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자임해-151화 (151/210)

< -- 151 회: 직할 통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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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정(劉綎)의 정식 직함은 좌도독(左都督) 이었다. 이는 오군도독부(五軍都督府)의 수장을 이르는 말이었다. 1550년 경영(京營)에 통수권을 가진 융정부(戎政府)가 설치되자, 오군도독부의 실권은 상실된 상태였다.

그러나 국난을 맞아 오군도독부는 다시 살아났고 그는 오군도독부의 최고 지휘를 차지했다. 하지만 그가 이런 지위에 맞는 지는 다시 한 번 생각할 필요성이 있는 인사였다. 명사(明史) 열전에 ‘여러 장수 중 가장 용감하다(諸將中最驍勇)’ 는 말로, 그의 용감성만은 인정하고 있지만 최고 지휘자의 재목은 아니었다.

탐욕스럽고 교만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오랜 전란으로 장수의 재목이 씨가 마른 지금 일개 총병(摠兵)이나 하면 맞을 사람이, 전군의 대권을 쥐고 급히 싸우던 하남의 임지에서 호북으로 달려왔으나 한 발 늦은 감이 있었다. 거느린 10만 모두 보군인데다 사기마저 침체되어 그의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은 때문이었다.

아무튼 그가 막 한수(漢水)를 도강하자마자 적은 코앞에 들이닥쳐 있었다. 비록 조선군이 대군을 동원하느라 3차로 제일 늦게 금릉을 출발했지만 이들보다 양양성(襄陽城)에 먼저 도착해 있었던 것이다.

조선군도 방금 막 양양 땅에 발을 들였으니 큰 차이는 아니었지만, 유정 군이 양양 성안으로 들고 못 들고 차이가 있기 때문에, 이는 아무 것도 아닌 것이 아니라, 전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조선군 2만에 한인 병사 8만을 거느린 곽재우는 즉각 양양성 보다는 이들의 공략에 나섰다.

배후에 양양성의 군사를 두고 있었지만 곽재우는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1만5천의 군사인데다, 대개의 명군이 그렀듯이 사기가 떨어진 그들이 성을 열고 나와 배후로 기습을 할 정도의 담량이 있다고 보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일군을 남겨 그에 대한 대비는 해야 했다. 그래서 곽재우는 한인 병사 1만을 뒤로 배치해, 이들의 기습에 최소한의 대비는 했다. 그리고 그는 삼엄한 군기만 유지한 채 유정의 군사를 감시하며 적극적인 전투도 하지 않았다.

금방이라도 일전을 벌일 듯 변죽을 울리면서도 대접전은 피하고 있었다. 이는 적과 아군 동수 인지라 아니 엄밀히 따지면 적의 군사가 성안의 군사까지 치면 1만5천이 더 많았다. 그런고로 곽재우는 아군의 군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강하와 강릉의 적을 아군이 쉽게 깨트리고 지원을 올 것이라 믿은 것이다. 그렇게 세월이 흐르는 속에서 정말로 초조해지는 것은 유정이었다. 하남성의 전투도 어려운데 더 지원할 군사가 없는 것은 자명한 노릇.

그래서 유정은 빨리 일전을 겨루어 적을 격파하고 북의 전선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었다. 그러나 적은 아군의 준동에 화기여단의 군사를 앞세워 대규모 포격만 강행하니 이를 돌파하려면 수많은 사상자가 생길 것 같아 주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에 적의 기병 1만마저 시위하듯 기동하며 설치니 쉽게 진격을 명하지 못하는 유정이었다.

하지만 마음만은 꼬리에 불붙은 소처럼 다급한 심정이 된 유정은, 적의 화약이 떨어지길 기다리며 연신 도발을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5일을 허비하고 나서 오늘은 화약이 떨어졌으려니 하고, 대규모 군사를 진공시켜 보았지만 적의 화력은 여전히 막강한 바가 있었다.

도저히 더는 참을 수 없었다. 내일은 죽이 되던 밥이 되었던 총 진격을 하기로 마음을 굳히고 저녁을 맞았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날 밤 적은 강하성을 떨어트린 7만 군세가 더 불어나 있었다.

1만 만을 강하성에 남겨두고 7만 군사가 이순신 함대의 배를 타고 양양 땅에 상륙한 것이다. 정탐병들로부터 이를 보고 받은 유정이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며 실기했음을 자책하는데, 그 이튿날은 강릉 성을 떨어트린 7만 군사가 또 불어나니, 차라리 이곳을 포기하고 후퇴하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드는 유정이었다.

아군의 떨어진 사기 더욱 급감하여 밤새 도강 준비를 시키는데, 그것도 쉽지 않았다. 적이 총 공격에 나선 것이다. 적의 군사 2만을 후미로 돌렸다하나 22만의 대군이 물밀듯 밀려드니, 도강이 문제가 아니라 우선 생명을 지키는 것이 급선무였다.

생각지도 않게 배수의 진을 치게 된 꼴의 아군 10만을 동원하여 유정은 연신 악을 써가며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한 치도 물러서지 말고 맞서 싸워라. 뒤는 강물로 더 이상 물러 설 곳도 없다.”

그러나 벌써 겁먹은 병사들의 발걸음은 전진이 아닌 자꾸 뒤로 물러서니 여간 답답한 노릇이 아니었다. 이에 화가 난 유정이 곧 뒤로 도망치는 놈들의 목을 몇 날려보지만 효과는 그 순간뿐이었다.

이러다가는 제대로 한 번 싸워보지도 못하고 패하겠음을 직감한 유정은 곧 자신이 선봉에 나섰다.

“나를 따르라! 저런 오합지졸은 우리의 상대가 아니다!”

연신 고함을 지르며 말을 타고 선두로 달려 나간 유정은 곧 자신의 애병인 120근이나 나가는 빈철도를 휘두르며 적들을 참살해나가기 시작했다. 관우의 청룡언월도가 82근이었다. 그런데 유정은 그보다 더 무지막지한 120근 대도를 휘두르며 날뛰니, 한인 병사들이 급급히 피하기 바빴다.

오죽하면 그의 별명이 ‘유대도(劉大刀)’ 이겠는가. 이를 보고 있던 웅정필이 화살 하나를 재어 그를 향해 날렸다. 퍽! 명궁답게 그의 화살이 왼쪽 팔에 꽂혔다. 실제 한인 병사들의 무기는 기존 조선군보다 무기가 빈약했다.

강남 점령 시 노획한 한인 병사들의 무기로 무장한 탓이었다. 그래서 대부분이 창, 칼, 아니면, 활 정도의 장비를 갖추고 새로 조선군에 편제된 한인 병사들이었다. 비록 여단장이지만 웅정필도 다를 것 없어서 기존 보군과는 달리 말 한 필에 도와 궁 하나를 더 받았을 뿐이었다.

아무튼 자신이 움직이는 바람에 빗맞은 화살이 자신의 팔뚝에 꽂히자 유정은 괴성을 지르며 고통을 참고 거추장스러운 화살을 뽑아내었다. 그리고 다시 한 손으로 120근 대도를 휘두르며 적을 참살하기 시작했다.

그 날뛰는 모양새가 악귀나찰이나 다름없었다. 이를 지켜보고 있던 곽재우가 전군에 호령을 했다.

“저 자에게 집중 사격을 가해 쓰러트려라!”

곽재우의 명이 곧 일선 여단장들에게 전달이 되고 이들은 또 그 부하들에게 지시를 하니, 유정을 향해 집중 사격과 화살이 날아들기 시작했다. 조선의 조총병들이 날리는 탄환과 한인 병사들이 날리는 화살이 수없이 날아드니 범 같이 날뛰던 장수도 별 수 없었다.

탄환을 무수히 맞음은 물론 온 몸에 화살을 맞아 완전히 고슴도치가 되는 것이 순식간의 일이었다. 그의 거구가 쿵 소리를 내며 땅에 떨어지니, 그와 함께 명군의 사기가 급격히 꺾였다. 그나마 유정의 분전으로 간신히 유지되던 전투 의지가 그의 죽음과 함께 소멸된 것이다.

곧 다투어 강변으로 도망을 치거나 무기를 투척하고 항복을 외치는 병사들이 무수히 생겨났다. 이럴 때 적을 몰아치면 도망갈 곳 없는 쥐가 달려들 듯, 최후의 발악을 할 것을 자명한 노릇. 이를 지켜보고 있던 곽재우가 전군에 명을 내렸다.

“항복하는 자는 살려주어라!”

“항복하는 자는 살려준다!”

“우리와 같이 잘 살 수 있다!”

조선군에 편제된 한인 병사들의 외침이 온 벌판에 메아리치니 강가로 달아나던 자들도 그 자리에서 병기를 버리고 항복 대열에 합류했다. 아니 제일 먼저 강가에 도달한 자들도 두 손을 번쩍 치켜들 수밖에 없었다.

도강장비였던 뗏목이나 나룻배가 이미 조선수군에 의해 싹 쓸린 다음이었기에 도저히 맨 몸으로는 도강할 엄두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일부는 차가운 강물에 뛰어들며 운에 운명을 맡기는 치들도 있었다.

여기에

두두두두..........!

두두두두..........!

5만 기병이 시위를 하듯 이들 주위를 맴돌며 말을 달리니, 그나마 약간이라도 전투 의지를 가졌던 자들마저도 낙담한 얼굴로 속속 항복 의사를 표시했다.

이렇게 되니 곧 조선군은 항복병과 저항하는 자들을 분리하기 시작하는데, 줄어드는 저수지에 고기가 한가운데로 몰리듯, 항복병을 솎아내니 기천의 군사만 남아 무기를 들고 대항하는 꼴이 되었다.

그런 그들에게 1개 기병여단이 돌진하며 충살하기 시작하니, 어느 귀신이 채어갔는지 모르게 그들은 죽음을 당하고 쓸려나갔다. 곧 전장에 평화가 찾아오고 전장 정리가 시작되었다. 이를 양양 성에서 모두 지켜본 적장 주매(朱梅)는 엄청난 적의 대규모 공세 앞에, 전혀 싸울 엄두를 내지 못하고 성루에 백기를 내걸게 했다.

이로써 호북성의 대도(大都) 세 곳이 조선군에게 평정되는 순간이었다. 곽재우는 곧 양양성으로 입성해 백성들을 위무하고, 아군 병사는 물론 성내, 성 밖 도합 10만의 포로를 다독였다.

아군의 공적을 기록하며 하루를 푹 쉬게 한 곽재우는 곧 제장들을 불러들여 1만 단위로 작은 성읍으로 파견을 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큰 성에는 2만까지 파견하며 22만 병력 중 4만만을 양양 성에 남기고 18만 병사를 곳곳에 푸니, 호북성 전체를 점령하는 것은 여반장이었다.

그 시기가 이제 막 추수철이 시작될 무렵이니 시기도 적절했다. 이로써 명의 정권은 이제 간신히 숨만 붙어 있는 중병환자나 다름없게 되었다. 유정군의 전면적인 패배로 병부상서 장학명이 처형되고 후임으로는 장봉익(張鳳翼)이 임명되었다.

이 또한 틈왕 이여송에게는 호기였다. 마치 둑을 막았던 제방이 일시에 터져나간 것과 같이 조선과 명의 일전으로 인한 유정의 패배는 명을 사기 면에서 지리멸렬하게 만들어 단숨에 하북 초입의 방어벽을 돌파할 수 있었다.

여기서 이여송은 다시 욕심이 작렬했다. 곧장 북경성으로 내달은 것이 아니라 다른 성을 약탈하기 위해 군을 몇 갈래로 쪼갰다. 산서, 산동, 안휘, 강소, 하북 등의 다섯 곳으로 쪼개 강북 전체를 손에 넣으려 기도한 것이다.

이런 상황 변화는 주익균이 잠시 숨을 돌릴 기회를 준 것이지만 황제 이진에게는 다른 생각을 갖게 하게 했다. 만약 이여송이 강북 전체를 수중에 넣는다면 이들과 또 한 번의 대 전쟁을 치러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한 것이다.

이진의 이 생각은 즉각 문면 하나를 닦아 이여송에게 칙사를 파견하는 계기가 되었다. ‘틈왕의 영역은 사천, 섬서, 감숙에 한한다는 내용이었다.’

한 마디로 이들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조건인바 선전포고나 다름없는 행위였다.

동시에 이진은 조선과 명의 옛 강남땅에 전군 비상령을 내리고 전쟁 준비에 돌입했다. 이런 일련의 조치는 틈왕 이여송으로 하여금 급급히 모사들을 불러들여 대 결단을 촉구하게 이르렀다.

“지금에 와서 삼성으로 영역을 제한하다니 이는 저들이 우리를 이용만 해먹고 나머지 전토를 차지할 속셈인 바, 설령 우리가 저들의 뜻을 순순히 따라도 종내는, 우리를 멸하려 달려들 것이니 차제에 북경 성을 우려 빼야 합니다.”

참모 진신갑(陣新甲)의 말을 받아 또 하나의 지낭 전종룡(傳宗龍)이 간했다.

“맞사옵니다. 폐하! 먼저 신속히 북경 성을 점령하여 명을 계승하는 쪽이 한족인 우리임을 밝히시어 정통성을 확보해야만 합니다. 폐하!”

“흐흠.........!”

침음하던 이여송이 침중한 낯빛으로 물었다.

“정녕 저들과는 척을 질 수밖에 없음인가?”

“저들이 이제 와서 우리의 영토를 세 개 성으로 제한하려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힘을 약화시키려는 것 아닙니까? 애초부터 이용할 생각 밖에 없던 것이 저들의 생각이었습니다. 차제에 북경을 점령하시어 명분을 손에 넣고 궁극적으로는 저들과 일전을 겨루는 수밖에 없사옵니다. 폐하!”

또 다른 모신 장국유(張國維)의 건의에도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이여송이었다. 조선의 막강한 저력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까닭이었다. 여기서 한 발 까딱 잘못 내디뎠다가는 천추의 한을 남길 것은 자명한 노릇. 정말 쉽게 결단할 사항이 아니었다.

그의 솔직한 속내는 정말 3개성만 확실히 보장해준다면 3개성의 왕 노릇이나 하다가 일생을 마치는 것도 괜찮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오늘 저들의 생각을 유추해보면 자신들을 이용해 먹을 생각 뿐, 쉽게 그것도 이루어질 것 같지가 않아 고민이 생기는 것이다.

“일단 조선제국 황제의 확실한 저의를 알아야겠다. 과인의 생각은 더도 덜도 말고, 조선과 친교를 나누되, 삼 개 성만이라도 확실히 보장해 달라는 것이다. 누가 사신으로 가 담판을 짓고 오겠는가?”

“폐하, 그것은 안 될 말이옵니다. 오늘 조선 황제가 야욕을 드러내지 않았습니까? 설령 저들이 삼 개 성을 확약한다 해도 그것은 물 위에 금을 긋는 것과 같은 행위로써, 다 부질없는 일이 될 것이옵니다. 폐하!”

모신들 모두 벌써부터 틈왕 이여송을 ‘폐하!’라 부르며, 황제의 나라로 나아갈 것을 종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갈등하고 있는 이여송이었다. 누구보다도 조선의 저력을 잘 알고 있고, 황제 이진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또 한 이유는 지금 자신들의 행위가 모래 위에 누각을 짓는 행위와 같아서 언제 허물어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내재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 여송도 바보가 아닌 이상 세금을 거두지 않고 언제까지 나라가 유지될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기 때문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고 세금을 거두고 싶지만, 지금은 죽도 밥도 안 된다는 것 또한 잘 알고 있어서, 일단 그 끝을 보고 실시하려고 오로지 지금은 기호지세로 내닫고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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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 후기 ============================

후의에 진심으로 감사드리고요!^^

늘 행복하시고 건강하세요!^^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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