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자임해-120화 (120/210)

< -- 120 회: 잠행(潛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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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후와 귀비들을 물리고 나니 곧 조회 시간이 임박해 제 대신들이 하나들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진이 황제가 된 후 바뀐 것도 있지만 3정승 6판서 위주로 중요 사안을 꾸려나가는 것은 여전했다.

황제의 나라가 되었다고 해서 모든 것을 다 바꿀 필요는 없었다. 이진이 생각하기에 조선의 제도도 참으로 잘 짜여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황제의 독주를 일부 견제하면서도 황제 또한 능력만 있으면 얼마든지 어진 정사를 펼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5년 세월 동안 3정승부터 싹 물갈이 되었고 6판서 역시 대부분이 바뀌었다. 3사 또한 전부 바뀌어 새로운 면면들이 많았다. 그들을 일괄 소개하면 아래와 같았다.

영의정: 유성룡

좌의정: 이항복

우의정: 이덕형

이조판서: 이이첨

호조판서: 김득신

예조판서: 남이공

병조판서: 강홍립

형조판서: 유영경

공조판서: 이원익

대사헌: 기자헌

대사간: 이호민

대제학: 신흠

예를 올린 후 자신의 자리에 단정히 앉아 있는 제 대신과 육 승지를 그윽이 바라본 이진이 입을 떼었다.

“오늘은 짐이 그동안 국사를 돌보면서 가장 문제가 되었던 것을 점검해 보려하오. 재 대신들은 이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고 그 대책에 부심해야 할 것으로 아오. 먼저 이조.”

여기서 말을 맺고 이진은 이조판서 이이첨을 쏘아보듯 바라본 후 다시 입을 열었다.

“이조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아직도 남아 있는 지방 말단 관원들의 적폐요. 이제 엄연히 그들에게도 나라에서 녹봉을 지급해 녹봉만으로도 생계유지가 가능하건만, 아직도 구시대의 악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백성들을 착취하고 있다는 보고가 수시로 파견되는 암행어사와 사간들에 의해 보고가 되고 있소. 이판은 여기에 대한 대책이 있으면 말하시오. 아니면 차제에 특단의 조치를 강구하던가.”

이진의 질책에 교언영색으로 빛나던 그의 입술이 오늘따라 푸르죽죽 죽어 아무 말도 못하는 이이첨이었다. 그런 그를 향해 이진이 여전히 쏘아보자 이이첨이 간신히 입을 열어 말했다.

“걸리는 족족 체직시키고 있사오나, 아직도 구태의 악습이 남아 성상을 노엽게 한 점 면목없사오나, 앞으로도 더욱 단속을 철저히 하야, 빠른 시일 내에 구시대의 악습을 단절하겠사옵니다. 황상!”

“매번 그런 식으로 빠져나가고, 그런 미지근한 대책으로는 안 되겠소. 이를 해결할 방안이 있으면 제 대신 누구라도 좋으니 발언하시오.”

“이는 지방의 관리를 제대로 관리 감독할 기구가 없어서가 아닌가 합니다. 이 넓은 땅에 사간원의 몇몇 관원들과 암행어사만으로 한계가 있는 듯하니, 차제에 이를 감시하고 감사할 기관을 하나 만드는 것도 좋은 방안이 아닌가 합니다.”

이진의 말에 대한 영의정 유성룡의 답변이었다.

“흐흠.........!”

침음하던 이진이 말했다.

“위인설관이라는 말이 있듯이 직제만 새롭게 만든다고 능사는 아니오. 해서 짐이 생각건대 사헌부의 관리를 대폭 놀리는 것이 좋겠소. 해서 최소한 1년에 한 번 정도는 지방 수령을 포함한 말단 관리들까지 일제히 장부 검열은 물론 그들의 비리까지 조사해, 그들의 해이해진 기강을 바로잡고, 비리를 발본색원하는 것으로 합시다.”

“알겠사옵니다. 황상!”

제일 먼저 이진의 뜻을 받드는 자가 있으니 더욱 권한이 비대해질 대사헌 기자헌이었다.

1582년 성균관에 입학, 1590년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 이듬해 사가독서(賜暇讀書)하고 검열(檢閱)이 되었다. 1592년 예문관봉교겸설서(藝文館奉敎兼說書), 병조, 이조좌랑을 거쳐, 정언·집의·성균관직강·홍문관부교리·보덕(輔德)·사간·사인(舍人)·동부승지·우부승지·좌승지가 되었다.

1597년 호조참판으로 진하사(進賀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오고, 1599년 강원도관찰사, 이듬해에 부제학, 대사헌이 되었다.

원 역사에서 그는 인조반정 당시 김류(金瑬), 이귀(李貴) 등이 모의 가담을 요청했으나 신하로서 왕을 폐할 수 없다고 거절하였다. 또한 반정 후에 인조가 신하를 등용할 때 불렀으나 가지 않았다.

“나라를 꾸려가려면 어느 나라든 문제되는 것이 세수(稅收)요. 과인이 여러 나라를 비교 고찰한 결과 다른 나라는 다 백성들에게 거두는 세금이 3할5푼 이상이요. 헌데 우리 조선은 짐의 즉위 직후 1할5푼 선이었던 것을 상업의 물품세, 공량세 등으로 2할까지 끌어올렸으나, 더 이상 진척이 없소. 그나마 짐이 인삼, 철, 소금 등을 전매해 얻는 수입으로 국고를 충당하니 다행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조선의 재정은 벌써 거덜이 났을 것이오. 여러 소리 할 것 없이 증세 방안에 대해서 대책을 내놓으시오.”

말이 끝나자마자 이진의 시선이 향한 곳은 호조판서 김신국에게로 였다. 김신국(金藎國) 그는 과연 누구인가?

원 역사에서 그는 정권의 성격이 전혀 다른 광해군과 인조 양 대에 걸쳐 6번이나 호조판서를 맡았던 것은 그만큼 김신국이 실무에 능했던 관료임을 증거하고 있다.

그는 또 병법에도 능통하였다. 임진왜란 때는 충주에서 의병 1,000여 명을 모집하여 왜적과 맞섰으며, 1593년 도원수 권율(權慄, 1537~1599)의 종사관으로 있을 때 권율은 “진실로 경제의 재목이다(眞經濟之材)”라고 칭찬하였다.

훈련도감의 제조(提調) 이덕형(李德馨, 1561~1613)은 김신국을 “재주와 국량(局量)이 있고 병사(兵事)에 뜻이 있다”라고 하여 군색랑(軍色郞)으로 임명하였다.

유성룡(柳成龍, 1542~1607) 또한 무신으로 재주가 있는 자를 발탁하여 병서와 진법을 가르치고자 김신국을 추천하였는데, 유성룡이 남인임을 고려하면, 김신국이 당색과 관계없이 무재(武才)를 인정받았음을 알 수 있다.

국방에 대한 김신국의 탁월한 능력은 광해군대인 1613년(광해군 5) 평안도관찰사를 맡으면서 정책으로 현실화된다. 그는 후금이 필시 침략할 것을 예견하고 미리 준비하는 계책으로서 진관을 설치하고(置鎭管), 조련을 밝게 하고(明操鍊), 군율을 엄히 하고(嚴軍律), 사기를 장려하고(勵士氣), 상 주기를 중시하고(重賞貧), 기계를 수선하고(繕器械), 전마를 공급하는(給戰馬) 7가지의 방안을 제시했다.

김신국은 방어의 도는 큰 것에 있지 않고 착실히 준비하는 것임을 강조하였다. 병법의 “주인으로서 손님을 기다리고 편안한 것으로서 수고로운 것을 기다린다(以主待客 以逸待勞)”는 것을 따르는 것이라고 했다.

김신국은 호조판서로 임명된 직후 ‘식화(食貨)는 왕정이 먼저 할 바이며 축적(蓄積)은 생민의 대명(大命)’이라는 인식하에 은광 개발과 주전(鑄錢)의 통용을 건의하였다. 그 예로 단천 은광의 개발을 건의하기도 했다.

경제의 총책임자로서, 국가적 정책 차원에서 화폐의 유통을 건의하고 실현시켰다는 점에서 김신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크다. 김신국이 동전의 주조와 유통을 건의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빈약한 농업생산에 경제기반을 둔 국가재정의 궁핍을 극복하려는 데 있었다.

김신국의 경제정책은 양전(量田)의 철저한 시행으로 농업경제의 기반을 튼튼히 한 바탕에서 국가의 비용을 절감하는 절제와, 생산 확대를 통한 국부 증대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 방안이었다.

이것은 화폐유통과 함께 국용을 절제하고, 어업과 염업과 같은 바다에서 생산되는 이익을 국가재정으로 적극 확보하려는 정책에서도 두드러진다 하겠다.

아무튼 김신국 또한 탁월한 실무관료로 그의 공적에 비하면 역사의 조명을 제대로 받지 못한 인물이라 하겠다. 김신국이 채 입을 열기도 전에 입을 여는 사람이 있으니 좌의정 이항복이었다.

“결국 증세는 백성들의 주머니에 손을 대는 것이므로 그 저항이 만만치 않을 것이옵니다. 황상! 백성의 아픔을 황상의 아픔으로 여기사 각종 구황작물의 보급, 이앙법을 통한 이모작에 의한 생산성 증대, 화폐의 주조로 인한 상업과 광공업의 발달로, 이제 간신히 굶주림을 면한 백성들에게 증세는 또한 고통이 아닐 수 없사오니,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황상!”

“흐흠........! 좌상의 말이 틀린 말은 아니나 국가적인 과업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재정이 더 필요한 것도 사실. 양 안의 절충점을 찾아보는 것이 어떻겠소?”

“성상의 어지신 정사로 해마다 세수가 증대하고 있사온즉 여기에 좀 더 절세를 한다면 백성들에 대한 세금 전가 없이도 충분히 나라 사람이 가능하리라 보옵니다. 하니 이제 밥술이나 떠 넣기 시작하는 백성들에게 세금 전가는 가급적 피해야 할 것으로 아옵니다. 이는 성상의 덕치를 더욱 우러르게 보는 바, 이 땅에 성군이 나셨다는 백성들의 칭찬이 더욱 자자해줄 아옵니다. 황상!”

“허허.........! 여기 이판 보다 더 능한 아첨꾼이 있을 줄은 몰랐군. 허허........!”

웃는 이진의 표정이 과히 싫지는 않은지 더 이상 증세에 대한 언급 없이 다음으로 넘어갔다.

“짐이 생각하기에 세종대왕께서 창제하신 언문보다 더 위대한 문자는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오. 헌데 우리의 현실은 어떻소? 모두 명의 문자인 한문 일색이니 이 또한 사대의 산물이 아닌가 하오. 해서 과인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쉽게 깨우칠 수 있는 언문 즉 ‘한글’이라 명명하거니와, 이를 널리 보급해야 할 것이오. 그 방안으로 각 지방의 향교마다 반드시 한글을 가르치는 것은 물론 그 입학 자격을 남녀 구분 없이 또한 천것들을 제외한 전 상민 자녀로 확대해 가르쳤으면 하오. 물론 지금도 향교 입학에 상민이 차별이 있다는 것이 아니나, 그 외연을 강제적으로라도 넓히란 말이오. 오히려 문자가 없는 만주족을 비롯한 이족들이 한글에 더 능하니 이는 뭔가 거꾸로 된 일이 아닌가 하오.”

이진의 시선이 예판 남이공으로 향하자 그가 급히 고개 조아려 아뢰었다.

“그렇게 시행하려면 향교의 확대는 물론 가르칠 훈장부터 확보하는 것이 급선무. 우선 이부터 확보하고 나서 점차 확대 시행하는 것으로 방향을 잡겠사옵니다. 황상!”

“옳거니, 짐의 말이 그 말이오.”

기꺼이 찬성하는 황제 이진이었다.

남이공((南以恭) 그는 누구인가?

호 설사(雪蓑)로 1590년 증광문과에 장원급제한 뒤 1593년 시강원사서(侍講院司書)가 되고, 이듬해 평안도 암행어사를 거쳐 사헌부지평, 사간원정언, 홍문관교리 등을 역임했다.

형조참의, 대사간, 이조참의, 예조참의를 거쳐 이듬해 홍문관부제학이 되었다가 현직에 이른 인물이었다. 권모술수에 능하고 담론을 좋아했다.

“병판의 건의로 그간 조선군에 왜, 명, 야인 할 것 없이 한데 묶어 편제를 이루다보니, 언어라든가 제 문화 관습이 달라 아직은 단일군으로서 제 능력을 온전히 발휘할 수 없다고 보는바, 이들의 화합과 역량을 이끌어내는데, 더 한층 힘써야 할 것이오. 하고 요즘 나라가 태평하다고 해서 지방군의 훈련이라든가, 여러모로 기강이 해이해진 점이 있으니, 이를 바로잡아야 할 것이오. 어느 나라든 아무리 평화 시라도 전쟁을 잊으면 반드시 그 화가 미치는 법, 이를 유념해야 할 것이오.”

“알겠사옵니다. 황상!”

이진의 하교에 급히 고개를 조아리는 병판 강홍립이었다.

명나라의 원병으로 5도도원수(五道都元帥)가 되어 후금을 쳤으나 대패하였다. 후금에 억류되었다 정묘호란 때 입국하여 조선과 후금의 강화를 주선하였으나 후금에 투항한 역신으로 몰려 사망한 인물이었다.

강홍립이 후금을 치는 5도도원수가 된 배경에는 그가 외교 전략과 중국어에 능통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부차(富車)에서 대패하고, 조선군의 출병이 부득이하여 이루어진 사실을 적진에 통고한 후 군사를 이끌고 후금에 항복하였다. 이는 현지에서의 형세를 보아 향배를 정하라는 광해군의 밀명에 따른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결국 역신으로 몰려 죽었으니, 그로써는 억울한 면이 있을 것이다. 아무튼 그의 조아림을 끝으로 잠시 정회를 선포하고 휴식시간을 갖는 이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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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 후기 ============================

후의에 감사드리고요!^^

늘 행복하시고 건강하세요!^^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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