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 사자와 춤을. (2)
*
아마도 소용녀가 태어나서 처음 본 것은 활활 타오르는 불길이었으리라. 처음 들은 소리는 쇠를 두드리는 망치질이었으리라.
그만큼 불과 철은 인생의 전부와 같았다.
조막만한 손으로 나무망치를 휘둘렀고, 진정한 야장이 되기 위해 체구까지 키웠다. 그렇게 그녀는 철신의 야장술을 이은 후계가 되었다.
- 낙야묵철은 인세의 것이 아니다.
철신이 남긴 한 마디였다.
소용녀는 중원에서 손꼽히는 무진철원을 뒤로 한 채 유선관으로 향했다. 철신과 낙야묵철에 대한 일화는 유선관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렇기에 언제가 될지도 모를 인연을 위해 모든 것을 뒤로 한 채 떠난 것이다.
불과 철에 대한 열정만은 천하제일이었다.
그 후로도 야장에 매진했다.
그리고 운명처럼 창월과 칠야의 수리를 맡게 되었다. 그녀의 온 신경이 낙야묵철을 다루는 것에 집중된 건 당연한 결과였다.
‘흐음.’
한데 그녀는 처음으로 한 눈을 팔았다.
한평생 심신을 지배했던 철과 불이 아니라 다른 것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흐음.’
요리였다.
다시 말하지만, 요리였다.
쥐나 벌레를 잡아서 만든 음식이 아니라 제대로 만든 요리가 눈앞에 놓여 있었다. 게다가 김이 솔솔 나는 것으로 보아 방금 만든 것처럼 보였다.
‘이게 말이 돼?’
그녀는 눈을 끔뻑이며 주변을 둘러봤다.
야명주의 빛이 아니라면 자신의 손조차 보이지 않을 만큼 깊은 동굴이 아니던가. 만병보고도 깊은 동굴이었지만, 흑린곡은 그 아래 위치한 지하였다.
그런 곳에서 요리를 마주하니 눈으로 보고도 믿기가 힘들었다.
잠시 후 고기와 야채를 입에 넣는 순간 육즙과 아삭함이 동시에 느껴졌다. 일평생 불과 철만 다뤄온 그녀에게는 천상의 맛과 다르지 않았다.
‘육포 조각이나 내놓을 줄 알았거늘······.’
처음 동굴에 떨어졌을 때 남천휘는 뭐가 그리 좋은지 한 턱 쏘겠다고 외쳤다. 그렇기에 먹다 남은 육포라도 내놓으려는 것인 줄 알았다. 한데 정작 허기를 이기지 못하고 먹을 걸 논하는 순간 기적이 일어났다.
소용녀는 옆에 놓인 병을 들었다.
이건 술이다.
술이라고!
입구도 출구도 없는 동굴에 갇혀서 죽는 줄 알았다.
온갖 종류의 철과 장비가 가득했고, 전설로만 전해지는 비약을 마주했다. 하나 그렇다고 동굴에 갇힌 현실을 바꿀 수는 없었다.
한데 바뀐 게다.
그녀는 술병을 기울이며 고개를 돌렸다.
탕! 탕! 탕!
‘이게 꿈인지, 현실인지.’
저쪽에는 꿈같은 현실을 만들어낸 남천휘가 열심히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탕! 탕! 탕!
그는 어디선가 기둥과 목재를 꺼낸 후 망치질을 하고 있었다. 돌 위에서 잘 수는 없으니 정자라도 만들겠다고 저러는 게다.
‘이게 말이 돼?’
그 때 남천휘가 소용녀를 돌아봤다.
“다 먹었어? 그럼 와서 망치질 좀 해. 이건 그쪽 전문이잖아.”
소용녀는 헛웃음을 지었다.
전설로 남았던 일화를 현실로 만든 존재였다.
지금껏 그와 관계된 일 중 납득할 수 있는 것이 몇이나 되랴.
어차피 만병보고 안에서 죽었어야 할 인생이다.
“간다. 가.”
그녀는 술병을 거꾸로 들고 한 입에 모든 술을 넘겼다. 목 넘김이 좋은 것으로 보아 이 또한 명주가 아닐까 싶다.
술과 요리, 그리고 편안한 숙소까지.
갇힌 건지, 휴가를 온 건지.
도통 모르겠다.
결국 소용녀는 망치를 들었다.
“망치와 못만 있으면 어디서든 상관없어!”
쾅! 쾅! 쾅!
격이 다른 망치질 소리가 흑린곡 안을 가득 채웠다.
잠시 후 소용녀의 경악어린 외침이 들려왔다.
“이불은 또 어디서 났어?”
“솜털하고, 오리털. 어느 쪽?”
*
남천휘는 망치질에 여념이 없는 소용녀의 뒷모습을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저렇게 듬직한 뒷모습도 참으로 오랜만이다.
그는 자신의 능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상세히 설명하지도 않았다.
- 너는 여기 와 본 거지? 만병보고 때부터 뭔가 있는 것 같더라니. 여기서 탈출하는 방법도 알고 있을 거야. 음식은 외부에서 가져온 건가?
남천휘는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한데 소용녀가 손사래를 치며 망치를 주워들더라.
- 됐어. 아무 말도 하지 마. 더 이상 골칫거리를 늘리고 싶지 않아. 그냥 그렇게 결정을 하고 넘어가자.
그저 철과 불만 있으면 어디든 갈 수 있는 존재가 바로 소용녀였다.
남천휘는 그런 소용녀가 편했다.
‘어차피 그녀가 외부에서 떠든다고 해도 믿을 사람이 있을까?’
소용녀가 불과 철에 집중한 이상 남천휘도 자신에게 집중하기로 했다. 어차피 흑린곡에 도착한 이상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쾅! 쾅! 쾅!
남천휘는 망치질을 하는 소용녀를 피해 내실로 향했다.
“만병보고의 상태창 좀 보자.”
흑린곡은 만병보고 내의 핵심이자, 요처였다.
그렇기에 흑린곡에는 특수한 기능이 포함되어 있었다.
일단 무균실(無菌室)이 상시 가능했다.
일정 공간의 대기를 강제로 정화하는 기능이다.
한 마디로 자연지기가 충만한 공간을 만들어 수련의 성취도를 끌어올리는 것이 가능했다. 철투와 무균실을 동시에 운용하면 한동안 주춤했던 레벨을 끌어올릴 수 있으리라.
◎ 철투(鐵鬪)의 장소로 지정하시겠습니까?
- 철투 1회 시 VIP 포인트 100점이 소모됩니다.
남천휘는 새롭게 추가된 대전 장소 중에서 백룡암을 택했다. 잠시 후 운무가 폭포처럼 흘러내리며 시간을 가렸다. 그리고 안개가 갇혔을 때 백룡암과 더불어 홍택호의 강변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 대전 상대를 선택해주세요.
1, 레벨 ~100 : VIP 100점 소모. (쉬움).
2, 레벨 100~200 : VIP 300점 소모. (평범)
3, 레벨 200~300 : VIP 500점 소모. (어려움)
이제는 200레벨도 두렵지 않았다.
그러니 200레벨 이상을 소환해서 대전해도 승기를 잡을 수 있으리라.
한데 문제가 생겼다.
남천휘는 자신의 상태창을 보며 한 숨을 내쉬었다.
《남천휘》
- 소속 : 만병보고(보유 지역 : 7)
- 별호 : 철귀유협
- 등급 : 178
- VIP : 4등급(잔여 점수 : 430)
- 성소 포인트 : 139000
VIP 등급을 올리고, 별 생각 없이 소모하다보니 430점이 전부였다.
‘이건 좀 곤란한데······.’
그동안 모아놓은 경험치 비약권만 해도 수십 일 동안 2배 이상의 효과를 보는 것이 가능했다. 거기에 무균실과 철투의 힘까지 더한다면 성장 예정치는 상상을 초월할 터였다.
“그냥 하지. 뭐.”
철투의 효용은 가상의 상대와 체력 소모 없이 무제한으로 대전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그러니 홀로 수련한다는 걸 제외하면 큰 불만은 없을 터였다.
남천휘는 상태창을 내리고, 무공총람을 띄웠다.
그 동안 애써 모른 척했던 현실과 마주할 시간이다.
띠링-
《비천무상도》《오행군림보》《환마소혼검법》
《천성혈법》《혈인도》
다섯 종의 무공 중 핵심이 될 만한 것을 펼쳤다.
《오행군림보》
- 4급 성장형.
- 숙련도(1/100). (가치 : 800)
초심, 기본, 난해, (대가).
- 스킬 : 궁신탄영(내공:3)
《비천무상도》
- 3단계 성장형.
- 숙련도(1/100). (가치 : 1000)
비상, (행공), 비천.
- 스킬 : 질풍난무(내공:1)
예전과 다를 것이 없다.
그게 문제였다.
오행군림보와 비천무상도는 이제 몸에 맞는 옷처럼 편안했다. 한데 ‘대가’와 ‘행공’ 단계에 이르는 순간 숙련도가 상승하지 않았다. 청도문을 무너트리고 난 후에도 숙련도는 여전히 1이었다.
‘이걸 어떻게 올려야 하나?’
한데 그 순간 예기치 못한 알림이 울렸다.
◎ VIP 4단계가 확인되었습니다.
- 숙련도에 대한 제약이 해제됩니다.
◎ 강기 활용을 위한 첫 걸음이 시작됩니다.(1/3)
- 무무혁명이 새롭게 재편되어 제공됩니다.
아! 제약이 있었냐?
그렇다는 녀석의 대꾸에 울화가 치밀었다.
뭐가 있으면 있다고 이야기를 해야 그것에 대한 대비를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이 놈의 자식은 꼭 가만히 있다가 최후의 순간에야 설명하는 못된 버릇을 지녔다.
‘호미로 막을 걸 가래로 막는다는 말도 못 들었냐?’
제아무리 입이 아프도록 떠든다고 뭐가 달라질까.
아쉬운 건 언제나 남천휘였다.
그는 을의 자세로 알림창을 처음부터 살폈다.
숙련도 제약이 해제됐으니 수련에 따른 성취가 고스란히 적용될 것이다. 만약 남천휘가 시스템의 업그레이드 이후 무공총람을 확인했다면 조금 더 빨리 현실을 파악할 수 있었으리라.
그랬다면 숙련도를 어느 정도 쌓을 수 있었겠지.
아쉬움이 없다면 거짓말이리라.
하나 강기(罡氣)가 등장한 이상 어지간한 짜증과 분노는 금세 자취를 감췄다.
‘강기 3단계만 완료하면!’
도기와 도사, 도막을 지나 지고의 경지를 상징하는 도강(刀罡)을 발출하는 것도 꿈이 아니었다. 그야말로 진정한 초절정의 경지에 등극할 수 있는 기회가 아닌가.
‘잠깐! 기회가 맞나?’
남천휘는 희희낙락하다가 이내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신은 아직 강기공을 펼칠 수 없다.
그러니 완숙한 절정의 경지일 뿐 초절정이라 할 수 없으리라. 한데 그렇다고 해서 초절정의 무인을 이길 수 없냐고 묻는다면 그건 또 아니지 않은가.
‘아무래도 질 것 같지 않단 말이지.’
강호의 구분법과 시스템의 구분법은 달랐다.
일례로 남천휘는 스스로 이류라 칭했던 시절부터 절정의 무인을 꺾지 않았던가. 그리고 시스템이 절정이라고 판단하던 시절 신공부에 맞섰다.
‘왠지 시스템이 강기를 논한 이상 일반적으로 알려진 강기가 아닐 것 같군.’
◎ 강기공(罡氣功)은 기의 응집도가 ‘최상’에 이르는 순간 발현됩니다. 점과 선, 면의 구분이 없어지니 주인님의 의지대로 기를 조율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남천휘는 눈을 가늘게 떴다.
‘강기를 채찍처럼 쓰는 것도?’
가능하다는 말에 침음이 더욱 깊어졌다.
잠시 후 남천휘의 얼굴에서 더 이상의 환희는 찾아볼 길이 없었다.
오히려 귀찮음이 가득했다.
시큰둥한 한 마디가 이어졌다.
“아! 대단하다. 강기를 엿가락처럼 다룰 수 있다니. 고금을 통틀어 유례가 없는 능력이잖아.”
재이는 남천휘를 달래듯 알림을 이어갔다.
◎ 강기공만 익혀도 특급 강호인에 한 걸음 성큼 다가 갈 수 있으니······.
남천휘는 손을 내저어 재이의 알림을 소거했다.
“이게 누굴 바보로 아나? 기의 응집도가 최상에 이르러야 한다며? 그 최상을 누가 정하는데?”
자칫 잘못하다가는 평생 기의 응집도만 부여잡고 살아야 할 수도 있을 터였다.
남천휘는 다짐을 하듯 말했다.
“특급 강호인이 될 거야. 약속이니까. 그렇다고 해서 내 삶을 다 포기하면서 매진한다는 뜻은 아니야. 그러니까 독소 조항 좀 빼라. 언제까지 사기 치면서 시스템을 운용할 거야?”
꿀 먹은 벙어리를 뒤로 한 채 가볍게 걸음을 옮겼다. 잠시 후 꿀을 다 먹은 벙어리가 시큰둥한 어조로 알림을 이어갔다.
◎ 심모원려의 재기를 발휘하였습니다.
- 통찰의 레벨이 상승합니다.
◎ 짧은 순간 귀계를 간파하였습니다.
- 지모의 레벨이 상승합니다.
남천휘는 특기의 상승에 희희낙락하다가 이내 미간을 찌푸렸다.
“야! 진짜 독소 조항이었던 거냐?”
S급 특기인 통찰의 레벨이 2가 되었지만, 조금도 즐겁지 않았다.
남천휘는 짜증 섞인 한 마디를 내뱉었다.
“수련이나 해야겠다. 오랜만에 박자 줘봐.”
어디 새로워진 무무혁명을 구경이나 해보자.
《오행군림보와 비천무상도가 실행됩니다.》
《해당 모드와 어울리는 새로운 음악과 춤을 검색합니다.》
세 번째 단계니까 창해일성소가 아닌 다른 음악이 나올 것이라 예상했다. 하나 지금껏 음률과 박자가 전부였던 무무혁명에 춤이 웬 말이더냐.
‘사기 치지 마라. 나 진지하게 레벨 업 할 거야.’
재이가 대답 대신 알림을 띄웠다.
◎ 특기 ‘무희’가 활성화됩니다.
- 무희의 발동으로 인해 춤 선생이 소환됩니다.
녀석도 진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