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생생우동(生生祐動). (1)- 3권 시작
35, 생생우동(生生祐動)
마치 꿈을 꾸는 듯했다.
아니지. 이렇게 실감나는 꿈이라면 매일 같이 꾸겠어. 집을 팔고, 빚을 져서라도 꿈속에서 살고 싶을 정도였다.
그만큼 눈앞의 광경은 진짜 같았다.
손을 뻗어서 만지면 촉감이 느껴질 만큼.
선조인 남추에게 말을 걸면 이마의 땀을 훔치며 ‘왔어?’라고 대답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생생했다. 그렇기에 그가 펼치는 비천무상도의 위력이 거짓처럼 여겨지지 않았다.
직도(直刀)가 번뜩일 때마다 마치 명사가 붓질을 하듯 허공에 묵빛이 잔영처럼 남았다가 흩어졌다.
잠시 후 남추가 직도를 무릎 위에 올려놓은 채 가부좌를 틀었다.
그리고 사색에 잠겼다.
운기조식과 함께 자신의 수련을 돌아보려는 듯하다.
‘후우.’
남천휘는 그제야 뜨거운 숨을 흘려냈다.
마치 코앞에서 수련을 지켜본 듯하여 온 몸이 힘이 잔뜩 들어간 상태였다.
‘이제 좀 쉬는 건가?’
그만큼 남추의 수련은 숨 돌릴 틈도 없이 계속됐다.
그걸 지켜보는 남천휘 또한 엄청난 압박감에 휩싸였다. 몇 번의 호흡을 통해 몸의 경직이 풀리는 듯했다. 만약 두 다리로 서있었다면 힘이 풀려서 주저앉았으리라.
한데 그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정말 주저앉았다.
고개를 숙이자, 발이 보였다.
왼쪽으로 돌리면 왼쪽 어깨와 팔이, 오른쪽으로 돌리면 오른쪽 어깨와 팔이 보였다. 손을 들려고 생각하니 눈앞에 자신의 손이 나타났다.
남천휘는 혼란스러움을 금치 못했다.
‘이건 뭐야?’
그저 남추를 지켜보는 것이 아니라 진짜 같은 공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닌가.
한순간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그는 가상현실, 즉 VR은 어찌됐든 가상의 현실을 보여주는 것이라 여겼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이야기책에서 보았던 장면이 떠올랐다.
주인공이 기연을 얻는 장면이었다.
은거고수의 흔적을 발견하고, 천부적인 재능을 지닌 주인공은 흔적을 통해 기연을 찾아냈다. 주인공은 은거고수의 흔적을 통해 생전의 모습을 머릿속으로 상상했다는 장면이 인상 깊었다.
잘난 놈들은 저렇게도 성공하는구나 싶더라.
어쨌든 VR 또한 그런 종류일 것이라 여겼다.
생생한 느낌 또한 하늘의 신능(神能)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네.’
가상현실의 위력은 자신의 상상은 물론이고, 영웅담을 쓴 작가의 창의력마저 뛰어넘었다.
‘이거 어디까지가 진짜인 거야?’
설령 진짜가 아니더라도 최대한 진짜처럼 보이는 광경일 터였다.
그 증거가 시계(視界)에 남아 있었다.
남천휘는 시계의 동서남북 부분에 존재하는 화살표를 뒤늦게 발견했다.
의지가 동쪽의 화살표를 인지하는 순간.
‘어어!
그는 운기조식을 하고 있는 남추의 옆으로 이동했다. 한 번 더 동쪽을 의식하는 순간 그는 남추의 앞에 존재했다.
아래쪽 화살표를 가리켰다.
그러자 앉아 있는 남추와 눈높이를 맞출 수 있었다.
‘하하, 하하.’
남천휘는 몇 번이나 화살표를 움직이면서 ‘가상현실’의 동작 원리를 깨우쳤다.
이 세상은 자신을 중심으로 이뤄진 것이 아니다.
‘이곳은 할아버지의 공간이야.’
그가 움직일 때에도 시계의 중심에는 남추가 있었다. 이 세상의 중심은 남추였다. 무슨 짓을 해도 남추를 시계 밖으로 몰아낼 수 없었다.
즉 남추를 중심으로 빙빙 도는 것만이 가능했다.
이렇게.
‘어어어어어어어!’
왼쪽 화살표를 연타하는 순간 마치 말을 타고 남추의 주변을 달리듯 빠르게 시계가 뭉개졌다.
또한 위에서 남추의 정수리에 난 흰 머리를 헤아리는 것이 가능했다.
‘흐음, 탈모 걱정은 안 해도 되겠어.’
또한 아래에서 남추의 코털 숫자를 확인하는 것도 가능했다.
‘콧수염이 아니라 코털이 자란 거잖아! 하아, 내가 지금 뭐하는거냐?’
남천휘는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몇 바퀴 돌았다고 힘이 빠진 게 아니다.
뒤늦게 이성을 되찾은 게다.
‘내가 이런 짓이나 하려고 가상 현실에 들어왔나 자괴감이 드네.’
남천휘는 주저앉은 채 남추를 바라봤다.
아직도 이것이 꿈인지, 생시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머릿속이 너무나 혼란스러웠다. 그렇기에 미친놈처럼 이성을 잃고 날뛰었다.
하나 시간이 지났음에도 눈앞의 세상은 그대로였다.
두 사람만의 세상.
남천휘는 남추의 호흡이 조금씩 가라앉는 것을 보며 한 숨을 내쉬었다.
남추는 운기조식을 끝내면 다시 수련할 것이 분명했다. 남천휘는 그걸 다시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봐야 할 터였다.
솔직한 심경을 논하자면 두려웠다.
‘내가 본다고 뭐가 달라질까?’
남추의 비천무상도법은 진중함과 화려함을 동시에 지녔다. 중양칠도와 비교하는 것조차 미안할 만큼 상승의 절예(絶藝)가 분명했다.
그렇기에 탐이 났다.
영혼을 팔아서라도 배우고 싶었다.
하나 영혼은 팔고 싶다고 팔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고, 비천무상도는 탐을 낸다고 얻을 수 있는 물건이 아닐 터였다.
단순히 눈으로 직접 본다고 해서 배울 수 있었다면 당대에 이르러 비천무상도가 사라졌을 리 만무했다.
‘젠장.’
남천휘는 가상현실에 들어오기 전을 떠올렸다.
그는 이미 모든 능력을 총동원하여 수련장의 흔적을 분석하려다 실패하지 않았던가.
물론 능력 부족으로 인해 기억을 잃었기에 지금의 기연을 마주하게 됐다.
‘운이 좋았어. 좋아도 지나치게 좋았지.’
이 정도의 행운이라면 벼락을 맞고 살아나서 동네 제일의 미녀를 쟁취하는 것과 비견되리라.
‘훗, 이만한 행운이 또 찾아올 리 없잖아.’
결국 남천휘의 결말은 뻔했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남추의 수련을 지켜보기만 하겠지. 그러다 조금씩 수련법을 잊은 채 도법의 화려함과 진중함만 기억하게 되리라.
‘빌어먹을!’
이럴 줄 알았으면 레벨 업도 열심히 하고, 아이템도 양껏 모아놓을 걸 그랬다.
때늦은 후회로 인해 눈시울까지 붉어졌다.
남천휘는 고개를 떨궜다.
한데 잠시 후 남추의 기분 좋은 비음이 들려왔다.
“으음. 잘 잤다.”
할아버지, 잔거야?
대단한 깨달음이라도 얻는 줄 알았건만.
남천휘는 지금껏 실의에 빠졌던 것이 억울할 만큼 황당해했다. 한데 그 순간 지금까지의 모든 충격을 일시에 날려버릴 경악스러운 일이 벌어졌다.
남추가 이마에 맺힌 땀을 훔치더니 남천휘를 바라보는 것이 아닌가.
“왔어?”
남천휘는 온 몸에 소름이 돋는 듯한 서늘함을 느꼈다. 고개를 돌릴 수만 있었다면 뒤를 확인하고 싶었다. 하나 그의 시선은 남추를 벗어날 수 없기에 그저 눈만 부릅뜰 뿐이다.
‘설마 나한테 한 말인가?’
그 때 남추는 가시처럼 뻗은 수염을 정리하며 웃었다.
“자네 말고 이곳에 올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공야청.”
아! 내가 아니구나.
잠깐, 그럼 공야청은 누군데?
낯선 이름에 잠시 넋을 놓았다.
한데 남추는 그 와중에도 공야청이라 불리는 상대와 대화했다.
“쓰러진다고? 상관없네. 힘이 닿는 한 비천무상도의 수련을 게을리 할 수 없지! 내 열정이 부럽다고?”
남천휘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지금껏 진중하기 그지없던 남추가 실의에 빠진 사람처럼 씁쓸한 표정을 보였다.
“나는 오히려 자네의 깨달음이 정말 부럽네. 자네는 삼교일치를 통해 제대로 구도의 길을 가고 있지 않은가.”
예상대로다.
대두동은 본래 도가의 구도자(求道者)들이 수련을 하는 장소가 분명했다. 불현 듯 수련동의 입구에서 보았던 문답(問答)이 떠올랐다.
‘선조께서는 도가에 입문하고 싶었지만, 할 수 없었군. 하긴 외형만 보면 아무리 봐도 산속에서 수행하는 것보다 약탈이 어울리기는 해.’
공야청이 또 뭐라고 했나 보다.
남추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나는 뜻으로 사람을 구하지 못하고, 칼로 사람을 구해야 하네. 오히려 부끄러움은 내 몫일세.”
아니, 저렇게 원대한 꿈을 품으신 분이 어째서 산적의 형상으로 남은 걸까.
남추의 과거사는 여전히 오리무중이었다.
그 순간 남천휘의 귀에 솔깃한 제안이 들려왔다.
“뭐라고? 자네도 비천무상도를 배우고 싶다고?”
선조는 정광이 번뜩이는 눈빛으로 남천휘를 바라보는 듯했다. 남천휘는 흡사 자신에게 묻는 듯한 기분에 눈시울을 붉혔다.
“비천무상도를 배우고 싶어요.”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그렁그렁한 눈빛으로 남추를 응시했다.
“남 선생님.”
앞으로 선조가 아니라 선생님이라고 부를 게요.
토씨 하나 빼놓지 말고 모조리 가르쳐 주세요.
남추는 웃었다.
“자네가 원한다면 기꺼이.”
오오! 우리 할아버지 최고!
할아버지 기일을 알아내서 제가 향을 사를 게요!
하나 남천휘는 이내 눈을 끔뻑였다.
‘어! 잠깐, 공야청인가, 뭔가는 왜 가르쳐주시지.’
어찌됐든 가문의 절기가 아니던가.
이것이야말로 국부를 외부로 유출하는 비리나 마찬가지였다.
하나 입을 닫았다.
말한다고 전해질 리도 없거니와 어찌됐든 공야청으로 인해 비천무상도를 배울 기회가 열렸다.
“일단 말로 설명하는 것보다 눈으로 직접 보는 게 낫겠군. 잠시만 물러서게.”
잠시 후 남추가 도법을 펼치기 시작했다.
홀로 수련할 때보다 느릿하게 도법을 펼치더니 초식의 묘리까지 설명하는 것이 아닌가.
‘이 정도면 거의 비급 전체를 알려주는 거네.’
그러던 중 남천휘는 남추의 해석을 듣다가 탄성을 흘렸다.
‘애초에 심법이 필요 없었구나!’
비천무상도는 도법이자, 심법이었다.
남천휘는 그제야 자신이 수련동의 흔적을 기억하지 못한 이유를 깨달았다.
단순히 무공으로 여겼기에 기억하지 못한 게다.
하나 심법의 흐름까지 이해하려하자 잊었던 흔적이 다시 새록새록 기억났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괴감에 휩싸였던 남천휘는 없다. 오히려 가상현실이 영원토록 이어지기를 바라는 탐욕의 남천휘만 남아있을 뿐이다.
그러던 중 남천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 부분은 너무 헷갈리는데??’
시야의 하단 부분을 바라봤다.
기다란 막대 문양 속에는 몇 개의 낯선 표식이 존재했다. 이미 가상현실의 작동법을 숙지했기에 표식 중 가장 왼쪽에 있는 되감기 표식(≪)을 건드렸다.
그 순간 남추의 움직임이 멈췄다.
지이이이잉-
그러더니 시간을 돌린 것처럼 역순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닌가.
남천휘는 아리송했던 부분에서 일시 정지(∥)라 적힌 표식을 눌렀다. 그리고 재생(▶)이라 적힌 표식을 누르는 순간 다시 순차적으로 시간이 흐르기 시작했다.
‘흐음.’
직도를 뻗고, 돌리는 동작이 애매하다.
남천휘는 다시 일시 정지를 누른 후 방향 화살표를 건드렸다. 몇 번이나 방향을 바꾸며 일시정지와 재생을 반복했다.
마침내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아하! 이 부분은 앞에서 봐야 이해가 되네.’
남천휘는 자신이 배우는 것처럼 몰입했다.
그렇게 몇 번이나 멈췄다가 움직이기를 반복했고, 모든 방향에서 동작을 확인하며 세세한 부분도 놓치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하염없이 흐를 때였다.
띠링-
재이의 알림이 들려왔다.
가상현실 속에서도 할 건 다 하는 구나.
생각해보니 이걸 만들어낸 것도 재이가 아니던가.
이제는 재이를 떠올리며 놀라기도 귀찮았다.
◎ ‘반쪽짜리 중양칠도’의 원형을 발견했습니다.
◎ 무공창에서 중양칠도와 삼황내문이 삭제됩니다.
◎ 무공 총람에 새로운 무공 ‘비천무상도’가 등록됩니다.
이건 좀 놀랍다!
‘이런 거라면 귀찮아하지 않을 테니 얼마든지 놀라게 해줘!’
재이의 알림대로라면 곧 비천무상도의 성취를 숙련도 형식으로 확인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닌가.
‘하하하! 가상현실은 대단해. 미연시보다 저격보다 훨씬 더 마음에 들어!’
남천휘는 가상 현실의 위력을 만끽했다.
재이가 눈앞에 있다면 포옹을 하고, 입맞춤을 하고 싶어질 정도였다.
‘잠깐! 너 여자 맞지? 맞나?’
됐다. 그게 무슨 의미가 있냐.
어차피 형태도 없이 안개처럼 흐느적거리기밖에 더 하겠어.
그래도 형태만 보면 꽤 몸매가 좋기는 했다만.
남천휘는 정색을 하며 고개를 내저었다.
‘훠이, 훠이! 신성한 가상현실 속에서 기껏 여자를 떠올리다니.’
사내라면 ‘VR’ 모드 속에서도 응당 수련에 집중해야 하지 않겠는가. 색마가 아닌 이상 보통 사람이라면 여자를 떠올릴 리가 만무했다.
남천휘는 진중한 사내의 기개를 드러내듯 힘차게 재생 표식을 눌렀다.
지이이잉-
남추의 웅혼한 기상이 피부로 느껴졌다.
직도를 휘감은 도기(刀氣)가 참으로 크고, 우람했다.
‘아아.’
남천휘는 그렇게 홀리듯 비천무상도에 빠져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의 일이다.
남추는 비천무상도의 기본기가 끝났음을 알리더니 싱긋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이제 자네가 떠날 시간이군.”
이번에도 남천휘가 아니라 공야청이라는 자에게 하는 말이 분명했다. 하나 남천휘는 남추가 자신의 하산을 고하는 것처럼 여겨졌다. 혈육의 정은 물론이고, 그간 함께 하며 깊은 정을 쌓지 않았던가.
“나 같은 평범한 사람과 달리 자네는 바쁘니까 더 잡을 수도 없군. 그 동안 즐거웠네.”
남천휘는 고개를 내저었다.
‘아닙니다. 저는 게으르고, 멍청해요.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꿈도 희망도 없이 밥만 축냈는걸요. 저보다 할아버지가 천 배, 만 배 대단하십니다.’
마음이 전해진 것일까?
아니면 공야청이 뭐라 한 것일까?
남추는 환하게 웃었다.
진실은 알 수 없으나, 전자의 영향이었으면 좋겠다.
남천휘는 일시정지를 누른 후 한참동안 남추의 얼굴을 바라봤다. 봉두난발에 가시처럼 삐죽한 수염, 그리고 눈가의 흉터와 유달리 맑은 눈동자까지 기억했다.
‘고맙습니다. 할아버지.’
재생 표식을 누르는 순간 남추가 손을 모았다.
“조심히 돌아가게. 지금은 기초만 잡았으니 훗날 기회가 된다면 다시 만나세.”
남천휘는 포권을 했다.
‘네, 꼭 다시 만나서······.’
말을 채 끝맺기도 전이었다.
시야가 희뿌옇게 변하더니 장막이라도 드리운 것처럼 까맣게 변했다. 누군가 뒤통수를 강하게 잡아당기는 듯한 충격이 눈을 질끈 감았다.
그 순간 재이의 알림이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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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든 모드 'VR'이 해제됩니다.
“아아.”
남천휘는 눈부심에 자신도 모르게 손을 올렸다.
동시에 오랫동안 쓰고 있던 안대를 벗은 듯한 후련함에 한 숨을 내쉬었다. 잠시 후 햇살에 익숙해진 눈을 억지로 뜨고, 주변을 살폈다.
‘수련동이네.’
돌아왔다.
한데 벌써부터 남추가 그리웠다.
남천휘는 동혈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는 동혈 밖 대두동의 전경을 바라보는 순간 잊고 있던 것을 떠올렸다.
“어! 그런데 시간이 얼마나 지난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