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오늘밤 주인공은. (7)
‘녹선단! 녹선단! 녹선단!’
씨벌, 이러다 안 풀리면 어쩌지?
그 순간 천상의 선녀가 귓가에 속삭이는 듯한 알림이 들려왔다.
◎ 독성이 해제됩니다.
※ 옷을 버리고, 몸을 닦기를 권고합니다.
녹선단 네 개를 쓰고 나서야 독성이 사라졌다.
‘맙소사! 회회회판님이시여!’
남천휘가 돌림판을 연속으로 돌렸을 때 녹선단이 쏟아지더라. 그 덕에 인벤토리에는 녹선단만 열여섯 개가 남아 있었다.
개 똥 같은 돌림판이라고 욕해서 죄송합니다.
‘불신하지 않겠나이다!’
남천휘는 짐짓 중독된 척 신음을 흘렸다.
그리고 황급히 공터로 향했다.
‘일단 무대에 올라와라.’
그가 비틀거리며 공터에 돌아오자, 천수련의 전음이 들려왔다. 당장 달려 나오려는 그녀를 억지로 만류했을 때 모인적이 느긋하게 들어섰다.
그는 쓰러진 후기지수들을 보며 혀를 찼다.
“병신 같은 놈들. 이런 사소한 일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면서 류혁과 어울리려는 게냐?”
하나 모인적은 후기지수들을 무시한 것과 달리 거리를 유지했다. 혹시 남천휘가 비장의 한 수라도 숨겼을까 우려하는 게다.
그는 독주머니를 꺼냈다.
“나는 너 같은 놈들을 잘 알아. 쥐뿔도 없으면서 근성으로 버티는 것들. 마지막 순간에도 포기하지 않는 것들. 다 어떻게 됐을까?”
남천휘는 입술을 안쪽을 깨물었다.
‘아우, 아파.’
다행히 제법 위태롭게 보일 만큼 핏물이 입술을 타고 흘렀다.
모인적은 만족스런 표정으로 입꼬리를 올렸다.
“잡초 같은 놈들은 날파리와 같아. 끝끝내 사람을 귀찮게 하지. 그래서 기회가 왔을 때 잘근잘근 밟으라고 하더라. 하지만 나는 그냥 약을 쳐. 그게 제일 확실하거든.”
놈은 주머니의 아랫부분을 긁었다.
‘아하! 저렇게 해서 터지는 시간을 조절하는구나. 그나저나 왜 저렇게 말이 많아?’
초류혁이 평소에 말을 안 시키나?
어쨌든 놈은 수다스러움이 남자의 가치를 떨어트린다는 말을 모르는 것이 분명했다.
한데 눈치 없는 재이가 말을 덧붙였다.
◎ 스스로를 비하하는 건 좋지 못한 습관입니다.
- 지속적으로 자괴감에 빠지면 성장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칩니다.
닥쳐! 이게 다 너 때문이잖아.
‘그러니 혼잣말은 제외하자.’
모인적은 그 사이 준비를 끝낸 듯 세 개의 독탄을 손가락 사이에 끼웠다.
“혹여 네 죽음에 여파가 있을 것이라 생각지 마라. 청도문은 네 생각보다 대단하고, 삼정의 결속력은 상상 이상이거든.”
그 말을 끝으로 놈이 독탄을 던졌다.
그 순간 남천휘의 눈빛이 번뜩였다.
그는 중독된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잽싸게 달려 나갔다. 그리고 일직선으로 꽂혀드는 독탄을 손으로 움켜쥐었다.
“이미 늦었다!”
모인적의 말투에는 조롱이 잔뜩 섞였다.
하나 이내 눈을 휘둥그레 떴다.
남천휘가 쥔 독탄은 터지지 않았다. 그 뿐 아니라 한 순간 어디론가 사라진 것이 아닌가.
“어! 뭐야?”
대답 대신 일권을 먹여줬다.
빠각!
놈은 예기치 못한 상황에 레벨 값도 하지 못한 채 비틀거렸다. 확실히 민첩보다 지혜 쪽에 능력치가 몰렸으리라.
‘독 따위에 의지하니까!’
물러서는 놈의 멱살을 쥐고, 발목을 걷어찼다.
‘쳐맞는 거야!’
내력이 담긴 발길질 두 번에 양 발목이 으스러졌다.
“으아악!”
퀘스트 완료를 위해서는 마무리에 더욱더 신경을 써야 했다.
이것이 화룡점정(畵龍點睛)이겠지.
재이의 칭찬이 들려왔다.
이런 건 또 귓등으로 흘리지 않지.
남천휘는 모인적의 허리춤에서 비수를 꺼낸 채 양 손목을 그어버렸다. 힘줄을 자르지는 않았지만, 지금처럼 칼질을 하려면 반 년 정도는 요양해야 할 것이다.
띠링-
남천휘는 퀘스트가 달성됐다는 알림이 들린 후에야 놈을 내던졌다. 인벤토리에 들어온 자수정 삼천 개를 보는 순간 환호성이 터져 나올 뻔했다.
하나 호흡을 가다듬었다.
목격자들을 위해서라도 속내를 숨겼다.
지금은 고난을 극복한 주인공이 되어야 했다.
“후우, 후우.”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사이 목격자들이 나타났다.
천수련은 황급히 다가와 남천휘를 부축하려 했다.
“가까이 오지 마. 독이야. 놈이 독을 썼어.”
남천휘의 말에 천수련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이쯤 해서 마무리를 해야겠다.
남천휘는 다리에 힘이 풀린 사람처럼 주저앉으며 왕대만을 향해 말했다.
“헉, 헉! 서산노옹을 불러주세요.”
위급한 순간일수록 상대를 지목해서 부탁해야 하는 게다. 그래야 귀찮고, 두렵더라도 신고를 한다고 하지 않던가.
왕대만은 영문 모를 소리에 눈만 끔뻑였다.
천수련에게 억지로 끌려왔다가 청도문의 소문주가 개입된 음모를 목격한 셈이 아닌가.
‘아씨! 나한테 왜 이런 일이······.’
그는 불현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기절한 줄 알았던 남천휘가 그를 빤히 보고 있지 않은가. ‘동생, 뭘 해야 하는지 알지?’ 라고 입을 뻥끗거리는 모습에 진저리를 쳤다.
‘나한테 왜 이러는 건데?’
*
용봉쟁투를 운영하는 실무자들이 한 자리에 앉았다.
각기 삼정의 대표였다.
신공부의 공은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출했다.
“어떻게 하실 겁니까?”
황보세가의 황은 히죽거리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더니 두 손을 털며 의자에 몸을 묻었다.
“크큭, 우리와는 상관없는 일이니······.”
그는 말끝을 흐리며 옆 자리에 앉은 청도문의 흑을 흘겨봤다.
흑의 얼굴은 창백했다.
하지만 그는 무덤덤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후기지수들끼리 다툴 때마다 우리가 모였다면, 용봉쟁투는 아직도 열리지 않았을 거요.”
“말 돌리지 맙시다. 당신도 이 일의 원인을 알고 있잖소. 남천휘가 백인검무의 핵심을 차지할 때부터 예견됐던 일이었어.”
공의 말에 흑은 의자를 당겨 앉았다.
“그렇지. 그게 문제요! 백인검무는 초류혁의 무대가 되어야 했어. 소개연이 공태령의 무대였듯. 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았소. 이 문제를 처리하는 것이 우선이외다!”
황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제 놈이 알아서 잘하는 걸 어쩌라고.”
그 말은 곧 주도권을 내어준 초류혁의 잘못이라는 뜻이 아닌가.
공이 황급히 말했다.
“신공부의 뜻은 황보세가와 같소.”
한 순간 개인의 의견이 조직의 방향성으로 결정됐다. 흑은 인상을 쓰며 반론을 제기하려 했지만, 공이 한 박자 빨랐다.
“무엇보다 후기지수 몇몇이 초 소협과 어울린 것은 사실이잖소. 그리고 그들이 이 사달을 일으켰지.”
흑은 미간을 좁혔다.
“날파리가 어디 초류혁 주변에만 있겠소? 공태령도, 황보장천도 마찬가지요. 무엇보다 그들이 무리를 이루도록 의도한 건 우리잖소. 이제 와서 책임소재를 가리자는 말은 어불성설이외다.”
황은 히죽거리며 말을 이었다.
“어울리라고 했지. 청부를 하라고 한 적은 없잖소.”
공이 박수를 치며 주위를 환기시켰다.
“어찌됐든 열 명의 후기지수들이 남천휘를 공격했소. 그 자리에는 모인적도 있었지. 누가 봐도 초류혁과의 관계를 의심할 거요.”
“증거는?”
“일양도와 천수련이 증인으로 나섰소. 처음부터 끝까지 목격을 했다고 증언까지 했지. 이건 숨기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날이 밝는 즉시 소문이 퍼질 거요. 그러면 백인검무는 고사하고, 용봉쟁투 전체가 더렵혀지겠지. 이제 어쩔 거요?”
공의 날 선 한 마디에 흑은 눈을 가늘게 떴다.
“덮어주시오.”
황은 딴청을 피우며 읊조렸다.
“크흠, 그냥은 안 되지.”
“신공부와 황보세가에 적당한 보상을 하겠소. 그러니 후기지수 몇몇의 일탈로 정리합시다.”
세 사람은 주고받을 것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그럼 상단 두 곳과 객잔 다섯 곳으로 정리합시다.”
“우리는 표국과 전장을 받겠소.”
그렇게 유백천과 염운을 비롯한 후기지수들의 운명이 결정됐다.
흑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초류혁의 일탈로 인해 청도문은 수만 냥의 손해를 감수해야 했다.
“흥! 백인검무 다음은 황보세가의 차례였지요?”
황보세가의 황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하하하! 걱정하지 않아도 좋소. ‘후기지수 보신경 대회’는 황보장천의 것이외다.”
“그렇게 되기를 빌겠소.”
흑은 찬바람이 일 정도로 냉랭한 기운을 흩뿌리며 자리를 떴다.
“사문회를 조직해서 공과를 논해야 할 게요. 생각해둔 사람이 있소이까?”
용봉평의 주인은 신공부였다.
그렇기에 문제가 생긴다면 신공부가 책임을 지고, 조사해야 마땅했다.
공은 느긋한 표정을 지었다.
“서산노옹을 비롯해 명숙 몇 명을 뽑을 예정이외다.”
황은 눈을 휘둥그레 뜨며 탄성을 흘렸다.
“호오! 서산노옹이라. 대쪽 같은 노인네가 말을 듣겠소이까?”
“서산노옹은 우리 쪽 사람이외다. 융통성이 아예 없는 사람은 아니지. 게다가 남천휘가 서산노옹을 직접 거론했소. 그러니 서산노옹에게 맡겨야 남천휘도 반발하지 않을 거요.”
황이 목소리를 낮췄다.
“만약에 서산노옹이 문제라도 일으키면?”
“개인의 일탈까지 우리가 신경 쓸 여력이 없지 않소이까. 안 그렇소?”
공의 말에 황은 박장대소를 했다.
“크하하! 동감이외다. 지루한 백인검무는 하루 빨리 끝내고, 다음 관문이나 준비해야겠소.”
*
이름 : ???(Lv:74)
별호 : 서산노옹
총합 : 2010(근력과 체력 위주 성장)
남천휘는 서산노옹(瑞山老翁)의 정보를 확인하며 탄성을 흘렸다. 모인적보다 레벨은 뒤처지지만, 총합은 훨씬 높았다. 게다가 산자(傘刺)라는 우산 모양의 기형 병기를 사용했다.
적으로 대하기 까다로운 상대였다.
하나 무엇보다 남천휘를 기쁘게 만든 건 서산노옹의 색이다.
그의 별호는 푸르스름하게 빛났다.
선한 존재였고, 선한 삶을 살아왔다는 증표였다.
‘모인적을 엿 먹이려고 부른 건데······.’
이렇게 좋은 사람이 나타나다니.
아직 강호의 도의가 시궁창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건 아닌 듯했다.
“독을 썼다고?”
서산노옹은 독을 거론할 때 미간을 좁혔다.
“전후사정을 한 번 더 말해주겠나?”
어차피 잔뜩 흥분한 천수련이 있는 말, 없는 말을 덧붙여서 증언했을 터였다. 그리고 왕대만 역시 기호지세인지라 본 대로 말했으리라.
돌이켜보면 왕대만이 신공부의 초빙을 받은 것도 도움이 됐다. 만약 청도문의 초빙을 받았다면 제아무리 남천휘의 특기가 발휘됐어도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으리라.
“병급 오십이 위, 염운이 찾아왔습니다.”
남천휘는 최대한 담백한 어조로 상황을 설명했다.
돈을 받은 것까지 숨기지 않았다.
“허허, 그 상황에서 돈을 요구했다고?”
“네, 꿍꿍이가 있어 보였거든요. 한데 살인조차 불사할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습니다. 강호의 식견이 부족하여 해를 입었으니 이번 일에는 제 책임도 있을 겁니다.”
서산노옹은 고개를 내저었다.
“그렇지 않아. 빛이 생기면 그림자도 생기지. 하여 사람들은 선악을 가리켜 빛과 그림자라 한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선은 빛이다. 하나 악은 그림자를 통해 스며드는 악취에 불과하다. 그림자처럼 고결한 표현을 쓸 가치도 없지. 그러니 놈들이 패악을 부렸다는 것만 생각해라. 무조건 놈들의 잘못이야. 또한 그로 인해 놈들의 돈을 얻어냈다고 해서 돌려줄 필요도 없다!”
남천휘는 탄성을 흘렸다.
후기지수들을 제대로 궁지에 몰아넣고자 했다.
그렇기에 은자 육백 냥 정도는 흔쾌히 포기하려 하지 않았던가.
‘이 할아버지, 마음에 든다.’
그렇게 공터에서의 싸움을 설명했다.
서산노옹은 오랜만에 웅심이 치솟는 듯 남천휘의 말을 들으며 추임새를 넣었다.
“그렇지! 패기가 있구나. 백인검무에서 두각을 드러낼 때부터 영웅의 기상이 느껴졌었어. 내 감이 틀리지 않았군.”
칭찬은 누구라도 춤추게 만든다.
‘재이는 빼고.’
남천휘는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이제 서산노옹을 직접 거론해야 했던 목적을 달성할 시간이다.
‘인벤토리.’
보급창이 열리며 소지품이 나열된다.
《녹린탄x3》
모인적이 던진 독탄을 그대로 인벤토리에 넣어둔 상태였다.
‘확인.’
이미 모인적을 쓰러트린 후 축복받은 확인서를 사용했기에 상세정보가 나타났다.
《녹린탄》
- 운남 오독교의 녹황사린을 흉내낸 독.
- 모교공이 만들었고, 모 가 직계에게만 전해진다.
- 미량 흡입 시 시력과 청각이 손상되고, 다량 흡입 시 신체가 마비된다. 최악의 경우 사망에 이르게 되는 절독으로 주의가 요구된다.
운남, 오독교, 녹황사린라는 단어가 낯설다.
‘다 필요 없고, 추가 정보가 핵심이지.’
※ 서산노옹와 백주검은 녹린탄을 혐오합니다.
- 녹린탄의 사용자로 알려지면 원한 관계를 맺게 됩니다. 사용에 주의를 기울이세요.
이게 핵심이다!
서산노옹과 백주검 중 후자는 잿빛으로 표기됐다.
근처에 없다는 뜻이다.
반면 서산노옹은 빨갛게 빛나더라.
주변에 있으니 경계하라는 뜻이다.
그래서 중독된 척하며 왕대만으로 하여금 서산노옹을 불러오게 한 것이다.
‘당신이라면 이걸 눈치 채지 못할 리 없지.
남천휘는 인벤토리에서 독탄을 하나 꺼냈다.
이미 내용물을 대부분 비운 상태였다.
미량의 독탄을 손바닥 안에서 터트리는 순간 정신이 아찔했다. 서산노옹은 반사적으로 남천휘를 부축하기 위해 다가왔다.
“안 됩니다! 독이 있어요.”
서산노옹은 소매로 코를 막은 채 미간을 좁혔다.
“뭐라? 아직도 독이 남아 있는가?”
“아까 모인적이 독을 썼습니다. 한데 옷에 독분이 남았나 봅니다. 조금 어지럽군요.”
남천휘는 실제로 녹린탄에 중독된 상태였다.
비록 미량이라고는 하나 어지러운 것을 피할 수 없었다.
한데 서산노옹은 품에서 장갑을 꺼내는 것이 아닌가. 그것도 독을 다룰 때 사용하는 녹피 장갑이다. 그는 신중하게 남천휘의 옷을 살폈다. 그러던 중 소매의 접힌 부분을 확인하더니 이를 갈았다.
“크흑! 이건 녹린탄이 아닌가!”
옳지. 그렇습니다.
어르신이 그렇게 찾아다니는 녹린탄이에요.
모인적이라는 놈의 집안에서만 사용하는 가문 비전의 독이랍니다.
“정녕 모인적이 이걸 사용했다는 건가?”
증인도 있답니다.
남천휘가 고개를 끄덕였다.
서산노옹은 더 이상 독을 논하지 않고 남천휘에게 옷을 벗으라 했다. 그리고는 물을 길어와 몸을 닦아준 후 작은 단약을 건넸다.
“먹게. 다행히 미량을 흡입했기에 중독이 심하지 않았어. 이건 잘못하면 진짜 죽는 독이야.”
하나 남천휘는 속으로 환호성을 내질렀다.
서산노옹의 눈빛만 봐도 극도의 분노가 느껴졌다.
"크흑! 모인적, 이 때려 죽일 놈!"
사마외도를 대할 때에도 저처럼 험악한 분위기를 조성하지는 않으리라.
‘안녕, 모인적. 친해지기도 전에 헤어지는구나. 조심히 꺼지도록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