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다 죽여 버리겠다!
24, 다 죽여 버리겠다!
“설마 나를 눈치 챈 걸까?”
혈랑회의 부회주는 수풀 너머로 사라지는 남천휘와 북풍대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대동했던 수하가 괴이한 웃음을 흘렸다.
“클클, 그럴 리가요. 그냥 주변을 살펴본 것입니다. 이십여 장은 족힌 떨어진 거리입니다. 저 어린놈이 부회주를 눈치 챌 수 있을 리가 없지요.”
“흐음.”
부회주는 수하의 아부에도 침묵했다.
그의 뇌리에는 혈금채의 부채주를 농락하던 남천휘의 모습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얼마 전까지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았던 놈이었다. 한데 갑자기 두각을 드러내더니 저처럼 묘한 수법까지 쓸 줄이야.’
혹여 곡부남가에서 키우는 비밀병기일 수도 있겠다는 추측을 했다.
부회주는 입맛을 다셨다.
'그냥 칠 걸 그랬나?'
본래 남천휘가 부채주를 쓰러트렸을 때 수하들과 함께 기습을 하려 했다.
한데 생각보다 싸움은 빨리 끝났고, 이내 자신이 있는 방향을 쳐다보는 것이 아닌가. 잠시 망설이던 사이 북풍대까지 나타났기에 기습을 포기했다.
탁월한 선택이었다.
그러나 마음 한 구석은 어딘가 모르게 찜찜했다.
“어쨌든 혈금채를 미끼로 던진 보람은 있지 않습니까? 이제 놈들은 밤에도 잠을 자지 못하고 경계를 서야 할 겁니다. 놈들이 완전히 지쳤을 때 혈랑회가 들이친다면 이번 의뢰도 식은 죽 먹기지요!”
부회주는 수하를 향해 돌아섰다.
그리고 대뜸 뺨을 후려쳤다.
“방심하다가 뒈지고 싶냐? 너희들은 회주의 날카로운 이빨이야. 물라고 할 때까지 이빨이나 갈고 있어.”
수하는 입안을 가득 채운 핏물을 뱉지도 못한 채 무릎을 꿇었다.
“존명.”
부회주는 거칠게 숨을 흘렸다.
자신도 수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못내 불쾌하기만 했다.
“회주께 돌아간다.”
*
“공자!”
남천휘는 돌아오자마자 앉지도 못한 채 눈물범벅이 된 소혜를 마주했다. 그녀는 남천휘의 소매를 부여잡고 울먹였다.
“왜 혼자 가신 거예요? 아까 피가 막 튀고!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는데 정신이 하나도 없었어요. 그런데 겨우 눈을 뜨니까 공자는 저 멀리 숲으로······.”
잠깐! 지금 내 소매에 묻은 건 눈물이 아닌데.
눈물치고는 너무 끈적거리잖아.
어! 너 지금 코 푸냐?
“쿠헤헹. 괜찮으세요?”
참 빨리도 물어보는 착한 소혜였다.
“산적 나부랭이한테 안 괜찮을 건 뭔데?”
남천휘의 호기로운 한 마디에도 소혜는 이곳저곳을 확인했다. 그 모습이 왠지 옷에 구멍이 났을까 걱정하는 사람 같았다.
아까 산속의 이상한 느낌처럼 이것 또한 나만의 착각이겠지.
“이리 오세요.”
소혜는 뒤늦게 남천휘를 앉히더니 물통을 건넸다.
“다음부터는 혼자 위험한 곳에 가시면 안 돼요.”
“알았어.”
“어머! 칼에 묻은 거 피잖아요.”
이미 부채주가 피범벅일 때부터 예상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피! 피야!”
소혜는 울상을 지은 채 입술을 삐죽였다.
이러다 또 울겠다.
그러면 비가 올 테고, 마차는 진창을 헤치며 나아가야겠지.
남천휘는 대수롭지 않게 칼을 내밀었다.
“내 피 아냐.”
“그래요? 다행이다. 제가 닦아드릴 게요.”
그러렴. 우는 대신 칼이라도 닦아다오.
한데 소혜는 직도를 받아들더니 봇짐에서 숫돌과 천을 꺼내는 것이 아닌가.
“네가 그런 걸 왜 들고 다녀?”
남천휘의 물음에 소혜는 소매로 콧물을 훔치더니 헤죽 웃었다.
“헤헤, 제 임무가 삼공자를 보필하는 거예요. 제가 단순히 바느질만 할 줄 알았다고 생각하신다면 완전 오산이십니다! 저는 공자를 위해 뭐든지 할 수 있다고요. 그러니 제가 날을 갈아 드릴 게요.”
예상외의 능력인 걸.
그러고 보면 소혜는 참 못하는 것이 없는 듯했다.
애초에 자신의 성격을 받아주며 옆을 지켜준 것부터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지 않은가.
삭삭삭삭-
그녀는 자신의 보물을 대하듯 직도를 품고 열심히 피를 닦았다. 그리고 숫돌에 물까지 묻혀서 정성스럽게 날을 갈기 시작했다.
스윽- 스윽-
남천휘는 그 모습을 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기특한 녀석.’
그 때 재이의 알림이 들려왔다.
◎ 직도의 내구도가 1 하락했습니다.
*
혈금채의 부채주는 아는 것을 모조리 털어놓았다.
홍춘이는 표정을 굳혔다.
“그러니까 혈랑회가 나타났다고?”
“예! 그렇습니다. 놈들이 채주를 인질로 잡고 곡부남가와 싸우라고 협박을······.”
퍽!
부채주가 비명과 함께 나뒹굴었다.
남천휘에게 두들겨 맞고, 칼까지 맞은 상태였다.
“으거거거거!”
홍춘이는 부채주의 멱살을 잡았다.
부채주의 비명은 홍춘이의 서늘한 눈빛을 마주하는 순간 사그라졌다.
“너 이 새끼! 인질? 협박? 지랄하지 마. 네가 채주가 되고 싶어서 넘긴 건 아니고? 어차피 여기서 너 불쌍히 여기는 사람 없어. 그러니 아가리 닥치고 똑바로 말해. 진짜 혈랑회가 나타났냐?”
“네, 네. 그렇습니다. 오십 명 쯤 되는 것으로 보아 모조리 몰려온 것이 분명합니다.”
홍춘이는 그제야 부채주를 풀어줬다.
부채주는 상처를 부여잡고 끙끙 앓는 소리를 냈다.
“금창약이라도 발라주십시오. 죽을 것 같습니다.”
홍춘이는 금창약이 든 대통의 마개를 열었다.
부채주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금창약은 고통을 완화하고, 피의 응고를 돕는다.
“고맙······. 푸흡!”
부채주는 손사래를 쳤다.
홍춘이가 금창약을 대충 흩뿌렸기 때문이다.
그는 금창약을 뱉느라 여념이 없는 부채주를 보며 수하에게 턱짓을 했다.
“몸값을 받고 넘길 거니까 잘 감시해라.”
북풍대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다가왔다.
그는 홍춘이가 멀어지자 부채주에게 말을 건넸다.
“송우평이야.”
“네, 네?”
“너한테 칼 맞은 등신 같은 놈. 내 일 년 후임이지. 그리고 두어 달 전에 내 여동생하고 혼인했어. 이 개새끼야.”
부채주는 오만상을 지은 채 몸만 벌벌 떨었다.
그 때 대원의 서늘한 한 마디가 들려왔다.
“지금부터 손끝 하나 움직일 때마다 한 대씩이다.”
*
무언가에 집중하는 사람의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땀방울만큼 아름다운 것이 어디 있을까.
소혜는 참으로 열심히 칼을 갈았다.
남천휘는 잠시 후 자신의 손으로 돌아온 직도를 쓰다듬으며 읊조렸다.
‘확인.’
직도의 내구도는 8이다.
부채주를 상대하며 6까지 떨어졌던 내구도가 2나 상승했다.
남천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공자, 어때요? 반짝반짝하지요.”
소혜는 이마에 송글송글 맺힌 땀을 닦으며 말했다.
뿌듯해하지 마!
하마터면 못쓰게 되어버릴 뻔 했다고.
어찌됐든 내구도를 2나 올린 건 소혜가 아닌가.
물론 시간 대비 효율은 따지는 것이 무의미할 정도였다.
“그래, 고생했다.”
남천휘는 건성으로 대꾸했다.
하나 소혜는 그것만으로도 뭐가 그리 좋은지 배시시 웃는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절로 헛웃음이 나왔다.
“이거 먹을래?”
남천휘는 육포를 떠올리며 손을 내밀었다.
소혜는 천품육포를 두 손으로 받더니 조금씩 뜯어서 오물거렸다.
“맛있어?”
“네! 땀을 흘린 뒤에 먹는 음식은 언제나 옳지요!”
알았으니까 뿌듯해하지 마.
네 땀은 옳지 않았어!
소혜와 대화할수록 머릿속이 혼미해졌다.
다행히 제정신을 가진 사람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삼공자.”
남천휘는 홍춘이의 표정을 보고 상황이 그리 좋지 않음을 눈치 챘다.
“심문은 끝났나요?”
“생각보다 귀찮은 자들이 개입했습니다.”
“혈금채 뒤에 누가 있나요?”
홍춘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혈랑회라고 아십니까?”
알 리가 있나.
‘나는 우리 집 건물도 다 모른다고.’
혈랑회(血狼會)는 이름처럼 본거지가 없이 떠도는 낭인집단이다. 산동성 북부에 처음 모습을 드러냈고, 원검문이라는 중소방파가 멸문했다.
심증은 있지만, 증거가 없는 상황이다.
그러니 혈랑회에 대한 평판은 바닥을 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놈들은 수년 가까이 산동성을 배회했다. 살인청부와 표물 운송은 기본이고, 문파 간의 다툼에 낭인으로 참전한 적도 있었다.
즉 홍춘이가 말했던 필요악과 같은 존재였다.
자신의 손을 더럽히고 싶지 않을 때, 또는 은밀히 흉계를 꾸밀 때 쓸 만하다는 평이 지배적이다.
남천휘는 혈랑회에 대한 설명을 듣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놈들이 왜 우리를 노립니까?”
“거기까지는 알 수 없습니다. 중요한 건 혈랑회는 한 번 물면 놓지 않습니다. 의뢰를 받은 이상 반드시 실행할 놈들이지요.”
남천휘는 눈을 가늘게 떴다.
무언가 뇌리를 간질이는 것이 있다.
답답할 때에는 레벨 업이 즉효다.
하나 경험치가 없으니 능력치라도 올려야겠다.
능력치를 지혜 수치에 투자했다.
그 순간 머리가 맑아지며 이리저리 섞여 있던 실타래가 풀렸다.
“미끼군요.”
“네?”
남천휘는 시야 상단에 위치한 지도를 살폈다.
가보지 않은 길이기에 까맣게 칠해졌으나, 경유지만은 점과 이름으로 표기가 되어 있었다.
“오늘 저녁에 묵을 곳이 장평마방이라 했지요?”
“네, 곡부남가와는 이빨과 잇몸 같은 관계지요.”
“장평마방을 지나면 태산입니다. 노숙을 해야 할 것이고, 다음 경유지까지는 삼사일을 가야 합니다.”
홍춘이는 그제야 짚이는 바가 있는 듯했다.
“설마 우리가 지치기를 기다리려는 걸까요?”
남천휘는 고개를 끄덕였다.
“혈랑회가 개싸움만 하는 자들이었다면 당장 들이닥쳤을 겁니다. 하나 놈들은 수 년 간 흔적을 남기지 않고 악행을 저질렀다면서요. 그렇다면 머리를 쓰는 놈들입니다. 실제 늑대가 먹잇감을 궁지에 몰 듯 괴롭히겠지요.”
“흐음, 그렇다면 혈랑회의 존재도 놈들이 스스로 알려줬겠군요.”
“태산에서 우리가 밤낮으로 경계하는 것을 지켜보다가 지쳤을 때 일거에 들이닥쳐 목을 물어뜯겠지요.”
홍춘이는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내뱉었다.
‘삼공자의 협심도 대단하지만, 대국을 보는 시야 또한 엄청나구나. 이리 똑똑한 분인 줄 누가 알았겠는가. 강하고, 똑똑하고, 협의지심까지 있으니······.’
이것이야 말로 대협의 기상이며, 영웅의 풍모가 아니겠는가.
그는 헛기침을 하며 말을 이었다.
“크흠! 당장 사람들을 불러야겠습니다.”
*
홍춘이는 북풍표국과 북풍상단의 책임자를 모았다.
상단의 대표는 오용으로 오 선생이라 불렸고, 표국의 대표는 소대성이라는 표두였다.
두 사람의 인상만 봐도 성향이 극명하게 나뉘었다.
오용의 얼굴에는 고집이 가득했고, 소대성은 이 자리가 불편한 듯 연방 엉덩이를 들썩였다.
“혈랑회가 나타났다면서요? 이대로 있어도 되는 겁니까? 지금이라도 돌아가는 것이······.”
표두는 앓는 소리를 냈다.
처음부터 느꼈지만, 표사들을 이끄는 표두 치고는 숫기가 없다. 계집애처럼 눈치만 보는 것으로 보아 표국 내에서도 딱히 두각을 드러내는 실력자는 아닌 듯했다.
‘왕 표국주는 왜 저런 사람을 내보낸 거야?’
홍춘이는 혀를 찼다.
슬쩍 고개를 돌리니 진중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남천휘가 보였다.
‘삼공자는 이런 자리가 처음일 텐데 표정의 변화가 없구나. 심지가 굳건하신 게지.’
하나 남천휘 또한 이 자리가 불편했다.
지금쯤 부채주의 몸에서 꺼낸 것들을 적립하고, 싸움으로 얻어낸 것을 정리해야 할 때가 아닌가.
‘일단 박도는 적립했고.’
부채주의 박도는 쓸만했다.
적립하기 전 설명을 보니 십여 년 가까이 애지중지했던 무기라고 하더라.
그러가 보니 소장 가치가 예상보다 높게 떴다.
그 덕에 현재 VIP 포인트는 40점이다.
목걸이나 각반과 같이 자질구레한 물품까지 모조리 적립한 결과였다.
‘문제는 이건데······.’
그는 손가락 사이에 낀 낡은 천을 살폈다.
이것은 부채주의 소매를 찢어낸 조각이다.
알고 보니 소매 뒤쪽에는 조잡한 그림이 존재했다.
그리고 그것은 누가 봐도 보물지도였다.
‘혈금채가 오 년 넘게 여기서 해먹었다고 했지?’
그렇다면 지난 몇 년 동안 쌓아놓은 금품이 제법 되지 않을까 싶었다.
‘지금쯤 산채가 텅텅 비어 있을 테니······.’
남천휘의 머릿속에는 금은보화가 산처럼 쌓인 비밀 창고가 그려졌다.
‘먼저 먹는 게 주인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