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누구냐? 너!
28, 누구냐? 너!
군사는 비책을 제안했다.
왠지 할 일이 생겨서 신난 듯한 목소리였다.
◎ 풍혈 설치로 적의 이동 속도 저하를 꾀하는 것이 옳을 듯하옵니다.
풍혈(風穴)이 뭔지는 모르겠다만, 군사라니까 일단 한 번 믿고 써 보자.
남천휘는 허락했다.
《풍혈이 설치됐습니다.》
- 유지 시간 : 한 시진.
- 대화동 전역에 동민으로 포함되지 않는 모든 존재의 이동속도를 10% 늦춥니다.
남천휘는 적의 동향을 한눈에 담았다.
육안으로 확인하는 건 불가능했다.
그렇기에 적의 표정을 살폈다.
처음에는 반응 없던 적들도 위치를 바꾸기 위해 몸을 움직이자 인상을 썼다.
그리고는 팔다리를 흔들며 의아해했다.
‘효과가 있기는 있네.’
아마도 풍혈이란 일종의 약식 진법과 같은 효과를 발휘하는 성소만의 공능이 아닐까 싶다.
그러던 중 참지 못하고 몸을 돌린 자가 보였다.
바위 뒤에서 튀어나온 적.
슬쩍 죽창의 위치를 바꾼 것만으로도 조준선의 중심에 적이 들어왔다.
민첩 수치 1065의 힘은 어마어마했다.
커다란 철궁과 기다란 죽창을 쥐고 있음에도 원하는 위치에 멈추는 것이 아닌가. 마치 힘줄과 근육의 모든 움직임을 통제할 수 있을 것처럼 고양감이 치솟았다.
‘그래서 너도 한 방.’
텅-
활시위를 놓는 순간 엄청난 반동과 함께 죽창이 튕겨졌다.
하지만 이 몸은 민첩 수치가 천 대.
정확히는 1065다.
재빨리 적의 위치를 조준선에 담았다.
그 사이 두 번째 적이 쓰러졌다.
그것은 곧 두 번째 살인을 뜻했다.
◎ 특기 ‘불굴(不屈)’이 발동됩니다.
“후우.”
한 번의 호흡으로 평정심을 되찾았다.
이번에도 ‘불굴’이다.
다른 특기와 달리 연원을 파악할 수 없는 유일한 녀석이다. 그리고 그 능력은 다른 특기가 따라잡을 수 없을 만큼 대단했다.
‘이상해. 아주 이상해.’
지금껏 알려진 혈랑회의 죄업만 해도 동정심은 사치였다. 아마 숨겨진 죄업까지 드러난다면 아무리 착한 사람도 돌을 던지지 않을 수 없으리라.
그만큼 나쁜 놈들이다.
하나 그것과 살인은 별개였다.
‘두렵지가 않아.’
그러니 죄책감도 없다.
남천휘는 미간을 좁혔다.
‘처음이 아닌 건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이 또 한 명의 적이 나타났다.
이번에는 등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 주변을 경계하며 빠르게 움직였다.
의아함과 별개로 저격의 정밀함은 유지됐다.
텅-
적은 세차게 검을 휘둘렀다.
육안 상 확인되는 적의 레벨은 34.
한 마디로 절정고수였다.
‘그래도 한 방!’
남천휘의 예언처럼 죽창에 실린 힘은 30레벨 정도가 버텨낼 수 없을 만큼 강맹했다. 굉음과 함께 죽창이 산산조각 났다. 수백 개의 파편은 그대로 암기가 되어 적의 온 몸을 휩쓸었다. 질풍뇌격궁의 부가 기능인 내공전달력 상승이 발휘된 듯했다.
‘하아, 이걸 아무데서나 쓸 수 있다면 도법 따위는 당장 때려쳤을 텐데!’
하나 제약이 너무 많았다.
남천휘가 아쉬워하는 사이 성소 포인트가 적립됐음이 알려졌다.
즉사다.
적은 세 명이나 쓰러졌음에도 물러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꽈드득.
남천휘는 질풍뇌격궁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여기는 내 땅이야. 사유지라고!’
물론 세금은 내지 않는다.
*
남천휘는 시간이 흐를수록 저격 모드에 대한 숙련도를 높였다.
네 번째 죽창은 성공.
다섯 번째 죽창은 실패.
‘쳇!’
다섯 번째 무인은 대응하는 대신 회피를 택했다.
그리고 그것이 목숨을 살렸다.
지이이이잉-
그 순간 저격 창 위쪽에 막대가 생성됐다.
다섯 개의 죽창을 소모했으니 재장전을 하는 게다.
혹시나 해서 활시위에 죽창을 걸었다
한데 느낌이 달랐다.
저격 모드가 활성화됐음에도 손끝이 굳은 것처럼 감각이 사라졌다.
‘······.’
불현 듯 저격 상태의 단점이 뇌리를 스쳐갔다.
배후를 잡히거나, 기습을 당한다면 생사를 장담할 수 없을 터였다.
‘마지막 화살은 신중하게 써야겠어.’
재장전을 하는 동안은 무방비 상태나 다름없었다.
다행히 적은 그것을 모른다.
만약 남천휘의 상태를 알았다면 산개하여 동시에 달려들었을 것이다.
그 광경을 상상하는 순간 소름이 돋았다.
“후우.”
심호흡으로 마음을 가라앉혔다.
‘괜찮아. 지형의 유리함은 내 쪽에 있어.’
그는 어둠 속에 있고, 적은 밝은 곳에 존재했다.
또한 저들은 자신의 정체는 물론이고, 머릿수조차 확신할 수 없는 상황이 아닌가.
혈랑회는 그래서 무리하지 않았다.
평범한 흑도 패거리와 달리 체계적인 훈련을 받았기에 변수를 즐기지 않는 게다.
‘나한테는 잘 됐지.’
어차피 시간은 그의 편이다.
슬쩍 시야 상단의 시간을 살폈다.
성소의 안정화를 위한 대기 시간은 한 시진.
벌써 반 시진 가까이 지난 상태였다.
잠시 후 기계음과 함께 재장전이 완료됐다.
‘이 느낌이야.’
죽창을 활시위에 거는 순간 감각이 확장되는 것처럼 예민해졌다.
‘여섯 명 남았는데······.’
남천휘는 경계를 늦추지 않은 상태로 전방을 주시했다. 이제 반 시진 정도만 버티면 이곳을 떠날 수 있는 상황이다. 그리고 적은 여전히 포탄처럼 쇄도하는 죽창을 경계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칠석에 서로를 바라보기만 해야 하는 견우와 직녀처럼 지냅시다.’
활시위를 늦췄다.
하나 여전히 시선은 적도들을 향했다
생각해 보면 꽤 어색한 대치였다.
남천휘는 저들이 혈랑회라는 것만 알 뿐이다.
반면 저들은 곡부남가의 누군가라고만 짐작할 뿐 남천휘임을 확신하지 못했다.
혈랑회는 아마 그들이 예상하지 못한 고수라도 나타난 것으로 여길 터였다.
‘엄청난 고수로 여겨줬으면 좋겠는데.’
남천휘는 손가락을 튕겨 천품육포를 꺼냈다.
그렇게 몇 개의 육포 조각을 해치웠다.
‘아! 술 한 잔 생각나네.’
앞으로 인벤토리를 더욱 활용해야겠다.
술도 넣고, 물도 넣고, 고기도 넣고, 침낭도 넣고.
인벤토리의 공능이라면 도둑왕도, 노숙왕도 꿈은 아닐 터였다.
꿈이 있다는 건 좋은 거야.
남천휘는 육포를 질겅이다가 눈을 가늘게 떴다.
지금껏 잠잠했던 적도들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일단 가장 레벨이 높은 적이 수하들에게 수신호를 보냈다. 게다가 표정만 보면 당장이라도 화살 비 사이로 달려 나올 기세가 아닌가.
‘설마?’
아니나다를까 지금껏 최대한 몸을 웅크리고 있던 적도들이 조금씩 고개를 내밀었다.
‘좋지 않아.’
현재 남아 있는 적은 여섯 명.
저들이 동시에 달려든다면 남천휘로서는 해결책이 전무했다. 한 발씩 쐈다가는 나머지가 더욱 속도를 올릴 터였다. 게다가 그로 인해 저격을 하는 자가 한 명임이 드러나게 된다.
남천휘는 굳은 표정으로 시야 상단을 확인했다.
성소의 안정화까지 남은 시간은 반 각.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이마를 긁적이며 방책을 궁리했다.
하나 창졸간에 활로를 떠올리는 건 쉽지 않았다.
‘쯧. 뭔가 생각날 듯한데······.’
조준경으로 적도들이 움직이는 것을 보고 있기에 더욱 혼란스러웠다.
결국 남천휘는 재이를 찾았다.
◎ 현재 성소 포인트는 1500이옵니다.
적의 이동 속도를 늦춘 것처럼 성소 포인트를 사용하라는 뜻이다.
하나 그것만으로는 미진했다.
그 순간 남천휘의 안색이 조금은 밝아졌다.
‘그렇지! 머리가 안 굴러가면 굴러가게 만들어야지.’
미사용 능력치 30개를 모조리 지혜에 쏟아 부었다.
그 결과 지혜 수치는 155가 됐다.
머리가 맑아졌다.
그래봤자 북풍상단의 오 선생과 비교하면 조족지혈의 수치가 아닌가. 변설 특기를 얻었을 때 습득한 정보에 의하면 오 선생의 지혜 수치는 500이 넘을 터였다.
‘휴, 갈 길이 멀구만.’
하나 없는 것을 아쉬워해봐야 무소용이다.
남천휘는 조금이나마 맑아진 머리를 굴려 방책을 궁리했다.
‘이거다!’
그는 황급히 저격을 풀었다.
질풍뇌격궁을 잠시 내려놓고, 인벤토리에서 죽창을 꺼냈다. 다섯 개의 죽창을 나란히 꽂아 놓고 다시 활을 잡았다.
‘잠깐 연달아 쏘려면 손에 잘 잡혀야 할 테니······.’
다시 저격을 해제했다.
그리고 직도를 뽑아 죽창의 끝 부분을 파버렸다.
이러면 급히 활시위에 걸어도 조준하기 쉬우리라.
그 때 가장 레벨이 높은 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대놓고 쏴달라는 모양새다.
하나 남천휘는 기다렸다.
저 자는 적도 중에서 가장 고수가 아닌가.
미끼를 자처한 것이 분명했다.
‘넌 꺼져! 똘마니나 풀어놔라.’
그 순간 고수가 빠르게 내달렸다.
동시다발적으로 다섯 명의 적도가 그 뒤를 쫓았다.
끼이이익!
남천휘는 빠르게 활시위를 튕겼다.
반동과 함께 죽창이 발사됐다.
재빨리 조준경을 확인한 후 옆에 놓았던 죽창을 활시위에 걸었다.
동시에 적선단과 벽선단을 흡입했다.
체력과 내공이 회복되며 다시 한 번 죽창이 튕기듯 허공을 날았다.
텅! 텅! 텅!
모두 네 개의 죽창이 쇄도했다.
한데 시간차를 두고 활을 쐈음에도 네 개의 죽창은 동시다발적으로 꽂혀드는 것이 아닌가.
쇄애애애애액-
이것은 모두 남천휘의 의도대로다.
첫 죽창은 칠 할의 힘과 내공을 담았다.
두 번째는 팔 할, 세 번째는 구 할, 네 번째 죽창에 전력을 다했다. 게다가 죽창을 튕길 때마다 활대의 방향을 조금씩 바꿨다.
그 결과 여러 명이 활을 쏜 듯한 광경이 만들어졌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남천휘는 죽창이 적도의 지척에 이르렀을 때 빠르게 읊조렸다.
‘성소 포인트 사용!’
《풍혈의 성능이 향상됐습니다.》
- 성소 포인트 1000을 소모했습니다.
- 반응속도 10% 저하가 추가됩니다.
그 순간 적의 움직임이 한순간 느릿해졌다.
가장 강한 적은 피하는 대신 검기를 발출했다.
죽창은 산산이 부서졌다.
콰쾅!
세 개의 죽창 중 두 개는 땅에 박혔고, 한 개의 죽창만이 적도의 심장을 꿰뚫었다.
적도들은 예기치 못한 공세에 돌진을 멈추고 좌우로 흩어졌다.
남천휘의 입매가 치솟았다.
‘됐다!’
단순히 죽창을 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절체절명의 순간 적의 반응속도까지 늦췄다.
그렇기에 저들이 이리도 혼란스러워하는 게다.
아마 진법을 떠올리고 있지는 않을까 싶다.
“후우.”
하나 남천휘의 미소는 오래가지 못했다.
연사로 인한 능력 수치의 하락은 엄청났다.
민첩을 제외하면 모든 수치가 한 자리 대로 떨어졌을 정도였다.
남천휘는 황급히 적선단과 벽선단을 흡입했다.
그제야 거칠었던 호흡이 안정되는 듯하다.
그 순간 간절히 기다렸던 한 마디가 들려왔다.
《성소의 각인이 완료되었습니다.》
- 성소가 안정화됐습니다.
- 보상이 지급됩니다.
- 최초로 침입자를 격퇴하였습니다.
- 보상이 지급됩니다.
착!
남천휘의 손에서 질풍뇌격궁이 사라졌다.
지금 중요한 건 보상이 아니다.
‘튀자!’
잠시 후 혈금채의 채주가 머물던 곳에서 밧줄에 묶인 죽창이 치솟았다. 죽창은 절벽 너머로 사라졌지만, 밧줄은 길게 늘어졌다. 이내 하나의 인영이 밧줄을 타고 빠르게 자취를 감췄다.
《남천휘가 영역을 벗어났습니다.》
《히든 모드 ‘저격’이 해제됩니다.》
《특기 ‘유지’와 ‘탐지’가 해제됩니다.》
《성소는 대기 모드로 전환됩니다.》
《주변 대기를 끌어 모아 자동으로 성소 포인트 적립을 시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