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 균형 붕괴.
61, 균형 붕괴.
정신적 지주(支柱).
존재만으로도 안심하게 되고, 의지하게 되는 존재를 가리킨다. 곡부남가의 가솔들에게 있어 안자영은 그런 존재였다.
“마님.”
그러니 소혜가 안자영의 품에 안긴 채 울먹이는 것도 놀랄 일은 아니다.
천수련은 그 모습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개똥이와 개구리의 상하 관계를 고심하던 중 묘한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소혜가 자신을 힐끔거리며 입술을 달싹였다.
‘무슨 말을 하는 거지?’
하나 독순술을 익히지 않은 이상 대화를 엿듣기란 불가능했다. 그 때 남천휘가 이마를 긁적이며 중얼거렸다.
“아, 저 녀석은 왜 저런 말을 하는 거야.”
천수련도 덩달아 인상을 썼다.
자신을 챙겨주던 남천휘가 곤란해 할 정도라면 무슨 말일지 불을 보듯 뻔했다.
‘험담을 하는 구나!’
분명 소혜, 아니 눈 큰 개구리를 닮은 저 아이가 안자영에게 고자질을 하는 것이리라.
천수련은 입술을 삐죽였다.
알 수 없는 배신감으로 인해 가슴이 뻥 뚫린 것처럼 허전했다.
‘귀엽다고 해줬는데. 치사하게!’
소혜와의 첫 만남에서 나눴던 대화는 거짓이었을까.
그녀는 또다시 깊은 고민에 빠졌다.
‘그래도 귀엽기는 해. 진짜 개구리 같기도 하고. 그럼 나쁜 개구리잖아. 두꺼비 같은!’
하나 그녀는 인식하지 못했다.
지금껏 고민과 담을 쌓은 명쾌한 삶을 살아왔다.
그런 그녀가 요즘 들어 틈만 나면 고민하고, 잡념에 휘둘리고 있음을 말이다.
그 원인이 남천휘임은 더더욱 눈치 채지 못했다.
짝!
안자영이 박수를 치며 이목을 끌었다.
천수련은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눈을 깜빡였다.
‘내가 요즘 미쳤나봐. 넋이 나간 사람 같잖아.’
다행히 안자영은 천수련이 아닌 가솔들을 향해 말했다.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거야?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떠오르잖아. 내일을 위해 어서 움직여!”
그녀의 외침에 가솔들은 일사불란하게 자신의 자리를 찾아 떠났다. 그들은 마치 혈사가 있었던 건 기억에서 지운 것처럼 여유로웠다.
천수련은 호쾌한 안자영을 보며 내심 감탄을 금치 못했다.
‘여장부시네.’
그도 그럴 것이 무공은 남천휘를 따르지 못하고, 가문을 관리하는 건 남천홍이 나았다. 게다가 상재는 막 총관을 따르지 못하고, 심지어 표국을 운영했던 왕망보다 수완이 좋은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가 등장하는 순간 가솔들은 경악할 만큼 빠르게 평소의 모습을 되찾았다.
그녀는 만인의 어머니였다.
천수련은 왠지 모를 서운함에 쓴웃음을 지었다.
조실부모하고, 목석같은 스승이 전부인 자신에게는 허락되지 않을 존재이리라.
“천 소저.”
안자영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네? 네!”
천수련은 어려운 사람을 만난 것처럼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괜찮아요?”
“아, 저는 별로 한 것도 없는 걸요. 저는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안자영은 차가운 천수련의 손을 잡아줬다.
“그렇게 긴장하지 말아요. 곡부남가에 발을 들인 이상 모두가 가족이에요. 내 집에 왔다는 생각으로 편히 있어요.”
천수련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안자영의 따뜻한 한 마디에 뭐라 형용할 수 없는 묘한 감정이 휘몰아쳤다.
그리고 맞잡은 손은 따뜻했다.
“그럼 대화 좀 할까요?”
*
솨아아아아-
폐부를 스쳐간 바람이 하얀 입김으로 사라졌다.
겨울은 겨울이다.
‘춥네.’
뭔가 삶이 반복되는 기분이다.
조금만 기억을 되돌려보니 조금 전 미연시가 강제로 해제됐을 때에도 지금처럼 추웠던 듯싶다.
남천휘는 곡부남가와 들판 사이에서 방황했다.
‘저쪽에 가기도 그렇고.’
적들이 쓰러져있던 들판에는 노국장의 무인들과 관부의 사졸들이 잔뜩 모여 있었다. 산 자와 죽은 자를 구분하느라 부산했다.
‘그냥 들어가는 것도 좀 그렇고.’
남천휘는 곡부남가를 돌아봤다.
시비와 하인은 모두 흩어졌고, 안자영과 천수련은 둘만의 시간을 가졌다. 남천홍은 하인들을 독려하느라 바빴고, 막 총관은 이제야 마음 편히 술을 마실 수 있겠다며 백주검과 자취를 감췄다.
서산노옹마저 돌아갔으니 이제 남은 건 자신뿐이다.
남천휘는 눈을 끔뻑이다가 중얼거렸다.
“여러분! 안심하세요. 곡부남가는 안전합니다.”
환호성 대신 어디선가 불어온 찬바람이 다시 한 번 폐부를 휘젓는다.
“춥다. 들어가야겠어.”
그 때 시야 상단에 위치한 지도가 반짝였다.
수십 개의 점이 반짝거리며 접근하는 것이 아닌가.
‘미리 볼 수 있어서 좋기는 한데…….’
백주대낮에 특기 유지를 활성화하면 수백 개의 점이 뒤섞여서 적아를 구분하는 것이 불가능할 듯했다.
‘혹시 가능할까?’
◎ 개방형 성소의 경우 특정 직업군과 특성 인물을 분류하지 않은 이상 낮에는 확인이 불가능합니다.
그럴 것 같았다.
만약 적아의 구분이 가능하다면 특기 ‘유지’는 S급이 되어야 마땅했다. 그나마 대두동이나 대화동처럼 폐쇄형 성소는 적아의 구분이 가능하단다.
남천휘는 곡부남가를 향해 접근하는 무리를 느긋하게 기다렸다. 관도를 따라 질주하는 것으로 보아 조상과 호연척의 무리가 아닐까 싶었다.
“삼공자!”
조상은 멋진 자세로 말에서 뛰어내렸다.
진중한 표정으로 포권을 하니 무인의 기개가 저절로 뻗어나갔다. 하나 머리 위의 레벨은 기개에 미치지 못했다.
엄청난 성장을 이뤘음에도 50 전후였다.
조상과 함께 나타난 호연척은 구르듯이 말에서 내려왔다. 그러더니 한쪽 무릎을 꿇고 비통한 어조로 말을 건넸다.
“삼공자, 이 일을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남천휘는 호연척의 팔을 잡아 일으켰다.
“왕망은 믿을 수 없는 자들을 모조리 표국 밖으로 내보냈지요. 총표두와 저들입니다. 저는 오히려 왕망으로 인해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을 구분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걸 전화위복이라 한다지요?”
눈으로 충성심을 확인했다고 할 수 없었기에 대충 얼버무렸다.
“하나 조 대주를 보내 함께 움직이라고 명하셨소이다. 그 말은 곧 이미 나를 믿어주셨다는 뜻이 아니겠소이까? 부끄럽고, 고맙구려. 표국의 일을 정리한 후 스스로 자리를 내어놓겠소.”
호연척은 집안 조카처럼 대하던 남천휘에게 존대를 했다. 왕망의 곁에 있었음에도 배신을 눈치 채지 못했다는 자책감 때문이리라.
분명 이별을 준비하는 과정이겠지.
남천휘는 고개를 내저었다.
“총표두. 가문의 일을 저 혼자 결정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소가주께서 집안의 대소사를 맡겼으니 후임을 천거할 자격쯤은 있을 겁니다. 북풍표국을 맡길 테니 괜한 말씀은 하지 마십시오.”
호연척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사내의 뜨거운 눈빛은 사양이지만, 피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는 감사를 표하기보다 에둘러서 칭찬의 한 마디를 건넸다.
“가주께서 삼공자를 보신다면 깜짝 놀라실 게요. 정말 큰 사람이 되셨구려.”
“별 말씀을요.”
남천휘는 호연척과의 짧은 만남을 뒤로 한 채 조상을 응시했다.
조상은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왕망은 죽었습니다.”
남천휘는 미간을 좁혔다.
그리고 무리 배후에 고개를 푹 숙인 채 멀뚱히 서있는 장년인을 향해 다가갔다.
“왕 대협! 와주셨군요.”
그러자 장년인이 흠칫 몸을 떨더니 고개를 들었다.
그는 용봉쟁투에서 헤어졌던 왕대만이다.
남천휘가 조상만 외부로 내보냈던 이유는 왕대만을 믿었기 때문이다. 왕대만은 성격에 문제가 있을지언정 왕망을 상대하기에는 차고 넘치는 무위를 지녔다.
“하하, 남 소협. 아니 이제 귀협이라고 불러야 하나?”
그는 남천휘가 다가올수록 몸을 움츠렸다.
생각 같아서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치고 싶었으리라. 그러나 타인의 시선과 평가를 목숨보다 중히 여기는 자가 아니던가. 그러니 똥마려운 강아지처럼 앓는 소리만 낼 뿐이다.
남천휘는 왕대만의 곁에 다가서는 순간 미소를 지웠다.
“야! 내가 친구야? 형님한테 말이 짧다.”
“크흠! 저들도 있는데 내가, 어, 그쪽, 아니, 남 소협, 크흠! 형님한테 형님이라 할 수는 없잖소.”
“좋아, 그건 그렇다고 치자.”
왕대만으로서는 왜 이걸 그렇다고 쳐야 하는지 납득할 수 없었다. 하나 강호는 강자존이요, 남아일언중천금이 아닌가. 한 번 웃어른으로 모시겠다고 약조를 했으니 돌이킬 수 없는 노릇이다.
‘무엇보다 저 미친놈이 언제 어디서 오줌 얘기를 꺼낼지도 모르고…….’
왕대만은 며칠 전 전해 받은 남천휘의 쪽지를 떠올리며 치를 떨었다.
- 똥쟁이, 성공적, 빨리 와.
‘나는 똥을 싸지 않았어!’
하나 왕대만은 속내와 달리 공손한 표정을 유지했다. 미친놈과 함께 할 때에는 무조건 비위를 맞추는 편이 살아남는 지름길일 터였다.
“설마 왕망보다 약했어?”
왕대만은 하소연을 했다.
“아니, 우리가 가자마자 일이 잘못된 걸 알았나 보오. 대뜸 제 목을 찌르며 자결을 하는데 내가 어찌 할 수 있겠소?”
남천휘는 침음을 내뱉었다.
왕망은 죽어 마땅했다.
하나 오랜 세월 아버지와 의형제로 지내온 자가 아니던가. 그렇기에 처결만은 아버지에게 맡기고자 했다. 어차피 위협이 될 만큼 강한 자도 아니었기에 가능한 선택이었다.
‘쯧! 그러게 벌 만큼 벌고, 먹을 만큼 먹으며 만족하고 사시지 그랬소.’
남천휘는 이내 왕망에 대한 생각을 훌훌 털어냈다.
조금 전 안자영의 행동력을 지켜보며 많은 것을 깨우치지 않았던가.
지금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이 우선이다.
남천휘는 호연척을 향해 말했다.
“총표두는 힘들겠지만, 지금 당장 표국으로 가주세요. 표국의 장부를 확보하고, 자산을 파악하세요. 조 대주도 함께 가서 힘을 보태주세요.”
조상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남천휘는 그런 조상을 보며 말했다.
“돌아오시면 술과 고기를 세 배로!”
조상은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더니 북풍대원들을 향해 외쳤다.
“고생한 만큼 보상은 달콤한 법이다! 가자!”
북풍대와 표사들은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왕대만은 헛기침을 하며 뒷걸음질 쳤다.
“크흠, 볼 일이 끝났으니 나도 가보겠소.”
“어디로 가게?”
남천휘의 물음에 왕대만은 우물쭈물했다.
행선지를 말하고 싶지 않은 기색이 여실히 느껴졌다.
“아무래도 고향으로 돌아가야 할 듯한데…….”
타탓!
남천휘가 오행군림보까지 쓰며 따라붙었다.
그는 왕대만의 어깨에 팔을 두른 채 유혹을 하듯 읊조렸다.
“그렇게 긴장하지 마. 곡부남가에 발을 들인 이상 모두가 가족이니까. 내 집에 왔다는 생각으로 편히 있어. 고향이 별거야? 정 붙이면 고향이지.”
왕대만은 똥 씹은 표정으로 헛웃음을 지었다.
하나 남천휘의 손을 뿌리치지 못했다.
뿌리칠 힘도 없었고.
“아! 내원에 서산노옹과 백주검께서 와 계셔. 네 배분이 낮지?”
왕대만은 침묵했다.
‘그들보다는 낮지만, 너보다는 훨씬 높아!’
하나 그가 할 수 있는 건 남천휘의 말에 따라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전부였다.
“네가 막내니까 수발 좀 들어라. 여기에 정 붙이고 사실 수 있게 비위도 좀 맞춰주고. 알았지?”
“아니, 내가 왜?”
남천휘는 피식 웃으며 왕대만의 손을 잡아끌었다.
“그럼 놀고먹으려 했어? 아무리 가족이라고 해도 밥값은 해야지.”
왕대만은 넋이 나간 사람처럼 질질 끌려서 곡부남가에 들어섰다. 맞잡은 손에서 느껴지는 한기가 지옥에 온 것을 환영하는 듯했다.
‘차라리 똥을 쌀까?’
유명해질지언정 도망칠 수는 있지 않은가.
그가 고민하는 사이 곡부남가의 정문이 음산한 소리와 함께 닫혔다.
쾅!
*
남천휘는 왕대만을 명숙들의 술자리에 던져놓고 처소로 향했다. 어찌됐든 이번 혈사를 통해 꽤 많은 변화가 있지 않았던가.
‘아무리 생각해도 아이템 정리할 때가 제일 행복한 것 같아.’
콧노래를 부르며 인벤토리에 새로 등록된 아이템을 살피던 중이다. 처소 앞에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던 소혜가 안자영의 호출이라며 잡아끌었다.
“아.”
남천휘는 안자영의 처소에 들어서자마자 표정을 굳혔다. 안자영과 천수련이 진지한 표정으로 그를 맞이했다.
‘이 분위기는 뭐지?’
가문의 일이라면 남천홍이나 막 총관이 동석했을 터였다.
“어머님, 급한 일이니 시간을 끌면 안 될 것 같아요.”
남천휘는 천수련의 한 마디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언제 봤다고 어머님이야!’
불현 듯 불길한 예감이 뇌리를 스쳐갔다.
검후의 제자이자, 용봉삼협 중 한 명인 천수련이라면 며느릿감으로 차고 넘쳤다.
‘호칭까지 저런 걸 보면…….’
안자영은 멀뚱히 서 있는 남천휘에게 말했다.
“공후탁이 우리를 노리고 있어.”
남천휘는 예상치 못한 말과 이름에 눈을 끔뻑였다.
“그게 누군가요?”
천수련이 대신 대꾸했다.
“신공부주요.”
남천휘가 영문 모를 소리에 반문하려는 순간 재이가 반 박자 빨리 치고 들어왔다.
띠링-
◎ 강호행의 마지막 퀘스트가 발동합니다.
어.
‘나 방금 메인 퀘스트 깼잖아.’
한데 퀘스트가 마지막이라는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신공부주 공후탁이 어찌됐든 특급강호인승급체계보다 중요할 리가 없지 않은가.
재이는 남천휘의 의문을 아랑곳하지 않고 퀘스트를 시야에 띄웠다.
《1-6, 중간보스》
- 신공부주 공후탁을 척살하라.
이보세요.
갑자기 난이도가 너무 뛰는 거 아닙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