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67 회: 개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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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기를 내걸어라!”
투항이 결정이 되자 사야가는 선상의 인물들에게 명령했다. 이에 제일 먼저 항복한 자가 주동이 되어 백기를 만들기 시작했다.
이때였다.
여전히 사야가의 부관들에게 제압되어 있는 고니시 유키나가를 보고, 그의 부관이 말했다.
“대장님! 이 무슨 수치입니까? 그대로 적에게 끌려가실 참입니까? 사무라이답게 할복하십시오.”
“나는 할복 따위는 안 한다!”
“사무라이도 아니십니다.”
“뭐라고 해도 좋다! 나는 이미 세례를 받은 몸이다!”
“말도 안 되는..........”
부관이 뭐라고 해도 하늘만 바라본 채 더 이상 대꾸를 않는 고니시 유키나가였다. 그는 정말 천주교에 귀의해 ‘아우구스티노’라는 세례명을 받은 신자였다.
이윽고 대장선에 백기가 내걸리자 왜적들은 맨붕 상태에 빠졌다. 따라서 항복을 할 것인지, 계속해서 전투를 할 것인지? 전함마다 의견이 분분했다. 그러나 누구나 생명은 소중한 것. 항복파가 다수를 차지할 수밖에 없었다.
남은 왜적이 이제 5만 명이 채 되지 않았다.
그중 4만5천여 명이 항복을 하고, 약 5천여 명은 끝까지 저항을 하다가 숨졌다.
삼경이 넘어 대승을 거둔 이날 오전 사시 무렵.
늦은 저녁인지 아침인지를 먹고 2시진의 휴식을 갖은 이순신 이하 수군은 곧 전장의 뒷정리에 나섰다.
바다에 나오니 밤새 바다를 밝히던 적선들도 이제 대부분 침몰하고, 어떤 배들은 뼈만 앙상히 남아 아직도 그 흉물스러운 몰골을 자랑하고 있었다. 이순신은 그런 배들은 내버려두고 재활용이 가능한 선박이나 무기만 수거하도록 명하고 자신은 장계 작성에 들어갔다.
처음 주상의 선견력에 감탄을 표하는 것을 시작으로, 많은 무구를 갖추어 주시어 승리할 수 있었음에 또 한 번 감사의 예를 표한 이순신은, 전황을 처음부터 상세히 적고, 끝으로 적의 사상자와 포로 수 그리고 아군의 희생자 수도 명기하였다.
이 보고에 따르면 아군의 희생자는 총4,725명이었다. 압도적인 대승이었으나 피해는 없을 수 없어 아군도 근 5천 명에 가까운 희생자를 내었다.
중앙군 또한 3개 사단장 연명의 장계를 올렸는데, 그에 따르면 아군의 희생자는 총 3,853명 이었다. 20만 대군을 물리친 것에 비하면 피륙을 찢긴 정도의 경미한 상처이나 아픈 것은 아픈 것이었다.
아무튼 포로들의 처리 문제까지 하문을 구한 이들은 현지에 주둔하며 뒷수습에 전념하였다.
* * *
이순신과 중앙군 사단장들의 장계가 거의 동시에 올라왔는데, 전쟁 중이어서인지 12시간 만에 부산에서 한양까지 파발이 도착했다. 이를 읽어 본 이진은 중참이 지났지만 또 한 번 비변사 회의를 소집했다.
비변사 구성원들이 모두 자리한 가운데 흡족한 얼굴의 이진이 입을 열었다.
“공경들의 노고로 금번 전쟁에서 아군이 대승을 거두었소. 병선 700여 척과 20만 대군을 물리치는 쾌거를 이룩했단 말이외다! 또한 적 4만5천 명을 포로로 잡고 적선 250척을 포획하는 혁혁한 전과를 올렸소이다. 이는 고금을 통틀어도 드문 대승이니 함께 경축합시다!”
“성은이 망극하옵나이다. 전하!”
“주상전하의 홍복이시옵니다. 전하!”
백관들의 하례를 받은 이진이 여전히 만면에 가득 웃음을 띠우고 말했다.
“이는 여기 계신 공경대부들의 자나 깨나 사직을 걱정하는 마음이 빚은 대승. 과인은 이를 백관과 함께 크게 경축하며 경회루에서 대 연회를 열겠노라! 또한 이 승전을 기념하여 대역 죄인을 제외한 자들의 형을 일정 이상 감면하고, 희생된 병사들에 대해서는 근본적으로 나라에서 예우할 방법을 찾도록 할 것이오.”
“성은이 망극하옵나이다. 전하!”
“그런데 문제는 포로 처리의 문제요. 그들을 어찌 처리했으면 좋을지 병판부터 그 의견을 말해보오.”
“왜적이라 함은 그 근본이 미개하고 흉악한 근성이 있는 바, 모두 바다에 수장하는 것이 옳은 줄 아뢰옵나이다.”
“다른 의견 있는 사람?”
“신 경기 병마절도사 김여물 아뢰옵나이다.”
“말해보오.”
“아무리 그렇더라도 포로를 수장시키는 것은 너무 한 처사옵고, 차라리 인구가 희박한 저 북쪽 변경에 배치하여 야인들을 견제하는 세력으로 써먹는 것이 가한 줄 아뢰오.”
“흐흠.........! 좋긴 좋은 안이나 통제가 가능하겠소?”
“북방의 병사보다 많아 통제가 불가능하오니 분산 배치하는 것이 타당한 줄 아뢰옵나이다.”
호조판서 이항복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이진이 말했다.
“호판의 말이 타당한 듯하오. 그 전에 과인은 왜의 침략에 분노하는 바, 왜구의 소굴이요, 이번 침략의 전진기지 역할을 톡톡히 한 대마도를, 차제에 아국의 영토에 복속시키려 하오.”
“적 20만 대군을 물리친 기세라면 충분히 가능할 것이오나, 대마도 땅이라는 것이 본래부터 땅이 척박하여 농사를 지을 수도 없을뿐더러........”
“그만, 예판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소. 그렇지만 예판의 생각은 너무 단편적이오. 그곳을 점령하면 과히 몇 가지 이득이 있으니 들어보시오.”
“첫째 아국 해상활동의 또 한 근거지가 될 수 있음이요. 둘째로 적의 전진기지를 빼앗아 침략을 어렵게 함이요. 셋째는 왜구의 소굴을 없애는 것이니 앞으로의 피해가 현격히 줄 것이오. 과인은 꼭 농사가 아니라 이런 여러 이점이 있으니 차제에 점령하려 하오. 하니 더 이상 이 문제에 대해서는 왈가왈부하지 마오.”
“전하의 뜻대로 하옵소서!”
이번 승전을 계기로 더욱 열렬한 숭배자가 된 승정원 식구들을 대표하여 도승지 이덕형이 찬성을 표했다.
이진의 단호한 선언도 선언이지만, 그동안 일어나지도 않을 전쟁을 준비한다고 은근히 투덜거리던 제 대신들이, 이번 사건을 계기로 현저히 발언권이 약해진 바, 아무도 더 이상 이 문제를 거론하지 못했다.
* * *
조선의 지존 이진으로부터 최종 포로의 처리문제와 앞으로 군의 전개방향에 대해 재가가 떨어진 것은 비변사 회의 후 만 하루만이었다.
그 명령서에 따르면 적 포로 4만5천 중 2만 5천을 수군에 배정하여 노를 젓는 격군으로 삼을 것이며, 나머지 2만은 각각 1만씩 평안과 함경도에 배치하라 했고, 주요 적장과 이번에 큰 공을 세운 사야가 및 마고 토키로는 한양으로 압송 조치하라는 명이 내려졌다.
또 이번 기회에 대마도를 정벌할 것이며 아군의 포상은 대마도를 정벌한 후에 시행하겠다는 말도 부기되어 있었다. 이에 따라 지방군은 먼저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고, 중앙군은 부산에 남아 수군의 대마도 정벌이 끝날 때까지 일시 포로들을 관리하기로 했다.
모든 사안이 결정되자 이순신은 곧 대마도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자신의 말로는 조선의 선진화된 문명에서 살고 싶어 항복했다는, 사야가를 역관과 함께 들여 만나보았다. 그의 증언으로 이순신은 대충은 몇 가지 사실을 알아낼 수 있었다.
이번 침략에 대마도의 도주(島主) 소 요시토시(宗義智)가 함께 이번 조선 침략의 선봉에 섰으며, 그 역시 포로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또한 그의 장인이 이번 침략의 총대장 고니시 유키나가라는 사실도 새삼 알게 되었다.
이에 이순신은 소 요시토시를 불러 대마도 상황을 물었다. 그는 모든 것을 포기했는지 순순히 불었다. 대마도에는 지금 치안을 유지할 수 있는 약간의 병력 밖에 없으며, 왜관에서 철수한 대부분의 상인과 왜관 거주자들이 그곳에 머물러 있다는 사실도 추가로 불었다.
이 순신은 이 정보에 의거 판단하건데 대단위 군사를 동원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직시하고 일단 제장들을 불러 모았다. 원균과 김억추 또한 이순신이 부른 관계로 이 회의에 참석하였다.
죽 늘어선 제장들을 한 번 천천히 살핀 이순신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주상의 어명이 내려온 바, 차제에 왜구의 소굴인 대마도를 점령하라 하시었소. 해서 본 통제사는 그 전에 대마도주 종의지(宗義智:소 요시토시)가 우리의 포로가 된 것을 알아내고 그를 심문 한 바, 그곳에는 경비병력 밖에는 없다는 소식을 알아냈소. 해서 본 통제사의 생각으로는 최소 2개 수영의 군사가 가서 작전을 끝내고 오는 것이 좋겠소. 자원자 거명하시오.”
이순신다운 신중한 작전에 제일 먼저 입을 뗀 사람은 그 누구도 아닌 원균이었다. 언제나 공에 목마른 사람다운 행동이었다.
“본 수사가 가도 되겠소?”
“지난번에도 대공을 세우셨는데, 피로하지 않으십니까?”
내심 껄끄러운 이순신이 돌려 물었다.
“하하하.........! 왜놈들을 속 시원히 때려죽였더니 피곤하기 보다는 아직도 기운이 펄펄 나오.”
“흐흠........!”
침음한 이순신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말했다.
“옛말에 호랑이가 토끼를 잡는데도 전력을 경주한다는 말이 있소. 하여 본 통제사는 이억기 전라절도사와 함께 가길 원하오.”
“그까짓 왜구 몇 명 때려잡는데 번거롭게 우르르 몰려갈 필요가 뭐 있소? 본 수사 병력만 해도 충분하니 통제사께서는 그 소임을 본 수사에게 맡겨주셨으면 고맙겠소.”
“흐흠..........!”
원균의 호언장담에도 한동안 침음하며 생각에 잠겼던 이순신이 다시 입을 열었다.
“본 통제사의 생각에는 변함이 없소. 이억기는 명을 받들라!”
“네, 통제사 어른!”
이억기가 얼른 군례를 올리며 이순신의 말을 기다렸다.
“전라 좌우수영의 군사를 이끌고 대마도를 정벌하되, 추호도 무리하지 말라. 하고 정벌이 끝나면 그곳에 대기하여 주상의 명을 받들라!”
“알겠사옵니다. 장군님!”
이억기가 신속히 복명하는데 원균이 볼이 부어 물었다.
“본관은 뭐요?”
“원 장군도 참가를 하시려면 하오. 하지만 단독 행동은 안 되오. 이억기 장군은 전라좌우수영을 통괄하는 전라수군절도사인바, 그의 직급이 높소. 하여 그의 명을 받으려면 가시고 아니면 여기에 남으시오.”
“이런 젠장..........”
쓴 입맛을 다시며 잠시 생각에 잠겼던 원균이 말했다.
“그래도 가겠소.”
“좋소! 절대 이억기 장군의 명을 어겨서는 아니 될 것이오. 군령장을 써놓고 가시오.”
“아, 그깟 왜구 몇 놈 때려잡으러 가는데 뭐가 그렇게 복잡한 거요. 나 혼자 가도 되겠구먼, 정 통제사 양반이 원하신다면 그리 하지요.”
더한 공을 세우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승낙하는 원균이었다. 원균 또한 장재가 아주 없는 인물은 아니었다. 항상 공을 탐내어 과욕을 부리는 것이 그의 큰 단점이었다. 그의 행적을 더듬어보면 아예 장수재목이 아닌 사람은 아니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1592년 경상우도 수군절도사에 임명되어 부임한 지 3개월 뒤에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왜군이 침입하자 경상좌수영의 수사 박홍이 달아나버려 저항도 못해보고 궤멸하고 말았다. 원균도 중과부적으로 맞서 싸우지 못하고 있다가 퇴각했으며, 전라좌도 수군절도사 이순신에게 원군을 요청하였다.
이순신은 자신의 경계영역을 함부로 넘을 수 없음을 이유로 원군요청에 즉시 응하지 않다가 5월 2일 20일 만에 조정의 출전명령을 받고 지원에 나섰다.
5월 7일 옥포해전에서 이순신과 합세하여 적선 26척을 격침시켰다. 이후 합포해전, 적진포해전, 사천포해전, 당포해전, 당항포해전, 율포해전, 한산도대첩, 안골포해전, 부산포해전 등에 참전하여 이순신과 함께 일본 수군을 무찔렀다.
칠천량해전에서 일본군의 교란작전에 말려 참패하고 전라우도 수군절도사 이억기 등과 함께 전사하였다. 위와 같이 전사하는 그날까지 싸운다고 싸웠으나, 이순신 보다 경력이 높았기 때문에, 서로 불편한 관계인 두 사람이 이었다.
이진이 생각하기에 문제라면 이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아무튼 이렇게 해서 대마도 원정 행이 결정되었다. 이들이 원정 준비를 하는 동안 이순신은 주상 이진의 명에 따라 항복한 왜병 2만5천을 어떻게 배치해야만 큰 문제없이 이를 부릴 수 있을까로 고민하였다.
결국 얻어진 결론은 서로 아는 사람은 전부 갈라놓고, 모르는 사람끼리 서로 붙여놓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야 한동안은 이들을 통제하기 수월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이들을 엄히 다루어 추호도 딴 생각을 못하게 해야겠다는 생각을 거듭했다.
군율을 어기는 놈이 있으면 시범적으로 극형에 처해 본보기를 보여줘야겠다는 생각까지 하는 이순신이었다. 이렇게 이순신이 포로 다루는 문제로 고심하고 있는 사이, 원정대가 편성되어 곧 출항을 하게 되었다.
비록 바람은 역풍이었지만 조선 수군의 판옥선은 두 개의 돛으로 역풍에도 상관없이 운행할 수 있는 구조였으므로 개의치 않고 출항을 시켰다.
조선시대의 판옥선(板屋船)이나 거북선은 돛을 두개씩 가지고 있었던 바, 이들 돛은 모두 현대 중국의 정크에서와 비슷한 일종의 러그 세일로 돛의 상하 변에 가프와 붐을 달고, 그 사이 2 ~3자 간격으로 바텐(활대)을 돛폭에 꿰어, 시트라는 줄로 돛폭을 조종 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이런 돛은 조작하기 용이하고 종범과 횡범의 장점을 고루 갖춰 역행성능이 우수한 것으로 정평이 나있다. 우리나라 전함들의 역풍 시 강점들은 이웃 중국 측 기록에 자주 보이는데, 명나라 화옥(華鈺)의 해방의(海防議)에 잘 나타나 있다.
‘조선의 귀선은 돛대를 세우고 눕히기를 마음대로 하고 역풍이든 퇴조 때이든 마음대로 갈 수 있다’고 했다. 아무튼 대마도 정벌의 돛은 올랐고 결과만 기다리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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