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 난입은 두 번째가 진짜! (1)
68, 난입은 두 번째가 진짜!
노국장주는 침통함을 숨기지 못했다.
이틀의 시간을 벌었으나,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활달하던 안자영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저 침묵을 지킬 수밖에.
그러던 중 남운군이 돌아왔다.
“어때요?”
안자영의 말에 남운군은 고개를 내저었다.
“길마다 신공부의 무인들이 가득해. 나가는 건 물론이고, 서신조차 전할 수가 없군. 아무래도 신공부주가 이 기회에 끝을 보려는 듯해.”
노국장주는 쓴웃음을 흘렸다.
“서신을 보낼 곳이나 있던가? 중원 곳곳에 있는 서원에 서찰을 보낸다한들 그들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외환을 경계하기 위해 무가의 길을 포기했건만, 내홍으로 이 꼴이 될 줄이야.”
안자영은 한 숨을 내쉬었다.
“애초에 참석한게 문제였을까요?”
남운군은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긴급 대회의는 신공부의 존폐를 결정하는 자리야. 만약 빙부께서 불참하셨다면 신공부주는 오늘 부로 공문십철의 목록에서 노국장을 파냈을 걸.”
안자영은 아버지의 굽은 등을 보며 한 숨을 내쉬었다. 제아무리 진취적인 그녀라고 해도 이런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없더라. 유가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그토록 배척했던 무력을 필요로 하는 상황이 아닌가.
노국장주의 말처럼 저들이 길을 열었다면 더욱 비참한 지경에 몰렸으리라.
“이럴 줄 알았으면 무공에 조금 더 매진할 것을 그랬네요.”
그 때 차를 내오던 천수련이 말했다.
“어머니, 그렇게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응?”
“하늘이 사람을 내고, 저마다 역할을 주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유가의 경천사상에 의하면 쓸모없는 것은 없다고 했어요. 잠시 곡절을 겪었다고 해서 그간의 삶을 부정하시면 안 됩니다. 모든 사람이 무공을 익혀 칼을 휘두른다면 어찌 세상이 올곧게 돌아갈 수 있겠어요.”
안자영은 천수련의 단호한 어조에 어색한 미소를 보였다.
“그래, 네 말이 옳다. 내가 못난 꼴을 보였구나.”
남운군은 이런 상황에서 찾아온 작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세 놈 중에 막내가 가장 걱정이었다. 한데 제 밥그릇을 챙기는 건 가장 빠르구나.”
안자영은 눈을 흘겼다.
“애를 앞에 두고 못하는 소리가 없으셔. 주책없게 그러지 말고 와서 차나 마셔요.”
부부가 정담을 나누는 사이 천수련만이 얼굴을 붉힌 채 차를 따랐다.
노국장주는 저들의 화기애애한 모습을 보며 잠시나마 힘이 솟는 듯했다.
‘저 녀석들을 지켜주고 싶다.’
일평생 지켜온 신념보다 더 중요한 것을 발견한 듯한 기분이다. 그는 그렇게 자신의 삶을 부정하기 위한 준비를 이어갔다.
천수련은 다구를 정리하며 창밖을 응시했다.
‘빨리 안 오면 바보 똥개라고 부를 거야.’
그러던 중 고즈넉하던 밤하늘에 날카로운 울음이 들려왔다.
삐이이이이-
산에서 새소리가 들렸을 뿐이다.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익숙한 울음이야.’
오직 천수련만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녀는 매의 주인을 찾기 위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신공부가 산길을 통제하고 있는 이상 외인이 등장할 리 만무했다.
하나 그녀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설마?’
*
조촐한 술 자리였다.
하나 상석에 앉은 사람은 신공부주였고, 좌우에 앉은 이들은 천라쌍익과 천위검호다. 신공부의 무력을 대표하는 세 사람이 한 자리에 모인 게다.
하나 신공부주는 늘 그렇듯 물을 마셨고, 천위검호는 차를 홀짝였다. 결국 천라쌍익만이 벌게진 얼굴로 연거푸 술잔을 기울일 뿐이다.
“천하에 가장 재미없는 술자리군.”
“이틀만 기다려라.”
“노국장주가 무너지는 건 기정사실이잖소. 하면 이후에는 어찌하실 요량이오?”
신공부주는 맹물을 천하의 독주라도 되는 양 인상을 쓴 채 들이켰다.
“처음 계획대로 간다.”
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계획이었다.
황보세가의 권법을 익힌 무인에게 공태령이 피살되고, 신공부는 그 죄를 황보세가에 묻겠다는 계획이었다. 하나 곤륜산인이 초류혁을 죽이면서 실패로 끝난 계획이 아니던가.
공후탄은 술잔을 꺾으며 말했다.
“죽은 자식 불알은 만지는 게 아니라고 했는데……. 다시 해도 되겠소?”
“못할 것도 없지. 오히려 그 때보다 상황이 나은 듯 하다만?”
“곤륜산인이 일궈왔던 흑도 세력이 일소됐고, 광목재사의 수하들 역시 뿔뿔이 흩어졌소. 교대와 휘대, 호대와 표대가 전멸했으니 이제 누가 남았을꼬?”
공후탄이 거론한 수하들만 해도 천여 명에 이를 터였다.
하나 신공부주는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천위검호가 고개를 숙여 사죄했다.
“제가 조금만 더 빨리 도착했다면 곤륜산인을 빼낼 수 있었을 겁니다. 제 탓입니다.”
신공부주는 손을 내저었다.
“됐네. 쭉정이들은 없어도 그만이야. 그리고 어차피 잘 되었어. 초류혁이 죽었으니 청도문주도 자리만 지킬 수는 없을 게야.”
공후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러고 보니 청도문주도 머리가 많이 굵어졌구려. 예전에는 술자리에서 시중이나 들었을 놈을 구제해줬더니 어깨에 힘이나 주고 말이야.”
신공부주는 공후탄을 만류했다.
“되었다. 청도문은 신공부의 숨겨진 칼이다. 황보세가를 불태울 때 청도문을 앞세우면 명분이 약해지지 않을 것이다. 어차피 산동강호만 차지하면 청도문 같은 건 얼마든지 또 만들 수 있어.”
“알겠소.”
천위검호는 말없이 찻잔만 만지작거렸다.
“귀협이 마음에 걸립니다.”
신공부주는 남천휘를 잊은 듯 미소 지었다.
“이제 놈은 상관없다. 놈이 운좋게 유운림을 나선다고 해도 수많은 유자가 그를 지켜볼 것이다. 불을 지르고, 광목재사를 납치한 것을 자인하는 셈이지.”
“그랬으면 좋겠군요.”
천위검호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남천휘가 부러진 쌍도를 골라내며 내비친 눈빛을 잊을 수가 없다.
‘그 눈빛은 그 나이 때의 것이 아니었어.’
단순한 분노나 야망이 아니라 모든 것을 짓밟고 일어설 것만 같은 맹수의 눈빛이 아니던가. 게다가 단기간에 엄청난 고수로 성장하기까지 했다.
이대로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우려를 떨쳐낼 수 없었다.
*
긴급 대회의의 삼일 째가 밝았다.
결전의 그날이나 다름없었다.
하나 대전에 모여드는 수뇌부의 표정은 밝았다.
지루할 만큼 아무 일도 없이 이틀의 시간이 흐른 것이다.
노국장주가 나타났다.
공문십철의 수뇌는 모두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는 지난 이틀 간 엄청난 고심을 한 듯 초췌한 몰골을 하고 있었다. 마치 십 년은 족히 더 늙은 듯보였다.
‘결국 포기했군.’
‘현실에 순응하는 것도 유자의 길이라네.’
노국장주는 공문십철의 시선에도 눈빛조차 흔들리지 않았다.
잠시 후 신공부주가 들어섰다.
그 또한 노국장주를 보더니 입꼬리를 올렸다.
“시간은 충분했소. 복잡하게 할 것 없이 거수로 결정합시다. 이의 있으신 분?”
신공부주의 눈빛은 노국장주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어차피 그만 굴복하면 모든 일은 비탈길을 구르는 수레처럼 자연스럽게 진행될 터였다.
그 때 노국장주가 거수했다.
“나는 반대요.”
신공부주는 눈을 가늘게 떴다.
신공부의 회의는 전원참석을 원칙으로 했다.
일단 참석만 하게 되면 가부는 다수결로 정해지는 것이 법도였다. 그러니 노국장주는 신공부주의 뜻대로 될지언정 끝끝내 함께 하지 않겠다는 점을 표명한 것이다.
“진정 그리하겠다는 거요?”
“신공부가 무가로 다시 시작할지언정 노부는 신념을 꺾지 않겠소.”
신공부주와 노국장주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부딪쳤다.
신공부주가 선공을 취했다.
“누가 유자의 신념을 꺾을 수 있겠소.”
입가에 은은했던 미소가 사라졌다.
“하나 신공부가 새로 태어난 이상 함께 하지 않겠다면 이 자리에 있을 필요가 없소. 그러니 떠나시오. 물론 그대뿐 아니라 노국장 전체를 말하는 것이외다.”
노국장주는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노부에게 노국장을 떠나라고 했소?”
“그렇습니다. 다른 곳에 가셔서 유자의 신념을 꿋꿋하게 지키세요. 하나 신공부의 영역에 다른 마음을 품은 자를 들일 수는 없습니다.”
쾅!
신공부주의 축객령에 노국장주는 결국 대노하여 탁자를 후려쳤다.
“지금 본 장의 기둥을 뽑겠다는 거요? 그것이 신공부의 부주로서 할 말인가!”
하나 노국장주는 말을 끝내기 무섭게 인상을 썼다. 어깨를 짓누르는 강렬한 압박에 헛구역질이 날 정도였다.
“혈겁을 만나 운 좋게 목숨을 구했다 들었소이다. 그럼 귀이 여겨서 장수할 생각을 해야 하지 않겠소? 적당히 하시구려.”
“크흑.”
신공부주의 기세에 밀려 노구가 비명을 내질렀다.
노국장주의 시선은 점차 땅을 향했다.
억지로 버텼다가는 뼈가 부러질 지경이다.
그 때 예기치 못한 구원의 한 마디가 들려왔다.
“부주.”
대전 밖에서 들려온 신풍수사의 한 마디였다.
“무슨 일인가?”
잠시 머뭇거리는듯하더니 조심스러운 한 마디가 들려왔다.
“손님이 오셨습니다.”
신공부주는 미간을 좁혔다.
이미 광명정으로 통하는 경기도 전체를 통제하고 있는 형국이 아닌가. 그러니 자신의 허락 없이는 누구도 출입이 불가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 찾아왔다.
‘그것도 신풍수사의 안내를 받았다면…….’
그는 구겨진 표정과 달리 부드러운 어조로 말을 건넸다.
“안내하시게.”
곧장 문이 열렸다.
고검을 품에 안은 중년의 여인이다.
반백의 머리카락은 곱게 틀어 올렸고, 옷차림 또한 삿되지 않았다. 마치 규중의 귀인처럼 고아함이 느껴졌다. 반면 짙게 뻗은 검미와 주름을 밀어낼 만큼 동그란 눈매에는 고집스러움이 가득했다.
공문십철은 서로를 보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외형만 봐서는 누군지 알지 못하는 듯했다.
반면 신공부주는 눈을 가늘게 떴다.
‘저 노괴가 왜 이런 곳에…….’
사십 대의 미부로 보이는 여인은 실제로 오십을 넘긴지 오래였다. 여인의 사문에서 내려오는 비전의 심법 탓이다. 또한 여인이 품고 있는 고검(古劍)은 은자 수만 냥을 줘야 구할 수 있는 귀물일 터였다.
여인은 신공부주의 시선이 위아래를 훑어보자 피식 웃으며 말했다.
“나 천술녀요.”
이름을 밝히는 순간 공문십철의 반응은 격렬해졌다.
“검후!”
“천응검후가 왜 이곳에?”
공손한 자, 경계하는 자, 호기심을 보이는 자.
반응도 제각각이다.
신공부주는 찰나의 순간 노국장주의 표정을 살폈다.
그 또한 검후의 갑작스런 등장에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있었다.
‘꼴을 보아하니 오는 걸 몰랐군.’
그렇다면 검후가 저간의 사정을 명확하게 파악하고 있을 리 만무했다.
신공부주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가장 상대하기 쉬운 존재는 약자가 아니라 아무 것도 모르는 자가 아니던가.
“신공부주의 이름으로 검후의 내방을 환영합니다.”
신공부주가 가볍게 목례를 하자, 검후는 미간을 좁혔다. 일견하기에도 강호의 명숙이 아니라 불청객을 대하는 듯했다.
‘검후의 이름값이 땅에 떨어졌다고는 하나…….’
이건 서운함을 넘어 불쾌할 지경이다.
대대로 검후는 강호를 지키기 위해 분골쇄신한 상징적인 존재가 아니던가.
전전대 검후만 해도 신마대전을 막아낸 정천칠공의 한 사람으로 명성을 떨쳤다. 구파일방의 주인들이라고 해도 검후를 쉬이 여기지 못했다.
“신공부에 큰 변화가 있다고 하여 허락도 없이 찾아왔소.”
검후의 말투에는 서늘함이 배여 있었다.
하나 신공부주는 유들유들한 말투로 대꾸했다.
“이미 결정이 났습니다. 검후께서 참관과 공증을 맡아주신다면 참으로 감사할 따름입니다.”
검후는 옆으로 한 걸음 비켜섰다.
그걸로 신공부주의 인사를 피했다.
“나는 구경하러 온 것이 아니외다.”
“설마 신공부의 행사에 개입을 하시려는 겁니까?”
“신공부가 개파할 때 당대의 검후께서 동석하셨소. 그리고 강호에 신공부의 존재를 증명하셨지요. 한데 네게 자격이 없겠소?”
신공부주는 입꼬리를 올렸다.
그는 검후가 있는 곳을 향해 서책을 밀며 말했다.
“없습니다.”
“뭐라?”
신공부주의 입가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그는 어깨를 펴고 검후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없다고 했습니다. 참관과 공증은 제가 배려하여 맡기는 것입니다. 당신이 마땅히 얻어야 할 자격이 아니란 뜻이지요.”
검후의 미간이 주름이 잡혔다.
“신공부주!”
하나 신공부주는 그런 검후를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다.
“당신이 할 것도 없고, 할 수 있는 것도 없소. 이곳의 주인인 내 말을 듣지 않겠다면 떠나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