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 삼협끼리 그러는 거 아니야. (2)
안회(顔回)는 공자가 가장 신임하는 제자였다.
공문십철의 한 명으로 은군자적 성향을 보였기에 도가에서도 이름이 높은 현인이었다. 후손들은 노나라 출신인 안회를 기려 노국장(魯國莊)을 세웠고, 지금껏 신공부의 한 축으로 명맥을 이어왔다.
그 후손이 바로 안자영(顔慈營)이다.
‘어머니가 갑자기 왜?’
남천휘는 어머니의 갑작스런 등장에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던 중 인명록에서 확인한 어머니의 정보가 뇌리를 스쳐 갔다.
그녀는 남천휘를 기준으로 72의 무력 수치를 지녔다. 곡부남가 최고의 무인이라 평가받던 조상보다 4가 높았다.
한 마디로 절정의 고수였다.
그러니 왕망의 배신을 접하고, 가문을 구원하기 위해 찾아온 것이 아닐까 추측해봤다.
“이게 도대체 다 뭐니?”
안자영은 눈살을 찌푸린 채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그녀는 아들 셋을 키웠음에도 여전히 고운 외모를 자랑했다. 한 폭의 그림처럼 화사한 눈매가 좁히는 순간 남천휘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
마치 어머니가 외출한 사이 집을 어지럽힌 철부지가 된 듯한 기분이다.
“자세히 얘기하자면…….”
남천휘는 왕망의 배신을 알렸다.
안자영은 수백 명의 외부 세력을 끌어들였다는 말에 분을 참지 못했다.
“맙소사! 내가 그 인간에게 가져다준 찬거리와 보약이 얼마인데…….”
곡부남가의 가모가 가솔과 양민을 자식처럼 챙긴다는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니 가주의 의형인 왕망을 지극히 챙긴 것은 당연했다.
‘그래도 찬거리까지 따지는 건 너무 현실적인 걸.’
그녀의 소박한 분노가 연이었다.
“그래서 그 배은망덕한 인간은 어디에 있더냐?”
남천휘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조 대주가 잡으러 갔어요.”
안자영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조상만으로는 힘들 텐데.”
그녀는 왕망과 비슷한 무위를 지녔기에 우려를 드러냈다.
“표국의 총표두는 배신하지 않았어요. 그와 함께 왕망을 포위할 겁니다. 왕망을 잡을 사람은 따로 있고요.”
안자영은 남천휘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사별삼일이면 괄목상대라고 했던가.
몇 달 사이에 막내아들이 몰라보게 달라졌다.
‘키도 큰 것 같고.’
저대로 커서 뭐가 될까 싶었던 아들이 흑도 세력을 소탕하고, 별호를 얻었다는 소문에 얼마나 기뻐했던가. 그러면서도 천둥벌거숭이처럼 날뛰지는 않을까 애써 마음을 졸여야 했다.
한데 오랜만에 마주한 아들은 너무 커버렸다.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의젓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운군의 맑은 눈빛을 빼닮았다.
무위를 자랑하지 않고, 명성에 도취되지 않을 눈빛만으로도 아들에 대한 걱정을 상당 부분 내려놓을 수 있었다.
“우리 아들, 멋있어졌네.”
남천휘는 어색한 미소를 흘렸다.
칭찬도 자주 들어야 익숙한 법이다.
그렇기에 남천휘는 작금의 상황이 너무나 어색하고, 부담스러웠다.
그 때 말발굽소리가 지축을 울렸다.
남천휘는 황급히 시야의 상단의 지도를 확인했다.
십여 개의 붉은 점이 곡부남가의 영역에 들어섰다.
“적이 또 있었나?”
“우리 편이야. 노국장에서부터 함께 왔단다.”
안자영의 말처럼 잠시 후 등장한 십여 명의 무인들은 모두 노국장의 잿빛 무복을 걸쳤다.
“아가씨, 이게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전쟁이라도 벌어졌나요?”
남천휘는 노국장의 무인들을 슬쩍 쳐다봤다.
저들의 레벨은 50 전후였고, 대부분 희거나 파란 색을 띄고 있었다. 신공부의 공문십철 중에서도 하위 서열인 노국장의 무인만으로도 곡부남가를 도모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럼 신공부의 상위 서열은 어떻다는 거야?’
돌이켜 보면 천위장의 장주인 천위검호만 해도 200레벨 대가 아니던가. 그러니 천위장에 100레벨의 고수가 즐비하다고 해도 놀라운 일은 아니리라.
“양 조장. 하오문에 가서 혈사를 알리세요. 이번 혈사는…….”
남천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본래 그가 세운 계획은 전혀 다르지 않은가.
그는 적을 섬멸한 후 무림맹 산동지부를 끌어들여 왕망의 죄를 만천하에 알리려 했다.
“어머니, 하오문은 왜?”
안자영은 당연하다는 듯 말을 덧붙였다.
“정보는 속도가 생명이야. 잠시 후면 피비린내를 맡고 승냥이들이 몰려올 게다. 그 때가 되면 우리만 아는 정보의 가치는 하락하고, 저들의 입맛에 맞게 변형될 것이 분명해. 그러니 먼저 하오문에 정보를 팔아버리면 그들로서도 다른 소리를 하지 못할 게다.”
그녀는 남천휘의 이해를 돕기보다 양 대주라 불린 무인에게 연이어 명령을 하달했다.
“신공부에 사람을 보내서 같은 정보를 전하도록 해요. 이 일은 조금 늦어도 됩니다. 오히려 소문이 퍼진 후 알게 된다면 더 좋겠네요.”
남천휘는 다시 한 번 미간을 좁혔다.
그는 섬예검귀의 사건 때부터 조금씩 신공부를 미심쩍게 바라봤다. 게다가 이번 혈사에는 진조문의 열왕대전검법까지 끼어있지 않던가.
‘신공부에서 누군가 열왕대전검을 뇌물로 해서 왕망을 움직인 것 같은데…….’
안자영은 남천휘의 표정을 보더니 빙긋 웃었다.
“많이 큰 줄 알았더니 여전히 표정을 숨기는 건 능숙하지 않구나.”
남천휘는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뒤통수를 긁적였다.
“저들 중에 혈랑회가 있다고 했지? 게다가 그들 중 한 명이 죽기 전 섬예검귀를 거론했다고 하지 않았더냐. 그렇다면 이번 일은 무림맹보다 신공부에 맡기는 편이 옳다. 그들이 이미 용봉쟁투 때 섬예검귀를 규탄한 이상 무슨 결과가 나오든 우리 쪽을 두둔해줄 수밖에 없어. 무엇보다 우리 막둥이는 귀협이 아니더냐? 저들이 너를 무시한다면 자신의 얼굴에 침 뱉는 것과 다르지 않지.”
아, 그게 또 그렇게 되네.
안자영은 명령도 하고, 설명도 하며 바삐 움직였다.
“하오문에 정보를 건네도 받아낸 돈은 관부로 보내세요. 현청에서 유 포두를 찾고, 내역을 알리세요. 그러면 사상자를 알아서 처리해 줄 겁니다.”
아! 저 돈이 또 저렇게 사용되네.
짝!
안자영이 박수를 치며 주위를 환기시켰다.
“움직이세요.”
노국장의 무인들은 안자영의 명령을 순순히 따랐다. 마치 그녀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게 더없이 익숙해보였다.
반면 남천휘로서는 안자영이 낯설었다.
어머니는 가솔들을 아끼기에 시문을 가르쳤고, 양민을 아끼기에 재주를 가르쳤다. 어쩌면 곡부남가의 가주인 남운군의 신망은 안주인인 안자영에게서 비롯됐다고 봐도 무방했다.
현모양처의 표본이 바로 그녀였다.
한데 남천휘는 지난 몇 달간 선보인 자신의 엄청난 변화보다 안자영의 낯선 모습이 더욱 놀라웠다.
‘멋있어. 멋있는데…….’
이상했다.
그녀의 무력은 72였지만, 지력은 34가 아니던가.
자신을 기준으로 34의 지력을 지닌 안자영은 한순간에 장내를 말끔하게 정리했다. 그렇다면 이건 지력의 고하가 아니라 경험의 문제였다. 무엇보다 수백 명이 죽거나, 다친 현장에서 평정심을 유지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오랫동안 강호행을 한 사람처럼 능숙하셔.’
그 때 안자영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네 아버지가 싫어하지만 않았어도 여전히 절강을 떠돌며 여협 흉내를 내고 있었을 게다. 그러니 그렇게 놀란 표정은 하지 말거라.”
남천휘는 어색하게 웃었다.
도대체 만나는 사람마다 자신의 속내를 속속들이 읽어내는 상황에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진짜 표정 관리하는 연습이라도 해야 하나?’
안자영은 반쯤 넋이 나간 아들의 어깨를 치며 물었다.
“내부는 괜찮은 게냐?”
남천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오십 명 정도 난입하기는 했는데 제압이 됐을 겁니다.”
그 순간 안자영이 인상을 썼다.
“뭐라고? 오십 명이 난입을 했는데도 느긋하게 있는 게냐?”
남천휘는 한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도 그럴 것이 지도를 통해 확인하고 있다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 아닌가.
다행히 서산노옹이 헛기침을 했다.
“한참동안 길을 잃고 헤매더니 저절로 흩어졌소이다. 운연각 주변은 안전하니 걱정하지 마시구려.”
안자영은 서산노옹을 향해 손을 모았다.
“그렇다면 정말 다행이군요. 그나저나 집안일을 챙기다보니 노옹께서 찾아주셨음에도 인사가 늦었습니다.”
서산노옹은 손사래를 쳤다.
“아니외다. 곡부남가의 신망 높은 안주인을 이제라도 만났으니 그것으로 족하오. 혈사는 마무리가 되었고, 내 공은 모래알처럼 작으니 신경 쓰지 마시구려. 그보다 급한 일도 있어보이는데…….”
안자영은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그 또한 집안의 일입니다. 차후에 따로 자리를 마련하겠습니다.”
“객식구라고 생각하시구려.”
서산노옹은 그 말을 끝으로 한 걸음 물러났다.
안자영은 눈짓으로 감사를 표했다.
그녀는 왕망의 배신을 눈치 채고 곡부남가로 돌아온 것이 아니었다.
“천 소저.”
천수련은 안자영이 자신을 부르는 순간 허리를 폈다. 그녀는 안자영이 나타난 순간부터 왠지 모르게 긴장의 끈을 놓지 못했다. 마치 사부를 처음 만났을 때처럼 온 몸에 힘이 잔뜩 들어간 상태였다.
“네!”
덕분에 우렁찬 한 마디가 흘러나왔다.
안자영은 그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렸다. 아들을 셋이나 키울 때에는 느껴보지 못했던 감정이다.
‘어!’
반면 남천휘는 안자영의 표정 변화에 흠칫 놀라야 했다. 탈각진체법을 통해 획득한 통찰은 비단 적을 상대할 때만 유용한 것이 아니었다.
‘눈빛의 변화와 잔주름의 깊이, 입꼬리의 각도로 봐서는…….’
사실 그딴 걸 알 리가 없잖아.
어머니는 일견하기에도 천수련에게 깊은 호감을 내비쳤다.
‘설마 며느리 감이라고 생각하시는 건 아니겠지?’
늘 아들만 셋이라며 딸을 아쉬워하던 어머니가 아니었던가. 한데 큰 아들은 집안일에만 매진하느라 혼사에 관심이 없었고, 둘째 아들은 무공을 익히겠다며 아예 집을 뛰쳐나갔다. 그런 상황에서 천수련을 봤으니 오해를 하는 것도 이상할 것은 없어 보였다.
“어머니, 그게 아니라…….”
남천휘가 황급히 안자영을 제지하려 했다.
하나 안자영은 이미 천수련을 보며 환한 미소를 보였다.
“노국장의 안자영이라고 해요. 잠시 대화를 나누고 싶은데…….”
그녀는 말끝을 흐리며 주변을 둘러봤다.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장소는 대화에 어울리지 않았다.
“일단 안으로 들어갑시다.”
“네!”
천수련은 군졸이라도 된 듯 힘차게 대꾸했다.
안자영은 천수련이 당황스러워하는 모습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녀는 남천휘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손짓을 했다.
“너도 따라오너라. 뒷일은 저들에게 맡겨도 돼.”
남천휘는 얼떨결에 천수련처럼 힘차게 외쳤다.
“네.”
몰래 연애하다가 걸린 듯한 이 해괴망측한 기분은 뭐란 말인가. 남천휘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어깨를 축 늘어트린 채 내원으로 향했다.
*
안자영이 등장하는 순간 운연각의 문이 활짝 열렸다. 이백여 명에 이르는 가솔들은 환한 웃음으로 가모를 맞이했다.
남천홍이나 남천휘를 대할 때와는 다른 미소였다.
그도 그럴 것이 어린 가솔들은 아예 곡부남가에서 태어나기도 했다. 특히 어린 시비들에게 안자영이란 신녀(神女)였고, 대모(代母)였다.
“마님!”
소혜는 안자영을 보는 순간 눈물을 쏟아냈다.
그러더니 이산가족이 상봉을 하듯 달려 나와 안기는 것이 아닌가.
“이것아, 누가 보면 죽은 사람이 돌아온 줄 알겠다. 다 큰 녀석이 이렇게 울보여서야 어느 놈이 데려가겠느냐?”
남천휘는 모녀를 방불케 하는 두 사람의 모습에 한숨을 내쉬었다.
‘누가 보면 내가 엄청나게 괴롭힌 줄 알겠네.’
반면 천수련은 당황스러움을 금치 못했다.
‘뭐지? 무슨 사이지? 시비가 아니었던가?’
그녀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안자영의 품에 안긴 소혜가 자신을 힐끔거리는 듯하지 않은가. 그럴 리야 없겠지만, 왜인지 모르게 그녀가 신경 쓰였다.
‘저 시비가 계속 마음에 걸려. 이름이 개구리라고 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