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자임해-96화 (96/210)

< -- 96 회: 선제공격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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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튿날.

이곳 해삼진의 정벌이 끝나자 따라온 문관들이 분주해졌다.

이진은 점령한 여진 땅을 아예 조선의 영토에 편입시키기 위해 적극적인 정책을 펴기로 하고, 초기부터 점령지에 문관을 파견할 것을 명하였다.

따라서 벌써 이곳에는 해삼진 수령(守令)이 임명되어 그 밑에 육조를 관장할 아전까지 따라 붙었다. 아니 아예 권농관(勸農官)까지 파견하여 농경을 권장하고 지질조사 및 수리와 관개 업무까지 살피도록 했다.

뿐만 아니라 경국대전의 규정에 의거한 행정조직 체계를 아예 갖추도록 했다. 즉 ‘서울과 지방은 5호(戶)를 1통(統), 5통을 1리(里)로 하고, 몇 개의 이를 합쳐 1면(面)을 만들고, 통에는 통주(統主), 이에는 이정(里正), 면에는 권농관을 각각 둔다’는 규정에 따라 행정조직 체계까지 갖추게 한 것이다.

이에 따라 육조의 이배(吏輩)들이 자신들의 맡은 일에 분주하였다. 호조를 맡은 이서(吏胥)는 전체 가구 수는 물론 각 호의 구성 성원들에 대한 신상정보, 재산의 유무로 농경지는 물론 가축의 수까지 세세히 파악하여 호패 발행까지 처리하느라 분주했다.

병조를 담당한 연리(掾吏)는 정남(丁男)을 파악하여 중앙군 자원 시 나라에서 녹봉을 지급한다는 사실을 들어 기병을 모집하였다. 그 결과 총 352가구 675명의 정남 중, 젊은 사람만 가려 뽑아 기병 200명을 충원하였다.

공조의 속리는 고기잡이배를 가지고 있는지의 유무는 물론 산과 하천, 소택지 등도 세세히 기록하고 이의 주인이 있는 지까지 세세히 파악하였다. 예조 소속의 아전은 열심히 공부하면 과거에 응시할 수 있는 기회도 있다고 침을 튀기나, 조선말도 제대로 모르는데 뜬구름 잡는 이야기에 지나지 않아 통박만 당했다.

이렇게 점령한 야인들을 조선의 행정조직에 편입시키기 분주한 가운데 권농관은 면밀히 지질 조사를 하여 농사에 적합한 땅을 선정해 내었다. 그렇게 바쁜 속에서 신립은 예하 영장(營長) 중에서 동생 신할((申硈)을 자신의 중군 천막으로 불러들였다.

동생으로부터 군례를 받은 신립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엄숙한 얼굴로 말했다.

“네가 여기 남아줘야겠다.”

“제가요?”

“왜 싫으냐?”

“아, 아닙니다.”

고개를 끄덕인 신립이 말했다.

“이 해삼진은 북해도와 조선을 잇는 해상교통의 요지가 될 터, 절대 잃을 수 없는 곳이다. 해서 전하께서 명하길 성까지 축조하여 단단히 지키도록 했다. 그러니 일 개 영을 거느리고 틈나는 대로 성을 축조하여, 기병이 돌격해 와도 방어할 수 있도록 단단히 준비하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장군님!”

“우리는 이곳이 수습되는 대로 떠날 테니 그만 나가봐.”

“네, 장군님!”

이진은 출전하는 신립을 불러 특별히 당부한 일이 있었다. 농사가 가능하고 야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곳은 곳곳에 성(城)을 축조하도록 당부한 것이다. 이는 일차적으로 대 기병 돌격 저지용 방어물이기도 하지만, 이진이 진정으로 의도하는 바는 다른 데 있었다.

자세히 설명하지 않아 신립도 채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지만 이는 훗날 청의 몽골 지배 방법을 모방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즉 농사 가능한 지역을 선정하여 청(淸)은 이곳에 대규모로 축성(築城)하였다.

그리고 그 안에 몽골 민족을 때려 넣었다. 그리고 가급적 유목 생활을 접고 농경 할 것을 권장했다. 이렇게 되어 정주하니 당연히 상인들이 몰려들어 도시를 형성하게 되어, 성은 더욱 번창하게 되었다.

그러자 세월이 감에 따라 말 위에서 태어나 말 위에서 죽는다는 기마민족 고유의 습성을 잊어버리고 점점 그들은 순한 양이 되어갔다. 청이 의도한 바대로 그들은 고유의 야성 DNA를 잊어버리고 순치되어 간 것이다.

이게 하루아침에 되는 것이 아니라 세대를 거듭할수록 진행되는 것이니, 이진이 궁극적으로 노리는 야인들의 기동력을 당장은 상실할 염려도 없는 장구적인 계책의 일환으로 아주 적절한 책략이라 하겠다.

이를 위해 이진은 아직 조선 자체 내에도 하급 단위에는 권농관이 파견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야인 부락만은 반드시 권농관을 파견하여 농사 적합 여부를 판정하여, 그런 지질에 한해 축성토록 하고 농경을 권장하도록 진행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러시아의 연해주 땅을 보면 알겠지만 일부는 흑토지대로 아주 비옥한 땅이 많다. 따라서 이곳에 밀, 옥수수, 콩 등의 재배가 이루어지고 있지 않은가. 지금 신립이 거느리는 2사단이 주로 개척하는 땅이 연해주 일대이니 충분히 가능한 발상이었다.

물론 신립은 이 연해주뿐만 아니라 더 북쪽 아무르 강 이하는 모두 정복하도록 명받은 바 있었다. 아무튼1개 영(營)은 영장(營將) 포함하여 2,806명으로 구성되어 있는바, 신립은 이 외에도 각종 포 전력을 갖춘 1개 초(哨:초관(哨官) 포함 112명)도 남겨 방어를 굳건히 하도록 조처하고 해삼진 즉 지금의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났다.

참고로 이 해삼진은 농사가 잘 되어서라기보다는 북해도 해상전진기지의 일환으로 성이 축조되고 있는 게 맞았다. 물론 일부의 땅은 이곳도 농경이 가능했다.

여기서 잠깐 신립의 가계를 들여다보면 첫째가 병조판서를 역임한 신잡(申磼)이고, 둘째 신급(申礏)은 피난 중 왜군을 만난 어머니가 벼랑에서 투신하자 그 뒤를 따라 뛰어내려 모친을 구하고 죽음으로써 후에 효로써 정려 받은 사람이고, 셋째가 신립이며, 막내가 신할이었다.

원 역사에서 신할은 경상도좌병사(慶尙道左兵使)를 지냈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함경도병사(咸鏡道兵使)가 되어 선조의 몽진을 호위한 공으로 경기수어사 겸 남병사(京畿守禦使兼南兵使)에 임명되었다.

이후 도원수(都元帥) 김명원(金命元)과 임진강에서 9일 동안 왜적과 대치하다가 도순찰사(都巡察使) 한응인(韓應寅)의 병력을 지원받아 심야에 적진을 기습하였으나, 복병의 공격을 받아 그 자리에서 순절한 사람이었다. 당시 그의 나이 44세였다.

* * *

신립은 북진에 북진을 거듭하였다.

그동안 크고 작은 부락들을 복속시켜 오다보니 어느덧 신립의 2사단은 흥개호(興凱湖:싱카이후) 부근까지 이르렀다.

정찰대를 운용하여 야인들이 많이 산다는 보고를 받았지만 지금까지와는 근본적으로 다르게 많은 야인 부족들이 일부는 농사를 짓고 일부는 방목을 하며 몰려 살고 있었다. 정찰대 소속된 권농관의 보고에 의하면 그만큼 토질이 좋아 목초는 물론 농경에도 적합한 땅이라서 그러하다 했다.

신립으로서는 고민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흥개호 서쪽으로는 진입하지 말라는 지침을 사전에 주상으로부터 받았지만, 이곳은 분명 흥개호 동편인데 많은 유목민들이 몰려 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신립은 결국 파발을 띄워 주상 이진의 지침을 받기로 하고, 혹시 모를 야인들의 습격에 대비해 수레 등으로 둥글게 외벽을 쌓아 방진을 형성하고, 주상의 비답을 기다렸다. 그러는 동안 점점 분위기는 흉흉해졌다.

이들이라고 바보가 아닌 이상 모를 리가 없었다. 조선 군대가 남쪽부터 쭉 같은 여진인을 정복해왔다는 것을. 기동력을 생명으로 삼는 이들인바 아무리 정복을 하고 온다고 해도, 이 잡듯 샅샅이 뒤지고 올 수는 없는 노릇이고, 거개가 정찰대의 보고로 제법 많이 몰려 산다는 부족만 정벌해 왔기 때문에, 이들도 작금에는 조선의 정책을 환히 눈치 채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튼 일촉즉발의 분위기 속에 주상의 비답이 내려졌다.

‘권율의 3사단을 급파하겠다. 흥개호 동쪽은 정벌해 조선의 강역으로 삼으라’는 지침이 내려진 것이다. 이에 신립은 자신의 군막으로 제장들을 불러들였다.

이때 영장 중의 하나인 변기(邊機)가 와 고했다.

“후르하부의 패륵(貝勒) 파아손(把兒遜)이 장군님을 뵙자고 찾아왔습니다.”

“그래? 일단 모셔라!”

“네, 장군님!”

잠시 후 변기가 일단의 야인들을 데리고 중군 천막 안으로 들어왔다.

“어서 오시오.”

“후르하부의 패륵(貝勒) 파아손(把兒遜)이라 하오.”

신립의 공손한 환대에도 파아손은 무례한 말투로 거만을 떨었다. 그러나 신립 또한 이쪽의 정세에 어둡지 않아 그가 왕(貝勒)이라고 거만을 떨고 있지만, 동부 야인 여진의 세 부족 중의 한 부족인 후르하부의 대족장인 정도는 알고 있었던 터라, 여전히 공손한 자세를 유지하며 자리를 권했다.

“자, 자리에 앉으시죠. 어쩐 일로 오셨는지요?”

그러나 여전히 뻣뻣한 태도로 신립이 권하는 의자에 앉지도 않고 팔짱을 끼고 선채 그가 말했다.

“우리 부족은 지금까지 조선 조정의 권고에 따라 서로 필요한 것을 교역하며 무탈하게 잘 지내왔소. 그런데 왜 갑자기 정책을 바꾸어 무단으로 우리 여진인들을 정벌하고 다니는 것이오? 백번을 양보하여 그 전의 일은 추궁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우리의 세력권인 이곳에서는 당장 떠나주시오. 아니면 전쟁도 불사하겠소. 흥! 우리의 전사만 2만이 넘으니 알아서 하시오.”

“흐흠........!”

침중하게 신음을 뱉은 신립이 말했다.

“조선 조정의 동부 여진인과 선린(善隣)을 유지하겠다는 정책은 아직도 확고하오. 다만 척박한 땅은 우리가 거두어 도모하고자 하는 바가 있는 지라, 오다보니 이곳까지 발을 들여놓았소만, 정 패륵께서 원치 않는다면 떠나도록 하죠.”

“고맙소. 우리도 그렇게만 해준다면 조선 조정과 척을 지고 살고 싶지는 않소.”

“삼일 후까지는 제반 준비를 갖추어 떠날 테니, 그런지 아오.”

“고맙소. 지금까지 유지되던 화기를 상하지 않게 되어 천만다행한 일이오. 그럼........!”

그가 물러가자 신립은 앞에 있는 탁자를 쾅하고 내리치며 분을 삭이지 못해 한동안 씩씩거렸다. 파아손(把兒遜)이 2만 전사라 했지만 그것은 거짓이고, 주상 이진이 내린 정보에 의해  1만  정도의 전사를 거느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신립 딴에는 흥개호 동쪽만 정벌할 생각이었는데, 저들 부족 전체가 이미 눈치 채고 덤빈다면 이는 상황이 달라도 크게 달랐다. 현 신립에게는 중간에 계속 병력을 떼어놔 6천 병력에 그간 모집한 야인 전사 1천이 전부인 현 병력이었다.

이 병력을 가지고 저들 1만 기병과 격돌한다는 것은 아무리 조선군이 철포 면에서 우위에 있다 해도 대패할 확률이 높았다. 어쩔 수 없이 장부는 굽힐 때는 굽힐 줄도 알아야 된다고 생각해 철수를 결정했지만, 그 분노만은 누를 길 없어 혼자 씩씩거리고 있는 것이다.

이런 신립에게 또 하나의 전령이 들이닥치니 주상 이진으로부터 보내온 파발이었다. 남쪽을 향해 세 번 절하고 그 내용을 읽어보니 저절로 그의 신기묘산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 앉은 자리에서 천리 밖을 내다보는 그의 신기묘산에 경외감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밀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혹여 다른 대 부족과 전투를 벌일 일이 생기면 일단 그곳에서 철수하라. 그리고 더 북으로 올라가 우수리 강 지류 목릉하(穆陵河)에 성을 축조하고, 3사단과 합세하여 적을 상대하라. ‘견벽철포(堅壁鐵砲)’ 이 네 자만 명심한다면, 승리를 의심치 마라!>

비로소 눈앞이 훤해진 신립은 제장들을 닦달해 서둘러 짐을 꾸리도록 했다.

견벽철포(堅壁鐵砲) 즉 성문을 굳게 닫고 철포에 의지해 싸우라는 말에 문득 깨닫는 바가 있어, 그대로 행하기로 하고 일로 북으로 행렬을 재촉하는 신립이었다.

그곳에서 수백 리를 북으로 올라와 목릉하 변에 도착한 신립은 사방으로 정찰대를 보내 그럴듯한 지형을 찾도록 했다. 그 결과 북으로는 제법 높은 산이 병풍처럼 둘러쳐 있고, 좌로는 목릉하가 도도히 흐르고, 남과 동은 탁 트인 벌판을 찾아내 이곳을 축성지로 선정했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가 있었다. 그 벌판에는 지금 수십, 수백 단위의 야인 부족들이 방목을 하고 있어 이들을 물리치기 전에는 이곳의 축성이 곤란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에 신립은 이 부족에 대해 세심한 정찰과 첩보활동을 하도록 했다.

첩보활동이야 당연히 새롭게 조선군에 편제된 야인 기병 중 언변이 있는 자들이 맡았다. 정보를 모으길 오 일.

정보를 종합한 결과 이들은 우량하(兀良哈)라는 부족으로 자신들의 말로 ‘암반(大人)’이라 칭하는 추장 아비차(阿比車)가 일족을 이끌고 있었다. 후르하부에도 속하지 않는 별개의 부족이었다.

결단을 내린 신립이 이 부족들의 각개 격파에 나섰다. 그 중에서도 세가 가장 번성한 부족을 제일 먼저 공략하러 나선 것이다. 모든 준비를 마친 신립은 모두가 잠든 이른 새벽 기습전에 나섰다.

병법에서 비겁이란 없는 것이다. 어떻게 하든 자신 부하들의 희생을 최소화해 승리를 하는 것이 관건이지, 다른 무엇이 필요한가. 당하고 비겁자니 어쩌고 떠드는 놈이 못난 놈인 것이다.

축시 말 일찍 새벽밥 해먹인 신립은 이제 막 어둠이 가시는 시각 중군 천막을 나섰다. 기병은 재갈까지 물림은 물론, 방울도 떼어 최대한의 기도비닉(企圖秘匿)을 유지한 채 야인들에게 최대한 신중하게 접근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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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 후기 ============================

크신 후의에 진심으로 감사드리고요!^^

늘 행복하시고 건강하세요!^^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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