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산적은 좋은 영양분이지요. (2)
어쨌든 비운고에서 얻어온 직도의 내구도가 벌써 절반이나 깎여버렸다. 두 배 경험치를 받았던 날부터 아낌없이 휘둘렀기 때문이다.
‘아껴서 써야해.’
가치 7의 무기에 숫돌을 사용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그 사이 산적 한 명이 허공에서 내리꽂혔다.
그래봤자 무릎 높이만큼 뛴 것에 불과했다.
예를 들면 폴짝 같은 느낌.
어찌됐든 박도에 실린 힘은 평소보다 강할 터였다.
남천휘는 뒷발을 빼고 자세를 낮춘 후 양 손으로 쥐고 있던 직도를 그대로 들었다.
콰직!
직도의 손잡이에 달린 쇠고리에 턱을 얻어맞은 놈이 대자로 뻗어버렸다.
《레벨이 상승했습니다.》
얼씨구! 17이다.
이러다 20이라도 찍을 기세였다.
“부채주를 지켜라!”
산적에게 어울리는 대사는 아니었다.
그보다 너네 부채주는 꼬리에 불붙은 망아지처럼 도망치고 있단다.
“그러니 비켜!”
남천휘의 좌권이 산적의 턱에 직격했다.
입술이 비틀리며 침과 피로 범벅된 이빨이 첫 눈처럼 흩날렸다.
“삼공자!”
홍춘이의 외침은 귓등으로 흘려보냈다.
지금은 경험치를 쓸어 담기에도 바빴다.
퍽! 퍽!
한 방에 한 놈씩.
마치 며칠 동안 굶은 사람처럼 허겁지겁 산적을 두들겨 팼다.
이제 스무 명 남짓 쓰러졌고, 열 명쯤 남았다.
한데 두 다리로 서 있는 놈들 중 절반은 등을 보인 채 도주했고, 나머지는 투기를 잃고 박도를 내려놓는 것이 아닌가.
‘어? 그러지 마!’
가장 허약해 보이는 산적이 박도를 재빠르게 내려놓더니 손을 번쩍 들었다.
“항복하겠습니다.”
이 자식아! 산적의 기개는 어디로 팔아먹었냐?
항복은 마치 전염병처럼 퍼져나갔다.
남천휘는 박도를 내려놓으려는 산적을 향해 황급히 다가섰다.
“항······.”
빠각!
남천휘는 쓰러진 산적을 뒤로 한 채 이마의 땀을 닦았다.
‘아슬아슬했어.’
하나 그 사이 남은 산적들은 모두 박도를 내려놓은 채 무릎을 꿇었다.
“삼공자, 괜찮으십니까?”
홍춘이가 다가왔다. 그는 검으로 무릎 꿇은 산적들을 겨눈 채 서늘한 눈빛을 토해냈다.
남천휘는 홍춘이의 검에 피가 묻은 것을 확인하고 미간을 찡그렸다.
‘내 몫을 빼앗아가다니······.’
그렇다면 남은 경험치라도 챙겨야 했다.
그는 호흡을 조절하기 무섭게 도망치는 산적들을 뒤따랐다.
“삼공자!”
그만 불러! 지나가는 멧돼지도 내가 곡부남가의 셋째 아들인 줄 알고 인사하겠다.
남천휘는 오행군림보를 펼치며 빠르게 나아갔다.
손에 잡힐듯말듯한 산적들을 보며 본능적으로 깨우쳤다.
레벨 업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놓치지 않을 거예요!’
남천휘는 표독스런 표정으로 더욱 빠르게 나아갔다.
하나 산적들은 홍춘이에게 잡혔던 시간만큼 거리를 벌린 상태였다.
‘젠장!’
불현 듯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상태창!’
두 번의 레벨 업으로 추가 능력치 40개가 쌓여 있었다.
20개를 민첩에 투자했다.
‘오오오!’
남천휘는 그 순간 바람을 느꼈다.
바람과 바람 사이를 내달리는 묘한 느낌.
그 순간 한참 떨어졌던 산적의 뒤통수가 코앞까지 다가왔다.
빠각!
산적은 경쾌한 타격음과 함께 뒤통수를 부여잡은 채 나자빠졌다.
“단 한 놈도 놓치지 않는다!”
남천휘는 벅찬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일갈을 내질렀다. 하나 이내 자신의 경솔함을 후회할 수밖에 없었다. 그냥 뛰던 산적들이 이제는 죽을힘을 다해 도망치는 것이 아닌가.
‘젠장! 상태창!’
어쩔 수 없이 상태창을 열어 다시 민첩에 투자했다.
‘오오오!’
그 순간 다시 한 번 바람을 느꼈다.
후회는 금세 잊혔고, 호기가 치솟았다.
그래도 괜히 도발은 하지 말자.
“하하하하!”
뒤에 남은 홍춘이는 남천휘의 호방한 웃음을 들으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삼공자의 협심이 저 정도였던가?’
분명 산적들은 필요악이라 했음에도 용납지 않는 저 모습을 보라. 불의와 타협하려던 자신의 모습이 너무도 초라했다.
“크흑! 너희 다섯은 나를 따르라! 삼공자를 보좌한다!”
“존명!”
세 놈 째에 기다렸던 레벨 업 알림이 울렸다.
이제 18레벨이다.
그리고 가장 먼저 도망쳤던 부채주가 십여 장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응?’
남천휘는 보법을 펼치는 와중에 침음을 흘렸다.
이름 : ???(20)
지위 : 혈금채 부채주.
이름도 모르고 성도 모른다.
오직 레벨과 지위만 보일 뿐이다.
이제는 익숙한 광경이었다.
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천휘는 부채주의 머리 위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이름과 지위를 나타내는 부분이 모조리 붉은 색으로 번들거렸다.
“저런 건 처음 보네.”
띠링-
◎ 카오틱 성향의 적을 발견하셨습니다.
- 처치 시 아이템 귀속이 가능합니다.
상태창의 목록 중 성향이라는 것이 있다.
남천휘의 성향은 조건부 선(善)이다.
대수롭지 않게 여겼기에 치워버렸다.
어찌됐든 선의 원래 용어는 라우풀, 그리고 악(惡)을 가리켜 카오틱이라 표현했다.
즉, 저 놈은 악인이다.
보통 지속적인 악행을 저지른 자의 정보는 붉게 표현이 된단다. 부채주의 경우 북풍대원에게 부상을 입혔기에 일시적으로 카오틱 상태로 전락한 것이다.
하나 남천휘는 모든 설명을 귓등으로 흘렸다.
‘귀속?’
요즘 들어 남천휘의 관심사는 VIP 포인트다.
포인트 적립을 위해서는 반드시 소유물로 인정된 물품이어야 했다. 한데 귀속이라면 곧 자신의 것이 된다는 뜻이 아닌가.
부채주의 허름한 외모에서 빛이 나는 듯했다.
거리를 좁히기 위해서 영혼이라도 팔겠어.
“상! 태! 창!”
어쩔 수 없이 민첩을 또 올렸다.
다른 능력치가 100 초반인 것에 비해 민첩 수치만 150을 찍었다.
그리고 그 효과는 즉시 발동했다.
타타탓!
자갈이나 뾰족한 돌 위를 내달려도 균형이 흐트러지지 않았다. 비탈길임에도 가장 빠른 속도를 낼 수 있는 자세를 취했다.
단순히 속도만 빨라진 것이 아니다.
바람을 가르고 스쳐가는 주변 풍광이 한눈에 들어왔다. 의도하지 않아도 몸이 기억하고, 반응하기 시작했다. 그 동안 민첩 수치에 대해서 너무 단순하게 생각한 것이 아닐까 싶다.
‘그건 나중에 생각하고!’
남천휘는 부쩍 가까워진 부채주의 등을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잡았다! 요놈.”
현재 레벨 18.
부채주의 레벨은 20이다.
그렇기에 남천휘는 거리낌 없이 손을 뻗었다.
이미 북풍대 부대주인 29레벨의 벽추를 이기지 않았던가.
‘약빨이었지만.’
한데 그 순간 부채주가 나무를 박차며 허리를 비틀었다. 허리춤에서 채찍처럼 휘어지던 박도가 남천휘의 목을 노렸다.
제대로 된 기습이다.
평소였다면 당황하며 걸음을 멈추거나, 경로를 비틀었으리라.
하나 남천휘는 이미 부채주가 나무를 박차기 위해 발을 뻗는 순간 직도를 뽑았다. 이성이 아니라 본능에 맡긴 움직임이다. 동시에 자세를 한껏 낮춘 채 앞발에 힘을 실었다.
쉬이이익!
그 순간 박도가 머리 위를 스쳐갔다.
남천휘는 박도가 아닌 자신의 오행군림보의 표식만 살폈다. 중심축이 앞쪽으로 향하는 순간 허리를 비틀었고, 뒷발이 호선(弧線)을 그리며 미끄러진다.
자연스레 상체의 움직임을 따라 직도가 횡으로 그어졌다.
촤악!
직도에 충격이 거의 없다.
하나 직도의 날을 따라 옅은 핏물이 흩뿌려졌다.
‘얕아.’
남천휘는 나직이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두 발을 띄웠다. 부채주의 발아래 나타난 표식을 밟으려면 이것이 최선이다.
파팟!
두 발은 마치 돌려차기처럼 순차적으로 부채주의 가슴을 노렸다. 부채주는 침음을 흘리며 있는 힘껏 상체를 뒤로 했다.
하나 애초에 표식을 위한 움직임이다.
남천휘의 두 발이 땅에 닿는 순간 경쾌한 알림이 들려왔다.
띠리링-
완벽이라는 두 글자가 빛으로 변하며 흩어졌다.
스스로도 놀랄 만큼 엄청난 균형 감각이 아닌가.
“헉!”
부채주는 자신의 앞에 선 남천휘를 확인하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하나 그는 놀라는 대신 반격을 하거나 거리를 벌려야 했다.
남천휘의 왼손은 이미 직도의 손잡이에 달린 고리를 파고들었다. 왼손 검지가 고리를 감싸는 순간 직도가 아래에서 위로 솟구쳤다.
수천 번은 연습한 칠도격이다.
그 순간 부채주의 앞가슴에서 피가 분수처럼 솟아났다.
으아악!
그로서는 상상도 하지 못했을 고통이었으리라.
대저 남의 고통을 하찮게 여기는 사람은 자신의 고통에 민감한 법이다.
그러니 다시 둔감하게 만들어줘야겠다.
빠각! 퍽! 퍽! 퍽!
오른 주먹이 명치를 파고들었고, 왼손으로 바꿔 쥔 직도의 끝으로 관자놀이를 후려쳤다.
“컥!”
부채주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더니 주저앉았다.
남천휘는 쓰러지는 부채주의 멱살을 쥔 채 거칠게 호흡했다.
“후우. 후우.”
그 순간 직도의 날 끝에서 방울져 떨어지는 핏물이 보였다. 반쯤 정신이 나간 부채주의 앞섬이 붉게 물든 것이 확인했다.
죄책감은 없다.
북풍대 대원을 향해 거침없이 칼을 휘두르던 놈이 아닌가. 게다가 산적 중에서 유일하게 카오틱 성향을 띄던 자였다.
놈에게 살인은 그리 낯선 결과물이 아닐 것이다.
하나 그것과 별개로 의아했다.
‘피를 보는 게······.’
두려움이나 거부감의 문제가 아니었다.
'낯설지 않아.'
머릿속이 복잡했다.
왜 이렇지?
쉽게 생각하면 특기 ‘불굴’의 위력이라 여기면 될 터였다. 한데 만약 그렇다면 이토록 대단한 ‘불굴’은 어디에서 왔단 말인가.
남천휘는 미간을 좁힌 채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재이. 내가 불굴을 어떻게 얻은 거지?’
답답한 마음에 그냥 물어봤을 뿐이다.
한데 재이는 뜻밖의 대답을 토해냈다.
◎ 대상자의 현재 레벨에서는 확인이 불가능합니다.
빌어먹을!
낯선 감정으로 인한 답답함에 온 신경이 곤두섰을 때였다.
뒤통수를 간질이는 듯한 묘한 느낌.
이걸 뭐라고 설명해야 하나?
조롱, 적의, 살기, 관조.
그 밖에도 여러 느낌이 섞인 시선이 느껴졌다.
‘아닌가?’
남천휘는 주변을 휘휘 둘러봤다.
울창한 산림과 삐죽 솟은 봉우리가 병풍처럼 사방을 가득 채웠다.
그러고 보니 제법 멀리 들어온 셈이다.
‘호랑이라도 나타나면?’
레벨 업!
호랑이 잡고 호랑이 기운이 솟아나겠지.
그 때 북풍대의 이조장인 홍춘이가 대원들과 나타났다.
“삼공자! 괜찮으십니까? 엇! 저 새끼는!”
남천휘가 부채주를 내밀자, 홍춘이의 눈에서 불길이 솟구쳤다.
“삼공자의 보법은 참으로 대단하군요.”
남천휘는 피식 웃으며 부채주를 건넸다.
한데 홍춘이는 이내 표정을 굳혔다.
“삼공자. 이곳은 곡부가 아닙니다.”
“아.”
“놈은 처음부터 도주를 염두에 뒀습니다. 평소와 달리 일부러 시비를 건 것 또한 무언가 노림수가 있었겠지요. 자칫 매복에 걸려들 수도 있었습니다.”
남천휘는 말을 잇지 못했다.
재이를 얻은 후 승승장구를 해왔기에 위기감이라는 것은 그리 익숙한 감정이 아니었다.
하나 이곳은 강호다.
강자에게는 꿈과 희망이 넘치는 신세계지만, 약자에게는 지옥이나 다름없는 세상이 아니던가.
그는 홍춘이를 향해 손을 모았다.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앞으로는 유념하겠습니다.”
홍춘이는 손사래를 쳤다.
“아닙니다. 삼공자께서 무탈하셔야 저도 부대주처럼 고기와 술을 얻어먹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남천휘는 직도를 슬슬 흔들며 크게 웃었다.
“그럼 부대주보다 좋은 선물부터 준비하세요.”
“네.”
홍춘이는 시무룩한 표정을 보였다.
남천휘는 그 사이 부채주의 품을 뒤져 쓸만한 물건을 모조리 빼냈다.
그 후에야 부채주는 홍춘이의 손으로 건너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