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25 회: 대항해시대의 서막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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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4년에 에스파냐 사람인 안드레스 데 우르다네타(Andres de Urdaneta)가 필리핀에서 아메리카로 돌아오는 항로를 발견한 이후, 에스파냐는 필리핀과 누에바에스파냐(Nueva Espana) 간에 정기적인 교역을 시작하였다. 이로써 마닐라와 아카풀코는 아시아와 아메리카를 잇는 주요 항구가 되었다.
갈레온 무역 루트라고 불리는 이 항로는 아프리카를 통해 아시아로 가는 포르투갈의 항로보다 안전하고 빨랐다.
태평양 인도 무역로(Carrera de Indias en el Pacificos) 또는 서쪽 섬들의 무역로(Carrera de Islas de Poniente: 에스파냐 인들은 필리핀을 ‘서쪽 섬들’이라고 불렀음)라고도 불린 이 무역로는 멕시코 만과 카리브 해를 대상으로 한 인도 무역로(Carrera de Indias)보다는 규모는 작았지만 막대한 이익이 보장된 무역이었으며, 에스파냐 식민지인(누에바에스파냐 인)들이 주로 담당하였다.
당시 에스파냐는 필리핀을 통하여 중국과의 교류를 원하였다. 따라서 1565년 세부(Cebu)의 레가스피(Legaspi)에 무역 근거지를 설치하였다가 1571년에 마닐라로 옮겼다. 그 이유는 마닐라가 중국과의 무역에 유리한 입지였을 뿐 아니라, 중국과의 오랜 교역을 바탕으로 중국인 거주지가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명나라 신종이 해금정책을 폐지하면서 중국과 이 지역 간의 무역량이 지속적으로 증가하였으며, 또 대부분의 중국 무역선들이 필리핀과 보르네오(Borneo) 섬에서 외국과 교역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받음으로써, 이 지역은 더욱 각광을 받게 되었다.
아카풀코에서 출발한 갈레온 선은 누에바에스파냐의 은, 코치닐(cochineal) 염료, 초석, 씨앗, 고구마, 담배, 완두콩, 초콜릿, 카카오, 수박, 포도나무, 무화과나무 등의 1차 산업 상품과 가죽 가방을 실었고, 에스파냐에서 수송해 온 포도주, 올리브유와 유럽의 다른 나라에서 온 검(劍)류의 무기와 마구(馬具)를 실었다.
마닐라에 도착한 갈레온 선들은 중국 상인들로부터 비단과 도자기를 구입하였으며, 향신료, 야자 와인 등의 식료품과 보석인 호박을 비롯하여 마닐라 삼, 비단실, 철, 염료, 주석, 왁스, 면직물 등과 보석, 문방구류, 자개류, 장신구를 비롯한 사치품들도 구입하였다.
이들이 구입한 상품은 중국뿐 아니라 페르시아, 인도, 일본 및 동남아시아에서도 온 것이었다. 당시 에스파냐가 구입한 상품은 국내 및 식민지 내의 상품과 경쟁하지 않는 것들로, 무역으로부터 자국 상품을 보호하고자 하였다. 아카풀코에서 마닐라로 가장 많이 수송된 상품은 은이었으며, 갈레온에서 내놓은 은화는 당시 아시아 여러 국가에서 사용되었다.
갈레온들이 태평양을 건너는 데는 최소한 4개월 정도가 걸렸으며, 카리브 해 지역의 선단과 마찬가지로 해적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에스파냐 해군의 호위를 받았다. 마닐라에 도착한 갈레온은 화물을 하역한 후 바로 아시아의 상품을 싣고 아카풀코로 향하였는데, 무역풍을 피해 구로시오 해류(Kuroshio current)를 타고 북쪽을 향하는 항로였다.
따라서 회항을 할 때 갈레온들은 일본 해적, 즉 왜구의 공격을 자주 받았다. 태평양을 건넌 갈레온들은 산디에고 요새(Fuerte de San Diego)나 산블라스 요새(Fuerte de San Blas)에 도착한 후 다시 아카풀코로 돌아와 상품을 하역하였다.
하역된 상품들은 멕시코시티로 향하여 베라크루스를 거쳐 에스파냐의 세비야(Sevilla) 또는 카디스(Cadiz)로 가거나 페루 부왕령(副王領)으로 수송되었다. 이런 중요 거점이고 항로이다 보니 황제 이진이 탐을 낸 것이다.
에스파냐 군대까지 쳐야 3만5천이 조금 넘는 마닐라 인구였다. 이곳에 3만 대군을 풀어놓으니 시가지 점령은 일도 아니었다. 가가호호를 뒤져 불온분자를 색출했으나, 애초부터 저항할 의지가 없는 중국 거류민과 원주민인지라 큰 마찰이 없었고 성과도 없었다.
그러나 일부 도망간 에스파냐 군인을 찾아내어 함께 구류하는 성과는 있었다. 김덕령이 이 모든 일을 끝내고 돈 로드리고 총독 저택을 찾아드니 장계를 작성하고 있던 이순신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수고하셨소!”
“별 말씀을........”
“그러나저러나 이제 장기 주둔 계획을 세워야하지 않겠소?”
“네, 장군님!”
“대책을 말해보오.”
이순신의 말에 잠시 생각하던 김덕령이 말했다.
“제일 걱정은 먹고사는 문제인바 우선 통나무집이나 따나 지어 거주지 문제를 해결하고, 2차로 둔전을 설치하여 식량을 자급자족할까 합니다.”
“이곳의 방어 계획은?”
“저희 군사들은 수륙 양면에 기마전까지 익힌 병사들입니다. 하니 군선 일부를 남겨주시면 충분히 방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해안에 대대적으로 성채를 구축하여 해안포를 늘릴까 합니다.”
“좋소. 다음 항해 시에는 군량미와 함께 전마도 1만 필정도 실어다주어 기동력을 보강할 수 있도록 하겠소.”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지요. 한 가지 더 바란다면 부하들 모두 가정을 꾸린 바, 그들도 이주시켜 장기주둔 채비를 갖출 수 있게 해주시면 더욱 고맙겠습니다. 장군님!”
“당연히 그렇게 해야겠지요.”
“고맙습니다. 장군님!”
김덕령의 인사에도 이순신은 단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하고 혼잣말처럼 말했다.
“이제 총독 이하 에스파냐 군을 어찌 처리할 것인가가 문제인데........?”
이에 대해 생각해둔 것이 있는지 김덕령이 즉답했다.
“일단은 지금과 같이 구금 상태로 두었다가 만약 저들이 우리의 요구에 응하지 않으면 태도를 달리해야죠. 완전 귀순하는 자는 우리 군에 편입시키고 그렇지 않으면 강제노역에 동원해 축성이나 둔전을 일구는데 쓰고자 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최선인 것 같소. 아직 식전이죠?”
“그렇습니다. 장군님! 병사들이 밥을 짓고 있으니 곧 먹을 수 있을 것사옵니다.”
“난 조금 얻어먹었더니 별로 시장한 줄은 모르겠지만, 일단 장계 작성이 끝나면, 바로 대장선으로 돌아갈 것이니, 이곳 일은 알아서 잘 처리하오.”
“알겠습니다. 장군님!”
“그럼, 바쁠 테니 이만 가보시오.”
“네, 장군님!”
김덕령이 물러나자 이순신은 곧 장계를 작성하여 가장 빠른 해추선 편으로 이를 조선에 띄웠다.
* * *
이순신의 장계를 읽어 본 이진은 심각한 안색으로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목하 몇 가지 문제를 고민하고 있는 것이다.
기왕 동남아까지 해상 루트를 확보한 김에 또 하나의 무역거점인 보르네오 섬을 점령하는 문제와 아직은 무주공산이지만 장래의 자원 확보를 위해서는, 현 오스트레일리아 즉 호주를 수중에 넣는 문제로 고심하고 있는 것이다.
또 하나 여기에 그의 고민을 추가한다면 군량미 보급 문제였다. 또 이 땅을 영구히 지배하려면 그곳에도 관리를 파견해야 했다. 그래서 이의 인선 문제도 함께 고심하고 있는 것이다.
잠시 이렇게 이마를 찌푸리고 있던 이진의 안색이 단호해졌다. 결단 했을 때의 이진 특유의 표정이었다. 곧 비답이 구술되기 시작했다.
<이순신 팔도수군통제사에게 명하노라. 마닐라는 김덕령에게 일임하고 보르네오 섬과 호주를 점령하도록 하라. 이를 위해서는 점령 후 상주할 보군이 필요할 것인즉 고산도에서 2만을 차출하고, 또 해남도에서 2만을 더 차출하여 보르네오부터 순차적으로 호주까지 점령하기 바라노라. 군량미 문제는 우선 고산도와 해남도에서 충당하도록 하고, 정 부족하면 명의 본토에서 사서 공급하되, 장기적으로는 둔전을 일궈 해결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현지의 관리로는 루손도 관찰사에 정철. 보르네오도 관찰사에 정인홍, 호주도 관찰사에 김우옹을 임명하는 바, 예하 관원과 함께 파견할 것인즉 그런 줄 알고 있도록 하라. 공의 수고가 많다. 무운을 빈다. 大 朝鮮帝國 皇帝 李珒>
이런 황제 이진의 복안에 의해 곧 연해도로 방귀전리되었던 정철, 정인홍, 김우옹이 가족과 함께 모두 일단은 한양으로 불러들여졌다. 이제 이진의 명으로 정철 같은 경우 루손 섬을 담당하게 된 바, 연해도에 있었으면, ‘관동별곡’이 아닌 ‘연해별곡’이 지어졌을 것을, 이제는 ‘열대별곡’ 내지는 ‘루손별곡’이 지어지지 않을까 예측하는 이진이었다.
* * *
황제 이진의 비답을 받은 이순신은 그 명을 이행하기 위해 일부의 군선을 남겨 마닐라를 보호하도록 하는 한편, 이억기가 주관하고 있는 고산도로 대 선단을 움직였다. 그곳에서 병력을 싣고 우선 보르네오 섬을 점령하기 위해서였다.
고산도로 향하는 이순신의 대장 선 내.
이순신이 몇 몇 장군들을 둘러보며 물었다.
“김시민 장군이 해남도를 맡게 되어 그곳에서 하선했다고요?”
“그렇습니다. 장군님!”
대답하는 이 문무를 겸비하고 화통한 김여물이었다.
“그럼, 김 장군은 어디를 맡게 되는 것이오?”
이순신의 물음에 김여물이 대답했다.
“본 장(將)이 고산도 병력을 인계받아 보르네오 섬에 주둔하게 되었습니다. 장군님!”
“그럼, 정 장군이 당연히 호주에 상주하게 되겠군요?”
“그렇습니다. 장군님!”
씩씩하게 대답하는 이 함경도 지방군을 맡았던 정문부였다.
“하하하........! 역시 젊음이 좋긴 좋아, 가장 젊으니 황상께서는 정 장군을 항상 도성에서 가장 먼 곳에 배치하시는 듯 하고만.”
김여물의 말에 정문부 또한 미소를 띠고 말했다.
“제 생각에도 그런 것 같사옵니다. 장군님!”
정문부 나이 올해 갓 마흔이었다.
이들의 대화에서 알 수 있듯이 이진은 장수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지방의 병마절도사로 나가 있던 세 인물을 이번에 새로 외지에 부임시킨 것이다. 즉 경상도병마절도사였던 김시민을 해남도로, 경기 단병사였던 김여물을 새로 점령하게 될 보르네오 섬으로, 함경도 병마절도사였던 정문부를 호주에 각각 파견한 것이다.
* * *
그로부터 약 20여일 후.
고산도에서 추가 징발된 갈레온 선 50척과 함께 6만의 제 병사가 보르네오 섬 서북쪽 해안에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 병력의 구성은 1만을 마닐라에 떼어놓은 이순신의 수군 2만과 고산도의 보군 2만, 해산도의 보군 2만, 도합 총 6만이었던 것이다. 아무튼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섬인 이 섬의 서북 브루나이는 대 전단의 출현에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항구에 정박해 화물을 부리고 싣던 상선의 모든 인원들이 육지로 피신하는 것을 필두로, 에스파냐 소속 군함 10척과, 네덜란드 소속 군함 10척이 응전 태세를 갖춘 채, 이들의 만 진입을 바라보고 있었다.
또 육지의 내부는 내부대로 큰 혼란에 휩싸여 있었다. 보르네오 섬 전체를 지배하는 브루나이 제 8대 국왕 알크 오마르알리는 곧 왕국 전체에 비상령을 하달해 군사들을 모으는 한편 대 전단의 움직임을 예의 주시하도록 했다.
이 브루나이 왕국이야말로 지금은 비록 서구 열강들의 잇단 브루나이 진출로 약간은 쇠퇴한 감이 있으나, 아직 보르네오 섬 전체에 지배력이 미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필리핀의 남부 일부도 지배하고 있는 강력한 이슬람왕국을 이루고 있었다.
면적은 한반도의 3.5배에 달하나 인구는 희박했다. 보르네오 섬 전체에 거주하는 인구가 채 50만 명이 못 되었다. 그것도 큰 강 두 개의 하류에 주로 몰려 살고 내륙에는 원주민 일부 이외에 인구가 희박했다.
인종구성은 매우 복잡하나 크게 내륙지에 거주하는 미개 부족과 해안저지대에 거주하는 말레이인으로 나뉜다. 대표적인 미개 부족은 다약족(族)이나 이들도 주거지에 따라 다시 여러 부족으로 구분된다.
말레이인은 외부에서 해안 각지에 이주해온 부족으로 그 중에는 자바인과 부기인 등도 섞여 있었다. 그 밖에 본토에서 이주해온 중국인도 북부와 서부의 해안을 중심으로 많이 살고 있었다.
지리적으로는 말레이 제도의 중앙부에 있는 데다 북서부가 남중국해를 지나는 동서교통의 요지이므로, 역사시대의 초기에는 인도인의 식민도 연안 각지에서 이루어졌다. 북안의 브루나이는 북부의 교역 중심지로 번영하여 일찍이 중국의 사서(史書)에도 기록되어 있었다.
최근에는 많은 중국인이 서해안의 폰티아낙 지방에 이주하였으나 내륙의 벽지는 거의 미개발 상태로 방치되어 있었다.
광산물도 풍부하여 금, 다이아몬드는 일찍부터 알려졌으며, 철광석, 석탄, 석유 등의 지하자원의 매장량도 풍부하다. 이런 브루나이 왕국에 수군 포함하여 조선의 6만 군사가 몰려들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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