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호만렙지존-195화 (195/305)

87, 사자와 춤을. (1)

87, 사자와 춤을.

만 가지 무기를 쌓아 놓은 만병보고.

그렇기에 무기가 사라진 만병보고는 쭉정이와 다를 바가 없었다.

하나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만병보고의 진짜 보물은 지하에 존재했다.

어쩌면 사령신도 모르지 않았을까 싶다.

알았다면 그 욕심 많다던 자가 이곳을 그냥 내버려 둘 리가 없지 않은가.

남천휘는 흑린곡의 구조도를 보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허리로 보이는 중앙 통로의 좌우로 팔다리를 상징하는 네 개의 작은 통로가 보였다. 그곳에는 종류의 재료와 야장을 위한 각종 도구가 가득했다.

“온갖 종류의 철이 다 있어! 이곳이야 말로 야장의 낙원이 분명해. 여기서 철만 다뤄도 죽을 때까지 행복할 거야!”

소용녀는 환호성을 내질렀다.

불과 철을 다루기 위해 무진철원마저 등진 그녀가 아니던가. 그녀는 동굴 지하에 갇혔다는 두려움마저 잊은 채 눈을 빛냈다.

하나 남천휘는 철편에 눈을 돌리지도 않은 채 곧장 머리, 그것도 뿔의 위치로 향했다. 그러니 흑린곡의 가장 깊숙한 곳에 발을 들인 셈이다.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어둠이 그를 반겼다.

하나 목을 지나 머리 쪽에 발을 들이는 순간 환한 빛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아.”

지금 이 순간만은 남천휘도 탄성을 흘렸다.

원형의 천장에 박힌 보석의 숫자만 해도 백여 개에 이르렀다. 저절로 빛을 내는 것으로 보아 저것이 야명주가 아닐까 싶다. 크고, 맑으며, 형태가 균일한 야명주는 한 성의 가치를 지녔다고 하지 않던가.

‘아아.’

하나 남천휘는 돈 대신 눈앞의 광경을 만끽했다.

탐욕이 생기지 않을 만큼 아름다웠다.

사랑하는 여인이 생긴다면 반드시 보여주고 싶을 정도였다.

남천휘는 자신도 모르게 떠오른 여인을 헛기침과 함께 애써 머릿속에서 밀어냈다.

“크흠.”

집중! 집중! 아니, 여자 말고 다른 집중!

다행히 수많은 야명주 아래에는 일견하기에도 시선을 끄는 두 개의 못이 존재했다.

남천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좌측에는 소젖처럼 흰 못이었고, 우측은 구정물처럼 새카만 못이다.

‘서, 설마······.’

◎ 공청석유 아닙니다.

남천휘는 헛기침을 했다.

‘크흠, 내가 바보냐? 한두 방울도 아니고 사람이 들어갈 만한 연못이 공청석유일 리가 없잖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바보 아니냐?’

◎ 주인님과 저는 나노 플레이트를 통해 동조화 된 상태로······.

그래, 그러니까 생각만으로 대화가 되겠지.

“퉤퉤!”

남천휘는 나노 플레이트를 토해내는 심정으로 몇 번이나 침을 뱉었다. 걸쭉한 가래를 몇 번이나 뱉은 후에야 재이의 알림이 사라졌다.

아마 더러워서 피한 듯싶다.

역시 무서움보다는 더러움이 한 수 위다.

‘그럼 저건 뭐지?’

아무래도 흑린곡은 남천휘의 생각보다 훨씬 더 중요한 장소인 듯했다. 재이는 장난기를 지우고 시스템의 쇳소리를 연상케 할 만큼 진지하게 알림을 띄웠다.

띠링-

◎ 특정 용어의 이해를 돕기 위해 주인님의 수준으로 변환을 시작합니다.

갑자기 수준은 왜?

남천휘는 백소(白沼)와 흑소(黑沼) 위에 뜬 명칭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변형액)(고정액)

‘야! 변환을 해도 너무 쉽게 변환한 것 아니냐?’

이래서야 자존심이 상할 정도였다.

그 순간 재이가 백소와 흑소의 원래 이름을 읊기 시작했다 알아듣지 못할 언어와 문자가 시야를 가득 채우는 순간 특기 ‘불굴’이 절로 일어날 정도였다.

‘아, 천상의 언어에 적응한 줄 알았는데······.’

그야말로 생활 용어 정도만 익힌 듯하지 않은가.

남천휘는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그래, 네 말대로 이해가 쉽기는 하네.”

◎ 칭찬 감사합니다.

저 요망한 것에게 반드시 복수할 것이다.

하지만 강호의 은원은 누대에 걸쳐 이어지고, 청산은 땔감이 마르지 않는다니 오늘은 참도록 하자.

대신 언제고 눈앞에 나타면 가만 두지 않으리라.

‘한 번만 더 안개로 나타나면 잔뜩 휘저어버려야지!’

남천휘는 입맛을 다시며 한 번 더 백소와 흑소를 바라봤다.

고정액과 변형액이라는 명칭을 듣는 순간 철가철방에서 봤던 광경이 뇌리를 스쳤다.

당시 낙야묵철을 회백색의 용액에 넣는 순간 항아리에 담겨 있던 것이 찰떡처럼 변하며 늘어지지 않았던가.

‘낙야묵철은 곧 생철이라 했으니.’

백소로 변형하고, 흑소로 고정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정확한 건 소용녀를 데리고 와봐야겠지만, 이미 수리된 칠야와 창월이 손에 들어온 것처럼 기뻤다.

‘그나저나 강철의 뿌리 퀘스트는 이곳에 와야 완전히 끝나는 건가?’

아무래도 마봉파를 가져와야 할 듯했다.

겸사겸사 소용녀도 끌고 와야겠다.

소용녀는 황금산을 발견한 사람처럼 환호성을 내질렀다. 철신의 직계인 그녀에게도 소량만 전해졌던 백소의 용액이 아니던가.

“활성만변액이 이렇게 많다니!”

흐음, 활성만변액보다 변형액이 더 귀에 쏙쏙 들어오는 건 사실이다.

그녀는 흑소를 보더니 경악을 금치 못했다.

“맙소사! 그렇다면 이건 불변고형액인가? 전설로만 전해지는 신비의 용액이 내 눈앞에 나타나다니!”

소용녀는 애지중지하던 철항아리도 내려놓은 채 남천휘를 얼싸안았다.

아! 역시 그녀는 힘이 장사다.

어깨가 으스러지는 듯한 고통에 하마터면 내공을 일으켜 저항할 뻔했다.

그녀는 눈을 빛내며 손을 내밀었다.

“내놔.”

“뭘?”

“칠야와 창월.”

남천휘 역시 연못에 빠진 직후였기에 흠뻑 젖은 상태였다. 그러니 무기를 숨기고 있었다고 거짓말을 하기도 애매한 상황이다.

한데 소용녀가 간단하게 상황을 정리했다.

“뭔가 수를 썼을 것 아냐? 그러니까 허공에서 뭐가 슝슝 나타나지. 네 능력에는 관심이 없으니까 빨리 내놔. 당장 고치고 싶으니까!”

그녀의 눈빛은 불이 필요하지 않을 만큼 뜨거웠다.

열정적인 눈빛에는 야장술에 대한 광기가 엿보일 정도였다.

채챙-

남천휘가 손을 뒤로 했다가 내미는 순간 칠야와 창월이 들려 있었다. 소용녀는 이유도 묻지 않은 채 부러진 도를 받아들었다.

“흐흐흐.”

광기가 엿보이는 것이 아니라 진짜 미쳤나 본데.

소용녀는 덩치가 무색할 만큼 빠르게 몸을 놀려 작은 통로로 향했다. 고정액과 변형액은 신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특수하지 않던가.

그러니 특수한 용기를 구하러 떠난 게다.

야장에 대한 온갖 장비가 가득했으니 백소와 흑소를 다룰 수 있는 물건도 찾을 수 있으리라.

남천휘는 그 사이 철항아리에서 마봉파를 꺼냈다.

‘어디에 넣지?’

흑소와 백소 사이에서 고민하는 순간 경쾌한 알림음이 울렸다.

◎ ‘흑린곡’에 ‘마봉파’가 돌아왔습니다.

- A급 성소 '흑린곡‘에 담긴 VR 영상을 시청하시겠습니까?(Y/N)

남천휘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생각지도 못한 VR이라니.

설마 백파도 남추가 여기까지 왔던 것일까?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아! 지혜 수치 안 올려주나? 이 상황에 이렇게 딱 맞는 말도 없을 텐데.’

◎ 능력 수치는 공방으로 일원화되었습니다.

야박한 녀석.

VR을 실행하는 순간 운무가 휘몰아쳤다.

어차피 자신에게만 보이는 운무였기에 소용녀에 대한 걱정은 하지 않았다.

솨아아아아아-

안개가 걷히는 순간 가장 먼저 느낀 것은 고통이었다. 온 몸을 바늘로 찌르는 듯한 따끔함에 VR 상태임에도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동시에 불덩이가 나타났다.

‘아니, 사람이잖아.

정확하게는 불덩이의 형태를 한 사람이다.

‘기파다. 기파를 유형화해서 흩뿌리는 거야.’

자세히 살피는 순간 붉은 운무에 휘감긴 존재가 보였다.

철그렁-

- 이걸 봉인해라.

진정한 육합전성이란 이런 것일까?

사방에서 심드렁한 목소리가 울렸다.

운무에 휘감긴 사내의 입술이 움직이지 않았다면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만큼 신기했다.

화면을 반대편으로 돌리는 순간 두 명의 노인이 나타났다.

두 노인의 표정은 극명하게 갈렸다.

붉은 머리에 홑옷만 걸친 노인은 적의와 살기가 가득했다. 그가 솥뚜껑만한 주먹을 쥐락펴락할 때마다 시퍼런 기운이 번뜩였다. 반면 구부정한 허리를 두드리고 있는 노인의 눈빛에는 호기심과 흥분이 가득했다.

한데 허리가 굽은 노인은 낯이 익었다.

철신(鐵神) 철장경.

백파도 남추에게 칠야와 창월을 건넬 때보다 더 나이를 먹은 듯했다.

‘그렇다면 저쪽이 청염진군이겠군.’

남천휘는 미간을 좁혔다.

그렇다면 운무에 휘감긴 사내는 누구란 말인가?

다행히 청염진군이 운을 뗐다.

“광오하구나. 사령신!”

사령신이라면 사마천세의 주인공이자, 신마대전의 한 축이었으며, 강호사에 핏빛 족적을 남긴 희대의 대마두가 아닌가.

지금까지 봤던 사람 중에서 가장 유명한 자였다.

‘VR로 봐도 이 정도면······.’

실제로 마주하는 순간 고개를 들지 못할 수도 있을 듯했다.

한데 사령신은 정천칠공의 한 사람인 청염진군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철신만 바라볼 따름이다.

청염진군은 노호성을 내질렀다.

“독문병기인 백룡검과 흑린검을 내어주겠다는 거냐? 또 무슨 흉악한 수작을 부리는 것이더냐?”

이건 또 무슨 말인가?

사내가 던진 물건은 희고, 검은 한 쌍의 팔찌였다.

그것을 가리켜 검이라 하는 이유가 궁금했다.

‘아! 변형액, 고정액.’

낙야묵철은 형태가 바뀌는 생철이 아니던가.

그렇다면 팔찌에 내력을 주입하는 순간 검으로 변한다고 해도 놀라운 일은 아니리라.

- 철신. 너는 그에게도 비슷한 것을 만들어줬지? 그러니 알 것이다. 이것과 그것의 차이가 어느 정도더냐?

철장경은 고개를 내저었다.

“모르오. 나는 그저 외형을 다듬고, 빛을 죽였을 뿐이외다. 그것만으로도 나는 철신이라 불릴 만큼 엄청난 기술을 익혔소. 그러니 그것과 이것이 같은 재질이라는 것만 알 뿐, 다른 것은 알지 못하오.”

- 쳇! 괴겁과 함께 이것을 얻고 기뻐한 것이 부끄러울 정도군. 그를 이길 수 없다면 쓰레기에 불과해. 그러니 그가 알기 전에 봉인해야겠어. 아니지. 이미 알고 있을 수도 있어. 그는 모르는 것이 없으니까. 지금 당장 봉인해!

남천휘는 탄성을 흘렸다.

본래 신마대전은 마도의 괴겁천마와 사도의 사령신이 자웅을 겨룬 혈겁이 아니던가. 정파는 그 와중에 몸을 넙죽 엎드렸기에 혈우(血雨)를 피했다고 알려졌을 정도였다.

‘괴겁천마를 적대시하는 게 아닌 것 같은데?’

‘그’라는 존재에 대한 의문만 깊어질 뿐이다.

사령신은 이름값이 아까울 만큼 칭얼거렸다.

그럴수록 노골적으로 무시당한 청염진군이 결국 노기를 드러냈다.

“사령신! 지금이라도 나와 일만 초의 자웅을 겨루자! 네 놈을 없애면 강호가 절반이나마 깨끗해지겠지.”

그 순간 엄청난 기파가 몰아쳤다.

동굴 전체가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하나 백소와 흑소의 수면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오직 청염진군만이 얼굴을 붉힌 채 몸을 웅크릴 뿐이다.

- 멍청한 놈! 요즘 너희 몇몇이 어울려 다닌다고 뭐라도 되는 듯싶더냐! 당장 핏물로 만들어 줄까?

“크흑.”

청염진군의 얼굴이 터질 듯 부풀었다.

얼굴에 피가 과도하게 몰린 게다.

“사령신! 그가 죽으면 봉인을 할 수 없소이다.”

그 순간 칼날 같던 기파가 자취를 감췄다.

사령신은 헐떡이는 청염진군을 향해 말했다.

- 하늘 위에 하늘이 있는 게다. 너 같은 놈에게 말해준다고 해서 알기나 할까? 눈앞에 절대자가 존재함에도 알아보지 못하는 반편이 같은 놈들.

철신은 한 쌍의 팔찌를 조심스럽게 주워들었다.

“이걸 낙야묵철과 봉인하면 되겠습니까?”

- 마음대로 하라. 영원히 빛을 볼 수 없게 만든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그 순간 사령신을 휘감고 있던 운무가 뭉쳤다.

육신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짙어진 운무가 산산이 흩어지는 순간 사령신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크흑! 치욕스럽구나. 언제까지 사마외도의 추악한 행보를 지켜봐야만 한단 말인가!”

철장경이 청염진군을 다독이듯 말했다.

“적의 약함은 곧 아군의 강함이외다. 저들이 무슨 이유에서든 독문병기를 포기했으니 향후 상대하기가 한결 수월해진 것은 사실이 아닙니까? 일단 봉인부터 합시다. 놈의 마음이 바뀌어도 결코 풀어낼 수 없을 만큼 완벽하게!”

청염진군은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백소와 흑소가 몇 번이나 항아리에 담겼고, 청염진군이 만들어낸 푸른 불꽃이 타올랐다.

불꽃은 어느 순간 운무가 되었다.

남천휘는 재이가 VR의 종료를 알리는 순간 한 숨과 함께 눈을 떴다. 머릿속에서 떠돌아다니는 단편적인 정보가 하나둘씩 엮이기 시작했다.

‘아! 나 뭔가 대단한 것을 본 것 같아.’

눈앞에서 곰이 노래를 부르고 있지 않은가.

“대막의 뜨거운 바람이 하늘의 분노와 합쳐져 내리 꽂히니.”

소용녀는 부러진 도를 활성만변액에 담근 후 일견하기에도 범상치 않아 보이는 망치를 내리쳤다.

땅-

“뜨겁고 순수한 심장을 깔끔하고, 빠르게 두드려라.”

땅-

“아름답고! 강한! 위험한! 열기여!”

땅-

“강철같이 뜨겁고, 순수한 심장을 두드려라!”

대막의 한복판에서 망치질을 하는 것처럼 열기가 전해졌다. 열기가 전해지는 것은 물론이고, 고막까지 찢어질 듯했다.

남천휘에게 쓸모없는 무희가 있다면 소용녀에게는 끔찍한 노래 실력이 있지 않을까 싶다.

쩡-

소용녀의 마지막 망치질은 지금까지와 달리 묘한 여운을 남겼다. 그녀는 도를 불변고형액에 넣은 후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진짜 밥 먹을 수 있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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