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역시 천재!
15, 역시 천재!
땅-
경쾌한 쇳소리와 함께 장검이 허공을 날았다.
북풍대의 조장인 양방언(梁方彦)은 연무장 바닥에 꽂힌 자신의 검을 보며 말을 잇지 못했다.
“어라? 이게 왜······.”
그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장검을 굳게 쥐고 있던 손이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전방을 향했다.
그곳에는 남천휘가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방금 초식이 정말 중양칠도의 육도격입니까?”
남천휘는 히죽 웃으며 말했다.
“양 조장도 봤잖아요. 아니던가요?”
“맞습니다. 그건 그런데······.”
그는 그래서 더 이상하다는 말을 억지로 삼켰다.
어찌됐든 곡부남가의 녹을 먹는 입장에서 곡부남가의 무공을 비하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그 때 조상의 웅혼한 일갈이 들려왔다.
“패자는 유구무언이라. 양 조장은 섬영검의 기본 검세 오백 회. 그리고 다음!”
양방언은 검을 주워들고 포권을 했다.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저야말로.”
그가 물러서는 것과 맞물려 북풍대의 또 다른 조장이 연무장 밖에서 걸어 들어왔다.
“클클! 자네, 출세하고 싶었나봐?”
조장 홍춘이(洪春二)의 장난기 섞인 한 마디에 양방언은 인상을 썼다. 두 사람은 격의 없는 사이였기에 악담에 악담을 더하여 대꾸했다.
“우리가 알던 삼공자가 아니야. 자네도 가벼이 여겼다가는 내 꼴이 날 걸? 아! 자네라면 나보다 더 심한 꼴을 당하겠군.”
“쳇, 그래도 기는 살았구만.”
홍춘이는 북풍대의 이조장이다.
삼조장인 양방언보다 호리호리한 체구에 팔다리도 길쭉했다.
섬영검을 익히기에 좋은 체형이다.
하여 일조장을 맡고 있는 부대주의 다음 자리를 자치했을 터였다.
그렇기에 홍춘이는 양방언의 경고에도 여유로웠다.
사십 대 초반의 그는 이십 년 가까이 낭인으로 살아왔다. 그렇기에 섬영검뿐 아니라 또 다른 쾌검도 익힌 상태였다.
‘일류인 내가 삼공자에게 지는 건 말이 안 되지.’
쉬리리릭!
홍춘이가 멋들어지게 검을 돌리며 말했다.
“선수는 양보하겠습니다.”
남천휘는 히죽 웃었다.
“내가 이래서 홍 조장을 좋아합니다. 배포가 있으시거든요.”
“하하하! 별 말씀을요.”
응, 별 말씀이 맞아.
그냥 해 본 소리거든.
‘재이야, 박자 줘. 소리 최대로!’
남천휘가 자세를 취하는 순간 귓가에 웅장한 연주가 시작됐다. 그에게만 들리는 수백 명의 악기 소리는 사기를 고양시키기에 충분했다.
‘처음에는 시끄럽기만 했는데.’
이제는 콧노래를 흥얼거릴 만큼 귀에 익었다.
그 덕에 박자를 타는 것이 숨 쉬듯 자연스러웠다.
파진악에 대한 이해도는 고스란히 숙련도에 반영됐다.
《오행군림보》
- 공간을 선점하는 패도(覇道)적인 보법.
- 내공의 소모가 극심할수록 위력을 발휘함.
- 4급 성장형 (기본 단계 진행 중)
- 숙련도(48/100). (가치 : 200)
가산을 탕진해서 만들어낸 보법이다.
인생을 쏟아부어서 올린 숙련도였다.
그로 인해 오행군림보는 북풍대의 조장들을 상대로 충분한 위력을 자랑했다.
‘따라라아아. 따아, 아!’
남천휘는 콧소리로 발성을 하며 파진악의 박자를 탔다. 그리고 군마가 질주하는 듯한 급박한 박자의 흐름을 타며 발을 내딛었다.
쿵!
청석을 강하게 내리찍는 순간 뒷발은 앞발과의 거리를 좁혔다. 그리고 두 발은 한순간에 방향을 바꾸더니 재차 청석을 밟았다.
쿠쿵!
그 순간 사선으로 짓쳐든 직도의 기세는 강렬했다.
홍춘이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밖에서 보던 것과 속도부터 달랐다.
‘확실히 빠르군. 첫 시작부터 전력인가?’
곡부남가에 전해지는 중양칠도는 매 공세마다 전력을 다해야 했다. 그렇기에 평소의 움직임은 거북이처럼 느릿했고, 전력을 다해야 하는 공격 때에만 속도를 올렸다.
홍춘이는 조금 더 지켜볼 요량으로 상체를 비틀었다. 상체를 비틀며 뒤로 살짝 누웠기에 남천휘의 전력을 다한 일격은 가슴 앞을 스쳐갈 터였다.
그랬어야만 했다.
그게 중양칠도를 펼치는 방식이니까.
쇄애애액!
한데 눈앞에서 직도가 사라졌다.
남천휘가 중간에 직도를 거둬들인 것이다.
즉 그가 전력을 다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허초?’
잠깐! 중양칠도에 허초가 있었던가?
‘있을 리가 없지. 중양칠도는 정직하니까! 하지만!’
홍춘이는 양방언보다 실전 경험이 많다.
그렇기에 그는 자신의 감을 믿었다. 즉시 뒷발을 빼서 무게 중심을 옮겼고, 늘어트렸던 검으로 하단을 방어했다.
따당!
남천휘가 올려치던 직도가 홍춘이의 검과 격돌하여 불똥이 튀었다.
홍춘이는 자신도 모르게 침음을 흘렸다.
검을 통해 전해지는 반탄력이 예상 외로 강렬했다.
‘언제 내력을 쌓은 거지?’
그 사이 남천휘의 두 발은 연무장 바닥을 쓸 듯이 움직였다. 두 발의 위치가 교차할수록 시점(視點)이 달라졌고, 직도의 위치가 변했다.
한순간 시야가 어지러웠다.
“크흑!”
홍춘이가 뒤늦게 반격을 펼쳤다.
하나 선수를 양보하는 순간 승세를 잃은 셈이다.
결국 그는 남천휘가 만들어낸 공간 안에서 한참동안 검을 휘두르며 허우적거렸다.
‘보법이로군. 이 정도 움직임이라면 진짜 보법을 익힌 것이 분명해!’
그제야 대주인 조상이 조장들에게 비무를 권한 까닭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양방언이 우스울 만큼 손쉽게 패배한 이유도 깨달았다.
‘대주가 우리에게 기회를 준 것이군.’
홍춘이는 등허리에 소름이 돋는 듯했다.
그는 곡부남가에 투신하기 전 낭인 시절을 떠올렸다.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갑자기 나타나서 상황을 저리하던 자들이 있었다.
흔히 명문의 후예라 불리는 후기지수였다.
‘인정해야겠군. 삼공자는 강해.’
*
조상은 연무장에서 벌어지는 비무를 보며 무심한 표정을 유지했다. 하나 손등에 핏줄이 드러날 만큼 강하게 주먹을 움켜쥔 상태였다.
‘그 때보다 더 강해지셨어.’
열흘 전의 비무가 떠올랐다.
남천휘의 보법은 그 날로부터 더욱 발전했다.
그 때의 보법이 쓸 만한 발놀림이었다면 지금은 이름 있는 무공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조상의 숨소리가 점점 거칠어진다.
누군가의 가르침도 없이 홀로 성장하고 있는 남천휘를 보고 있는 것만으로 흥분이 됐다.
그는 불현 듯 자신이 검병을 만지작거리고 있다는 사실에 다시 한 번 놀랐다.
“대주, 삼공자의 성취가 엄청나군요. 제가 모르는 스승이라도 생긴 겁니까?”
조상은 부대주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부대주인 벽추는 절정을 코앞에 둔 고수였다.
마지막 한 계단만 더 오르면, 조금만 더 까치발을 해서 벽 너머를 볼 수 있다면 절정이 될 만큼 뛰어난 무인이다.
그런 그조차 남천휘를 향해 호승심을 보였다.
조상은 부대주에게 자신의 감정을 전했다.
“천재. 역시 천재였어.”
부대주는 조상의 한 마디에 전후사정을 깨우쳤다.
“설마 홀로 저 정도의 보법을 만들어내신 겁니까?”
“그렇다네. 보법의 형이 잡히니 중양칠도의 약점마저 가려지는군. 삼공자는 더 이상 백면서생이라 불릴 분이 아니야.”
부대주는 양 허리에 찬 쌍검을 만지작거렸다.
“다음 순서가 접니다. 기대되는군요.”
조상은 고개를 내저었다.
“자네는 다음 기회를 노리게.”
“네? 설마 새치기라도 하시려는 겁니까?”
벽추(碧秋)가 입술을 삐죽였다.
하나 조상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새치기를 하고 싶기는 하지. 하나 그 전에 공자에게 드릴 말씀이 있네.”
벽추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공자의 체면을 위해서라도 이쯤에서 제가 멈추겠습니다.”
남천휘가 보법으로 우위를 점했지만, 장기전으로 가면 홍춘이가 이길 것으로 예상한 게다.
“부탁하네. 삼공자는 아직 패배보다 연승으로 자신감을 키워야 할 때야.”
타탓!
연무장에 벽추가 올라섰다.
“비무는 여기까지! 멈추시오!”
그가 쌍검을 뽑고 남천휘와 홍춘이의 간격에 발을 들였다.
챙!
벽추는 헛웃음을 지었다.
본래 두 자루의 검으로 각기 상대를 밀어내려 했다.
한데 그가 쳐낸 건 홍춘이의 검뿐이다.
남천휘는 벽추의 검과 부딪치기 전 직도를 거둔 것이다.
그 말은 곧 자신의 힘을 제어한다는 뜻이리라.
‘전력을 다하신 게 아니었군.’
남천휘는 직도를 거두며 한 숨을 내쉬었다.
“이제 슬슬 힘에 부쳤는데. 잘 끊어주셨습니다.”
벽추의 미간에 골이 깊어졌다.
‘힘에 취하지 않고 우열을 파악하고 계셨던가. 보면 볼수록 놀랍군. 잠룡이야. 잠룡.’
천재에 이어 잠룡이라는 평가까지.
하나 남천휘는 바닥난 스탯이 회복되기를 기다릴 뿐이다.
‘현재 능력치로 활동이 가능한 시간은 이각쯤이군.’
실제로 이각이 지난 후부터 능력치가 급격하게 하락했다.
“삼공자.”
남천휘는 스탯이 복구되는 걸 구경하다가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조상이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조 대주가 저런 표정을 지으면 대부분 귀찮은 일이던데······.’
아니나다를까 조상은 예기치 못한 것을 권유했다.
그 순간 알림과 함께 재이의 한마디가 들려왔다.
《메인 퀘스트 ‘강호행’이 발동했습니다.》
메인퀘스트가 떴다.
지금껏 서브퀘스트나 돌발퀘스트는 있었을지언정 처음 있는 일이다.
하나 남천휘는 똥 씹은 표정을 풀지 않았다.
‘강호행을 하고야 싶지. 그런데 10레벨이 막 나대고 그래도 되는 거냐?’
◎ 특급 강호인 승급 체계는 완성형이 아닌 성장형 시스템입니다. 대상자의 성장을 위해 최적화된······.
그렇다고 칼을 대신 맞아주는 것도 아니잖아?
꽃길만 걷게 해 줄 거냐.
기연이 막 쏟아지고, 미녀만 만나는 거야?
‘이 녀석, 또 대답이 없네.’
남천휘는 구시렁거리다가 헛기침을 했다.
조상이 뜨거운 눈빛으로 응시하고 있지 않은가.
아마 그가 권유한 것에 대한 답을 기다리는 듯했다.
남천휘는 검지로 이마를 긁적였다.
‘갑자기 이러니까 난감하네.’
조상의 권유는 간단했다.
이제 강호를 경험해볼 때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물론 당장 명문거파를 찾아가 비무를 하거나, 산동성 밖으로 떠나자는 것은 아니다.
한 마디로 가문의 일을 해보자는 권유였다.
곡부남가는 상단과 표국, 그리고 몇 개의 다루와 객잔을 운영했다. 이 중 상단이나 표국과 연계하면 분명 남천휘가 할 만한 임무도 있을 터였다.
그러나 그것을 위해서는 소가주인 남천홍의 허락이 선결되어야 했다.
‘형은 좀 껄끄러운데.’
곡부남가의 모든 것은 남천홍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남천홍이 원했고, 주변에서도 그리 만들었다.
하여 반석 같은 권력을 자랑했다.
실상 남천휘가 북풍대의 연무장에서 수련할 수 있는 것도 남천홍의 묵인이 있었기 때문이다.
남천홍의 식탐만큼이나 대단한 것이 권력욕일 터였다. 자신이 지닌 걸 빌려줄지언정 아예 내어줄 사람은 아니라는 게다.
‘이러다 형한테 밉보이는 거 아냐?’
괜히 타초경사의 우를 범하는 건 아닐까 싶다.
공연히 문제를 일으켜 화를 자초하는 건 아닐까 걱정이 된 것이다.
그 사이 재이의 알림이 연이었다.
퀘스트 수락 여부에 대한 제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게다.
이렇게 그냥 두면 알아서 수락하겠지.
“지금 갑니까?”
조상은 남천휘의 물음을 승낙으로 여겼다.
“씻고, 단장을 한 후에 함께 가도록 하지요. 제가 가주전에 알리겠습니다.”
함께 가준다니.
당신이라는 남자는 정말 좋은 사람이야.
아! 눈에 먼지가 들어간 것 같다.
“크흠, 이각 후에 만납시다.”
남천휘는 헛기침과 함께 연무장을 떠났다.
처소로 돌아가는 길이라고 해도 그냥 허비할 수는 없지 않은가.
상태창을 펼쳤다.
양방언과 홍춘이를 상대하면서 마침내 레벨이 올라서 10이 되었다.
이제 남천휘도 두 자리 레벨이다.
‘송겸은 아직도 9던데.’
《남천휘(南天輝)》
- 소속 : 곡부남가(曲阜南家)
- 호칭 : 신사의 품격
- 별호 : 없음
- 등급 : 10
- VIP : 1등급(잔여 점수 :0)
근력(筋力) : 91. 민첩(敏捷) : 85.
체력(體力) : 94. 지혜(知慧) : 65.
내공(內功) : 75.
- 미 배분 능력치(+20)
남천휘는 경탄을 금치 못했다.
10레벨이 되는 순간 등급 업으로 인한 추가 능력치가 20으로 올랐다. 예전에 5가 올랐을 때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 상승폭이다.
게다가 오행군림보를 중점적으로 수련한 덕에 근력과 체력, 민첩이 눈에 띄게 상승했다.
‘역시 지혜와 내공이 문제네.’
지혜와 내공 수치를 보면 한숨부터 나왔다.
‘책을 억지로라도 읽어야겠어.’
지혜 수치에 대한 대비책은 늘 존재했다.
다만 남천휘가 책을 읽지 않을 뿐이다.
문제는 내공이다.
영약을 구하거나, 새로운 심법이라도 익히지 않는 한 수치 상승이 요원했다.
언제까지 레벨 업으로 인한 능력치를 쏟아 부을 수는 없지 않겠는가.
‘일단은 올려.’
지혜에 5, 내공에 15를 배분했다.
그 덕에 지혜는 70, 내공은 90이 됐다.
지혜를 올리는 순간 머릿속이 맑아지며 남천홍과 관련된 기억들이 비온 뒤 죽순처럼 솟구쳤다.
‘아! 역시 형은 껄끄러워.’
다행히 내공 상승으로 인해 온 몸을 휘감은 청량감은 기분전환이 되기에 충분했다.
“후우.”
남천휘는 한결 편안해진 표정으로 자세를 잡았다.
놀면 뭐하나.
처소로 돌아가는 도중에도 보법을 수련했다.
쉬이익! 쉬이익!
바닥을 쓸 듯이 두 발을 갈지자로 번갈아 내뻗었다. 머릿속에는 이제 남천휘의 등장음악처럼 여겨지는 파진악이 울려 퍼졌다.
‘오늘 따라 길에 사람이 없는 걸?’
남천휘는 신명나게 보법을 펼치다가 서서히 자세를 바로 했다. 사람이 없는 것이 아니라 죄다 길옆으로 피해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음을 눈치 챘기 때문이다.
“크흠! 보법을 수련 중이었어.”
시비와 하인들은 어색하게 웃으며 목례를 했다.
전혀 믿지 않는 표정이다.
남천휘의 걸음은 더욱 빨라졌다.
야! 이런 거나 경고하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