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38 회: 백성 앞으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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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상의 대방 이진열이 물러가자 이진은 대전내관에게 명하여 검계 두령들을 불러 모으게 했다. 반 시진 후 그들이 등대하자 이진은 그들에게 명했다.
“과인의 사저로 가면 내상의 대방 이진열이 있을 것이야. 그에게 물어 그가 싣고 온 물건들은 일단 과인의 창고에 보관토로 해라. 그리고 양이들 또한 과인의 사저에 머물게 하되, 그들의 이송과정부터 외부로 드러나서는 절대 안 됨이야. 무슨 말인지 알아듣겠느냐?”
“네, 전하!”
“하고, 그 물건 중에 조총 열 자루를 꺼내어 과인에게 가져오도록.”
“명 받자옵니다. 전하!”
그들이 물러나는 것으로 이진의 오늘 하루 공무는 끝이 났다.
다음 날 아침.
육 승지들이 참여한 승정원 회의석상에서였다.
도승지 유성룡이 이진에게 보고를 했다.
“전하, 호조참판 윤두수가 걸해소를 올려 사직을 청했나이다.”
“다른 사람들은?”
“없었사옵니다.”
“올렸으면 올린대로 차제에 모두 윤허하여 물갈이를 한 번 하는 건데 말이야. 쩝쩝.........!”
아쉽다는 듯이 이진이 입맛을 다시자 괜히 바람도 불지 않는데 부르르 몸을 떠는 육 승지들이었다.
“호판 윤두수의 사직을 윤허한다. 그 후임으로 정탁(鄭琢)을 임명한다.”
밤새 생각한 것이 있었는지 이진은 거침없이 지시를 하달했다. 여기서 잠시 정탁에 언급하면 이러 했다.
1526년 생으로 올해 63세의 원로대신이었다. 호는 약포(藥圃)로 예조, 형조, 이조의 판서를 역임한 경륜이 풍부한 인물이었다. 경사(經史)는 물론 천문, 지리, 상수(象數), 병가(兵家) 등에 이르기까지 정통하였다.
훗날의 일이지만 원 역사에서 정탁은 곽재우(郭再祐), 김덕령(金德齡) 등의 명장을 천거하여 전란 중에 큰 공을 세우게 한 사람이었다. 또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72세의 노령으로 스스로 전장에 나가서 군사들의 사기를 앙양시키려고 했으나, 왕이 연로함을 들어 만류하였다.
특히, 이 해 3월에는 옥중의 이순신(李舜臣)을 극력 신구(伸救)하여 죽음을 면하게 하였으며, 수륙병진협공책(水陸倂進挾攻策)을 건의한 사람이기도 했다. 박학다식하며 충직돈후 하고, 인재를 볼 줄 아는 사람인지라 선택한 인물이었다.
“전하! 이 서계(書啓)를 보시옵소서. 경상도로 파견 나갔던 암행어사 한효순이 올린 서계인데, 역참과 봉수대의 관리 상태가 아주 엉망이라 하옵니다. 전하!”
“과인의 해주행에서는 그런 점을 발견하지 못하지 않았소?”
“지금까지 적의 외침이라면 주로 북변에서 일어났는지라, 남쪽은 아무래도 관리가 허술했을 것으로 사료되어집니다. 전하!”
“흐흠........! 아무래도 혁폐도감에 넘겨 무슨 수를 내야겠고 만.”
“그렇사옵니다. 전하!”
“다른 사안은 없고?”
“평안과 황해도의 역질이 수그러들고 있다하옵니다. 전하!”
우승지 이덕형의 보고에 이진은 아주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내의원이 예조 소속이므로 예조를 분장하는 이덕형이 보고를 한 모양이었다.
“잘 된 일이야, 잘 된 일이야.”
드높은 천정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되뇌이는 이진의 말에 덩달아 기분이 좋아지는 육 승지들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 육 승지를 물리고 암행어사의 보고서인 서계를 읽어 내려가는 이진의 안색은 심각하게 굳어 있었고 이마는 찌푸려져 있었다.
[........ 경국대전의 규정과는 다르게 경상도 역참의 대부분이 힘없는 늙은 말들이나 심지어 다리가 부러진 말, 그나마도 수자가 태부족이었사옵니다. 역졸의 근무 태도 또한 안이하기 짝이 없었고, 그나마 달아난 자들이 숫하여 인원 또한 턱없이 모자랐습니다. 그 원인을 캔즉 고을의 힘 있는 자들이 상등마는 하등마로 교체해갔고, 호환으로 호랑이에게 물려죽었다는 핑계도 많았습니다. 또한 상께서 내리시는 하사품 중에서도 유난히 말의 포상이 많은 관계로 그 첩지가 한 길이나 쌓여 있으나, 내줄 말이 없는 실정이었사옵니다. 역에 종사하는 자들에게 내린 공전 중 질 좋은 토지는 모두 빼앗기고, 공전이라고 남아 있는 것은 하천 부지 등으로, 그나마 많이 유실되어 서류상으로만 남아 있는 경우가 허다했습니다. 이러니 생계 수단을 갖지 못한 자들이 도주했사옵고, 이곳에 근무하는 천역들 또한 제 경비를 본인이 부담해야 했으므로 버티는 것이 용할 지경이었습니다.
봉수대라고 올라가보니 낮에는 근무자가 하나도 없었고, 봉수대 주변의 나무는 모두 베어져야 불빛이 멀리 갈 텐데도, 전혀 사계 청소가 되어있질 않았사옵니다. 소신이 또 밤중에 올라가 본 바로는 봉수대 산꼭대기까지 올라가기 싫은 자들이, 중간에 짐을 부리고 누워 자고 있었나이다. 이래가지고야 만일 왜구의 기습이라도 받는다면 조정에서는 알 도리가 없어 손 놓고 있어야 하지 않겠사옵니까? 이런 역참과 봉수대가 열에 아홉은 되니, 신속한 대책을 마련하시옵소서. 전하! .........]
“허허....... 이런 일이........!”
탄식을 금치 못한 이진은 한동안 손으로 이마를 괴고 꼼짝도 하지 않았다. 한동안 그렇게 있던 이진이 곧 신색을 회복하고는 대전내관에 명하여 몇 가지 지시사항을 전달했다.
이날 조회시간.
내관에게 조총 한 자를 들린 이진이 입시하자마자 병조판서를 호통쳐 불렀다. 손에는 서계 한 뭉치가 들려 있었다.
“병판 대감!”
“네, 전하!”
병조판서 정언신은 상의 큰 부름 소리에 놀라 얼결에 급히 부복하여 대답하였다.
“역참을 관할하는 승여사(乘輿司)가 병조 소속 맞지요?”
“네, 전하!”
“이 따위로 역을 관리한단 말이오. 한 번 읽어보시고 대책을 세우시오. 대책을........”
말을 하면 할수록 화가 나는지 이진은 서계 뭉치를 그대로 병판에게 던지니, 낱장으로 되어있던 보고서들이 흩어지며 대전바닥에 휘날렸다. 놀란 대감이라는 작자들이 허둥지둥 끌어 모아 병판 앞으로 전해주니 그나마 시간이 절약되었다.
“좋지 않은 일로 다른 사람들까지 얹잖게 할 필요가 없어, 이 일은 여기서 끝내겠소.”
이렇게 말한 이진은 어좌에 앉지도 않고 대신들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가며 대전내관을 소리쳐 불렀다.
“내관!”
“네, 전하!”
“총 이리 가져오너라!”
“네, 전하!”
종종걸음으로 다가와 건네는 조총을 손에 쥔 이진이 그것을 번쩍 들어 보이며 말했다.
“이것이 뭔지 아오?”
“혹여 왜놈들의 화승총 아니옵니까? 전하!”
예조판서 정철의 말에 약간은 비웃음이 담긴 얼굴로 말했다.
“예판이 이걸 다 알다니 별일이오?”
“지난번 왜의 사절이 헌납한 공물 중에는 그것 외에도 공작새, 쌍안(雙眼) 등 이물(異物)들이 많았사옵니다. 전하!”
“그런데 왜 과인은 볼 수 없었지?”
“어찌 제 임금을 누르고 시역찬탈한 자의 물건을 받고 희희낙락 하오리까? 소직이 일방적으로 되돌려 보냈나이다. 전하!”
“방약무인이로군! 허허........! 그것, 참........!”
혀를 차던 이진이 갑자기 안색을 굳히고 무거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 물건이 얼마나 중한지 알기나 하오. 이 총 또한 과인이 어렵사리 입수하였은즉 제 경들은 잘 들으시오.”
“앞으로의 전쟁은 이놈이 대세를 좌우할 것이오.”
이진은 조총을 들어 대신들에게 보여주며 계속해서 말했다.
“20보 안쪽에 있는 사람이 이 총에 맞으면 바로 절명하는 것이오, 절명! 대세와 시류를 알아야 정치도 가능한 것, 이제 우물 안 개구리마냥 조선 국내에 안주해, 누가 상복을 몇 년 입는 것으로 허구헌날 날 지새우지 말고, 양이와 왜, 더 나아가 명, 야인, 유구 등으로 눈을 돌려 조선이 살아나갈 길을 찾아야 하는 다급한 시대란 말이오. 지금 이 시대는.”
일장 훈시에 꿀 먹은 벙어리가 된 제 대신들을 뒤로 하고 보탑에 앉은 이진이 계속해서 말했다.
“앞으로 조선군이 이 총포를 익숙하게 다루게 되면 그때는 화력시범도 보여 줄 터. 그때 가서 이 병기의 우수성을 체험하고, 총포와 화약의 개량에도 힘써, 하시라도 외적의 침입해 대비해야 할 줄 아오.”
“망극하옵나이다. 전하!”
이진의 잔소리(?)에 감명을 받아서는 아닐 테고, 아마 더 듣기 싫은지 일제히 부복해 이진의 말을 끊는 제 대신들이었다.
잠시 침묵을 지키며 제 대신들을 둘러보던 이진의 시선이 좌의정 성혼에게 멎더니 물었다.
“혁폐도감 건은 어찌 되어 가고 있소?”
“지금 인원을 선발 중이옵나이다. 전하!”
“그렇게 진행 속도가 느려서야 무엇에 쓰겠소?”
현대인으로 바쁘게 시간을 쪼개며 살아온 이진에 비하면 이들의 시계는 느려도 너무 느렸다. 대중가요의 속도가 갈수록 빠른 음악으로 전이되는 것은, 그만큼 현대인들의 심장박동도 빨라져, 거기에 감응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이 시대에 선비들이 읊조리는 시조를 듣고 있노라면, 몇 소절 안 되는 것을 한 5분씩 길게 뽑아대고 있으니, 아마도 이 속도가 이들의 정서에 맞기 때문에 그렇지 않은가 싶다. 아무튼 이진이 보기에는 중국인들 보고 만마디 하지만, 지금의 조선이 만만디 할아버지 왕국이었다.
이진의 생각이야 어떠하든 성혼이 답변을 했다.
“곧 인원선발이 끝나는 대로 제반 불합리한 점의 개혁에 착수하겠나이다.”
“속도를 좀 내주시오.”
“네, 전하!”
“다른 할 말 있는 분하시오.”
“신 예판 아뢰옵나이다.”
“말해보오.”
정철이 헛기침으로 목청을 가다듬더니 갑자기 고개를 조아려 아뢰었다.
“평안 황해도 지방의 역질이 수그러들고 있다하니 이는 전하의 제례에 감응한 탓이 아닌가 하옵나이다. 경하 드리옵나이다. 전하!”
“물론 과인의 노고도 있었지만 제 경들의 신속한 조치에 힘입은 바 컸던 듯하오. 마마 신이 속히 물러가기를 기원하면서 다음 안건 있으면 상정 하시오.”
“전하! 이앙법의 전면 허용을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우의정 이산해 말에 이진이 노여운 얼굴로 볼을 푸들푸들 떨다가, 한참 후 호흡을 가라앉힌 이진이 안정적이나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 문제에 대해서 더 거론한 자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절대 용서치 않겠소.”
이진의 광폭한 말에 조개입이 되어 몸을 사리는 제 대신들이었다. 좌중이 조용해지자 이진이 말했다.
“오늘 조회는 이것으로 파하는 것으로 하겠소. 좌상과 병판은 이 자리에 남고 다른 분들은 물러가도 좋소.”
이진의 말에 따라 하나 둘씩 자리를 떠나고 종내에는 이진이 말한 성혼과 정언신만 남았다.
“대전내관은 등대하고 있던 인물들을 안으로 들여라!”
“네, 전하!”
육 승지와의 회의가 파하고 내린 명에 의해, 전각 안에 네 인물이 차례로 들어서고 있었다.
이진이 익히 알고 있는 신립, 권율, 이춘길 외에 낯선 외인 하나는 역참과 봉수대에 대한 서계를 올린 전 경상 암해어사 한효순이었다. 이들의 숙배와 인사를 받고 난 이진이 어좌에서 내려오며 말했다.
“과인이 경들을 부른 것은 신식 무기가 출현했기 때문에 이를 보여주려 함이오.”
이렇게 운을 뗀 이진이 손으로 또 다시 대전내관을 불러 그가 소지하고 조총을 그들에게 보여주며 말했다.
“이 총을 각각 훈련원에 100정, 내금위와 겸사복에 각각 50정씩 줄 테니, 훈련원은 포수를 적극 양성하고, 내금위와 겸사복 역시 훈련에 만전을 기해 과인을 호위하는데 만전을 기하도록 하오!”
“성은이 망극하옵나이다. 전하!”
그들의 감사를 웃음으로 받은 이진이 곧 조총의 사용법을 설명하였다. 화약의 장전 납탄의 삽입, 격목으로 다지기, 약실 청소 및 꼬질대로 청소하는 방법 등을 세세하게 일러준 후, 우선 가져온 열 정을 훈련원만 네 자루 주고, 나머지는 각각 세 자루씩 나누어주었다.
이들에게는 모두 용무가 끝났으므로 그제야 이진은 한효순(韓孝純)을 세세히 살폈다. 청수한 얼굴에 맑은 눈동자가 인상적인 사십대 중반의 사람이었다.
“경의 서계는 잘 읽어보았소. 그대의 강직함을 높이 사 과인이 부른 것이오.”
“성은이 망극하옵나이다. 전하!”
부복해 감사를 표하는 한효순에게 시선을 뗀 이진이 좌상 성혼을 보고 물었다.
“좌상이 군기시(軍器寺) 도제조를 맞고 있지요?”
“그렇사옵니다. 전하!”
이진이 이번에는 시선을 정언신에게 옮겨 물었다.
“병판은 당연직으로 군기시의 제조를 맞고 있고요?”
“그렇사옵니다. 전하!”
“좋소. 과인은 여기 있는 한 공을 정3품 군기시 정(正)으로 보임하려 하오. 하니 서로 의논하여 군기시를 잘 이끌어나가되, 가급적 실무자의 의견을 존중해 주었으면 좋겠소.”
“명심하겠사옵니다. 전하!”
양인의 대답에 만족한 표정을 지은 이진이 갑자기 돌아서며 일갈했다.
“한효순은 명을 받들라!”
“신 대령이옵나이다. 전하!”
이진의 명에 급히 부복해 고개를 조아리는 한효순이었다.
“과인은 금일부로 경을 군기시 정으로 보임할 것인즉 임무를 수행함에 있어서, 하시도 태만함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야!”
“성은이 망극하옵나이다. 전하!”
“하고 과인은 경을 제조, 도제조까지 품계는 올리겠지만, 계속해서 붙박이로 군기시에 못 박을 터. 경의 평생직으로 알고 임무를 수행함에 있어서 하시도 게으름을 피워서는 안 될 것이야!”
“명심하겠나이다. 전하!”
한효순의 즉각적인 대답에 만족한 표정을 지은 이진이 장내의 모든 사람들에게 말했다.
“갑시다!”
“네?”
“과인과 함께 군기시를 시찰하러 가잔 말이오.”
“알겠사옵니다. 전하!”
이진은 그들의 대답이 떨어지자마자 빠른 걸음으로 전 밖으로 걸어 나갔다.
그 뒤를 세 명 외에 종종걸음으로 쫓는 제 수행원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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