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85 회: 가례(嘉禮)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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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자리가 끝나갈 무렵이었다.
곽재우가 포도주 잔을 들고 밖의 눈 내리는 설경을 구경하고 있는데, 필라레트 로마노프가 다가와 낮은 목소리로 불렀다.
“장군!”
곽재우가 아무 말 없이 돌아보자 필라레트가 웃음 띤 얼굴로 말했다.
“양국이 보다 긴밀한 관계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한 가지 빠진 것이 있소.”
“무엇이오?”
“양국 황실간의 혼인이오.”
뜬금없는 말에 곽재우가 무어라 답을 못하고 있자, 계속해서 필라레트가 입을 열었다.
“내 아들이 황제가 되는 것은 기정 사실 아니오?”
“그렇소이다만........”
“내 딸 아이를 귀국의 황제에게 받치고 싶소.”
“몇 살인데요?”
“장차 황제가 될 미하일 로마노프의 누이로 현 18세요. 자랑이 아니라 정말 아름다운 아이요. 많은 가문에서 탐을 냈지만 차마 아까워.......”
더 이상 말을 잇지 않는 그였다.
“흐흠........!”
침음하며 생각에 잠기는 곽재우였다. 곽재우가 생각하기에 당금 황상은 여느 왕이나 황제와 달리 여색을 그렇게 밝히는 편이 아니었다. 동맹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취한 여인들이 대부분이었고, 별도로 궁녀를 탐하는 것을 본 일이 없는 곽재우였다. 그런 그이기에 이국의 색다른 미녀 하나쯤 얹어주는 것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곽재우였다.
“좋소! 하지만 황상께 진상 험험, 황상의 배필이 되려면 그만큼 교양과 미모도 받쳐주어야 하니 본장이 먼저 인견(引見)하고 싶소.”
“내일 이 자리로 데리고 오리다.”
“좋소! 그렇게 하도록 합시다.”
동의를 한 곽재우가 등을 돌리자, 흐뭇한 웃음을 지은 필라레트 역시 돌아섰다. 야망이 있는 인물답게 자신의 딸이라도 팔아 사전 정지작업을 해놓는 그였다.
등을 돌린 곽재우가 여전히 창밖을 응시하며 포도주 한 모금을 물고 입안에서 굴리고 있는데, 이번에는 스트로가노프 백작이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아름다운 밤이지요? 각하!”
“그렇소만,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네. 몇 가지 의문점이 있어서요?”
“말씀하세요.”
“유럽의 대외교역 창구라 하심은........?”
“아~! 그 이야기요. 먼저 하나 물어봅시다.”
“하문하시죠. 각하!”
예의가 깍듯한 스트로가노프 백작이었다.
“아무래도 유럽과 교역이 많지 않소?”
“당연히 우리나라가 유럽에 속해 있으니 많을 수밖에 없습니다. 각하!”
“해서 하는 말이오. 앞으로 조선제국과 러시아 간에 큰 도로가 뚫리면 아국은 이 통로를 통해 보다 많은 교역을 러시아는 물론 유럽과도 행하려 하오. 이 과정에서 귀 가문을 통해 많은 수출입품이 오갈 것이오. 물론 나중에는 양국 상인들에게도 문호가 개방되겠지만 어느 시점까지는 귀 가문이 앞장서서 대행해 주길 바라는 것이오.”
“고맙습니다. 각하!”
“단 하나 명심할 것이 있소이다.”
“무엇이온지요?”
“본 장이 귀하를 젬스키 소보르 의장으로 추천했지만, 황제가 선출되면 바로 물러나도록 하시오. 공연히 멈칫거리다가는 정변에 휘말릴 수가 있소. 하면 양손의 떡이 아니라 한 손의 떡도 지키기 어려워질지도 모르죠. 아니 일신의 안위가 위태로워질지도 모릅니다. 그만큼 권력의 세계는 비정한 것이라서....... 아무튼 잘 처신하기 바라오.”
“명심하겠습니다. 각하! 애초의 말씀대로 부를 쌓는 데만 전념하도록 하겠습니다. 각하!”
“좋은 생각이오.”
이렇게 이날 밤의 파티가 끝나가고 있었다.
* * *
다음 날 오전 10시.
여느 날과 다름없이 일찍 일어난 곽재우는 지금까지의 상황을 모두 기록한 장계를 긴급 파발에 띄우고 창가에 앉아 느긋하게 차 한 잔을 즐기고 있었다.
이때였다. 부관이 들어와 고했다.
“웬 낯모르는 마차 한 대가 방금 도착했습니다. 문장을 보니 아무래도 로마노프 공작가의 마차 같습니다. 뵙자고 하면 어떻게 할까요? 대원수님!”
“들여보내도록 하라!”
“네, 대원수님!”
부동자세로 경례를 하고 부관이 물러나도 곽재우는 여전히 창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었다. 부관의 말이 아니더라도 창을 통해 밖의 풍경이 다 보이고 있었다.
먼저 마차에서 내린 필라레트 로마노프가 손을 내밀어 한 여인을 마차에서 수월하게 내리게 하고 있는 광경이 잡혔다. 아무래도 그가 어제 말한 딸인 모양이었다. 흰 드레스를 입은 여인의 모습이, 일견하기에도 상당히 키가 커보였다. 몸매 또한 한마디로 잘 빠졌다.
부친의 에스코트 속에 사뿐사뿐 걸어오는 그녀에게서 곧 눈을 뗀 곽재우는 눈을 감고 자신의 생각을 돌아보았다.
‘아무래도 내가 잘 한 일이지?’
자문자답하며 흐뭇하게 미소를 짓는 곽재우였다.
사실 곽재우가 작성한 장계에는 필라레트 딸에 대한 내용은 일절 없었다. 오래 측근에서 황상을 지켜본 바로는 여자를 상납한다고 해서 달가워할 그가 아니었다. 아니 당장 불호령이 떨어질지도 몰랐다.
그래서 그는 일체 언급을 않다가 자신이 귀국할 때 함께 데리고 갈 속셈이었다. 자신이 보기에 러시아 황녀가 황상과 맺어지면, 양국의 우호에 좀 더 도움이 될 것 같아서였다. 아무튼 곽재우가 이런 생각 속에 빠져 있는데 문이 덜컹 열리더니 로마노프가 들어왔다.
여전히 에스코트를 하고 있는 상태였다. 이를 본 역관이 황급히 달랴와 곽재우 옆에 섰다. 진즉부터 통역을 해오고 있는 자로, 스트로가노프 백작 가문에서 붙여준 자였다. 거상답게 청국의 언어에 능한 자가 있어 선정된 자였다. 곽재우 또한 그들과 오랜 세월 부대끼다 보니 청국의 언어 정도는 구사할 수 있었다.
“어서 오시오!”
“하하하........! 약속대로 딸을 데리고 왔소이다.”
“거 앉으시지요.”
“고맙소이다.”
벌써 황제가 되기라도 한 양, 자신이 아들을 황제로 지목한 이래 상당히 거만해진 그였다.
탁자의 의자에 앉은 부녀를 보고 곽재우 또한 천천히 걸어가 그들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지긋한 눈으로 영애를 바라보았다. 고개를 숙이고 있어 자세히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이에 뭐라고 한마디 하려는데 이를 눈치 챈 부친이 먼저 한마디 했다.
“장군 앞이다. 고개를 들라!”
“네, 아버님!”
비록 작은 목소리지만 청아한 음색이 듣기 좋았다.
키에 비해 작은 얼굴이었지만 이목구비는 어느 하나 흠을 잡을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한 미인이었다.
“아........!”
저절로 감탄사가 나오는 뛰어난 미모였다.
“하하하........! 만족 하시는지요?”
감탄사만으로도 모든 것을 판단한 로마노프의 흡족한 얼굴이었다.
“훌륭하오! 헌데 교양은 어떨 런지........?”
“어려서부터 가정교사를 두어 오랜 세월 공들여 가르쳤으니 크게 빠지지는 않을 것이오.”
“그렇다면 다행이고요.”
말을 시켜볼까 하다가 고개를 가로저은 곽재우가 말했다.
“아마도 얼마 후면 본장이 귀국할 것 같소. 그때 함께 가기로 하고 일단은 집에 거하고 있는 게 어떻겠소?”
“아무래도 딸아이가 불편할 테니 그게 낫겠소이다.”
“그럼, 그렇게 하도록 하고 더 하실 말씀이 있으신지요?”
“우리 끼리 합의를 본 바, 어제의 승전을 기리기 위해 장군의 동상을 이곳 모스크바에 세우는 것은 물론, 이날 또한 승전축일로 제정하여 온 국민이 해해연년 기억하려하오.”
“굳이 그렇게 까지 할 게 뭐 있소?”
“아니오. 은혜를 모르면 짐승과 무엇이 다르겠소? 이미 결정된 사항이니 장군께서는 더 이상 사양하지 마시오.”
“허허........! 그것 참........!”
난처한 표정을 지었지만 크게 싫지 않은 곽재우가 이 문제를 더 이상 언급하지 않자, 이 문제는 이것으로서 일단락이 되었다. 이렇게 되어 얼마 후에는 곽재우의 동상이 의젓하게 모스크바 시내에 서게 됨은 물론, 러시아는 실제 그들의 말대로 매해 이 날을 승전축일로 기념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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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 후기 ============================
좀 짧습니다!^^
양해하시고요!^^
늘 좋은 날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