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자임해-161화 (161/210)

< -- 161 회: 정귀비와 복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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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이진은 어제 세 여진 왕과 마신 술로 숙취가 있어 초조반 후 잠시 쉬고 있자니, 벌써 시간이 되었는지, 김 상선이 고했다.

“황상, 비서실 회의를 할 시간이옵니다.”

“끙........!”

신음을 토하며 마지못해 일어나지만, 그래도 한결 좋아졌다고 생각하는 이진이었다.

명의 남방으로 온 이래 정례적인 경연을 폐하고 가끔 자신이 허락하거나 연락을 하면 경연을 하고 있었으므로, 이 부분에서는 한결 부담이 가벼워진 까닭이었다. 그러면서도 머리속에는 몇 구절이 생각나는 게 있었다.

공자의 논어 가운데 ‘임금 되기도 어렵고 신하되기도 쉽지 않다’는 말과 함께, 황종희(黃宗羲)의 ‘명이대방록(明夷待訪錄)’ 중에서 ‘명군이란 자신의 희생 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며, 따라서 이만큼 손해 보는 직업도 없다’라고 갈파했듯이, 끝임 없는 자기희생이 요구되는 직업이 이 톱의 자리라는 것이 오늘 새삼 실감 나는 이진이었다.

개인의 욕구나 기호를 억제하고 모든 것을 정치에 종속시켜, 그것도 임기가 있어 몇 년 안에 끝내는 것도 아닌, 이진 자신만 해도 벌써 근 20년 가까운 세월 톱의 자리에서 신고를 겪고 있지 않는가. 20년도 이런데 이런 긴장감 죽을 때까지 유지해야 진정으로 명군(明君) 소리를 들으니, 명군 되기가 이렇게 어려운 것이다.

이래서 초반에 반짝하다가 나라를 망친 왕들이 어디 한 둘인가? 그러므로 중국의 그 기나긴 역사 속에서도, 진실로 명군 대접 받는 이는 당 태종과 청의 강희제 정도가 아닐까 생각하는 이진이었다.

이런 나름의 생각을 하다 보니 자신은 외조의 가운데 전각인 중화전(中和殿)에 와 있었다.

“황제 폐하! 입시오!”

김 상선의 가녀린 고음을 들으며 이진은 조선의 궐처럼 병풍이 쳐진 비밀 문을 열고 들어가 옥좌에 앉았다.

“황제 폐하! 만세, 만만세!”

허례를 들으며 이진은 차분한 시선으로 자신의 비서진을 둘러보았다. 송익필, 송한필, 지함두, 허균, 김상헌, 원숭환 등의 비서진 외에 특별히 광해가 매 아침 참석하라는 지시에 의해, 그의 모습도 보였다. 이들을 차례로 훑어본 이진이 여전히 차분한 음성으로 말문을 열었다.

“오늘 특별히 올라온 안건이라도 있소?”

“경항대운하의 문제점이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사옵니다. 황상!”

송익필의 말에 이진이 가만히 고개만 끄덕이며 듣고 있자 그의 말이 이어졌다.

“사치는 일삼으면서도 나라에 돈 들어가는 것은 지극히 아까워했던 신종과 틈왕 이여송이 운하를 그냥 방치하는 바람에, 많은 양의 토사가 유입되고 곳곳이 허실되어, 강남의 물자가 제대로 운송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옵니다. 그나마 우리의 수군과 상선들이 해로로 운송하지 않았다면, 나라의 경제에 큰 지장을 초래했을 것이옵니다. 황상!”

“흐흠........!”

침음하던 이진이 생각을 가다듬고 말했다.

“짐의 국정운영을 운영함에 있어서 현재 가장 중요시 하는 것은 조속한 안정화요. 이를 축으로 짐이 특히 중점을 두는 시책이 국방, 조세, 조운이오. 국방을 튼튼히 해 백성들이 외부의 적에게 노출되는 일이 없게 하고, 경감된 조세로 백성들의 살림살이가 나아져 이것이 소비를 진작시켜, 더 많은 생필품을 만들어 궁극적으로는 일거리를 제공하는 것이지요. 여기에 흉년이 든 곳은 그 아픔을 헤아려 면세 내지는 감세를 적극 추진하고, 조운이라 표현했지만 모든 물자가 물 흐르듯이 흐를 수 있는 교통망 확보 내지는, 운송수단의 적극적 생산이오. 그러니 이를 위해서는 돈이 얼마가 들어도 좋으니, 차제에 운하를 더 깊이 굴착하고, 무너진 곳이 있으면 빠른 시간 내에 보수하는 것으로 하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황상!”

“운하 문제가 나와서 말씀 드립니다만, 황하 유역의 치수도 빼놓을 수 없는 나라의 근심거리입니다. 여름만 되면 홍수로 범람하는 바람에 인근에 많은 피해가 발상했습니다만, 지금까지도 제방이 완전치 않아 해마다 많은 피해를 입고 있사옵니다. 이를 대비하셔야 할 것이옵니다. 황상!”

원승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던 이진이 답했다.

“황하의 치수 사업이야 말로 역대 제왕들의 근심거리요, 우선 사업이었소. 그래도 끊임없이 문제가 제기되니 근본적인 대책을 세워 장기적인 안목으로 접근하는 것이 좋을 것 같소.”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황상!”

원숭환이 감격한 얼굴로 고개를 숙이는데 이번에는 허균이 발언을 했다.

“황상! 매일 정무에만 시달리실 것이 아니라 겨울철이면 사냥이라도 나가시는 게 어떠 하오십니까? 이를 통해 무의 기풍도 진작시킬 수 있고요.”

“현안이 산적해 있는데 놀러 가시라고 권하다니, 그게 어디 녹을 먹는 대신으로서 할 소리요?”

김상헌의 입 바른 소리에 허균이 한 마디 하려다 한숨을 쉬고는 이진의 용안만 바라보았다.

“짐이 한 번 움직이면 수만 명이 피곤해지오. 아직은 할 일도 많고, 내년 겨울이나 기약해 볼까 하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황상!”

허례를 받으며 별 표정 변화 없이 고개만 끄덕이던 이진이 어제의 과음으로 피곤하지 말했다.

“특별한 안건이 없으면 오늘은 이걸로 파합시다.”

“네, 황상!”

비서실장 송익필이 답을 하는 것으로, 또 다시 그들의 허례를 받고 이진은 중화전을 물러나왔다. 그 길로 자신의 침전으로 향하는데 시비 하나가 조신하게 다가와 고했다.

“망아(忘我) 스님께서 뵈올 수 있을 지 여쭈어 보라 했사옵니다. 황상!”

망아 스님은 출가한 정 귀비를 이르는 말이었다.

“크게 할 일도 없으니, 지금 가보기로 하자.”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황상!”

정 귀비를 모시던 궁녀가 안내를 자처하는 속에서 황제 이진 일행은 궁성 서북쪽 제일 끝에 있는 망아사(忘我寺)를 찾았다. 옛 영화전(英華殿)을 개조해 만든 절이었다. 크게 개조할 것도 없이 전각 안에 부처님을 들인 정도였다.

아무튼 이진이 일행을 이끌고 전각 앞에 이르자 벌써 망아 스님이 문 앞에 나와 황제 이진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 오세요. 황상! 소승이 찾아 뵐 것을 괜히 번거롭게 해드린 것은 아니온지요?”

“괜찮소이다.”

“망극하옵니다. 황상! 안으로 드실까요?”

“그럽시다.”

이진은 비구 망아를 따라 전각 안으로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서니 벌써 뜰부터 맡아지던 향 내음이 더욱 짙어졌다. 담담한 얼굴로 부처님 상을 뵙고, 그 앞의 포단에 망아를 보고 마주 앉았다.

“무슨 일이 있소?”

이진의 물음에 두 눈을 감고 잠시 합장을 하던 망아가 말했다.

“아(我)를 잊으려 애를 쓰건만, 밟히는 것들이 있어서 감히 황상을 청했사옵니다. 송구하옵니다. 황상!”

“본인의 알은 아닌 듯 하고, 그래 무슨 일이오?”

이진의 물음에 잠시 눈을 감고 생각을 정리한 망아 스님이 말했다.

“예전 소승이 이 궁에 살 때는 궁녀와 환관을 통틀어 상주 인원이 10만 명을 헤아렸사옵니다. 황상!”

“그런데요?”

이진의 추임새에 힘을 얻었는지 비록 파르라니 깎은 머리지만 여전히 아름다운 정 귀비 아니 망아가 말했다.

“헌데, 반도 이여송이 이 궐을 점거하고, 황상이 들어오시는 과정에서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궁에서 쫓겨나고 탈출을 감행했사옵니다. 물론 일부는 이여송이 끌고 가기도 했습니다만.”

“흐흠........! 말을 듣자하니 탈출하거나 쫓겨난 자들 중에 문제가 있는 자들이 있는 모양이오.”

“그렇사옵니다. 황상!”

“환관이나 궁녀나 어려서 입궁한 이래로 궁에서 심부름이나 하며 살다가 풍진 세파에 뛰어드니 제대로 적응을 못하고, 굶는 아이들과 환관들이 숫한 모양입니다. 황상! 그들이 은밀히 줄을 대어 선처를 호소하니, 아무리 불법에 귀의한 소승이라 하나, 외면하지 못하여 특별히 황상께 주청을 드리는 바입니다. 황상!”

“흐흠........!”

이진이 생각에 잠기는데 망아가 계속해서 말을 했다.

“그리고 불법에 귀의한 자로써는 입에 담기 어려운 말이나, 소승이 보니 궁녀들이고 후비들 또한 너무 적은 것 같사옵니다. 황상! 저희 명 황실에서는 수녀제(秀女制)라 하여, 황실의 피를 신선하게 하고 외척의 발호를 막기 위해, 일찍이 12세가 되면 사족의 여아를 궁으로 들여, 내부에서 생활을 하게 하다가, 그 중에서 자질이 뛰어난 자를 가려 후비로 삼았던 제도가 있사옵니다. 이런 제도를 본받아 좀 더 후비를 늘리심이.........”

채 망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손을 저어 그의 말을 만류한 이진이 말했다.

“우리 조선에도 그와 비슷한 제도가 있소. 어려서부터 궁녀로 선발하는 것이죠. 문제는 그런 제도를 몰라서 하는 것이 아니라.........”

여기서 말을 끊고 망아를 한 번 더 똑바로 바라본 이진이 말했다.

“짐이 조사케 했더니 아까 귀비 아니 망아 스님의 말마따나 궁중에서 생활하는 인원이 10만 명에 달해서인지는 몰라도, 한 달 궁정비용이 은자 1만 냥씩이나 내탕금에서 지출되었더이다. 국고로 나가는 돈은 그렇게 아까워하여 관리도 제대로 임명하지 않은 양반이........ 이제 와서 선제를 비난하자는 것이 아니라, 짐은 그것도 명이 우리에게 나라를 내준 원인의 하나로 보오.”

망아의 일그러지는 안색을 간파한 이진이 급히 말을 이었다.

“우리 조선의 1달 궁정비용이 얼마인지 망아 스님께서는 짐작하시겠소?”

곧 표정을 수습한 망아가 말했다.

“적어도 한 삼, 사천 냥은 되지 않을까요?”

“틀렸소. 상여를 포함하여도 한 달에 오륙백 냥이면 충분하오.”

“설마.........?”

“아니, 그럼 짐이 거짓말을 한단 말이오?”

“아, 아닙니다. 황상! 너무 놀라운 사실에 소승이 실례를 범했사옵니다. 황상!”

“하하하.........!”

그녀의 급 사과에 대소를 터트린 이진이 자신의 옷을 새삼 잡아 다녀 보이며 말했다.

“이 옷을 한 번 보시오? 옷감이 무엇인 것 같소?”

이진의 말에 곁으로 다가 온 망아가 이진이 입은 옷을 새삼 만져보고 이모저모 뜯어보더니 말했다.

“흑초의(黑貂衣) 아니옵니까? 황상!”

“그렇소.”

“이런 담비 의야 궁에서는 아주 흔한 옷인데.........”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망아에게 이진은 한 술 더 떴다.

“이 안 옷감도 한 번 만져보오.”

이진의 말에 좀 더 가까이 다가온 망아가, 스님의 신분이 되었어도 잠시 주저하더니 마지못해 안 옷감을 실제로 만져보았다. 그런데 갑자기 욕정이 끌어 오르는 이진이었다.

짙은 향내와 함께 그녀의 맑은 얼굴과 은은하게 맡아지는 향내가 묘한 대비가 되어, 묘하게 사람의 마음을 진탕시키는 그녀였다. 전과는 또 다른 매력에 혈기가 끌어 오른 모양이었다.

“험, 험..........!”

헛기침으로 이진이 욕념을 달래는데, 망아 스님 또한 붉어진 얼굴로 살짝 고개를 숙이고 답했다.

“매우 거친 비단 옷이네요. 이 정도면 가난한 평민이나 못 입을까, 웬만한 사람은 다 입을 수 있는 정도의 옷이니, 참으로 검박하십니다. 황상!”

“아닐 말이지만 이렇게 아낀 돈으로 대포 하나 더 만들고, 배 한 척을 더 만들었기에 오늘날의 조선이 있을 수 있었소.”

“황상의 말을 들으니 공연히 소승이 부끄러워지네요.”

“하하하........! 너무 그러실 필요 없소.”

“.........”

저런 구두쇠에게 괜한 말을 꺼냈다고 후회하는지 살포시 고개를 숙이고 말이 없는 망아를 잠시 바라보던 이진이 말했다. 어느새 털어냈는지 그의 말에는 끈끈한 욕정이 묻어나는 감정은 전혀 없었다. 아니 무미건조하게 들릴 정도로 담담한 음성이었다.

“짐이 보건복지부에 실상을 조사토록 하여 정말 어려운 사람이 있다면 복지 차원에서 접근하도록 하겠소.”

“망극하옵니다. 황상!”

진정 감사의 눈으로 바라보는 망아의 눈은 자비가 가득했다. 벌써 고승이라도 된 양 스스로 자신을 잊어가는 정 귀비였다.

“황상 이야기에 팔려 차가 어느새 다 식었군요.”

그녀의 말이 아니더라도 언제 나왔는지 모를 철관음이 싸늘히 식어 있었다.

“괜찮소. 차가운 차가 때로 마음을 명징하게도 하잖소.”

“소승이 여러 모로 부끄럽사옵니다. 허나 흉금이 넓으신 황상께서 이를 다 덮어주시고, 가엾은 자들을 위해 자비를 베풀어 주신다니, 황상의 앞길에 부처님의 무한한 가피가 있을 것이옵니다. 황상!”

“그런 덕담을 들으니 이제 도저히 빼도 박도 못하게 생겼군요. 하하하.......!”

“호호호........!”

자신도 모르게 이진을 따라 소리 내어 웃던 망아가 얼른 자신의 입을 틀어막으며 실태를 급 수습했다.

이 모습에서 묘한 여인의 향기를 맡는 이진이었다. 그러나 군주의 자리는 절제의 자리. 이진은 급히 요즈음 자신의 좌우명으로 써놓고 가끔 읽어보는 이에야스의 글을 떠올렸다. 비록 적이지만 존경할 만한 가치가 있으면 존경해도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방향성만은 확실히 잡을 필요가 있었다.

사람의 일생은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먼 길과 같다. 그러니 서두르지 마라. 무슨 일이든 마음대로 되는 것이 없음을 알면 오히려 불만 가질 이유도 없다. 꽃과 열매는 함께 주어지 지 않는 것, 마음에 욕심이 차오를 때는 빈궁했던 시절을 떠올려라. 인내는 무사장구(無事長久)의 근본이요, 분노는 적이라고 생각해라.

이기는 것만 알고 정녕 지는 것을 모르면 반드시 해가 미친다. 오로지 자신만을 탓할 것이며 남을 탓하지 마라. 모자라는 것이 넘치는 것보다 낫다. 자기 분수를 알아라. 풀잎 위의 이슬도 무거우면 떨어지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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