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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자임해-72화 (72/210)

< -- 72 회: 대마도도 우리 땅, 독도는 더 더욱 우리 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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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걷던 걸음을 우뚝 멈춰 세운 이진이 돌아서서 따르던 김 내관에게 명했다.

“무관으로 신충일(申忠一)이라는 자가 어디 근무하는지 수배하여 신속히 등대하도록 하라.”

“네, 전하!”

김 내관이 몇 마디 하자 대전내관 하나가 총총히 사라졌다. 이를 보고 나무 그늘로 들어간 이진의 머리에는 신충일 이라는 자의 생각으로 가득했다.

이 자는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 생활로 관직에 발을 내 디딘 자로 그의 저서가 아주 유명했다. ‘건주기정도기(建州紀程圖記)’라는 책을 저술한 사람으로, 이 책은 이 당시의 한만 관계를 알 수 있는 귀중한 사료로 남아 있었다.

임진란이 발발하고 일단의 소강상태라고 할 수 있는 강화교섭 기였던 1595년 조선에서는 북방 지역에 대한 동태를 조사할 필요가 생겼다. 그것은 임진왜란을 틈타 당시 세력을 확장하고 있던 여진의 성장에 주의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얼마 전에는 누르하치가 사신들을 보내 통교를 청해 왔기 때문에 답사를 보내야할 필요성도 있었다. 그리하여 왕명에 의해 신충일(申忠一)을 답사(答使)로 파견하게 되는데, 그와는 별도로 그는 여진 지역의 정탐의 임무도 띠고 있었다.

그렇게 하여 신충일이 압록강 만포진(滿浦鎭)을 건너 돌아오기까지의 과정을 아주 세세하게 저술한 것이 ‘건주기정도기(建州紀程圖記)’라는 책이었다. 이 내용이 얼마나 상세한지 그 일부만 옮겨 보면 그가 얼마나 유능한 외교관이고, 세작이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첫째 누르하치가 주거하는 곳의 위치, 외성과 내성의 크기와 축성 방식, 성문의 종류와 만든 방법, 외성에 사는 민가 조사, 내성에 사는 누르하치의 측근, 성중의 우물 숫자와 물의 량, 감시체제, 목책 방법, 성 위의 방비기구에 대한 유무.

둘째 책 누루하치의 군사동원방법, 누루하치(노추)의 장수 수는 150여 명이며, 소추(小酋)의 장수는 40여 명이라는 것, 연대(煙臺)의 군인 교체 방법과 양식의 조달 방법, 변고를 알릴 때의 방법, 양식의 조달과 보관 방법, 둔전(屯田)과 전지(田地)의 수확량, 여진족이 살고 있는 지역의 특성, 여진인의 처벌 방법, 여진과 그 외의 민족과의 관계, 건주여진 이외의 여진족과의 관계, 여진과 몽골과의 관계 등등 등.

첫째의 내용을 보면, 신충일이 얼마나 치밀하게 정탐하고 있었는가를 가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만일을 대비해 성곽의 규모와 누르하치의 위치, 우물 등등 마치 전쟁 전에 적진을 탐색한 내용과도 같을 정도였다.

둘째에서도 마찬가지로 매우 상세히 정탐을 행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그 내용들은 거의 건주여진의 세력 규모와 군사력, 그리고 전쟁이 일어났을 때의 대응 방법 등과 관련된 사항들이었다.

당시, 신충일의 이같이 상세한 건주여진에 대한 정탐 보고는 임진왜란으로 인해 혼란을 거듭하고 있던 조선 정부에 북방 건주여진에 관한 확실한 정보를 획득할 수 있게 해주었고, 또 이로써 남방에서의 왜군과의 대치 상황에 북방을 유효적절하게 대응할 수 있는 대외정책의 방향성을 제공해주었다고 평가할 수 있었다.

아무튼 이런 자가 머리에 떠올랐다는 것이 다행이라 생각하며 앞으로 북방 정책의 근간을 세우기 위해 골몰하는 이진이었다.

지금 이진이 들어온 정보에 의거 파악한 개략적인 상황은 이러했다. 먼저 여진은 누루하치가 자신의 부족인 건주여진을 통일한 상태로 또 하나의 큰 부족인 해서여진과 대치하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와 국경을 접하며 살고 있는 야인여진이 있는데, 이들을 세분하면 또 둘로 나눌 수 있었다.

강 건너 조선의 혜산에서 회령 일대에 사는 장백여진과 지금의 싱카이후 안쪽 목단강 일대에 사는 동해여진이 그들이었다. 이들을 좀 더 세세히 나누면 건주와 해서여진과 마찬가지로 여러 부족으로 나뉘는데, 아무튼 이에 누루하치가 한 걸음만 더 내디디면 만주를 일통하는 강성한 세력이 된다는데 이진은 유의하고 있었다.

누루하치에 대해 생각만 하면 골치가 딱딱 아픈 이진이었다. 그의 세력이 커져도 걱정 움츠러들어도 걱정이었다. 이진의 궁극적인 야망은 명국을 집어삼키는 것인데, 지금 조선의 국력으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이진의 등장으로 명의 원조도 받지 않고 왜적을 물리쳤으니, 그만큼 명이 소진할 군비를 아꼈다 할 것이다. 이는 그들의 멸망 시점이 늦추어졌다는 것과 다름없었다. 그러나 장점도 있으니, 임란 후 뿌리박혔던 중국에 대한 모화사상이 덜해졌다는 것이다.

하니 명의 황제를 모시는 사당인 ‘만동묘(萬東廟)’ 같은 것은 출현하지 않을 것이다. 어찌됐든 좀 더 국력을 보존한 명을 상대로 조선 단독으로 상대할 수는 없으니, 이진은 만주 야인들을 최소한 우리 편, 궁극적으로는 예속시켜 함께 거병하려니 이렇게 골치가 아픈 것이다.

이런 생각으로 누루하치를 바라보면 함께 거병할 동지로 그를 보면 그의 세력이 강성해지는 것이 옳다. 그러나 그를 예속 대상으로 보면 그의 힘이 강성해지는 것이 절대 좋을 리가 없는 이진이었다.

그래서 이진은 결론적으로 누루하치에게는 투 트랙 전술을 구사하기로 결정하고, 이의 연장선상에서 다른 야인들을 다룰 생각이었다.

또 하나 이진으로서는 궁극적으로는 타도의 대상이지만 현재로서는 사사건건 간섭을 받아야 하는 명국의 정세였다. 현 명의 황제 만력제(萬曆帝) 즉 주익균(朱翊鈞)은 현재 정사를 돌보지 않는 태정(怠政) 상태에 빠진지 3년 째였다.

어린 나이에 즉위한 만력제(萬曆帝)는 즉위 초기 10여 년 동안은 선제(先帝)의 뜻에 따라 내각대학사(內閣大學士) 장거정(張居正)에게 정무(政務)를 맡겨, 내정(內政) 개혁을 추진하는 등 이른바 ‘만력중흥(萬曆中興)’이라는 치적을 이룩했으나, 갈수록 가관인 작금이었다.

만력제는 황귀비(皇貴妃) 정씨(鄭氏)를 총애하여 장자(長子)인 주상락(朱常洛) 대신에 정귀비가 낳은 셋째 아들 주상순(朱常洵)을 황태자(皇太子)로 삼으려 하였다. 내각(內閣) 대신(大臣)들이 종법(宗法)의 원칙을 내세워 이에 반대하자, 만력제는 1589년 이후 30여년을 조정(朝廷)에 나오지 않고, 정무(政務)를 내팽개치는 태정(怠政)을 행하게 되는 것이다.

이에 대신(大臣)들도 몇 년 동안 황제의 얼굴을 보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으며, 신료(臣僚)들의 상주문(上奏文)은 회답이 없이 궁중에 방치되었다. 고위 관직이 비어도 후임자를 제대로 임명하지 못해 내각(內閣)이나 지방 관청의 상당수가 관리가 제대로 충원되지 못해, 업무가 제대로 추진되지 못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고 있는 작금이었다.

여기다 몇 년 더 있으면 환관(宦官)들을 광세사(鑛税使)로 파견하기 시작해, 백성들의 원성(怨聲)을 산다. 광세사(鑛税使)로 파견된 환관(宦官)들은 지하에 광맥(鑛脈)이 있다는 것을 알면 채굴(採掘)을 위해 그곳에 있는 백성들을 모두 몰아냈다.

그리고 채굴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인근의 상인들에게 도광(盜鑛)의 책임을 물어 배상을 강요했다. 광세사(鑛税使)들은 상인과 백성들을 마구잡이로 약탈하였고, 환관의 발호(跋扈)가 나타나면서 환관과 내각 사이의 당쟁도 격화된다.

광세사(鑛税使) 파견은 명(明) 시대에 나타난 대표적인 악정(惡政)으로 꼽힐 만큼 백성들의 반감을 샀지만, 만력제(萬曆帝)는 재위 기간 내내 광세사(鑛税使)의 파견을 중단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렇게 모아들인 돈을 왕실 재정인 내탕(內帑)에 두고 개인적인 사치로 낭비하여 더욱 백성들에게 원성(怨聲)을 샀다.

심지어 훗날 누르하치(努爾哈赤)가 이끄는 후금(後金)의 군대가 무순(撫順)을 점령하자 병부상서(兵部尙書) 설삼재(薛三才)를 비롯한 대신들이 요동遼東) 방어를 위한 군비(軍費)가 모자라 내탕금(內帑金)을 지원해달라고 요청하였으나, 만력제(萬曆帝)는 이조차도 거절하는 사람이었다.

이런 사람이 원 역사에서 임란에는 조선에 파병을 하니 후세에 이르러, ‘고려의 천자(天子)’ 또는 ‘조선의 황제’라는 야유를 받을 만 했다. 아무튼 명사(明史)에 언급되어 있듯이 명의 멸망은 마지막 황제 숭정(崇禎)이 아니라, 만력에 의해 비롯되었다 할 정도로, 명은 빠르게 쇠락의 길로 들어서 있었다.

이 쇠락의 첫째 원인으로 꼽히는 만력제의 태정의 원인에 대해서는 황태자 책봉을 둘러싼 신하들과의 대립 외에도 여러 설이 분분하다. 그는 누군가의 부축을 받지 않고는 혼자 걸을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비만이었고, 등과 다리가 굽은 신병(身病)을 앓아 움직이기를 싫어하게 되었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실제 1958년 정릉(定陵)의 발굴이 이루어져 만력제(萬曆帝)의 유골이 복원되었는데, 상체가 심하게 굽어 있었다는 사실이 확인되기도 하였다. 일부에서는 그가 아편 중독에 빠져 있었을 가능성이 제기되며, 어려서 총명함을 보였던 그가 장거정(張居正)이 죽은 뒤에 급격히 정무를 게을리 한 사실을 두고, 자신이 믿고 의지하던 인물을 잃음으로써 심각한 우울증을 앓았기 때문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아무튼 이 멸망을 재촉하는 또 하나의 원인이 되는 사건이 벌써 벌어져 있으니, 요동순무 이성량(李成梁)의 해임이 그것이었다.

이성량은 요동의 군사 책임자로 22년 동안 재임하면서 10여 차례나 승전보를 울린 사람이었다. 즉 변경지방의 무장으로서 세운 공로를 따진다면 200년 이래 으뜸이라는 공적을 세운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늙어갈 수록 추악해졌다. 탐욕에 물든 것이다. 누루하치가 교역으로 얻은 이를 분배받으면서, 그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방관하는 것은 물론, 그 돈으로 조정 요로 곳곳에 돈을 뿌려 자신의 탄핵을 막아왔다.

권불십년이라 했던가, 그것도 한계가 있었다. 아무리 이성량이 뇌물을 퍼부어도 이성량을 비난하는 목소리가 그칠 줄 몰랐다. 그러는 사이 이성량의 비호세력이었던 신시행(申時行), 허국(許國), 왕석작(王錫爵) 등이 차례로 조정에서 물러나자 그의 지위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결국 어사 장학명(張鶴鳴)의 탄핵을 받아 그 직위에서 해임되고, 영원백(寧遠伯)이라는 작위만 남게 되었다. 이 후 10여 년 동안 18명에 이르는 후임이 교체될 정도로, 요동지방은 명에 있어서 제대로 된 인사 관리가 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이성량의 해임이 작년의 일이었으니 누루하치로서는 물고기가 물을 만난 격이 될 것이다. 아무튼 익히 알고 있는 역사적 사실과 얻어진 정보를 바탕으로 한동안 깊은 생각에 빠져있던 이진이 급히 몇 가지 명을 추가로 내렸다.

곧 광해를 들라하고, 이순신과 만상의 대방을 불러올리라 한 것이 그것이었다.

* * *

시간상으로 지근거리에 있던 광해가 제일 먼저 등대하여 이진을 뵈었다.

침전인 강녕전이었다.

“승전을 감축 드리옵니다. 전하!”

부복해 몸 둘 곳을 몰라 하는 동생 혼(琿)을 지그시 바라보던 이진이 돌연 대소를 터트리며 말했다.

“하하하........! 못 본 사이 많이 컸구나. 이제 어른이 다 되었음이야.”

이진의 말에는 좀 어폐가 있었다. 한 살 차이인 동생에게 할 말은 아니었던 것이다. 이제 광해의 나이 열여덟. 16세면 정남(丁男)이라 해서 군역을 지는 당시의 시대상으로 보면, 완전 어른이라 할 수 있는 그를 보고 더 더욱 할 말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근 80에 육박하는 정신 연령에 자신이 아니었으면 왕이 되었을 그를 생각하면 일종의 연민이 드는 것을 금할 수 없는 이진이었다. 때로 그가 있어 말년의 비극을 피할 수 있으니 이는 또 다행이라 생각하는 면도 있었다.

아무튼 광해를 볼 때마다 만감이 교차하는 이진인지라 그의 성장에 내심 반가움이 치밀어 대소를 터트린 그가, 온유한 음성으로 물었다.

“골분도자기는 어떻게 되어 가고 있지?”

“이제 완전 자리를 잡아 왜, 양이, 명 등에 골고루 수출되고 있사옵니다. 하오나 소뼈의 수급이 한정되어 있어 그것이 한입니다. 전하!”

“흐흠.........! 그렇군! 잘 되고 있다니 다행이다. 그러면 말이야.........”

“네, 전하!”

“너에게 한 가지 더 중요한 일을 맡기겠다.”

“명만 내려주십시오. 전하!”

이제 장성하여 제법 씩씩하게 나오는 광해였다. 그러나 이진은 뜸을 들이며 한동안 광해를 지그시 바라보다가 느닷없는 질문을 했다.

“우리 형제가 몇 이더냐?”

“그야........ 신성, 정원........”

“틀렸다. 단 둘이다. 그들은 다 배다른 남이다. 내 기꺼이 포용은 하나, 우리 형제는 단 둘 뿐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것도 어려서 어머니를 잃은 고아 아닌 고아 단 둘.”

“망극하옵니다. 전하........!”

망극(罔極)이라는 단어가 재미있다. 임금이나 어버이의 은혜가 한 없이 큰 것도 망극이요, 한없는 슬픔도 망극이다. 광해의 망극은 끝 간 데 없는 슬픔이리라.

“해서 말이다.”

“.........”

눈물을 훔치고 고개 들어 이진을 바라보는 광해의 눈에는 슬픔 속에서도 모종의 기대가 있었다.

“과인이 네게 종사의 안위에 해당될 중대 업무를 맡기려 한다.”

“하명만 하십시오. 전하!”

광해의 씩씩한 대답에 빙그레 웃은 이진이 오히려 물었다.

“군무사(軍務司)가 무엇 하는 곳이냐?”

“네, 전하! 군사에 관한 직무와 이웃나라의 동정(動靜)을 살피는 일을 맡아보는 곳 아닌가 합니다.”

“그렇다. 그 중에서도 외국의 동태를 살피는 일 즉 세작(細作)에 관한 업무를 네가 관장해라. 그 인원만 가지고는 안 되고, 과인이 부리는 또 하나의 집단이 있다. 그들 중에서도 외국의 세작 일을 하는 자들까지 한데 묶어 네가 총괄하되, 지금의 세보다 배로 확대하라. 하고 ........”

여기서 잠시 멈추고 광해의 표정을 살피던 이진의 말이 이어졌다.

“이는 엄중한 기밀이니 그 누구에게도 누설하지 말고, 과인에게만 직보 하라. 또한 명칭도 변경하여 정보사(情報司)라 할 것이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

자신이 정말 국왕에게 신임을 받고 있다는 것을 피부로 느낀 광해가 또 다시 눈물을 흘리며 감격스러워했다.

이진으로서는 그 누구보다도 믿을 수 있는 동생인데다, 역사적으로 보아도 그는 외세에 대해서는 균형 감각이 잡힌 사람이었다. 해서 중화사상에 중독된 자들보다는 낫다고 판단되어 그를 불러 책임을 맡기는 이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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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

후의에 감사드리며, 늘 행복한 일상이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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