103, 판을 깔다. (2)
그 때 누군가 헛기침을 하며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크흠, 천 소저. 누가 보채기라도 합니까?”
천수련은 상대를 확인하고 슬쩍 인상을 썼다.
상대는 훤칠한 체구에 보기 좋은 미소를 지은 채 다가섰다. 하나 눈동자에는 물기가 가득했고, 얇은 입술로 인해 어딘가 모르게 께름칙했다.
“제가 소저의 상념을 방해한 건 아니겠지요?”
자연스럽게 말을 붙이며 다가서는 상대에게서 여유가 느껴졌다. 그는 천수련이 대꾸를 하지 않아도 개의치 않았다. 누구도 자신을 거절하지 못할 것이라는 자부심이 가득했다.
그도 그럴 것이 사내는 하북 석가장(石家莊)의 소장주였다.
본래 하북성은 팽가의 영역으로 유명했다.
하지만 석가장의 성세는 팽가를 넘어섰고, 심지어 팽가를 오대세가에서 밀어내기까지 했다.
“제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씀하세요.”
소장주의 호언장담처럼 석가장은 명실공이 하북의 패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하북의 북쪽은 장성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산해관이 있지 않은가. 심지어 산해관을 지나 북쪽으로 올라가면 괴겁천마의 사성신위(四聖神位)에 속한 북해빙궁의 흔적까지 존재했다. 그렇기에 석가장은 한때 곤륜파가 서쪽의 방벽이라 일컬어졌던 것처럼 북쪽의 방벽이라고 칭해졌다.
하나 천수련은 지나가는 개가 짖느냐는 듯한 반응이다.
“알았으니까 가보세요. 혼자 있고 싶네요.”
석가장의 소장주인 석자경의 미소에 금이 갔다.
‘훗, 뻣뻣하기는.’
하나 석자경은 간간히 천수련이 미소를 짓거나, 몽환적인 표정을 짓던 것을 떠올렸다.
‘두고 보자.’
석자경은 애써 미소를 유지한 채 물러났다.
그가 공터 밖으로 나서자, 비단 무복을 걸친 네 명의 사내가 접근했다.
“어떻게 됐어?”
“크큭, 천하의 석가일룡도 검후의 제자한테는 안 되는 건가?”
경박한 언사가 쏟아졌다.
석자경과 더불어 신기오룡(神技五龍)이라 불리는 자들이다.
물론 저들끼리 이름을 붙인 후 퍼트린 것에 불과했다. 하나 제대로 호명하지 않으면 온갖 패악을 부렸으니 자연스럽게 정착됐을 뿐이다.
“내가 약이라도 구해다줄까?”
중원오대상단에 속하는 장강대상단의 소단주가 키득거렸다. 표국과 마방을 총괄하는 천리표국의 소국주가 말을 보탰다.
“머릿수는 우리 표국만한 곳이 없지. 여차하면 마을 전체를 우리 애들로 꾸며서 유인하는 것도 나쁘지 않아.”
석자경은 고개를 내저었다.
“됐어. 예전의 검후가 아니야. 적당히 건드리다보면 넘어오게 되어 있어. 내가 누구냐? 석가일룡이야. 내가 찍어서 자빠트리지 못한 계집이 없다.”
장강대상단의 소단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 마음대로 해라. 우리는 산동에서 한 번 제대로 날뛰어보자고.”
천리표국의 소국주가 음흉한 표정을 지었다.
“너희들은 산동이 처음이지?”
“왜 좋은 곳이라도 알고 있어?”
“예전부터 산동은 강호의 변방이었다고. 황보세가가 아니면 신경 쓸 곳이 없어. 우리 이름만 대도 알아서 설설 길 걸?”
석자경은 박수를 치며 입꼬리를 올렸다.
“좋아! 어차피 현월회라고 해봤자, 변두리 조직에 불과하잖아. 일은 어른들에게 맡기고, 우리는 알아서 놀아보자고!”
그러자 지금껏 침묵을 지키던 녀석이 한 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용린협이라고 부르는 그 놈. 봉황곡주를 이겼다잖아. 그 놈은 어쩔건데? 함께 어울릴 거야? 아니면 무시?”
석자경은 콧방귀를 꼈다.
“훗! 강호칠대금문에 속하는 봉황곡의 주인을 혼자 이겼다고? 반 년 전만 해도 알려지지 않았던 놈이? 뭔가 뒷배가 있는 거야. 생각해 봐. 너희들의 별호가 그냥 생겼냐?”
신기오룡은 자신들의 뒷배가 만들어준 영향력을 떠올리며 수긍을 했다.
“봐서 쓸 만하면 받아주고, 아니면 평소처럼 짓밟으면 된다고. 하하하!”
소국주가 친우의 어깨를 쳤다.
“야, 조용히 해. 검후 온다.”
신기오룡은 천응검후를 향해 포권을 했다.
“검후를 뵙습니다.”
“다들 고생이 많네.”
천응검후는 별 말 없이 신기오룡을 지나쳤다.
하나 그들을 지나친 후에는 똥이라도 밟은 것처럼 인상을 썼다.
‘쓰레기 같은 것들.’
신마대전 당시에는 어디서 뭘 했는지도 모를 것들이 당금 강호의 주인이 되어서 기세등등한 꼴이 아닌가.
그녀는 약속장소에 이르러서야 미소를 되찾았다.
“먼저 와 있었구나.”
천수련은 화살촉을 품에 넣고 빙긋 웃었다.
“산동성이 멀지 않았어요. 이번 일만 끝내면 스승께서 간절히 바라시던 일이 이뤄지겠네요.”
천응검후는 코웃음을 쳤다.
“훗, 네 녀석의 속셈을 모를 듯싶으냐?”
천수련은 애써 영문 모를 표정을 지었다
하나 그녀를 키워준 스승을 속일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녀는 혀를 쏙 빼물더니 천응검후의 곁에 바짝 붙어 섰다.
“어서 가요. 문상이 대표단을 소집했다면서요?”
“그래, 가자. 그만 보채 거라.”
*
강호에서 무림맹이란 곧 정의였다.
그러니 정파의 세상에서 무림맹의 명패를 내민다면 가지 못할 곳이 없다.
그렇기에 산동으로 파견된 사절단은 여정 내내 수많은 문파와 장원의 환대를 받았다. 그들은 언제나 사절단을 위해 가장 좋은 음식을 내왔고, 가장 좋은 숙소를 배정했다.
지금도 사절단의 수뇌는 상사방이라는 중견방파의 내원에서 회의를 이어갔다.
“모두 모이셨군요.”
백결공은 파진악을 만나며 보였던 동요를 잊고, 평소의 모습을 되찾은 후였다. 마치 각성의 수석을 대하듯 묘한 미소를 머금은 채 찻잔을 들었다.
그의 좌우에는 사절단의 대표라고 할 수 있는 명사가 배석했다.
가장 먼저 산동에 파견을 명받았던 전륜검객 후인통은 심중을 알 수 없을 만큼 무덤덤한 표정으로 자리를 지켰다. 반대편에는 문상과 함께 파견된 천응검후가 은은한 미소를 보인 채 찻잔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문상의 계파라 할 수 있는 석가장 출신의 장로가 함께 했다.
“여러분을 모이라고 한 까닭은 현월회에서 새로운 소식이 왔기 때문입니다. 일단 이것을 보시지요.”
문상은 고급스럽게 치장된 서찰을 꺼냈다.
“현월회의 창립을 곡부남가가 아니라 황보세가에서 진행한다는 내용입니다.”
그 순간 후인통과 검후의 표정이 엇갈렸다.
“크흠, 잘 되었군요. 계보도 알 수 없는 곡부남가와 같은 곳에 가는 것보다 황보세가에서 일을 치르는 편이 낫지 않습니까. 대외적으로 모양새도 좋고. 어찌됐든 곡부남가와 황보세가가 더 이상 대립하지 않는다는 의미일 테니 한시름 놨군요.”
후인통에게 있어서 산동은 강호의 변방이다.
변방의 수장이 누가 되었든 무림맹에 반목하지만 않으면 된다고 여겼다. 그렇기에 무상의 계파였지만, 문상의 말에 미소를 내비쳤다.
반면 검후는 말을 아낀 채 눈을 가늘게 떴다.
‘신공부도 있을 텐데 어째서 황보세가로 옮겼을까?’
어찌됐든 남천휘와 작지 않은 인연을 맺었고, 제자가 연정을 품은 상대가 아니던가.
‘나쁜 쪽이 아니면 좋겠는데.’
문상이 말을 이었다.
“후 대협께서 경험이 많으니 사절단의 운용을 맡아주시겠습니까?”
후인통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하겠습니다.”
“석 장로께서는 아이들을 관리해주세요. 맹이 아닌 외지에서 강호의 경험을 쌓는 것도 중요하니까요.”
석 장로는 윗사람을 대하듯 손을 모았다.
“맡겨주십시오”
“검후께서는 행사가 끝나면 바로 절강으로 가시는 겁니까?”
문상이 천응검후를 무시하듯 말했다.
하나 검후는 개의치 않았다.
“현월회주와 작은 연이 있으니 잠시 머물렀다가 떠나려 합니다.”
“그러세요. 자! 회의는 이것으로 끝냅시다.”
세 사람이 저마다 사정에 맞게 문상에게 인사를 한 후 별원을 떠났다.
문상 백결공은 후원을 벗어난 후 읊조렸다.
[망자는?]
[공의 명대로 대기 중입니다.]
그는 자신의 처소가 아닌 숲으로 향했다.
자박자박-
아직도 눈이 녹지 않았을 만큼 으슥한 장소였다.
[맹주와 군사의 동태는?]
[아직 별다른 움직임이 없습니다.]
백결공은 눈을 가늘게 떴다.
[맹 내의 수족들에게 내가 돌아갈 때가 보신에 힘쓰도록 전해라. 또한 각성의 수석 또한 잠시 사태를 관망하도록 전하라.]
[따르겠습니다.]
[비경회는?]
호위는 잠시 침묵했다.
일원과 비경회는 오랜 세월 암중에서 서로를 찾기 위해 힘썼다. 백결공의 사부인 좌사의 시절부터 계속됐던 악연이다.
한데 광명회가 사라지고, 일원이 부흥하면서 잠시 소강상태를 맞이했다. 그러다보니 비경회가 일원의 핵심을 찾지 못하듯 일원 역시 비경회의 핵심을 찾을 수 없었다.
‘맹주와 군사는 비경회가 확실하다. 관건은 역시 그자인가?’
백결공은 자신과 사사건건 부딪치는 무상을 떠올렸다. 탐욕스러운 자인 것은 확실했지만, 적아(敵我)를 구분하기 어려웠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얼마 전만 해도 각지에서 수석들이 들고 일어나 맹을 꼬꾸라트릴 것처럼 기세가 등등했다. 한데 북쪽에서 남천휘가, 남쪽에서 사부가 날뛰더니 정세가 묘하게 달라졌다. 마치 지금껏 뻥 뚫린 관도를 내달리다가 암초를 맞이한 듯한 기분이다.
‘이러다가 하늘께서 도래하시면.......’
그 순간 끝이다.
백결공에게 있어서 ‘하늘’은 그 자체로 무적이다.
좌사와 우사가 없어도 ‘하늘’은 강호를 지배하고, 군림할 터였다.
그러니 하늘이 강림하기 전 좌사의 이름으로 천하를 정리해야 했다. 그렇게만 된다면 하늘은 강호를 좌사에게 내어줄 터였다. 그리고 쓸모없는 우사와 그 일파를 쓸어버리리라.
“후우.”
백결공은 고운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쓸어내렸다.
‘제갈세가에 밀려 이백 년 전 멸문한 본가가 우뚝 설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아버지, 지켜봐 주십시오. 결코! 놓치지 않을 거예요.’
그는 백옥처럼 투명하고, 매끄러운 낯빛으로 미소를 지었다.
결의를 다지자, 다시금 자신감이 솟구쳤다.
“망자는 나와라.”
그가 나직이 읊조리는 순간 어둠 속에서 네 명의 망자(忘者)가 등장했다. 파계승과 초자, 그리고 풍채 좋은 부호와 시종으로 보이는 자였다.
모두 대사형인 파진악이 좌사의 명으로 세뇌시킨 전대의 고인들이다. 대부분 무림공적이거나, 사마외도에서도 내쳐졌을 만큼 잔악했다.
특히 겉으로 보기에 사람 좋은 인상을 하고 있는 부호는 십이망자 중에서도 수위에 꼽히는 고수였다.
금산혈주(金算血主).
그는 은자 한 냥을 갚지 않은 자를 벌하기 위해 마을 하나를 통째로 불태운 마인이다. 상인으로 시작하여 대마두가 된 후 삼십 년 전 공적으로 몰렸다. 그리고 절벽에서 떨어져 죽었다는 그가 이렇게 다시 나타난 게다.
금산혈주의 종복으로 보이는 지옥귀(地獄鬼) 또한 살수계의 거목이었다. 그 역시 공적으로 몰렸고, 오래 전 자취를 감춘 상태였다.
“별고 없는가?”
백결공은 금산혈주와 지옥귀를 대할 때와 달리 반대편에 서있는 두 망자에게는 싸늘한 시선을 보냈다.
서장 혈계사의 지주였던 법륜살(法輪薩)과 대부를 사용하는 무명초자(無名樵子)는 지난날 봉황곡주와 함께 곡부남가를 공격했어야 했다
하나 그들은 지켜보기만 했을 뿐이다.
뒤늦게 파진악의 명령이 있었음을 알게 될 때까지 이유를 몰라 전전긍긍하지 않았던가. 그렇기에 백결공에게 법륜살과 무명초자는 징치의 대상이었다.
“지금부터 따로 움직인다.”
금산혈주가 대표로 나섰다.
“어디서 보면 되겠습니까?”
백결공은 입꼬리를 올렸다.
“굳이 볼 필요가 있는가? 황보세가에서 현월회의 개파를 알리게 될 것이다. 그러니 황보세가에서 남천휘를 죽여라. 놈이 죽는다면 황보세가에 혐의를 뒤집어씌울 수 있지. 그렇게 된다면 산동강호는 다시 혼돈에 빠지게 될 터! 그것으로 족하다.”
“따르겠습니다.”
백결공은 흩어지려는 망자 중 지옥귀에게 손짓했다.
“아! 그대는 굳이 황보세가로 갈 필요가 없다.”
“무엇을 하면 되겠습니까?”
“곡부남가로 가라. 그곳에 남천휘의 형이 있을 게다. 그를 죽여라.”
“존명.”
산동성을 앞두고 세 명은 북쪽으로, 한 명은 남쪽으로 향했다.
백결공은 조소를 흘렸다.
“만약 일이 잘못 되어도 네 놈은 선택을 해야 할 것이다. 황보세가에 남아 현월회를 지켜야 할지, 아니면 본가로 돌아가 가족을 살려야 할지.”
그가 좋아하는 구도였고, 지금껏 수많은 적이 알게 모르게 이런 상황에 처했다.
그리고 지금껏 양쪽 다 살려낸 자는 없었다.
“실컷 고민해봐라. 결과는 마찬가지야.”
*
남천휘는 머리를 감싼 채 앓는 소리를 냈다.
‘어떻게 하지?’
◎ 아무리 고민하셔도 결과는 바뀌지 않습니다.
어느 한 쪽에 대한 피해를 감수하셔야 합니다.
남천휘는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눈에 불을 켠 채 서로를 바라보고 있는 소혜와 연하연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