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 전설의 고향.
82, 전설의 고향.
청도문과 유선관은 모두 남천휘의 영역이다.
그야말로 산동성 동부를 손에 넣은 게다.
‘그래봤자 아는 사람은 한 명도 없겠지만.’
남천휘는 어렵지 않게 유선관에 도착했다.
어차피 성소와 성소 사이에는 체력이 소모되지 않기에 안락한 여정이었다. 한데 황 노대의 객잔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이 왜인지 모르게 낯이 익다.
“어!”
상대는 꾸벅꾸벅 졸다가 남천휘를 발견하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형님!”
그는 유생으로 변장한 살수 주제에 의원을 동경하는 소우주였다. 매일 같이 붙어 있다 보니 호칭도 정리했다. 하나 살수가 형이라고 부르니 왜인지 모르게 뒤통수가 근질거렸다.
‘뭐 어때?’
첫 의뢰였다잖아.
그 말인즉슨 미수범이라는 뜻이다.
의뢰를 수행하러 갈 때 가더라도 정상참작 정도는 해 줄 수 있잖아.
“너 안 갔네?”
남천휘가 놀란 까닭이 이거였다.
매일 같이 붙어 있었던 이유는 놈을 떼어놓는 순간 살인을 하러 갈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강호인이라면 모를까, 학관의 유생을 죽이러 가게 둘 수는 없지 않은가. 하여 녀석이 질색할 만큼 일부러 붙어 있었다. 아마 자신을 대해야 했던 공태령의 마음이 이렇지 않을까 싶더라. 어찌됐든 녀석에게는 말도 하지 않고 떠난 길이었다.
그렇기에 당연히 녀석은 떠났을 것이라 여겼다.
소우주는 멋쩍은 표정을 지은 채 남천휘를 힐끔거리며 쳐다봤다.
‘저 놈의 새끼! 뭔가 노리는 게 있군.’
아니나다를까 남천휘를 살피던 소우주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형님, 그런데 혼자 오셨습니까?”
“왜?”
“소문에 듣자 하니 청도문이 몰락했다던데요. 철귀유협과 혈검살의가 힘을 합쳐 악적을 징치했다고 칭송이 자자합니다.”
남천휘는 절로 한 숨을 내쉬었다.
저 녀석은 청도문이 무너졌다는 사실보다 혈검살의의 이름을 거론할 때 눈을 빛냈다.
‘아무리 의원을 동경해도 그렇지······.’
아니, 혈검살의를 동경했던 건가?
생각해보니 그게 맞는 듯했다.
무공과 의술의 조합이라면 혈검살의가 유일하지 않던가. 그렇기에 가명조차 우주류검술의 절초에서 따왔을 터였다.
“혹시 함께 오신 건 아닌 건가 해서······.”
그러면 그렇지.
개가 똥을 끊지.
“없어. 이 놈아. 혈검살의를 왜 나한테서 찾아?”
“의형제를 맺었다는 소문이.”
“아니야!”
한데 그 순간 객잔의 주렴이 걷히며 혈검살의가 우르르 나타났다. 그나마 성시는 연하연을 데리고 객방으로 향한 듯했다.
“남 소협, 걸음이 어찌 그리 빠른가? 쉬지도 않고 쫓아오느라 발바닥이 부르트는 줄 알았어.”
마이의 친근한 푸념에 소우주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는 마이를 보며 죽은 사부가 돌아온 것처럼 탄성을 흘렸다.
“마이동풍!”
“하하하! 나를 알아보는 자가 있구나.”
엇! 그거 진짜 별호였냐?
마이는 남천휘를 의식한 듯 거드름을 피우며 소우주와 통성명을 했다.
“역시 도가의 성지답게 안목 높인 소도사가 계셨군.”
쟤 옷은 도복이 아니라 학사의잖아.
그리고 애초에 도사도 아니고 살수란 말이다.
“오래 전부터 마 대협을 존경해왔습니다. 죽기 전에 한 번 꼭 뵙고 싶었어요.”
“하하하! 나는 그리 대단한 사람이 아닐세.”
“대형께서 혈검살의의 명성을 도맡으시니 이 아우는 부럽기만 합니다.”
“홍칠아. 네 강호행은 이제 시작이야. 무공과 의술을 양 손에 쥔 이상 혈검살의의 이름은 갑옷처럼 너를 감싸줄 것이다.”
“하루 빨리 그리 됐으면 좋겠네요.”
말과 달리 입은 찢어질 것처럼 귀에 걸렸다.
남천휘는 이상한 놈, 이상한 놈, 그리고 볼을 붉히고 있는 이상한 놈의 조합에서 거리를 뒀다.
한데 소우주가 큰 결심을 한 듯 갑자기 대례를 올리는 것이 아닌가.
“대협! 불초소생을 부디 제자로 받아주십시오.”
모두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특히 소우주의 본업이 살수임을 알고 있는 남천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미친 게 분명해.
“좋다!”
뭐야? 진짜로 받아주는 거냐.
마이는 눈을 부릅뜬 채 소우주를 일으켜세웠다.
“우리의 만남이 인연이라면 소중히 여겨보자. 소년, 그대의 가슴에 소우주를 담을 준비가 되었는가?”
소우주는 아예 눈물을 글썽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바로 소우주입니다.”
뭔가 도가의 교리가 어렴풋이 섞여 있는 듯했지만, 모른 척 그냥 넘어가도록 하자.
홍칠 또한 놀란 건 마찬가지였다.
“형님, 또 제자를 받는 거요?”
남천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어쩐지 급전개가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했다.
‘나까지 혼미해지는 것 같아.’
마이와 소우주는 이산가족이 상봉한 것처럼 서로의 어깨를 감싼 채 떨어질 줄을 몰랐다.
“네 이름이 뭐냐?”
“저는 사실 살수입니다. 하나 아직까지 진짜 살행을 나선 적은 없습니다. 무공을 익히고 싶었지만, 배울 것이라고는 살수의 암수 밖에 없더이다.”
“괜찮다. 과는 공으로 덮는 법!”
이봐요. 그거 위험한 사상이야.
“내 제자가 되었으니 이미 과는 사라진 것이다.”
이봐요! 그건 엄청 위험한 논리잖아.
“크흑, 천애고아인 제게 제대로 된 이름이 있을 리 없지요. 스승께서 지어주신다면 이름으로 삼아 죽을 때까지 간직하겠습니다.”
마이는 침음을 흘렸다.
“너를 보는 순간 다섯 이라는 숫자가 떠올랐다. 또한 텅 빈 상태에서 새로 시작하니 오공이라고 하자꾸나.”
오공(五空)이라니.
‘지금까지 거둔 제자가 네 명이군.’
소우주, 아니 오공으로 다시 태어난 전직 살수가 한 번 더 대례를 올렸다.
“스승님!”
마이는 뿌듯한 눈빛을 보였고, 홍칠은 축하의 의미를 담아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하나 남천휘는 언제 산통을 깨야 할지 시기를 조절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좋은 생각이 뇌리를 스쳐갔다.
“마 대협! 축하합니다.”
마이는 남천휘가 손을 흔들며 다가오자 경계의 빛을 감추지 못했다. 눈빛과 마음은 그러지 않으려고 하지만, 몸이 먼저 반응하는 게다.
“인연이 닿아 좋은 제자를 얻었으니 좋은 수련처가 있어야겠군요.”
“태산이 지척이잖아. 어딘들 우리 사제가 거처할 곳이 없을까.”
마이는 평범한 축하라고 여겼는지 기름을 바른 듯한 매끈한 수염을 쓰다듬으며 웃었다.
어! 그러고 보니 진짜 기름 냄새가 나잖아.
“크흠. 그건 아니지요. 굶고, 괴롭히고, 때리면서 가르치는 건 구시대의 유물이란 말입니다. 오늘 날의 강호인이라면 응당 맛있는 것을 먹고, 좋은 옷을 입으며, 안전한 수련장에서 수련을 해야 성취가 높아지지 않겠습니까.”
“허허, 그런 곳이 어디 흔한가.”
남천휘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곡부남가 인근에 전문적으로 수련을 할 수 있는 대규모 비처가 있습니다. 마 대협께서 원하신다면 제가 기꺼이 초빙을 하지요.”
하나 마이는 쉬이 걸려들지 않았다.
“크흠, 가서 집이나 지켜달라는 건 아니고?”
“쯧쯧, 생각이 짧으시네.”
남천휘는 마이에게 바짝 다가선 채로 귀엣말을 했다.
“청도문에서 거둬들인 돈은 어디 전장에 박아둘 겁니까? 멋지게 치장하고, 화려한 옷을 입으면 뭐할 건데요? 산 중에서 오공에게 박수나 받으며 지내는 것이 진짜 마 대협의 미래입니까?”
마이가 멈칫했다.
역시 겉멋에 살고, 겉멋에 죽는 혈검살의다.
“끄응.”
남천휘는 쐐기를 박았다.
“곡부 남부는 굶는 이가 없고, 누구나 웃으며 지내는 지상 낙원과 다르지 않아요. 먹고 살기 좋은 동네이니 인심이 좋은 건 당연지사! 하나를 하면 둘을 칭찬하고, 둘을 하면 다섯을 칭송할 만큼 순수한 사람들이 사는 동네라고요.”
이쯤 되면 마이의 머릿속에 인심(人心)과 순수(純粹)가 뿌리를 내렸을 터였다.
“헛헛! 오늘은 생각해보고 내일 말해주겠네.”
헛기침마저 혼란스러운 것을 보니 결과는 정해진 듯했다.
“그러세요. 본가의 문은 언제나 열려 있으니까요.”
그러니 곡부남가에서 문지기 노릇 좀 잘 부탁합니다. 많은 것을 바라지도 않는다. 그저 밥값만 해줘도 충분했다.
‘좋아! 앞으로 쓸 만한 녀석이 있으면 죄다 곡부남가로 보내버리자!’
뒤처리는 소가주인 남천홍이 잘 해줄 것이다.
안 하면 어머니나 아버지라도 하겠지.
“일단 술이나 한 잔 합시다!”
홍칠은 좋은 핑계거리가 생겼다고 여겼는지 대뜸 탁자 위로 올라갔다.
“여러분, 오늘 내 형님이 제자를 들였소. 다 같이 축하 좀 해줍시다!”
이른 아침부터 객잔에 모인 술꾼들의 눈치는 살수에 뒤지지 않을 터였다. 술을 사겠다는 소리임을 확인하는 순간 사방에서 박수와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남천휘는 흥겨운 홍칠의 뒷모습을 보며 박수를 쳤다.
‘기왕이면 너도 가라. 곡부남가.’
잠시 후 남천휘도 공짜 술 잔치에 한 발 걸치려던 순간이었다. 한데 낯익은 녀석이 객잔의 입구에서 두리번거렸다.
“너로구나.”
철가철방에서 관람비를 받던 녀석이다.
“소용녀께서 대협을 찾으십니다.”
설마 벌써 고쳤을라나?
남천휘는 입맛을 다시며 시동을 따라 나섰다.
철가철방의 입구는 여전히 빗장이 채워진 상태였다.
뒤쪽으로 돌아 들어가는 순간 전처럼 자욱한 안개가 시야를 가득 채웠다.
치이이이이이이-
잠시 후 물안개가 사그라졌다.
그 너머로 보이는 육중한 체구는 VR에서 봤던 철신 철장경을 방불케 했다. 한데 물안개가 걷힌 후 드러난 소용녀의 표정은 초췌하기 그지없었다.
실패라는 두 글자가 뇌리를 스쳤다.
‘쯧.’
소용녀는 남천휘를 보며 한 숨을 내쉬었다.
“미안해요. 실패했습니다.”
“책임을 물을 일은 아니지요. 어떻게 된 겁니까? 마봉파가 낙야묵철로 이뤄졌으니 붙이기만 하면 된다고 했잖습니까.”
남천휘는 최대한 담백하게 말하려 했다.
하나 아쉬움이 묻어나오는 것을 숨길 수 없었다.
소용녀는 철 항아리를 꺼냈다.
“엇!”
마봉파였다.
하나 내부를 가득 채웠던 낙야묵철은 보이지 않았다.
소용녀의 눈짓을 따라 시선을 돌리니 회백색으로 번들거리는 약물 사이로 가죽처럼 펼쳐져 있는 묵빛의 철이 보였다.
“분리했군요.”
“분리만 했어요.”
그녀는 기구를 사용해 약물 속의 낙야묵철을 꺼냈다. 그 순간 고금을 통틀어 듣도보도 못한 기사가 벌어졌다.
촤라라라락!
가죽처럼 축 늘어져 있던 철이 저절로 뭉쳐들더니 울퉁불퉁한 구체로 변하는 것이 아닌가.
“이게 무슨······.”
마치 살아 있는 철을 보는 듯했다.
“낙야묵철의 다른 이름은 생철이랍니다.”
혹시나 했던 생각이 맞아떨어졌을 때의 충격은 생각보다 컸다.
“아! 그럼 주물을 하려고 해도 붙지 않겠군요.”
소용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몇 번이나 칠야와 창월에 덧붙이려고 해봤어요. 하나 공기 중에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원형을 기억한 것처럼 변해버려요. 이것을 만든 사람은 단순한 야장이 아니라 대단한 무공의 고수였을 거예요.”
남천휘는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비록 퀘스트 아이템으로 받았지만, 명색이 정천칠공 중 두 사람의 힘을 모아 만든 기물이 아니던가.
제룡검야(帝龍劍爺)의 음유지기.
청염진군(靑炎眞君)의 양강지기.
봉인된 물품의 가치가 700이고, 등급이 영웅이라면 분명 음양의 기운을 뭉쳐 만들어냈을 터였다.
“이대로라면 방법이 없어요. 철신의 비전은 모두 익혔다고 여겼는데······.”
‘혹시 실전된 것이 있었던 걸까요?’라는 혼잣말을 듣는 순간이었다.
그렇다.
마봉파에는 히든 퀘스트가 숨겨져 있지 않던가.
칠십 일 간의 유예 기간을 얻고, 퀘스트 자체가 봉인됐다. 그렇기에 남천휘는 그 전에 얻었던 퀘스트마저 잊고 있었던 게다.
《강철의 뿌리를 찾아서.》
- 강철의 고향에서 항아리의 봉인을 푸세요.
※ 철장경 왈(曰) ‘철중철(鐵中鐵)은 강중강(剛中剛)이고, 연중연(軟中軟)이라.’고 했습니다.
남천휘는 바짝 마른 입술을 축이며 말했다.
“혹시 이런 말 들어봤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