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창해일성소(滄海一聲笑). (3)
“그저 지나가는 이들이 배나 곪지 않게 도와주는 것이 전부야. 거듭 말하지만 곡부남가는 무가와 상가의 중간 지점에 위치했네. 섣불리 나섰다가는 화를 자초할 수도 있음이야.”
막 총관의 비관적인 말에 소가주는 기대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황보세가와 신공부가 나선다면?”
하나 긍정적인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들이야 여전하지. 겉으로는 고고한 척, 속으로는 어디 뜯어먹을 것 없나 허덕이고 있을 걸. 뭐가 됐든 쉬이 움직일 자들이 아니야.”
“중소방파나 양민을 신경쓸 여력이 없겠군요.”
막 총관은 기어코 술잔을 기울인 후 인상을 썼다.
“크흑! 언제는 신경 썼던가? 그나마 청도문처럼 협잡질을 하지 않는 걸 다행으로 여겨야지.”
소가주는 청도문을 떠올리며 미간을 좁혔다.
산동성 동쪽 끝 반도에 위치한 청도문은 교역을 통해 성장한 방파다. 밀염은 물론이고, 사람까지 거래한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하나 지리적 여건으로 인해 황보세가나 신공부와는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 상태였다.
“아버지가 얼른 돌아오셔야 할 텐데요.”
막 총관은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노야, 그나저나 부모님이 노국장에서 겨울을 보내는 이유가 뭡니까?”
“쉬러 갔다니까.”
하나 소가주의 눈빛은 여느 때와 달리 깊은 의구심을 품고 있었다.
결국 막 총관은 딴청을 피우듯 한 마디를 읊조렸다.
“크흠, 검을 장식으로 사용하던 시대는 이제 끝났을지도 몰라.”
*
곡부남가가 내려다보이는 구릉 정상.
서른 명 남짓한 무인들이 서너 명씩 무리를 지어 대기했다. 나무 그늘 사이로 몸을 숨겼기에 달빛조차 그들의 흔적을 쉬이 찾아낼 수 없었다.
혈랑회다.
이들이 구릉에 숨어든 게 벌써 삼일 전이다.
“흐음, 점점 마음에 들지 않는군.”
회주는 곡부남가를 내려다보며 침음을 흘렸다.
부회주는 무심한 듯한 회주와 달리 초초함을 숨기지 못했다.
“날이 밝으면 원단입니다.”
원단(元旦)은 새해의 첫 날을 뜻한다.
하나 부회주가 원단을 거론한 까닭이 새해를 맞이하여 뜨끈한 국물이라도 먹자는 의미는 아니리라.
“알고 있다. 하나 거슬려.”
회주가 곡부남가를 바라보는 눈빛에는 온갖 부정적인 감정이 가득했다.
짜증과 분노, 의구심과 살의.
복잡한 감정의 근원은 바로 곡부남가의 막내인 남천휘로부터 비롯됐다.
‘곡부남가의 담장을 넘으려면 얼마든지 넘을 수 있었어. 한데 나는 왜 넘지 않은 걸까?’
의뢰가 실패로 돌아갔을 때부터 키워온 살의였다.
그는 실패를 만회하기 위해 계획을 세우고, 변수를 차단하고자 했다.
다만 한 가지만은 해결할 수 없었다.
죽창을 날린 궁귀(弓鬼).
아무리 생각해도 곡부남가와 연결 지을 수 없는 신비 고수였다. 그러나 남천휘의 급성장을 떠올리면 혹시나 하는 찜찜한 마음을 지울 수 없었다.
‘계륵이로군.’
이럴 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는 교착 상황.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나 명쾌한 해법을 찾지 못했기에 새해 벽두를 앞두고도 여전히 곡부남가를 지켜보고 있는 것이리라.
부회주가 회주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몽산으로 집결하라는 명령이 내려왔습니다. 지금 출발해도 빠듯합니다.”
회주는 미간을 좁혔다.
혈랑회의 존재는 암중(暗中)의 주인으로부터 비롯됐다.
그렇기에 상부의 명령은 절대적이다.
결국 그는 몸을 돌렸다.
“이번 일이 마무리되면 반드시 돌아와 곡부남가를 불태우겠다. 단 한 놈도 남기지 않고 모조리 죽인 후 시신조차 남지 않게 할 것이야.”
마치 자신의 찜찜함을 털어내듯 저주를 퍼부었다.
부회주는 회주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하나 속으로는 퇴각을 격하게 환영했다.
그 역시 곡부남가, 아니 남천휘를 떠올릴 때마다 기이한 찝찝함을 떨쳐낼 수 없었다.
‘매 순간 엄청난 성장을 이뤄내는 기재.’
혹여 그 기재가 남몰래 궁술이라도 익혔다면?
부회주는 손을 쥐락펴락 했다.
지금도 죽창을 튕겨냈을 때 전해진 뇌기의 감각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이런 찝찝함은 처음이야.’
하나 직접 경험은 처음이지만, 간접 경험은 존재했다.
영웅담(英雄談).
그런 이야기들을 보면 주인공은 늘 급성장을 하고, 주제도 모르는 적은 늘 상대를 과소평가하며 덤벼들지 않던가.
수레를 막아서는 사마귀처럼.
부회주는 사마귀처럼 죽고 싶지 않았다.
‘물론 말도 안 되는 생각이지만 조심해서 손해 볼 건 없어. 누구나 목숨은 하나뿐이니.’
그는 ‘만에 하나’라는 조심성이 지금의 자신을 만들었다고 여겼다. 그렇기에 겁쟁이라고 비웃어도 신경 쓰지 않았다. 개똥밭에서 굴러도 이승이 좋은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 아닌가.
회주가 나직이 한 마디를 읊조렸다.
“쯧, 몽산으로 가자.”
부회주는 입꼬리를 올린 채 수하들을 채근했다.
“이동한다! 빨리! 빨리!”
*
사람 마음이라는게 그렇다.
안 되던 것이 되는 순간 조급해졌다.
남천휘가 그러했다.
마치 오늘이 생의 마지막인 것처럼 열과 성을 다해 중양칠도의 흔적을 좇았다. 하나 ‘쌍익여일오’라는 야담집을 제외하면 성과라고 할 만한 것이 전무했다.
결국 수련장으로 돌아왔다.
어찌됐든 중양칠도만큼 오행군림보도 중요했다.
남천휘는 무공창을 띄워놓고 옅은 미소를 지었다.
《오행군림보》
- 공간을 강탈하는 패도(覇道)적인 보법.
- 공간을 선점하는 변환(變幻)적인 보법.
- 내공의 소모가 극심할수록 위력을 발휘함.
- 4급 성장형 (난해 단계 진행 중)
- 숙련도(10/100). (가치 : 400)
‘반쪽짜리 중양칠도’와 달리 보는 것만으로도 배가 부를 만큼 기분 좋았다.
가치가 400이다.
현재 남천휘가 지닌 것 중 질풍뇌격궁을 제외하면 가장 높은 가치를 지녔다.
‘크하하! 이게 나중에는 800까지 늘어난다는 거지!’
게다가 추가된 설명 또한 만족스러웠다.
‘패도에 이어서 변환이라.’
이제야 오행군림이라는 이름값에 걸맞은 묘용이 생긴 듯했다.
‘일단 박자 줘봐! 소리는 적당히.’
창해일성소의 반주가 들렸다.
여전히 듣고 있는 것만으로도 어디론가 떠나고 싶을 만큼 부드러운 음률이 계속됐다.
하나 남천휘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갑자기 튀어나올 노인의 카랑카랑한 일성에 화들짝 놀란 경우가 어디 한두 번인가.
눈앞에 나타난 손가락이 하나씩 접혔다.
그리고 주먹을 쥐는 순간 창해일성소의 표식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크흑!’
남천휘는 두 발을 빠르게 놀렸다.
오행군림보의 난해 단계는 이름처럼 난해하기 그지없었다. 눈앞에서 떠오르는 표식의 속도는 더욱 빨랐고, 다섯 개였던 표식은 아홉 개로 늘어났다.
게다가 지금껏 한 개씩 뜨던 표식이 여러 개로 겹쳐서 나타나기도 했다.
지금이 그 때였다.
동시에 칠현금의 두 줄만을 튕기는 소리가 빠르게 연이었다.
뚱땅뚱땅뚱땅뚱땅뚱땅!
남천휘는 제자리 뛰기를 하듯 좌우(左右)를 번갈아 연타했다.
다다다다다다다다다다!
완벽이라는 두 글자가 겹쳐지며 시야를 수놓았다.
完璧 x 10.
남천휘는 입꼬리를 올렸다.
‘좋아! 첫 고비는 넘겼다.’
하나 방심은 금물이다.
이내 시야에 기다란 화살표가 등장했다.
――――――――〉
남천휘는 황급히 오른 발로 우측 표식을 밟았다.
그러면서도 왼 발은 따로 등장하는 표식을 차근차근 강타했다. 마침내 길게 늘어진 표식이 사라졌고, 북서와 남쪽을 가리키는 표식이 새로이 나타났다.
타탓!
하나 귀를 찌를 듯한 알림과 함께 ‘최악‘이라는 문구가 시야를 가득 채웠다. 한 번 흐트러진 신형으로 표식을 쫓는 건 불가능했다.
남천휘는 결국 C 등급을 받으며 오행군림보의 수련을 끝마쳤다. 그나마 성공률과 정확도를 끌어올린 것이 성과라면 성과일 것이다.
“휴우.”
남천휘는 호흡을 조절했다.
이제 수련의 추(錘)를 오행군림보에서 중양칠도로 넘길 차례였다.
하나 직도를 뽑는 대신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예전처럼 직도를 휘두르며 수련하는 건 무의미했다.
이미 중양칠도는 잠을 자면서도 펼칠 수 있을 만큼 능숙하지 않던가. 그렇기에 두 자루의 직도를 쥐고 있을 때를 상상하고자 했다.
‘실제로 들고 하면 더 좋겠지만······.’
남천휘는 쓴웃음을 흘렸다.
평생 한 손으로 하던 걸 갑자기 두 손으로 펼치는 건 불가능했다.
몇 번 도전을 했으나, 생각처럼 되지 않았다.
결국 남천휘는 심상(心象) 수련을 선택했다.
중양칠도의 숙련도가 극에 이르렀기에 가능한 선택이었다. 무엇보다 수련의 우선순위는 쌍도 활용이 아니라 숙련도 상승이 아니던가.
“후우.”
가늘고 긴 호흡이 이어지며 심신이 안정됐다.
남천휘는 눈을 감고 양 손에 직도를 쥐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그렸다. 지난 며칠 동안 반복했기에 생각보다 쉽게 심상에 빠져들었다.
‘일도격부터.’
중양칠도를 다시 익힌다는 생각으로 상상을 이어갔다.
두 자루를 들었을 때의 장점과 단점을 구별했다.
그리고 장점을 모아 상상 속에서 움직였다.
스스로에 대한 관조에서 시작된 심상 수련은 더위와 추위를 잊게 했다. 그리고 이내 외부의 감각조차 차단한 채 깊숙이 파고들었다.
‘할아버지, 당신은 도대체 어떤 사람이었던 겁니까?’
얼마나 깊은 상념에 빠져 있었을까.
남천휘의 정신을 번쩍 들게 만드는 알림이 울렸다.
◎ 자아의 형상화에 성공하셨습니다.
◎ 특기 ‘심상(心象)’이 등록되었습니다.
◎ 심상을 통한 수련이 극소수 구현됩니다.
눈을 떴다.
특기 목록에 새롭게 등장한 심상을 보면서도 믿을 수가 없었다. 재이의 알림에 의하면 상상 속의 수련이 현실에 반영된다는 뜻이 아닌가. 극소수라는 단서가 붙었지만, 어찌됐든 된다는 것부터 말이 되지 않았다.
이 또한 기연이리라.
남천휘는 헛웃음을 지었다.
재이와의 만남 이후 무수한 기연을 얻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걸 뭐라고 하면서 좋아해야 할지······.’
수련의 과정이 추가됐다.
앞으로는 몸을 쓰는 수련 외에 심상 수련도 빼먹지 말아야겠다.
천에 하나라도 적용된다면 감지덕지였다.
남천휘는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 뭘 해야 할지 모르던 시절.
- 뭘 할 수 있을지 모르던 세월.
하나 지금은 해야 할 일이 명확했다.
그리고 할 수 있는 힘이 있다.
그러니 열심히 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자! 한 번 더. 박자 줘봐.”
창해일성소가 울려 퍼진다.
남천휘는 당황하여 음악을 흩어버릴 기세로 손을 내저었다.
“아니야. 아니야.”
심상 수련을 한다는 것이.
이렇듯 버릇이 무섭다.
해가 바뀌었다.
스무 살이 되었다.
하나 남천휘는 여전히 연무장을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겨울답지 않게 햇살이 따뜻하던 어느 날.
남천휘는 튕기듯 몸을 일으켰다.
두 손을 번쩍 든 채 환호성을 내질렀다.
“됐다!”
끝없는 환호성 속에서 재이의 담담한 알림은 계속됐다.
◎ 중양칠도의 숙련도가 100에 도달했습니다.
◎ 《백파도 남추의 추억이 깃든 그림》에 관한 히든 퀘스트 조건이 모두 달성됐습니다.
◎ 목적지가 표시됩니다.
그 순간 시야 구석에 위치한 지도의 한 부분이 빨갛게 반짝거렸다.
남천휘는 눈을 빛냈다.
“저기가 내가 가야할 곳이로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