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 몽산의 은거괴인. (5)
*
철투(鐵鬪)는 신세계였다.
상대를 골라가며 원 없이 싸울 수 있다.
고작 포인트 몇 점으로 말이다.
설령 패배하더라도 손해가 없다시피 했다.
고작 포인트 몇 점으로 말이다.
심지어 철투에서 승리를 할 때마다 무공에 대한 숙련도가 상승했고, 경험치가 들어왔다. 그러다가 연승을 하기라도 하면 포인트를 돌려주기까지 했다.
‘철투는 내 꺼 중에 최고!’
이러니 빠져들지 않을 수가 있겠나.
남천휘는 철투를 시작한 이후 VIP 포인트를 아끼지 않았다. 100레벨 이상의 고수를 상대하기 위해 한판 당 300 포인트를 아낌없이 사용했다.
한데 100레벨 이상은 가상의 상대가 무작위로 나타났다. 그러다보니 칼에 베이고, 창에 찔리고, 별의별 상처를 달고 살아야 했다.
처음에는 승리보다 패배가 많았다.
결국 남천휘는 평범이 아닌 쉬움 단계로 선택했다.
연승을 하면 돈, 아니 포인트를 내지 않아도 되는 구조가 아니던가. 그렇게 100레벨 이하의 적을 상대로 164연승에 성공했다.
100포인트를 내고 164포인트를 얻은 셈이다.
이렇게 한 달 내내 연승을 쌓으면 VIP 포인트를 어마어마하게 모을 수 있을 터였다.
하나 원대한 계획은 몇 걸음 떼기도 전에 포기를 해야 했다. 어느 순간부터 아예 경험치가 오르지 않았고, 숙련도는 오히려 떨어졌다. 이유를 물어보니 너무 약한 적을 골랐기에 쉽게 승리를 했단다. 그로 인해 초식이 무뎌졌다는 것이 원인이었다.
결국 남천휘는 어쩔 수 없이 평범 단계에 다시 도전했다.
한 판에 300 포인트를 내야 철투를 할 수 있지 않은가. 그렇기에 무작위로 적수가 골라질 때마다 시스템을 만든 하늘의 이름 모를 신에게 기원했다.
제발 적당한 적을 만나게 해 달라고.
오랜만에 기도가 통했다.
남천휘는 운 좋게 100레벨 초반의 적을 연이어 만났다. 9연승을 했을 때에는 이미 온 몸의 피가 들끓는 듯했다. 어차피 철투 중에 소모된 체력은 승패가 결정되는 순간 회복되지 않던가.
그렇기에 쉬지 않고 열 번째 적을 맞이했다.
“질! 풍! 난! 무!”
고기도 먹어본 놈이 맛을 안다던가?
어찌됐든 남천휘는 신들린 사람처럼 스킬을 남발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스킬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철투에 푹 빠진 셈이다.
촤악!
둔중한 울림과 함께 광풍이 좌우로 길을 열 듯 갈라졌다. 그 사이로 뻗어나간 도기가 교차하며 열 번째 상대의 전신을 헤집었다.
“으아아악!”
삼류 악당의 최후를 방불케 할 만큼 꼴사나운 모습으로 적이 사라졌다.
저래뵈도 108레벨의 고수가 아닌가.
남천휘가 하늘을 향해 손가락을 뻗는 승리의 자세를 취했다. 동시에 삼 회전 종료를 알리는 종소리와 승리를 알리는 문구가 눈앞에 떠올랐다.
◎ 레벨이 올랐습니다.
남천휘는 입꼬리를 올렸다.
삼일 째 레벨 상승이 없었기에 내심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하나 그가 환하게 웃는 까닭은 따로 있었다.
재이의 알림은 없었지만, 질풍난무에도 등급이 존재했다. 스킬을 많이 사용할수록 등급이 상승했고, 그럴 때마다 스킬의 소모 값이 줄었다.
지금까지 등급은 4번 올랐다.
한 번 오를 때마다 내력의 소모가 10씩 줄었다.
그렇기에 질풍난무를 펼치는 소모 값은 260으로 하락한 상태였다. 이대로 무균실 속에서 계속 수련을 한다면 질풍난무와 궁신탄영을 연계해도 부담이 줄어들 것이다.
“어찌됐든 질풍난무…….”
대수롭지 않게 내뱉은 한 마디의 여파가 즉각 나타났다.
촤아악!
남천휘는 자신의 몸이 제멋대로 움직이는 불쾌한 경험과 함께 예(乂)자 형태로 튕겨나가는 도기를 물끄러미 바라봐야만 했다.
“빌어먹을! 꺼놓는다는 게 또 실수했네.”
무슨 주문도 아닌 것이 말만 하면 발동이 되냔 말이다. 이러다 모산파의 술사가 동생으로 삼아달라며 쫓아다닐 판이다.
남천휘는 상태창을 켜고 두 스킬을 눌렀다.
그제야 스킬 명이 빛을 잃고 잿빛으로 변했다.
“그래, 인정할 건 인정한다. 위력은 끝장나니까 소모 값만 최대한 줄여보자.”
뜬금없이 내력을 소비했기 때문일까.
목적했던 10 연승에 성공했기 때문일까.
아랫배가 허전했다.
“승리의 연회를 열자!”
중얼거림에 창해일성소의 박자를 붙이니 이 또한 흥겨운 가락이 되었다.
“넓은 바다에 웃음을 실어 보자. 얼쑤!”
그는 콧노래를 부르며 공터 외곡으로 발길을 돌렸다. 잡초가 무성했던 외곽은 휴양지를 방불케 하는 물품으로 가득했다.
일단 가장 먼저 정자가 눈에 들어왔다.
수십 명이 달라붙어도 며칠은 걸릴 법한 공사를 마무리한 시간은 불과 일각 정도였다.
방법은 간단했다.
‘집이 부자라서 다행이야.’
곡부남가는 메인 퀘스트의 영향인지 하루가 다르게 성세를 자랑했다. 검대를 만든다는 소문에 온갖 낭인들이 모였고, 사방에서 거래를 트자는 상단과 표국의 주인들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정문 앞을 서성였다.
그래서였을까.
생필품을 챙기러 창고에 갔다가 정자 지붕을 발견했다.
비유나 과장이 아니라 진짜 지붕이었다.
후원에 새 정자를 놓으려는 듯 멀쩡한 지붕이 창고 앞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닌가. 안에 들어갔더니 기둥으로 삼을 법한 나무가 천장까지 쌓여 있더라.
그래서 죄책감 없이 슬쩍 했다.
남천휘는 자신이 만든 정자에 들어선 후 손가락을 튕겼다. 자신의 처소에 놓여 있던 팔선탁이 등장했다. 인벤토리에서 토끼 구이와 토끼 탕을 꺼내는 순간 추위에 저항하듯 뜨거운 김이 솟구쳤다.
방금 만든 듯한 요리에 절로 군침이 돌았다.
‘만들자마자 넣었으니 틀린 말은 아니지.’
남천휘는 의자까지 소환한 후 보료에 몸을 묻었다.
즉묵노주를 꺼낸 후 반주(飯酒)로 삼았다.
“크하! 이게 바로 신선놀음이지.”
남천휘가 비스듬히 눕는 순간 정면으로 대두상이 보였다. 그는 술잔을 눈썹 높이까지 들어 올린 후 빙긋 웃으며 말했다.
“당신의 눈동자에 삼 배!”
술 잔을 꺾는 순간 익숙한 주향이 입안을 가득 채웠다. 장소와 시간, 분위기가 어우러지는 순간 즉묵노주의 맛은 가히 천상의 미주(美酒)를 방불케 했다.
아! 이래서 막 총관이 술을 마실 때 온갖 핑계를 붙이는 게로구나.
누군가에게 미안했기 때문이 아닌 게다.
그저 핑계 있는 술이 더 맛있을 뿐이다.
“크하! 좋다.”
한데 갑자기 지도의 한쪽 구석이 반짝였다.
지도를 확장하는 순간 노국장에 있는 천수련의 붉은 점이 반짝이는 것이 아닌가.
“쯧쯧, 이 놈들아.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는 게 아니야. 물론 나는 올라갈 수 있지만, 올라가지 않을 거란다. 이게 가진 자의 여유라고나 할까? 잡은 물고기에는 물을 주지 않는 게야!”
벌써 취했나?
남천휘는 천수련의 붉은 점이 원상태로 돌아오는 걸 확인한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술에 취했으면 달을 쥐려던 시성 정도는 되어줘야지!”
취한 게 맞다.
호기로움이 들불처럼 흉중을 가득 채웠다.
남천휘는 스킬을 활성화 한 후 철투에 진입했다.
“평범으로 한 놈 더 붙어보자! 장소는 현실감이 있게 대두동으로!”
새롭게 추가된 대전 장소를 외치는 순간 재이의 알림이 들려왔다.
◎ VIP 포인트 300점이 입금되었습니다.
- 100~200 레벨인 가상의 적이 등장합니다.
잠시 후 가상의 적이 등장했고, 십여 합을 넘기기도 전에 두부처럼 잘린 채 흩어졌다.
“질풍난무!”
사방이 절벽인 탓에 남천휘의 일갈은 멀리 퍼지지 않고, 분지 내를 맴돌았다. 그렇게 질풍난무와 궁신탄영이라는 외침이 열 번 이상 뒤섞였을 때였다.
“우에에엑!”
*
남천휘는 시간의 흐름을 잊은 채 수련에 매진했다. 어차피 대두동에는 늘 안개가 자욱했고, 사방이 절벽인 지형으로 인해 햇빛이 들지 않았다.
외부의 방해 없이 집중할 수 있었다.
그야말로 거대한 폐관 수련장이나 마찬가지였다.
남천휘는 자신만의 공간에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날뛰었다.
“질풍난무! 궁신탄영!”
자수정을 얻고, VIP 포인트를 모았다.
그걸 활용해 쉼 없이 철투를 실행했다.
군사가 열심히 모아놓은 성소 포인트를 미안함 없이 써재꼈다. 경험치 비약의 유무를 가리지 않고, 무균실을 하루 종일 운영했다.
마치 영산의 한 가운에서 영기를 독차지한 기연처럼 내공의 축적은 경악할 만큼 빨랐다.
남천휘는 철투를 끝내자마자 생각에 잠겼다.
방금 전의 적수는 창을 사용하는 고수로 115 레벨이다. 하나 낮은 레벨이라고 무시할 수 없었다. 생각보다 상대하기가 까다로웠다.
장병기를 활용해 멀리서 찌르기와 베기를 선보였다.
그로 인해 몇 개의 생채기를 얻었고, 생명력은 절반이나 깎이지 않았던가.
‘만약 아까 내가 맞받아치지 않고 흘려냈다면?’
애초에 스킬은 염두에 두지 않았다.
분명 궁신탄영을 활용하여 접근했다면 단칼에 베어버릴 수도 있었으리라. 하나 그리 쉽게 이겼다면 지금처럼 고민거리가 생기지 않았을 터였다. 무엇보다 낮은 레벨의 적을 이겼음에도 경험치가 쏠쏠했다.
남천휘는 몇 번이나 대전을 복기한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창수를 상대하기 위한 몇 가지 복안을 떠올렸다.
‘다시 만나면 더 빠르고, 쉽게 이길 수 있어!’
남천휘의 머릿속에는 수많은 복안이 존재했다.
검수, 도수, 창수를 비롯해 기형병기를 사용하는 적에 대한 복안들이 수백에 이르렀다.
어쩌면 철투의 효용은 수많은 실전을 통해 백전노장으로 만들어주는 것이 아닐까 싶다.
“철투!”
안개가 뭉쳐들고 가상의 적이 생성됐다.
쉬운 단계와 달리 평범 단계는 아직 대전 상대의 선택이 불가능했다. 누적 승수가 300을 넘기면 그 때부터는 가능하단다.
아직은 먼 얘기였다.
그렇기에 가상의 적을 용봉쟁투의 백인대에서 맞이했다.
‘역시 비무는 백인대에서 하는 게 제일 실감나.’
남천휘는 그러던 중 입꼬리를 올렸다.
그리고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상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오랜만이네!”
익숙한 적수의 정체는 바로 곤륜산인이다.
이제는 곤륜산인의 레벨을 확인할 수 있었다.
레벨 119, 섬예검귀 갈벽.
이것이 곤륜산인의 정체였다.
그리고 남천휘는 지금껏 몇 번이나 곤륜산인을 상대로 승리를 거뒀다. 이제는 스킬을 사용할 필요도 없었다. 실제로 놈과 겨뤄봤기에 쾌검에 대한 대비가 손쉬웠다. 아니나다를까 곤륜산인은 십여 합을 넘기기도 전에 목이 베인 채 사라졌다.
쉬어가는 판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승일패로 끝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어찌됐든 자신의 손에 죽은 악적에게 다치거나 죽는 것만큼 기분 나쁜 일도 없으리라.
“허, 오늘 무슨 날이야?”
남천휘는 자동으로 선택된 다음 적수를 보며 침음을 흘렸다. 놀랍게도 백인대에 오르는 적은 한 명이 아니었다. 각기 우수와 좌수에 검을 한 자루씩 쥔 두 명이 동시에 올라섰다.
“황도쌍노라.”
레벨은 각기 137과 139였다.
남천휘는 황도쌍노보다 강한 적을 이겨봤음에도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150짜리 한 명보다 저 둘이 강할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게다가 그가 곡부남가에서 황도쌍노를 쓰러트릴 수 있었던 건 천수련의 도움과 저들의 방심이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후우.”
하나 이제 천수련은 없다.
그리고 철투에 등장하는 적은 절대로 방심하거나, 상대를 얕보지 않았다.
전력으로 부딪쳐야 할 상대였다.
남천휘는 히죽 웃었다.
“나 진짜 많이 컸네.”
스릉-
천하도와 제일도가 교차하며 황도쌍노를 겨눴다.
“너희들이 별로 두렵지 않네.”
동시에 궁신탄영을 읊조리는 순간 그의 신형이 빛살보다 빠르게 청석을 박찼다.
파팟!
*
남천휘는 공터에 주저앉은 채 숨을 몰아쉬었다.
철투가 끝난 순간 소모됐던 체력이 모두 회복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머릿속이 복잡했고, 호흡은 거칠었다.
그만큼 황도쌍노와의 대결은 많은 것을 남겼다.
단순히 많은 적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출중한 고수의 진짜 합격술이 어느 정도로 위협적인지를 몸소 체험했다.
또한 저들이 자하림에서 훔쳤다는 환혼검법의 위력은 예전과 달랐다. 방심하지 않고 전력으로 펼친 환혼검은 모골이 송연할 만큼 남천휘를 몰아붙였다.
딱-
남천휘가 손가락을 튕기는 순간 낡은 책자가 나타났다. 황도쌍노는 악업의 수치가 상당했기에 이름과 레벨이 피처럼 붉었다. 그렇기에 그들을 쓰러트리는 순간 중요 물품이 저절로 수집됐다.
그 중 하나가 낡은 책자였다.
남천휘는 책자의 겉면에 적힌 흐릿한 표제를 읽었다.
“환마소혼겁법.”
이것이야 말로 황도쌍노가 자하림에서 훔친 환혼검의 진짜 명칭일 터였다. 하나 마(魔)라는 글자가 주는 묘한 음습함에 지금껏 인벤토리에 처박아 두지 않았던가. 한데 진짜 환혼검을 상대하고 보니 호기심이 잔뜩 일어났다.
그가 축복받은 확인서를 통해 비급을 확인하려던 순간이었다.
지도의 붉은 점은 점멸을 계속했다.
“또 누가 껄떡대는 건가?”
책만 파던 유생들에게 천수련 정도의 미색이라면 아주 천상의 선녀처럼 여겨질 것이다.
남천휘는 마뜩찮은 표정으로 혀를 찼다.
“쯧쯧, 그 시간에 공부를 해라.”
한데 붉은 점이 반짝이는 속도는 점점 빨라졌다.
그러던 중 조금씩 색이 변하기 시작했다.
남천휘는 미간을 좁혔다.
“야! 이거 뭐야?”
◎ 미연시 2호가 생명의 위협을 느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