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호만렙지존-166화 (166/305)

75, 신교대(新橋隊). (4)

*

백곰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정식으로 인사 올리겠습니다.”

누구신데 집안의 큰 어른 대하듯 하시나요.

이러다 절까지 하겠는 걸?

그는 싱긋 웃으며 자신을 소개했다.

“양가의 장남, 양대안이라고 합니다.”

대안(大眼)이라니.

자식의 이름을 저리 짓는 자가 어디 있던가?

남천휘는 소혜를 곁눈질 했다.

그러고 보니 눈이 큰 것만 보며 두 사람이 남매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터였다.

‘흥! 그래서 동질감이라도 느낀다는 건가?’

남천휘는 퉁명스런 어조로 말했다.

“남천휘야. 이쪽은······.”

소혜가 소매를 슬쩍 내리더니 누가 쫓아오기라도 하는 사람처럼 황급히 대꾸했다.

“소혜, 소혜에요.”

양대안은 반색을 하며 눈을 맞췄다.

“아, 어여쁜 이름을 지니셨군요. 누추한 곳까지 찾아오시느라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인마! 고생한 건 나고.

소혜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더니 고개를 살살 흔든다.

“아닙니다. 자당께서 불청객이라고 내치지 않고 차까지 내주셨는걸요.”

“하하! 자친께서 함께 하는 것을 좋아하십니다. 어! 이 귀한 차를 내오신 걸 보면 소저를 꽤 반기신 것이 분명합니다.”

이 새끼야! 나한테 준 거라고.

무엇보다 어려운 말을 사용하면서 대화를 나누는 꼴이 불쾌했다.

왠지 모르게 소외된 이 기분.

이것이 자신과 개똥이를 보던 개구리의 심경인가?

남천휘가 참다못해 한 마디를 하려는 순간 여인의 서릿발 같은 한 마디가 흘러나왔다.

“놈. 사내가 경중을 따지지 못하고 경박하게 구는 것이더냐?”

양대안뿐 아니라 남천휘까지 찔끔 놀랄 일침이었다.

그래, 지금은 양방언을 등용하러 온 길이 아니던가.

“어머니, 죄송합니다.”

남천휘는 양대안이 주눅 든 것과 달리 빙긋 웃으며 여인에게 말했다.

“다행히 제게 방도가 하나 있습니다.”

“그게 뭔가요?”

남천휘는 양대안을 힐끔거렸다.

“아! 저는 잠시 나가 있겠습니다.”

한데 소혜도 덩달아 자리를 피해주는 것이 아닌가.

‘아니, 저것들이!’

남천휘는 훗날을 도모한 채로 여인에게 묘안을 알렸다.

“대안이를 공격하시겠다고요?”

여인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제아무리 강단이 있는 여인이라고 해도 자식에 대한 문제는 민감할 수밖에 없으리라.

“네.”

“다쳐야 하는 것입니까?”

남천휘는 입꼬리를 올렸다.

여인은 모르는 듯했다.

양방언은 강호를 등졌을지언정 자식에게까지 은둔을 강요하지 않았음을 말이다.

양대안의 레벨은 98이다.

단순히 레벨만 따지자면 서산노옹을 뛰어넘었고, 백주검과 비슷한 수준이다. 물론 실전에서는 이야기가 다를 터였다. 백전노장인 두 명숙이라면 어느 정도의 레벨 차이에 구애받지 않으리라. 하나 거꾸로 생각하면 수련만으로 레벨을 98까지 끌어올렸다는 뜻이 아닌가.

“자제분은 실전을 거치지 않았을 뿐 아주 강합니다.”

하나 여인은 믿지 못하겠다는 듯 한 숨을 내쉬었다.

“나무를 해오는 것 말고는 아무 것도 못하는 녀석인데······.”

남천휘는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양 교두와 내기를 할 생각입니다. 그 때 모른 척 자리만 지켜주시면 됩니다. 대안이가 다칠 염려는 하지 않으셔도 되고요. 저 철귀유협입니다!”

여인의 얼굴이 환해졌다.

철귀유협의 이름값이 이 정도였던가?

‘아, 나도 점점 철귀유협이 입에 익어간다.’

*

양방언은 석양을 등진 채 걸음을 옮겼다.

몸이 무겁다.

언제부터였던 걸까?

그는 자신도 모르게 허리춤을 더듬거리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래, 박도를 내려놓은 그 때부터 몸이 무거웠다.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흘러내리려는 끈을 추슬렀다.

그러자 장난감 같은 금이 묘한 음을 흘리며 제자리를 찾았다.

‘오늘은 유독 힘들군.’

이유는 고민할 필요도 없다.

철귀유협의 방문이 원인일 터였다.

그는 사실 언제고 철귀유협이 찾아오지 않을까 예견했다. 그도 그럴 것이 곡부남가는 외부의 무인만 충원한다고 해서 성장할 수 없었다. 무인들의 충성과 교육을 통해서 기반을 다져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체계적으로 가르칠 사람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양방언은 그것을 자신의 역할이라 여겼다.

‘물론 내가 할 일은 아니지만.’

아내를 위해 박도를 내려놓고 금을 튕긴 세월만 벌써 십 수 년이다.

그는 거절하기를 잘했다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그렇다고 해서 누군가를 가르칠 자신이 없는 건 아니었다. 다만 강호는 여전히 위험했고, 아내가 버텨낼 만큼 호락호락한 세상이 아니지 않은가. 그는 자신의 욕심만 접으면 모두가 행복해지는 삶을 포기할 수 없었다.

“후우.”

양방언은 두툼한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잠시 후 얼굴에는 핏기가 돌았고, 억지웃음을 만들어냈다.

“부인! 나 왔소.”

그는 사립문을 힘차게 열어젖혔다.

하나 기세 좋게 들어선 것과 달리 걸음을 떼지 못했다. 항상 고즈넉하던 집안에 활기가 돌았다. 아내는 어린 소녀와 기름 냄새를 풍기며 무언가를 만들었고, 아들 녀석은 주방을 힐끔거리며 어설프게 장작을 패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자신이 즐겨 앉던 평상에는 불청객이 앉아 차를 홀짝였다.

“당신.”

남천휘는 험악해진 양방언의 표정에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늦으셨군요. 이쪽에 앉아서 차 한 잔 드시지요.”

“누가 내 집에 함부로 발을 들이라 했소. 광영루까지 찾아온 것도 모자라 집까지 불쑥 나타나다니 너무 무례하지 않은가?”

양방언의 일갈에 양대안은 어깨를 움츠렸다.

하나 남천휘는 든든한 뒷배를 믿었다.

“왔으면 손발부터 닦으세요! 그리고 집에서는 목소리 높이지 않기로 했잖아요.”

여인의 앙칼진 한 마디에 양방언은 아들과 같은 표정으로 헛기침을 했다.

“크흠, 그러려고 했소.”

잠시 후 남천휘는 양방언과 마주앉았다.

“제가 누군지 아시지요?”

양방언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소. 요즘 가장 회자가 되는 사람을 어찌 모를까.”

“제가 근골과 자질이 좋은 후기지수들을 모았습니다. 날개만 달면 당장이라도 활공할 수 있는 녀석들이지요.”

“그래서요.”

“양 교두께서 날개를 달아주십시오.”

“방파의 기틀이 잡는 일이외다. 하루이틀에 될 일도 아니고, 돈 몇 푼 쥐어준다고 될 일도 아닐 것이오.”

남천휘는 서책을 내밀었다.

며칠 전부터 상태창을 통해 정리한 발탁무인들의 정보였다. 각자의 장단점은 물론이고, 향후 발전 가능성까지 일목요연하게 정리가 되어 있었다.

이것이라면 분명 양방언도 회가 동할 터였다.

“허어.”

양방언은 못이기는 척 서책을 살피다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이게 진짜요?”

“먼 길을 찾아왔습니다. 거짓으로 시간을 허비할 이유가 없지요.”

남천휘의 말에 양방언은 연이어 탄성만 흘렸다.

‘그래, 그가 내게 거짓말을 할 리가 없지. 하지만 이건 정말 엄청나군.’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누군가를 가르치기 위해서는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쳐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장유무는 시간이 지나야 알 수 있을 만큼 신의 영역이 아니던가.

한데 남천휘의 서책은 어둠 속에 등불을 켜놓은 것과 같았다.

‘소문이 과장되었을 것이라 여겼거늘······.’

생각보다 철귀유협은 대단한 자였다.

‘어쩌면 나 같은 건 필요가 없을 지도 모르겠군.’

어차피 수락할 생각도 없었지만, 왜인지 모르게 아쉬운 마음이 스쳐갔다.

남천휘는 서책을 부여잡고 탄성을 흘리는 양방언에게 한 마디를 건넸다.

“날개는 제가 드리지요. 그러니 붙여만 주십시오. 양 교두가 아니면 불가능합니다.”

선비는 자신을 알아주는 이를 위해 죽는다고 하지 않던가. 한데 양방언에게는 이미 자신을 알아주는 이가 존재했다.

그는 잠시 주방에 있는 아내를 힐끔 바라봤다.

쳐진 어깨와 굽은 등이 안쓰럽다.

‘그래, 저이를 위험한 세상에 끌고 들어갈 수는 없지. 안하는 게 맞는 게야.’

양방언은 마음을 결정한 듯 대꾸했다.

“후우. 이 정도면 대붕의 날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훌륭한 자료요. 하나 나는 이미 오래 전에 강호를 등졌소. 몸과 마음이 녹슬었으니 강호의 기억 또한 사라졌소. 그러니 돌아가시오.”

“정말입니까?”

“그렇소. 나는 여한이 없는 사람이외다.”

남천휘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제가 양 교두의 진심을 끄집어내면 어찌 하시겠습니까?”

양방언은 코웃음을 쳤다.

“설마 나를 도발할 생각인가? 나는 왈패의 가랑이를 지나고, 개처럼 짖었던 사람이외다. 그것만 봐도 강호를 잊었다는······.”

그 때 남천휘는 평상에서 튕기듯 일어났다.

그리고 어디선가 암기 같은 것을 꺼내더니 양대안을 겨눴다.

“어!”

양방언은 눈을 부릅뜬 채 남천휘의 소맷자락을 잡아끌었다. 하나 남천휘가 조금 더 빨리 손에 쥔 것을 냅다 집어던졌다.

수천의 내력을 운용했고, 특기 ‘투척’까지 발동됐다.

“안 돼!”

다행히 양대안은 장작을 패면서도 이쪽을 힐끔거리는 와중이었다. 그는 남천휘의 기습에 뒷발을 빼더니 도끼를 고쳐 잡았다. 일련의 동작이 물 흐르듯 연계됐다. 동시에 도끼의 날이 암기를 올려쳤다.

파삭!

양대안은 자신의 떨리는 손을 보며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러다 허공에서 떨어진 육포 조각을 보고 침음을 흘렸다.

“육포에 이런 힘이 담겼다니······.‘

그러다 이내 실수를 눈치 챈 듯 양방언의 눈치를 봤다.

“아버지.”

양방언은 남천휘를 잡아끌며 소리쳤다.

“감히 내 아들을 공격하다니!”

하나 남천휘는 여유로웠다.

“다칠 것이라 생각하셨습니까?”

양방언은 남천휘의 눈빛이 맑은 것을 보고 주춤거렸다.

“크흠, 어떻게 대안이의 성취를 눈치 챘는가?”

“저절로 보이더군요.”

거짓말은 아니다.

정말 머리 위의 레벨이 보였으니까.

양방언은 그것을 고수의 기감으로 여겼는지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자제분의 무위는 지금 당장 출도해도 두각을 드러낼 정도입니다. 그렇게 수련을 시켰으면서 강호를 등지셨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남천휘의 직설적인 말에 양방언은 침묵했다.

그 때 여인의 날카로운 한 마디가 들려왔다.

“사내가 일구이언을 할 수 없잖아요. 남 소협과의 약조를 지키세요.”

하나 양방언은 여전히 아내의 눈치를 보며 말을 아꼈다. 결국 여인이 다가와 양방언이 손을 맞잡고,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평범하게 사는 건 이제 충분히 했잖아요. 내 소망은 다 이뤘으니 이제 당신의 뜻대로 사세요. 내가 지금껏 당신을 교두라 부르는 이유를 진정 모르시겠어요?”

“부인.”

“곡부남가의 평판은 오래 전 만민양생을 알리며 천하를 구호한 장가장에 비견할만하잖아요. 이렇게 좋은 곳에서 훌륭한 사람이 찾아왔거늘 언제까지 좀생이처럼 머뭇거리시렵니까?”

양방언은 한 숨을 내쉬었다.

남천휘는 그 순간 양방언이 결심을 내렸다고 확신했다.

“양 교두께서 걱정하시는 바를 모르지 않습니다.”

결국 양방언은 남천휘를 앞에 두고 손을 모았다.

“이 양 모는 철귀유협에게 의탁하여 다시 한 번 강호행을 시작해보고자 하오.”

남천휘는 양방언의 손을 맞잡고, 말했다.

“기꺼이 함께 하겠습니다.”

양방언은 그제야 숨겨뒀던 모습을 보였다.

“크하하하! 오늘 같은 날에는 서 말의 술을 마셔야 하지 않겠소이까?”

남천휘는 사내답게 맞장구를 치려했다.

여인의 찌를 듯한 눈빛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이 분위기가 아닌 것 같은데.’

아니나다를까 여인은 양방언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술 같은 소리 하시네요. 일단 안에서 잠시 얘기 좀 하시지요. 너도! 따라 들어오너라.”

이내 흑곰과 백곰이 포승줄에 묶인 것처럼 고개를 푹 숙인 채 안채로 사라졌다.

*

양방언은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다듬었다.

“크흠.”

그는 남천휘를 앞에 두고 고개를 숙였다.

“못난 꼴을 보였군요.”

남천휘는 히죽 웃으며 말했다.

“저희 집과 비슷하던 걸요. 아무래도 화목한 가정의 실상은 다 이런 것이 아닐까 싶군요.”

양방언은 못이기는 척 남천휘와 함께 웃은 후 말했다.

“날개를 붙일 수만 있다면 뭐든 지원해준다던 말, 진심입니까?”

“저는 지금껏 허언을 한 적이 없습니다.”

없던가? 없을 거야.

있어도 기억나지 않으면 없는 거다.

남천홍이 말하지 않았던가.

맛있게 먹으면 살이 찌지 않는다고.

그 논리대로라면 믿는 대로 이뤄지는 것이 삶의 지혜이리라.

다행히 양방언은 백지에 붓을 놀리느라 여념이 없었다. 아무래도 무인들을 교육하기 위해 필요한 것을 적는 듯했다.

‘그런데 언제까지 쓰는 거야?’

엇! 아저씨, 백만 대군이라도 양성하려는 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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