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 주인공은 언제나 맑은 뒤 흐림. (1)
71, 주인공은 언제나 맑은 뒤 흐림.
호각의 효과는 확실했다.
삽시간에 수십 명의 승천문도가 뭉쳤다.
게다가 신공부의 무인 중에서도 상당수가 운집했다.
“한 놈도 하산하게 만들지 마라! 오늘 일은 광명정에 묻어버리겠다!”
천라쌍익의 광기 어린 외침에 백여 명에 이르는 무인들은 검과 도를 뽑았다.
반면 광명정의 무인들은 창졸간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 때 안개 속에서 한 줄기 빛이 스며들 듯 남천휘의 일갈이 들려왔다.
“드디어 마각을 드러냈구나! 신공부는 오늘 적폐를 잘라내고 새로 태어난다!”
수백 명의 무인들이 얼떨결에 병장기를 겨눴다.
하지만 이내 눈동자에 총기가 깃들었다.
신공부주의 만행은 이미 증명된 것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게다가 신공부에서 승천문이 퇴출됐으니 공후탁은 야인이나 마찬가지였다.
무엇보다 남천휘가 건재했다.
자식뻘이나 마찬가지인 그의 등이 오늘따라 들판처럼 넓어보였다.
“쳐라!”
돌이켜 생각해보면 누구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인지 모르겠다.
신공부나 승천문의 무인들은 신공부주와 한 배를 탄 셈이다. 반면 광명정의 무인들은 이런 곳에서 죽고 싶은 마음이 추호도 없었다.
그러니 참다못한 누군가 공격을 시도했으리라.
하나 남천휘는 무인들이 자신을 지나쳐가는 것을 본 후에야 혈투의 시작을 인지했다. 그는 천라쌍익이 발광하는 순간 신공부주의 실각을 떠올렸다.
이제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넌 셈이다.
그렇기에 시급한 사안에 집중했다.
신공부주보다 중요한 일은 바로 퀘스트였다.
《1-6-2, 장무기무기(壯武起武技)》
- 노국장주가 생존했습니다.(1/1)
- 공문십철의 대표를 모두 쓰러트렸습니다.(10/10)
- 3단계 봉인이 해제됩니다.
천위검호를 쓰러트리는 순간 메인 퀘스트의 2단계가 완료됐다.
그리고 3단계가 열렸다.
《1-6-3, 의천도룡(義天屠龍)》
- 노국장주의 생존.(0/1)
- 공후탁의 죽음.(0/1)
2단계인 ‘장무기무기’에 비해 ‘의천도룡’은 해석이 손쉬웠다. 하늘의 의로움을 대신하여 용을 베라는 뜻이겠지.
‘상제신룡.’
남천휘는 공후탁의 별호를 읊조렸다.
결국 노국장주를 살리고, 공후탁을 죽이면 메인 퀘스트 ‘중간보스’가 완료된다.
분위기가 살았고, 판이 깔렸다.
이제 공후탁만 죽이면 되는 게다.
하지만 남천휘는 섣불리 움직이지 않았다.
메인 퀘스트를 돕기 위해 생성됐다는 3단계의 보조 퀘스트가 문제였다. 1단계에서는 느끼지 못했던 위화감이 2단계를 지나면서 강해졌고, 3단계에 이르러서는 확신으로 변했다.
공후탄을 쓰러트리고 단상에 올랐을 때였다.
천위검호가 등 뒤에서 살기를 뿌렸지만, 마음만 먹는다면 신공부주를 노릴 수도 있었으리라.
완벽한 명분? 타인의 시선?
어찌됐든 퀘스트의 완료 조건은 공후탁의 죽음이 아니던가. 어디서, 어떤 방식으로 죽여도 상관없을 터였다.
하나 재이는 남천휘의 기습 가능성을 배제했다.
왜 그랬을까?
“흩어져! 흩어져!”
광명정의 무인들은 각기 소속방파가 다르다.
그렇기에 그들은 한데 뭉쳐 싸우기보다 손발을 맞춰본 동료와 함께 적을 상대했다. 저들은 신공부와 승천문에 네 배 이상의 머릿수를 지녔다.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포위망이 완성됐다.
‘게다가 적의 주력이라고 할 수 있는 천라쌍익과 천위검호는 중상을 입었잖아.’
그러니 눈앞의 광경은 천위검호의 과잉 충성과 천라쌍익의 광기가 만들어낸 절호의 기회였다.
남천휘는 단상 위의 신공부주를 노려봤다.
‘절호의 기회인데…….’
신공부주를 향했던 시선이 시야 구석을 향했다.
‘시간은 왜 이렇게 많이 남은 건데?’
- 제한시간(77:16:35:51)
메인퀘스트 1막 ‘강호행’의 마지막 퀘스트인 중간보스의 제한시간은 백일(百日)이다.
한데 신공부주의 목은 코앞에 있지 않은가.
고작 2할의 시간을 사용하고 퀘스트 완료를 목전에 뒀다.
이상했다.
‘매일 같이 기간 대비 성장 경험치가 구리다고 타박을 하던 녀석인데…….’
그처럼 철저한 재이가 이 정도의 시간 단축을 예상하지 못했다는 것 또한 우스웠다. 그렇다면 녀석은 정상적으로 진행이 됐을 때 백일이 걸린다고 예견한 것이리라.
정상적인 상황.
남천휘는 장내를 한 눈에 담았다.
어디서부터 정상이고, 어디까지가 비정상인지 찾아내기 위함이다.
“크악!”
검후는 한 손으로 뒷짐을 진 채 가볍게 검을 흔들고 있다. 그것만으로도 적은 팔다리 중 어느 한 곳을 부여잡은 채 나뒹굴었다.
천수련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검후에 비해 성취가 부족했기에 조금 더 과격했다.
‘우리 쪽이 압도적으로 유리해.’
이처럼 유리한 상황에서 신공부주를 놓칠 리가 없지 않은가.
“패륜의 무리를 처단하라!”
동주림주는 굽은 등을 편 채 패검을 휘둘렀다.
노인네가 좋은 것만 먹고 지냈는지 아주 혈기왕성하다. 잠시 장내를 지켜본 것만으로도 광명정의 무인들은 신공부와 승천문의 무인들을 몰아붙였다.
그 때 담담한 한 마디가 들려왔다.
“뭐 해?”
응? 반말.
‘나한테 반말을 할 녀석이 있었던가?’
남천휘는 슬쩍 고개를 돌린 후 미간을 좁혔다.
사천 냥짜리 명배우가 뒷짐을 진 채 강 건너 불구경하듯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두둑했던 전낭이 하루아침에 홀쭉해진 것을 떠올리며 시큰둥한 한 마디를 돌려줬다.
“너희 집이 몰락하는 광경을 잘도 구경하는구나.”
아, 잊고 있었다.
공태령은 유운림에 갇힌 후부터 진짜 제 모습을 가감 없이 선보였다는 점을 말이다.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 걸? 나를 바둑판의 흑석처럼 여기던 자들이야. 바둑판 자체가 뒤집히는 걸 보니 속이 다 시원하네. 아! 그 표정은 뭐지? 내가 이제 와서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짖으며 칼이라도 대신 맞아줄 거라고 생각한 거야? 훗, 내 연기에 넋이 나갔군. 역시 천 냥 정도 더 뽑아낼 걸 그랬네.”
본성을 드러내더니 말투까지 저렴해졌네.
‘무서운 놈.’
공태령은 쓴웃음을 흘렸다.
“인륜이 머리가 아니라 가슴에서 지워지는 느낌. 이제는 쓰라리거나, 아프지도 않아. 그저 경극의 한 장면을 보는 것처럼 무덤덤할 뿐이야.”
참으로 안쓰러운 가정사다.
남천휘가 혀를 차는 사이 공태령이 턱짓으로 전장을 가리켰다.
“그런데 너야 말로 잘도 구경하고 있네.”
“무슨 뜻이지?”
“평소의 너였다면 저들과 함께 뒤엉켜서 싸웠어야지. 하긴 천위검호와 천라쌍익을 연달아 이기고 멀쩡한 것도 이상하지. 어차피 신공부주는 계속 단상 위에 있잖아. 도망갈 곳도 없어 보여. 차라리 힘이 빠졌으면 후방에서 운기조식이라도 하고 오지 그래?”
남천휘는 눈을 부릅떴다.
‘그러게. 저 자는 왜 단상에서 움직이지 않는 걸까?’
신공부주는 대전에서 단상으로 나온 후부터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놈의 가면을 깨고, 본성을 드러나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놈은 움직이지 않았다. 심지어 자신이 공후탄의 몸뚱이를 깔고 앉은 후 면전에서 도발을 했음에도 놈은 움직이지 않았다.
왜?
‘단순한 자존심이 아니라…….’
저기에 있어야만 했던 이유가 있는 게다.
남천휘의 특기가 동시다발적으로 활성화됐다.
그리고 지금까지 누적된 정보를 분류하고, 취합하며 결론을 내놨다.
‘설마 비밀통로가 있나?’
평소의 남천휘였다면 지금 이 순간 적진 한가운데어서 혈전을 펼쳤으리라. 행여 적의 칼에 맞아 약한 자들이 죽을까 걱정했으리라. 포위망을 믿고 신공부주의 수족을 처단하는데 열중했으리라.
‘그랬다면 놓친다.’
그리고 신공부주는 비밀통로를 통해 탈출할 터였다.
어디로?
‘청도문!’
지금까지의 모든 사건은 신공부주를 정점으로 해서 점조직처럼 뿌리를 내리지 않았던가. 신공부주가 청도문을 좌지우지한다면 초류혁이 죽었음에도 청도문주가 침묵한 이유를 설명할 수 있다.
남천휘는 눈을 빛냈다.
신공부주 정도 되는 악인이 신공부를 버리고 도망칠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으리라.
아니, 관심조차 가지 않았다.
그저 놈의 목적을 알아냈다는 것에 만족했다.
그 때 광명정의 무인이 칼을 맞고 쓰러졌다.
한쪽 어깨가 덜렁거릴 정도로 깊게 베인 듯했다.
남천휘는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자신이 나섰다면 저 자는 다치지 않았을 수도 있을 터였다. 혹은 저기 어딘가에서 죽은 무인이 목숨을 부지했을 수도 있다. 하나 그렇게 뒤엉켰다가는 신공부주를 처단할 수 없으리라.
‘신공부는 나 혼자 일으키는 게 아니야.’
저들의 의지와 땀, 그리고 피로 인해 새로이 태어나야 할 터였다.
희생을 감수해야 했다.
이처럼 매정한 다짐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S급 특기인 ‘불굴’일까?
남천휘는 고개를 내저었다.
무적자(無籍者).
어디에서 속하지 않았기에 어디에나 속할 수 있다.
그러니 남천휘는 내키는 대로 행동했다.
그 순간의 감성, 그 때의 이성이 의지가 되어 질주하는 게다.
‘그러니 보조 퀘스트 따위는 무시한다.’
죽인다.
‘오늘!’
반드시 신공부주를 처단한다.
저런 놈을 살려뒀다가는 후환이 일파만파 퍼질 터였다. 어차피 중간보스의 완료 조건은 공후탁의 죽음이 아니던가.
게다가 남은 칠십 일 동안 놈을 찾아 헤매고 싶은 마음은 전무했다. 수십 일 동안 뒤통수가 근질거릴 것을 생각하면 벌써부터 짜증이 솟구쳤다.
대의를 위한 것도, 퀘스트에 목을 매는 것도, 심지어 신공부를 위한 것도 아니다.
온전히 자신을 위해서였다.
내가 귀찮지 않기 위해, 내가 편하기 위해.
무적자란 이기심의 집합체가 아닐까 싶다.
‘그래, 나를 위해서 하는 거야.’
그러니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남천휘는 가장 먼저 혀를 깨물었다.
‘아우!’
비릿한 혈향이 입안을 가득 채웠다.
적선단을 사용하는 대신 공태령을 향해 손짓했다.
“크흑! 내상이 도진 것 같아.”
다소 큰 목소리에 주변에 있던 무인들의 시선이 꽂혀들었다.
“너 뭐하냐?”
남천휘는 입가에 맺힌 피를 손바닥으로 펴 발랐다.
그러자 제법 피를 토한 모양새가 만들어졌다.
[아직 돈값하려면 멀었다. 와서 부축해.]
공태령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가왔다.
하나 돈값을 하려는지 다급한 어조로 되물었다.
“괜찮아? 많이 다친 거야?”
보면 볼수록 연기를 잘한다.
진심이 엿보이는 생활 연기에 자칫하면 호감도까지 오를 듯했다.
남천휘는 비틀거리며 공태령의 품에 안겼다.
‘예전에도 느꼈지만 참 가냘프단 말이지.’
쌍도를 휘두르며 악귀처럼 날뛰던 녀석이 이처럼 호리호리할 줄 누가 알겠는가.
남천휘는 공태령의 부축을 받으며 후방으로 향했다. 그러면서 하늘을 향해 피를 토할 기세로 외치고, 또 외쳤다.
“크흑, 하늘이시여! 대악인을 앞에 두고 어찌 이러실 수 있단 말입니까.”
무인들은 병장기를 고쳐 잡았다.
남천휘의 몫까지 의협의 기치를 드높일 요량이었다.
두 사람이 향한 곳은 공문십철 중 동주림의 처소였다. 공태령은 처소에 들어서자마자 병균이라도 옮은 사람처럼 거리를 뒀다.
“뭐하려고?”
남천휘는 침묵했다.
제아무리 부모자식 간의 연을 끊었다지만, 네 아버지를 죽이러 간다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공태령도 눈치를 챈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하긴 들어서 뭐해. 귀찮기만 하겠지.”
남천휘는 공태령을 뒤로 한 채 처소 밖으로 향했다.
‘신안, 신속, 귀식.’
세 가지를 활성화시킨 이상 전장으로 스며드는 건 손바닥 뒤집기처럼 손쉬웠다. 귀식(龜息)으로 인해 기척이 사그라지고, 신속(迅速)으로 인해 지형지물의 방해가 줄었다.
남천휘의 눈빛마저 옅어졌다.
‘내가 오늘 살수 특기 하나 얻어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