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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자임해-103화 (103/210)

< -- 103 회: 황제의 꿈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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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丁酉:1597)년, 3월 초.

원 역사에서 이 해에는 왜의 재침을 받았지만 지금 조선은 감히 명국을 치려하고 있는 것이다.

3월 초. 이때는 이미 여러 곳에서 전선이 형성되고 있었다.

가장 먼저 명의 하 삼성에서는 일시 물러갔던 왜구 3만이 다시 쳐들어와 해안은 물론 온통 내륙까지 휘젓고 있었다. 이를 지휘하는 사람이 원균이었다.

진즉부터 이진의 명을 받아 왜의 내륙을 습격 3만 왜구를 모은 원균이 이를 명의 광동, 복건, 절강 일대에 풀어놓으니, 명 조정은 벌집을 쑤셔놓은 듯 소란스러워졌다. 이에 매 번 뒷북만 치고 다니는 이여송 대신 북방의 마귀(麻貴)가 급파되어 이의 진압에 나섰다.

그러나 천 명 단위로 수시로 이동하며 해변 내륙할 것 없이 약탈을 자행하고 관군을 희롱하니 마귀도 하 삼성의 군대를 동원해 이를 저지하려하나, 황하의 누런 물이 맑아지길 기다리는 것보다 더 요원한 일이었다.

아무튼 이는 하 삼성의 군대가 조선 원정에 동원되는 것을 막으려는 이진의 고육책이었다. 이 계는 3월이 되자 고산도의 이억기에 의해서도 자행되니, 이억기는 주상 이진의 특명을 받고 항왜들을 전부 동원해 강소와 안휘 성을 들쑤시고 다니고 있었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겨울이라 대동에 침입해 일부의 가축만 약탈해 갔던 구유크(貴由)가 봄이 되자 다시 대동과 장가구 일대에 나타나 소란을 피우기 시작한 것이다. 지난번 원정 때 부친 찰합이가 전사함에 따라 ,그의 부인이었던 정혜옹주를 관습에 따라 물려받음은 물론, 부족 전체도 인수받은 그가 이진과의 약속을 충실히 지키기 위해 출병한 것이다.

하여튼 몽고 놈들은 희한한 풍습이 있었다. 아비가 데리고 살던 여자를 물려받다니....... 이는 친모 친자 간에도 벌어지는 일로, 달단의 삼 낭자는 벌써 3대를 갈아탔으니, 근친상간도 이런 지저분한.........

하여튼 이에 명 조정은 동일규(董一奎)를 산서 총병으로 하여 유격 공자경(龔子敬)을 급파해 진압에 나섰다.

이런 속에서도 석성은 자신의 임무를 태만히 할 수 없어 산동, 하북, 하남에서 징집을 행해 8만 군사를 모았다. 조선 정벌군이었다. 이의 대장에는 원래 요동 총병(摠兵) 송응창(宋應唱)을 임명하려 했으나, 재가 과정에서 이여송(李如松)으로 바뀌었다.

신종 주익균은 이상하게 이여송에 대한 집착이랄까 총애가 심했다. 그가 서너 번의 탄핵을 받아 위기에 몰릴 때마다 매번 그의 편을 들어주었으니까 말이다. 아무튼 병조판서 석성은 대해점령군(對海占領軍:조선정벌군)이 꾸려지자 이여송에게 상방보검을 하사하며, 꼭 조선을 정벌하고 돌아올 것을 신신당부 하였다.

황제의 비호에 교만해질 대로 교만해진 이여송이 ‘그러마!’ 하고 제 지휘권을 인수받았다. 지휘권을 인수받은 제독 이여송이 제일 먼저 한 일은 자신 밑의 네 동생을 모두 부총병관(副摠兵官)으로 발탁한 일이었다.

순서대로 그들의 이름은 여백(如栢), 여정(如楨), 여장(如樟), 여매(如梅)였다. 모두 한 가락 하는 장수들임에는 틀림없으나 너무 팔이 안으로 굽는 감이 있는 인사였다. 또 이여성은 요동총병 송응창에게 전하여 자신이 산해관을 넘는 날 나와 맞으라 했다.

현지에서 보면 되지 너무 교만하고 권위적인 명이 아닐 수 없었다. 아무튼 이렇게 8만 군사를 꾸린 이여송이 산해관을 넘던 날이 3월 초순이었다. 봄이라지만 아직 북방은 봄과는 좀 거리가 있었다.

하필 이여송이 8만 군사를 거느리고 산해관을 넘던 날은 진눈깨비마저 내려 병사들 모두 어깨를 움츠리고 걷게 하고 있었다. 이런 이여백의 부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열 지어 선 송응창의 군사가 아니라 급보였다.

명의 제일 전선인 요양, 청하, 무순 성이 조선군과 야인 군사들에 의해 일제히 공격을 받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이에 창황히 군사를 몰아 현지로 달려가는 이여송이었다.

한편 이때 요동에서는 이진의 명에 의해 기 약속된 대로 세 갈래의 군사가 명의 요충을 공격하고 있었다. 북의 무순성에는 엽혁부의 칭기야누의 1만5천 군사와 합달부의 양기누의 1만5천 군사, 도합 3만 군사가 무리지어 달려들고 있었다.

또 그 밑의 청하성에서는 누루하치가 거느린 3만 군사가 총 공세를 벌여 곧 성이 떨어질 듯 위태위태했다. 또 그 밑의 요양성에는 조선군 2, 3사단 4만이 달려들어, 간신히 목숨 부지해온 요동도사 엄일괴의 간을 콩 알 만하게 하고 있었다.

이에 광녕성에 주둔하고 있던 요동 총병 송응창이 구원 차 급히 내달으나, 제 시간에 댈지가 의문이었다. 이런 정세 속에서 전황은 또 한 번 급변을 맞고 있었다. 천여 척의 군선에 7만 군사를 태운 이순신의 대함대가 명의 발해만(渤海灣)에 나타난 것이다.

여기서 웃기는 일은 곧 육지로 상륙만 하면 바로 북경의 턱밑인 천진(天津) 또는 영하성(寧河城)이건만, 이 바다를 지키는 단 몇 척의 수군도 없다는 사실이었다. 아마 급보를 받은 절강 도독(都督) 진린(陳璘)이 칠팔십 척의 배를 거느리고 황망히 달려오고 있을 것이다.

왜구에 대비해 그쪽만 소규모로 수군을 운영하고 있던 명국 조정이었다. 그나마도 형편없는 수준이었다. 아무튼 아무 저항 없이 발해 만에 상륙한 이순신의 대 전단에서 제일 먼저 이일의 1사단 군사 2만이 하선을 시작했다.

무인지경 아무도 없는 영하 일대에 차례로 말과 군사가 내리길 얼마, 제일 늦게야 전함에서 내린 사람은 사단장 이일과 부 군사 지함두였다. 그런데 이진의 명에 의해 특파된 지함두의 복장이 가관이었다.

거친 베로 만든 두건에 초의(草衣)를 입고, 왼손에는 부채를 오른 손에는 죽장을 비스듬히 들었다. 그리고 오히려 추위를 느낄 쌀쌀한 날씨에도 살만 남은 부채를 흔들며 지함두가 말했다.

“선내에서 빈도가 한 말 잘 기억하고 있지요?”

“그렇소이다.”

“모두 하선한 듯하니 서둘러 작전 시행에 돌입합시다.”

“그러지요.”

대답한 이일이 앞서가는 파아손을 불러 말했다.

“애초의 계획대로 우리는 성이고 뭐고 거들떠보지도 말고, 바로 북경 성을 향해 내달리는 거요. 괜스레 성을 점령한답시고 얼씬거리다가 너무 시간을 지체하면, 우리의 계획에 큰 차질이 생기오.”

“알겠소이다. 장군!”

“출발!”

“출발!”

곧 2만 기마대가 지축을 울리며 일로 북경 성을 향해 쏜 살 같이 내달리기 시작했다.

이는 이진이 지함두에게 사전에 이른 작전으로 청 태종이 삼전도에 인조를 무릎 꿇렸던 그 작전이었다. 한마디로 속전속결, 번갯불에 콩 구워 먹는 속도전이었다.

청 태종이 압록강 변에 나타났을 때 조선군이 전혀 몰랐던 것은 아니었다. 알면서도 태만하였다. 아직 강이 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강이 얼어붙으면 도강 할 줄 알고 봉화 3개만 올려 경계경보만 전달하고 있는데, 이들은 얼지 않은 강을 도강해 내처 내달렸던 것이다.

오로지 수도 한양 성만을 보고. 그런데 이 과정에서 조선군은 또 착각을 했다. 한양으로 가는 요로의 성들을 점령해가며 이들이 진격할 줄 알았던 것이다. 그러니 봉화가 다섯 개 올라 적의 침략 사실을 알렸을 때는 이미, 청군이 한양 성 인근에 도착한 때였다.

부랴부랴 인조가 피난 짐을 꾸리나, 벌써 적이 코앞이라 바다 건너 교동도로도 가지 못하고, 기껏 간다는 것이 남한산성이었다. 이렇게 해서 왕이 외적 앞에 수없이 머리를 조아리는 초유의 불행한 사태를 맞고 말았던 것이다.

우리 민족이 당했으면 배우는 바가 있어야지. 이를 후대인인 이진이 제대로 배워 제대로 지금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눈앞의 영하 성이고 나발이고, 1사단 2만 기병은 오로지 말 엉덩이에 채찍질만 해 내달릴 뿐이었다. 보급품도 필요 없었다. 각자의 무기 외에 비상식량으로 지급한 미숫가루 하루치와 주먹밥 하나가 전부였다.

돼지 오줌보로 만든 수통도 필요 없었다. 갈증이 나면 말의 목에 빨대를 꽂아 기갈을 해결해가며 내달리고 있는 것이다. 이는 몽고군이 세계를 제패할 수 있었던 기동전략에서 배운 바였다.

아무튼 영하 성에서 북경까지 직선거리로 100km 남짓. 돌고 돌아 120km 즉 300리 길을 1사단 기마병들이 내처 내달려 도착한 시각이 신시 정(申時 正:오후 4시)이었다.

영하에 하선한 시간이 오전 10시 무렵이었으니 꼬박 6시간을 질주한 셈이었다. 그렇다고 뒤 한 번 돌아볼 여유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한 시간에 20km를 주파한 셈이니, 오늘날 경주마의 속도로 내처 달리면 2시간 밖에 안 걸릴 거리를 꽤 여유 있게 왔던 것이다.

그러니 중간에 주먹밥도 먹고 여진 기병에 비해 서툰 조선 기병을 배려해, 숨 돌릴 여유는 있었던 셈이었다. 아무튼 갑자기 하늘에서 천군(天軍)의 군대가 뚝 떨어지듯, 일단의 기마대가 돌입해 북경 성을 포위하니, 명국의 수도는 일대 혼란에 빠졌다.

그 뿐만 아니었다.

무거운 불랑기포는 못 가져왔지만 호준포 여타 천지현황의 각종 포는 물론 신기전의 화차까지 매달고 온 조선군인지라, 포가 방렬되자마자 북경 성 내에 일대 불벼락을 내렸다.

펑, 펑, 펑!

쾅, 쾅, 콰광!

“크, 큰일 났사옵니다. 황, 황상!”

낯색이 하얗게 질려 더듬거리는 태감 유용을 보는 익균의 눈에는 짜증을 넘어 분노의 불길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때마침 익균은 총애하는 정 귀비를 안고 주연(酒宴)을 벌이고 있었던 참이었다.

이때였다. 다시 한 번 천둥 벼락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펑, 펑, 펑!

쾅, 쾅, 콰광!

“이 백주대낮에 웬 날벼락 치는 소리냐?”

“조선군이 북경 성을 포위했나이다. 황상!”

“무슨 소 하품하는 소리야! 조선군이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지기라도 했단 말이냐? 외방의 군사는 다 무얼 하고?”

“아무튼 조선군이 북경 성을 포위하고 있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옵나이다. 황상!”

“당장 내각수보와 병조를 들라 이르라!”

“네, 황상!”

그 시각 조선군은 이제 정밀 타격을 시행하고 있었다. 자금성(紫禁城)의 정문이라 할 수 있는 남문 즉 승천문(承天門)을 정 조준해 포격을 실시하고 있는 것이다. 승천문이란 지금의 천안문(天安門)을 말한다. 이 당시는 승천문이었고, 훗날 화재가 나 전소된 것을 다시 재건한 후(1651), 천안문이라는 이름이 붙게 된 것이다.

또 광장도 40만 평방미터나 되는 지금과 같이 넓지 않고 당시는 1/4 크기이니 얼마든지 직선거리로 유효사거리 내에 승천문이 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정밀 타격을 한다 해도 이 당시는 현대와 같이 정밀도가 높지 않아서, 아름다운 금수교(金水橋)부터 먼저 박살이 나고, 승천문에 간신히 한 발이 맞았다.

그제야 황제의 어림군이 쏟아져 나오고 오군영 소속의 병사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런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군의 편전부대와 조총부대였다.

탕, 탕, 탕!슉, 슉, 슉!

짚단 쓰러지듯 쓰러지는 명군들이었다.

이렇게 도성을 지키기 위한 명군과 조선군 간의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이 시간, 기다리다 못해 모처럼 정궁에 나타난 익균에 의해, 병판 석성의 머리가 터져나가는 참변이 발생하고 말았다. 벼루를 내던진 탓이었다.

“네, 네놈이 그래도 일국의 국방을 책임진 놈이더냐?”

“폐하.........!”

머리에서 피가 질질 나나 감쌀 새도 없이 부복하기 바쁜 석성이었다.

“갑자기 조선군이 하늘에서 떨어지듯 나타니, 이 무슨 해괴한 일이냐? 입이 있으면 해명을 해봐라, 해명을.........!”

“그보다 우선 방어가 급선무인지라..........”

“그래 어떻게 방어할 것인데?”

“소신이 먼저 앞장서서 싸우겠습니다. 폐하!”

“병졸보다 못한 놈! 뭐, 앞장서서 싸워? 네가 말단 병졸이냐? 어떻게 이 난국을 타개할 생각을 해야지, 말단 항오도 아니고. 도대체가 원.........!”

이때 내각 수보 조지고(趙志皐)가 재빨리 아뢰었다.

“폐하! 일단 요동에 나가 있는 군사를 불러들이시고, 각 성의 군사를 추가로 모집하는 한편, 적도들에게는 휴전을 제의하여 협상으로 질질 시간을 끄는 것이 상책인 줄로 아뢰오.”

그 말을 받아 주익균이 빈정거리듯 말했다.

“짐 같으면 절대 시간을 끌지 않겠다. 일단 총공격을 퍼부어, 짐부터 손에 넣고 협상을 하던지 지랄을 떨던지 할 것이야. 하니 장기대책보다 지금 당장 필요한 대책을 내놔!”

“우선은 오군영과 어림군까지 동원하여 최대한 시간을 버는 수밖에는 없나이다.”

병판 석성의 말에 답답한지 한숨만 내쉬었다 들이쉬었다 하는 주익균이었다.

이때였다.

콰광! 콰광!

연이어 벼락 치는 소리가 들리고 ‘와아........!’하는 함성 소리까지 들려왔다.

낯색이 창백하게 변한 석성이 머리를 누르며 그대로 달려 나갔다. 아무래도 숭천문이 적에 의해 뚫린 듯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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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 후기 ============================

100회를 맞아 보내주신 성원에 보답하는 의미에서 오늘은 한 편 더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크신 후의에 깊이 감사드리며, 늘 행복하시고 건강하시길 축원 드립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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