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호만렙지존-232화 (232/305)

103, 판을 깔다

103, 판을 깔다.

남천휘는 화려하게 꾸며진 방을 살폈다.

은자가 아니라 금자로 헤아려야 할 만큼 귀한 물건이 가득했다. 무엇보다 급하게 모아서 진열한 것이 아니기에 세월의 흔적까지 느껴졌다.

이런 게 명가의 품격이라는 걸까?

하나 생각만으로도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황보세가가 뿌리부터 흔들리는 상황이 아니던가.

만약 자신이 황보세가를 병탄한 후에도 이 방에서 명가의 품격이 느껴질까?

‘그건 아니지.’

고래로부터 강호의 모든 것은 힘으로 귀결됐다.

힘 없는 소림이나 무당을 떠올려보라.

겉으로는 예를 표하겠지.

하나 누구도 소림과 무당을 두려워하지 않으리라.

‘애초부터 명가의 품격은 나와 어울리지 않아.’

그렇기에 남천휘는 사마의의 계획을 받아들였다.

사마의는 곡부남가를 적의 시야 밖에 두고, 황보세가에서 모든 것이 이뤄지기를 원했다.

일청대사의 말처럼 백결공이 일원의 수뇌라면 홀로 오지는 않을 터였다. 또한 그 정도 되는 자가 어설픈 수하들과 어울릴 까닭이 없다.

정면으로 부딪치든, 암중에서 피를 뿌리든 적지 않은 피해가 예상됐다.

‘그러니 기회가 되면 먹어버리자.’

애초에 황보세가를 그냥 둔 까닭은 명분이 부족해서였다. 황보세가의 마지막 여력까지 사라진다면 현월회에 흡수될 수밖에 없으리라.

‘뒤통수가 근질거리는 건 사양이야.’

남천휘는 입맛을 다셨다.

다만 한 가지가 마음에 걸릴 뿐이다.

‘진행상황 좀 띄워봐.’

그 순간 눈앞에 곡부남가에서 일어나고 있는 변화가 일목요연하게 정리됐다.

《곡부남가》

- B급 성소.

- [군사][인사][정략][상벌]

- 진법을 설치하고 있습니다.

- 혼무운해진(混霧雲海陣).

진행률 35%(잔여 시간 : 17일14시48분)

- 마풍미혼진(魔風迷魂陣)

진행률 49%(잔여 시간 : 11일4시11분)

- 탁오흘근진(濁汚紇根陣)

진행률 28%(잔여 시간 : 21일13시45분)

- 팔괘석병진(八卦石竝陣)

진행률 69%(잔여 시간 : 4일18시33분)

그 십여 종의 진법을 설치 중이다.

성소를 중심으로 요처마다 사시사철 안개가 자욱하고, 어느 곳은 쉴 새 없이 바람이 불며 오감을 혼란하게 만들었으며, 외적이 침입할 수 있는 뒷길은 진창이 되어 발을 묶었다.

그 중 남천휘가 가장 심혈을 기울인 것은 팔괘석병진이다. 대규모 공사를 강행하여 팔괘의 묘리를 담아 전각군을 재배치했다.

‘백결공이 도착할 즈음이면 팔괘석병진은 완성될 거야.’

그래서 조금 아쉬웠다.

잔여 시간만 봐도 눈치 챌 수 있듯 곡부남가에 설치하는 진법은 잠시잠깐 펼쳐지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었다. 성소의 주인이 바뀌거나. 성소가 사라지지 않는 이상 밤낮을 가리지 않고 활성화될 터였다.

“아! 저거 설치하느라고 들어간 포인트만 해도······.”

◎ 총 88만 8000 포인트가 소모됐습니다.

- 현재 잔여 성소 포인트는 73690입니다.

그렇다.

남천휘는 백결공을 대비하기 위해 곡부남가를 요새화했다. 아쉽게도 이번 일에 써먹을 수는 없지만, 향후 곡부남가의 안위를 지켜줄 든든한 방벽이 되리라.

“그나저나 이 자식은 왜 이렇게 안 오는 거야?”

남천휘는 일각이나 기다리게 만드는 황보장천을 떠올리며 이를 갈았다.

그 순간 기다렸다는 듯 문이 열렸다.

“미, 미안. 오래 기다렸지요?”

이것 봐라?

며칠 만에 만난 황보장천의 얼굴은 초췌했다.

아무래도 황보관이 요양을 위해 폐관을 하고 있으니 가문의 대도사를 맡아서 하는 듯했다. 한평생 호의호식하다가 큰일을 하려니 정신이 없을 만도 하다.

‘평소에도 벗겨먹기 좋은 놈이었는데······.’

멀쩡하지 않으니 금상첨화였다.

“힘드냐?”

황보장천은 남천휘가 친근하게 대하자, 표정을 풀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굴욕적인 거래가 있었으니 얼굴을 대하기가 껄끄러웠으리라. 하나 그렇다고 해서 제 성질대로 할 수도 없는 노릇이 아닌가.

한데 지인처럼 대해주니 한순간 맥이 풀린 듯했다.

“가주께서 잠시 쉬고 계시니 큰일이야 있을까? 그저 생소한 일을 도맡아하려니 쉽지 않을 뿐이야.”

“괴롭히는 놈은 없고?”

황보장천은 잠시 머뭇거렸다.

세가 내부의 일을 밝혀도 될까 우려하는 듯했다.

그 때 남천휘가 달콤한 한 마디를 건넸다.

“우리 사이에 숨길 일은 없잖아?”

“그, 그런가? 하하! 그렇지. 우리는 용봉쟁투를 함께 한 동료니까.”

함께 하기만 했지.

“그래, 무슨 일이야?”

남천휘가 운을 떼는 순간 황보장천은 땅이 꺼져라 한 숨을 내쉬었다.

“오대원로. 그들이 사사건건 트집을 잡으니까 푼돈 쓰는 것도 쉽지 않아. 쯧! 아버지만 멀쩡하셨을 때에는 고개도 들지 못했던 자들이!”

그는 이를 갈다가 모든 일의 원흉이 앞에 있음을 깨닫고 헛기침을 했다.

남천휘는 황보장천을 달래듯 말을 건넸다.

“어차피 현월회의 창립 행사가 끝나면 돌아갈 거야. 내가 그렇게 만들어주지.”

그 순간 황보장천은 귀인을 만난 사람처럼 환하게 웃었다.

“정말? 그렇게만 해주면 나야 고맙지.”

황보세가의 조상이 보았다면 울화가 치밀어서 한 번 더 돌아가실 상황이다.

하나 황보장천은 근심거리가 사라진다는 것에만 정신이 팔렸다.

남천휘는 잠시 생각에 잠기는 척 침음을 내뱉었다.

“흐음, 모르는 사이도 아니고······.”

물어. 이 놈아.

‘네깟 놈을 구슬리는 건 일도 아니지.’

라고 사마의가 호언장담을 했다.

황보장천은 삼일 밤낮을 굶다가 고기를 발견한 사람처럼 입맛을 다시며 물었다.

“왜, 왜 그래?”

남천휘는 결심을 한듯 의자의 팔걸이를 내리쳤다

“에라이! 좋아. 현월회의 창립행사를 황보세가에서 하자!”

황보장천은 눈을 끔뻑이다가 넋 빠진 목소리로 반문했다.

“응?”

남천휘는 선심 쓰듯 말을 이었다.

“본래 곡부남가에서 하려던 현월회를 황보세가에 맡긴다고.”

황보장천은 눈을 끔뻑였다.

‘우리 집에서 왜?’

가뜩이나 황보세가의 앞마당에서 패배했기에 여파가 컸다. 지금도 오대원로가 황보장천에게서 트집을 잡을 때마다 망신당했다며 악을 쓰지 않았던가.

한데 그런 남천휘가 세가 안에서 현월회의 창립을 알린다면 황보세가의 꼴은 더 우스워질 터였다.

“그건 좀······.”

남천휘가 황보장천의 말을 끊었다.

“그렇게만 된다면 사람들은 황보세가를 현월회의 서열 로 위로 보겠지. 어쩌면 내 본가인 곡부남가와 황보세가를 같은 줄에 세울 수도 있어. 그쯤 되면 오대원로나 속가들도 함부로 반발하지 못할 걸?”

황보장천은 잠에서 깬 것처럼 눈을 빛냈다.

“아!”

사마의의 말과 한 치의 오차도 없는 반응이다.

황보세가의 내일은 오늘보다 더 어두워질 것이 확정되는 순간이었다.

남천휘는 황보세가의 망설임에 쐐기를 박았다.

“아직도 세가의 위명을 걱정하는 거야? 나한테 패배하는 순간 이미 끝났어. 이제 와서 앞마당 좀 빌려준다고 해서 달라지지 않는다고. 하지만 우리는 동료니까 강요하지 않을게. 그러지 않아도 신공부주께서 간곡하게 바라더라. 여자하면 그 쪽에 맡길게. 어차피 외조부도 계시니 모양새도 더....”

쾅!

황보장천은 탁자를 내리쳤다.

“아니야!”

이 놈아, 황보세가가 무너질 때 이처럼 분연히 떨쳐 일어나지 그랬냐.

“네 일이 곧 내 일이다! 네 호의를 감사히 받을게. 그리고 내가 근래에 유례가 없을 만큼 성대하게 벌여보마.”

참 쉽죠?

황보장천은 이미 세가를 장악한 것처럼 눈을 빛냈다.

“장천아!”

황보황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황보세가는 누대로 오대세가에 꼽히거나, 그에 준하는 대접을 받았다. 백 년 전 신마대전 때를 제외하면 한 번도 세가가 침범당하지 않았을 정도였다.

한데 백 년 만에 생각지도 못했던 굴욕을 당했다.

반 년 전만 해도 이름조차 몰랐던 남천휘에게 가주를 비롯한 수뇌부가 모조리 패배한 게다.

황보황 역시 그 중 하나였다.

남천휘에게 당한 패배가 굴욕적이었고, 가주인 황보관의 말에 상처받았다.

그렇기에 치욕의 그 날 이후 두문불출했다.

한데 황보장천이 찾아와 현월회의 창립을 도맡아하게 됐다며 의의양양해하는 것이 아닌가.

어처구니가 없었다.

아닌 말로 무림맹의 행사를 맡았다면 그 또한 쌍수를 들고 환영했으리라. 하나 현월회는 역사로 보나, 덩치로 보나 격이 맞지 않았다.

“남천휘의 말처럼 행사를 진행한다면 사람들은 세가를 이 인자로 여길 게다. 하나 그 말은 곧 황보세가가 남천휘의 밑으로 들어갔다고 선포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야. 수백 년에 이르는 황보세가의 영예를 네 손에서 끝낼 생각이더냐?”

황보장천은 대뜸 인상을 썼다.

황보황은 그래도 지금껏 그를 지원했던 뒷배가 아닌가. 그렇기에 일부러 찾아와 알려준 결과가 타박이었다. 그라고 해서 황보황의 우려를 모르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반발심을 드러냈다.

“숙부! 모르는 소리 하지 마세요. 오대원로가 직계를 갈아치우려고 이빨을 드러냈단 말입니다. 아버지께서 부재중이시니 제가 그것을 막아야 해요. 영예요? 이러다 직계에서 밀려나 방계가 된다면 숙부는 멀쩡할 줄 아십니까?”

황보황은 황보장천의 짜증 섞인 외침에 한 숨만 내쉬었다.

‘이 녀석은 난이로구나. 협이나 의는 없어도 돼. 그래도 자존심만은 가졌어야 했는데······.’

그 동안 수중의 금옥처럼 키운 것을 후회한다고 해서 달라질 것이 있으랴.

황보장천은 황보황이 침묵하자, 기고만장하여 말했다.

“숙부가 내키지 않는다면 됐습니다. 제가 알아서 진행하지요. 대신 중요한 일을 해주셔야겠어요.”

황보황의 영혼 없는 대꾸가 들려왔다.

“뭐냐?”

“남천휘에게 만서각을 공개하겠다고 했습니다.”

“만서각은 내외원의 경계로 외인을 함부로 들일 곳이 아니야.”

황보장천은 짜증을 부리듯 말했다.

“오대원로가 괜히 물러갔겠습니까? 다 제가 조율한 일이니 듣기만 하세요.”

황보황은 조카의 윽박지름에 말문이 막혔다.

‘나는 가족이 아니었던가?’

돌이켜보면 가주나 소가주나 자신을 대하는 건 다르지 않았다.

“그래, 말하렴.”

“하루도 아니고, 삼십삼일 동안 책을 읽겠다고 하더군요. 하나 만서각의 서책은 시중에서도 충분히 구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그렇지.”

황보장천은 목소리를 낮췄다

“분명 뭔가 있어요. 놈이 의미 없이 책이나 읽겠다고 그 큰일을 해줬을 리 없습니다.”

“남천휘는 그리 녹록한 자가 아니지.”

“그러니 숙부께서 만서각을 좀 살펴보세요.”

황보황이 미간을 좁히자, 황보장천은 입꼬리를 올렸다.

“뭔가 있으면 우리가 먼저 찾아내면 되는 겁니다. 모조리 뒤져서 수상한 것이 있으면 걸러내세요. 그리고 만서각의 서책과 비품을 목록으로 정리해두세요. 만약 놈이 만서각을 다녀갔다가 무언가 없어진다면 그것이 보물일 겁니다.”

“······.”

황보장천은 자신만 흥을 내는 듯하자, 인상을 썼다.

“숙부! 정신 좀 차리세요. 한 번 졌다고 폐인이라도 된 겁니까?”

황보황의 눈매가 꿈틀거렸다.

“아니다.”

“집중 좀 해주세요. 조카가 혼자 힘들게 세가를 건사하려 하고 있지 않습니까.”

황보장천은 믿을 사람이 없다며 한참을 투덜거리다가 돌아갔다.

황보황은 눈을 빛냈다.

‘그래, 모조리 뒤져주마.’

*

천수련은 무림맹의 위력을 실감했다.

스승인 천응검후와 함께 맹을 찾았을 때만 해도 대우가 좋지 않았다. 하나 군사회의에서 절강에 대한 지원을 약속한 이후 대우가 급변했다.

무엇보다 맹의 수뇌부라고 할 수 있는 문상을 수장으로 한 사절단의 대표로 지정되었다. 문상과 함께 강호를 호령하는 이상 절강성의 문제는 해결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사문의 위기를 해결하자, 자연스럽게 그가 떠올랐다.

‘흐응.’

천수련은 콧노래를 부르며 화살촉을 만지작거렸다.

일전에 남천휘가 자신을 생각하라며 주었던 신물이다.

“칫, 나 없다고 심심해서 매일 같이 골방에만 박혀 있는 건 아니겠지?”

그녀는 화살촉을 보며 혀를 찼다.

“간다. 가. 이 놈아. 그만 보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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