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자임해-90화 (90/210)

< -- 90 회: 십년대계(十年大計) 부국강병(富國强兵) -- >

7

이진이 봄기운을 만끽하며 후원을 거닐고 있을 때였다.

사저에서부터 중전을 모시던 옥란이 총총 걸음으로 다가와 이진에게 아뢰었다.

“전하! 기쁜 소식이 있사옵니다.”

“무슨 일인데 그렇게 호들갑이냐?”

“중전마마께서 회임하셨다는 소식을 방금 다녀간 어의로부터 들었사옵니다. 전하!”

“그래? 아 하하하.........!”

갑자기 하늘을 우러러 앙천광소를 터트리는 이진이었다. 십년 체증이 내려가듯 큰 근심을 내려놓은 기분이 든 이진의 웃음은 여간해서 그치지 않았다.

이진이 비록 빈들을 한꺼번에 네 명씩을 거두었지만 중전의 회임을 포기하지는 않고 지극정성으로 봉사(?)한데는 나름의 고충이 있었다. 적서의 차별이 심한 이 조선사회에서 자신의 후대가 또 서자로 왕통이 이어갈 경우, 절름발이 군주가 되어 한동안은 신하들의 그늘에 묻힐 수밖에 없음을, 이진은 무척 안타까워하고 있었던 까닭이다.

바로 윗대 선조로부터 이제 조선은 방계로 왕위를 이어가고 있는데, 게다가 또 자신은 그 중에서도 또 서자 출신 왕이었다. 신하들이 이를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지만, 은연중에 왕을 무시하는 마음이 심중에 자리 잡고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게다가 또 서자로 왕통을 이어나간다면 군왕에 대한 신하들의 생각이 어떠하겠는가? 이를 누구보다도 잘 인지하고 있던 이진의 간난신고(?)가 드디어 결실을 맺는 것 같아 더 없이 기뻐하는 이진이었다.

이후 이진이 더욱 중전을 알뜰히 보살피는 속에서 후궁들도 다투어 임신을 하게 되니, 조선의 금궁(禁宮)은 아연 봄기운이 충만했다.

* * *

이렇게 조선의 궁궐에 봄기운이 한창일 때에, 여진 내부에서는 치열한 싸움이 전개되고 있었다. 싸움이야 이진의 예상 내에서 움직이고 있었지만 말이다. 엽혁부와 합달부가 주동이 된 해서여진이 누루하치를 공격했지만, 번번이 패퇴당하는 상황 속에서, 이번에는 지함두에 설득당한 장백여진이 움직였다.

장백여진의 너연부와 야류장부가 누루하치의 거성 퍼알라를 향해 진공하기 시작한 것이다. 앞뒤로 적을 맞은 누루하치는 아무리 주변보다는 세력이 강하다 해도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급히 세를 둘로 쪼개 동고부와 왕안 부족장에게 이들을 틀어막도록 하니, 장백여진도 더는 진군할 수 없게 되었다. 또한 해서여진도 더욱 공격에 박차를 가하나 공격에서 수비로 돌아선 누루하치의 전력도 완강해서, 누구하나 쉽게 승리를 거두지 못하는 상태가 지속되고 있었다. 자체 역량들만 소진하는 지루한 싸움이 계속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상태가 6개월 간 지속되자 이진이 송익필을 사자로 보내 이들의 싸움을 중재하니, 어쩔 수 없이 양측은 창칼을 거두었다. 이런 정세를 유심히 지켜보고 있던 인물이 있었으니 영원백 이성량이었다.

막상 현직에서는 물러났다 하나 여전히 이성량은 요동의 막강한 군벌(軍閥)이었다. 워낙 오랜 동안 현직에 있어 ‘리타야(李大爺)로 불리는 그의 영향력은 아직도 막강했다. 범 같은 자식들이 좌우에 즐비했고, 요동이나 산동(山東)의 무관들 가운데 상당수는 그의 가정(家丁)이나 막객(幕客) 출신이었다. 또 현역시절 깔아놓은 첩보원들도 여전히 그를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

이런 첩자들의 보고에 의해 조선군이 왜군을 대파했다는 소식을 접했을 뿐만 아니라, 이제는 그 영향력이 만주에까지 미치는 것을 본 이성량이 황제에게 상소를 하기에 이르렀다. 위와 같은 내용을 적시하고 조선의 힘이 더 커지기 전에 병탄하여 군현(郡縣)을 설치하고, 명의 직할령으로 삼자는 주장이었다.

또 여기에 도어사(都御史) 조집(趙)도 같이 상주(上奏)하여 부화뇌동(?)하니, 이런 정보를 입수한 조선 조정은 아연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명국 조정도 벌집을 쑤셔놓은 것 같이 시끌벅적하였으나, 다행히 이성량의 상주에 대한 명 조정의 반응은 부정적이었다. 병과도급사중(兵科都給事中) 송일한(宋一韓)과 급사중(給事中) 사학천(史學遷)이 이성량의 주장을 일축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조선이 비록 강해졌고 옛날과 같이 고분고분 하지는 않으나, 아직까지는 아국을 섬기는데 신하의 예절에 어긋나지 않았으니, 이성량의 주청은 과하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몇 가지 의문 사항을 해결하고 조선의 분위기를 파악하기 위해 칙사를 파견해야 된다는 내용은 설득력을 얻으니, 곧 명 조정에서는 황제의 칙사를 조선에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위의 내용을 이진은 조선 중신들에게 가감 없이 전부 공개하니, 그야말로 믿었던 자에게 발등 찍히는 기분이 든 제 대신들의 명국을 보는 시선이 이때부터 달라지기 시작했다. 이런 속에서 명의 칙사로 임명된 태감 유용(劉用) 이라는 자가 요동 벌에 들어섰다는 보고에 이어, 벌써 압록강 근처에 나타났다는 보고가 연이어 이진에게 들어왔다.

명국의 사신 태감 유용(劉用)이 누구인가?

수천 명에 이르는 명나라 환관 가운데서도 서열 2위의 막강한 인물이었다. 그런 그를 맞아 신하들이 주동이 되어 조선 조정은 부산하게 움직였다.

그가 요동에 나타났다는 보고를 접한 순간부터 접반사를 의주(義州)로 급파했고, 압록강을 건너는 순간부터는 극진한 예로 그를 맞고 있었다. 그러나 태감 유용이라는 인물은 대단히 돈을 밝히는 자로서, 압록강을 건너기 전부터 조선에 발을 들이면, 최소 은자 10만 냥은 뜯어가겠다고 공공연히 외치고 다니는 인물이었다.

15세기 조선에 다녀간 명나라 환관들에 대한 기억은 좋지 않았다. 워낙 뇌물을 밝히고, 요구 사항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그들 가운데 상당수는 조선 출신이었다. 하지만 명나라 황제의 총애를 배경으로 더 위세를 떨었다. 세종 때의 윤봉(尹鳳)과 성종 때의 정동(鄭同)이 그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이런 배경뿐만 아니라 황제부터 은을 밝히니 명나라는 작금 탐풍(貪風)이 온 나라를 휩쓰는 분위기였다. 이러니 이 자의 태도 또한 당당하고 의당 그래야만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무튼 조선 땅에 발을 들인 유용의 태도는 가관이었다.

의주에 도착한 유용은 자신에 대한 접대는 오로지 은(銀)으로만 하라고 했다. 은만 주면 식사도 다례(茶禮)도 필요 없다고 했다. 은이 부족하면 아예 움직이지를 않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가 거느린 수행원 중에는 한 밑천 잡으려고 조선에 들어온 상인들도 많았다. 그들 또한 이런저런 기완(嗜玩) 물품을 내놓고 강매하고, 온 나라 안이 이들의 접대로 몸살을 앓는 꼴이 되었다.

어찌 됐든 한 걸음 한 걸음마다 은을 깔다시피 해서 일단 이들을 도성에 들이는 데까지는 성공했다. 그런데 이자의 횡포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한양에 도착하여 보인 행태는 더욱 가관이었다. 은으로 된 사다리를 만들어 달라고 했다. 천교(天橋)라 불리는 이것을 타고 숭례문을 넘어가, 조선의 왕을 만나겠다는 것이었다. 이를 보고 받은 제 중신들부터가 모두 이제는 더 참을 수 없다는 듯 화들을 내며 편전은 그 자에 대한 성토장으로 변했다.

그러나 이진은 오히려 이들 중신들을 달래 은제 사다리를 만들어주는 것에 버금가는 은을 안겨, 기어코 그를 숭례문 안 황화방(皇華坊)에 위치한 태평관(太平館)까지 끌어들였다. 그리고 명 사신을 맞는 영칙의(迎勅儀)에 따라 칙사를 맞으러 나갔다.

제 중신들이 줄줄이 뒤따르는 가운데 그의 앞에 선 이진이었다. 이진이 그의 앞에 서 탐색하느라 뻣뻣이 서 있자, 수염 없는 자가 창황히 소리를 질렀다.

“조선 국왕은 어찌 하여 황제를 대리하는 본 칙사를 맞고서도 제대로 된 예를 베풀지 않는가?”

‘참자, 참아! 여기서 저자에게 예를 잃으면 다 쑨 죽에 코 빠트리는 격이다.’

내심 치솟는 울분을 씹어 삼키며 이진은 그자에게 다섯 번 절하고, 세 번의 고두를 행했다.

“어험! 자, 이제 조선 국왕의 절도 받았으니, 칙서를 전달하러 가볼까나?”

한껏 거드름을 피우며 비로소 말 등에 올라타는데, 하도 비만하여 몇 놈이 덤벼서야 이 자를 간신히 말 등에 태울 수 있었다.

끄덕 끄덕.

그자가 앞장을 선 가운데 일행은 경복궁 근정전으로 향했다. 이윽고 근정전 기단 밑에 이진이 부복하니 이 자가 명 황제의 칙서를 읽어 내려갔다.

[짐은 조선에 몇 가지 의문 사항이 있다. 본 칙사 편에 그 의문을 상세히 답하라!

첫째: 왜와의 싸움이 있었다는데 어찌 제대로 품신하지 않았는가? 또한 조선군 단독으로만 물리친 것인가?

둘째: 남방에 파견된 순무사의 말로는 포로가 된 왜구 중에는 조선에서 파병되었다는 자복이 있었던 바, 이 말이 과연 사실인가?

셋째: 아국의 관리 하에 있는 야인들에게 조선은 왜 임의로 벼슬을 내리고, 그들을 귀의시켰는가?

넷째: 조선에서도 이제 금은이 많이 난다는데 왜 이를 지금까지 숨겼는가?

다섯째: 얼마 전에는 야인들의 싸움에 개입하여 그들에게 무기를 공급하고 중재를 선일이 있는가?

위와 같은 물음에 제대로 답하지 못하면 전 요동총병관 이성량의 상주가 아니더라도 조선에 따끔한 교훈을 내릴 터, 전말을 하나도 숨김없이 칙사 편에 고하라!]

내심 올 것이 왔다고 생각한 이진이었지만 침착하게 일어나 일단 그를 달래, 근정전 안으로 들였다. 그리고 차를 대접하며 은 5만 냥에 갈음하는 금괴 한 궤짝을 내놓았다. 그리고 입이 쩍 벌어져 파리 다섯 마리가 일시에 빨려 들어가도 모르고 있는 유용을 향해 말했다.

“어느 하나 사실이 아닙니다. 다 조선을 미워하는 자들의 참소입니다. 칙사께서 조선 조정을 어여삐 여기시어 바른 말을 고해주소서!”

“아, 그야........! 조선 국왕의 말대로 양국을 이간시키려는 자들의 참소가 옳겠지요. 하하하........! 본 칙사는 비로소 기분이 매우 좋아졌소. 하하하.........!”

“그러시다면 바로 거동하시어 태평관으로 다시 가시지요. 하마연(下馬宴)이 준비되어 있사옵니다.”

“옳거니! 참으로 조선 국왕이 비록 매우 젊지만 예의를 아는 구료. 그럼, 일어서실까요?”

비만한 몸을 일으키며 턱을 쓰다듬으나 그곳에는 남처럼 있어야 할 것이 없었다. 이후 이진은 함께 태평관으로 건너가 하마연을 베푸는 것을 시작으로, 이튿날도 또 거동해 익일연(翌日宴)을 베풀었고, 또 떠나는 날에는 다시 전별연(餞別宴)을 베풀어 전송하였다.

유용이 떠나고 벌어진 이튿날의 조회 시간.

“전하........!”

이구동성으로 불러놓고는 모두 분해 눈물을 쏟는 제 대신들이었다. 그런 그들을 인자한 눈으로 바라보던 이진이 침착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군자의 복수는 10년이 지나도 결코 늦지 않는다 했소. 어찌 한 때의 분함을 참지 못하여 대계(大計)를 그르칠 것인가! 이 모든 것이 약소국의 비애! 더욱 발분하여 강한 조선을 만듭시다!”

“전하!..........!”

이진의 말에 또 다시 부복하여 분루를 떨어트리는 제 대신들이었다. 이때 예판 우성전이 일어나 발언을 하였다.

“전고에도 없는 탐학한 자를 맞아, 한 때의 분노에 몸을 맡기지 않으시고, 그저 냉정 침착하게 그를 어르고 달랜 전하의 행동거지는 제 신하들의 본보기가 되었나이다. 분노로 떨쳐 일어난들 당장 우리가 명국을 어찌 할 수도 없는 일. 그 치욕 속에서도 굽히고 굽히시어 만난(萬難)의 화를 떨치신 주상께 삼가 경의를 표합니다. 전하!”

“하하하.........! 살다보니 과인이 예판의 칭찬하는 말을 다 들을 때가 있구료. 맞소! 한 때의 분함을 참지 못하면 백 가지 근심을 남기고, 천년의 한을 남기는 법. 과인 또한 목구멍까지 차올라오는 분노를 참고, 참아 그 자를 접대한 바, 당분간은 명과 조선 조정 간에는 평화가 깃들 것이오. 하지만, 과인은 절대 오늘의 치욕을 잊지 않을 것이오. 지금부터 복수를 준비해 으하하하..........!”

갑자기 대소를 터트린 이진이 조용히 말을 맺었다.

“반드시 되돌려주는 날이 있을 것이오. 당장 몇 개월 안에 명의 북방이 시끄러워지는 것을 시작으로.”

“하하하.........!”

또 다시 거침없이 웃는 이진이었지만, 그의 눈에는 한 줄기 굵은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치욕을 당한데 대한 분노의 눈물이었다.

* * *

그로부터 삼 개월 후.

북쪽 찰합이가 이끄는 2만 기병이 갑자기 장가구, 대동에 나타나 무인지경을 휩쓸듯 북방을 휩쓸었다. 이에 명 조정은 마귀(麻貴)를 총병(總兵) 삼아 5만군을 급파해 이들의 제압에 나섰으나, 쉽게 진압하지 못했다.

근 삼 개월에 이르는 이들의 날뜀 속에 적들은 10만 마리 이상의 가축과 남녀 2만 이상을 포로로 잡고 북방으로 철수하였다. 이 과정에서 비록 적들은 수괴 찰합이를 잃었지만 명국이 입은 피해는 막심했다.

뿐만 아니라 남쪽에는 수시로 왜구가 준동하였다. 잊어먹을 만하면  한 번씩 왜구가 나타나 남방을 들쑤시니, 이여송(李如松)을 제독으로 하여 3만 군사를 급파하였다. 그러나 매번 그들의 뒤만 쫓는 뒷북 전투만 벌이는 이여송 군대였다.

이에 명 조정에서 이여송의 탄핵소리 높은 가운데, 뇌물로 간신히 버티고 있는 이여송이었다. 그러나 왜구의 준동은 끊이질 않고 명 조정도 이의 진압에 지쳐갔으며, 당장 당하는 자들의 민심 이반이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

그렇게 세월은 흐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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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

늘 행복하시고 건강하세요!^^

후의에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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