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36 회: 백성 앞으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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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가가 어느덧 한양 도성을 벗어나 궁벽한 산골에 이르니 길부터가 몹시 좁아졌다. 지금 어가는 역참 로를 따라 나아가고 있는데, 그 길이 말 두 마리가 나란히 달릴 정도의 폭 밖에 되지 않았다.
이 길도 이진이 처갓집을 갈 때 언뜻언뜻 들른 역참로에 비하면 배는 넓은 길이었다. 남쪽으로 향한 역참로는 간신히 말 한 필이 통과할 정도의 폭밖에 되지 않았던 것이다. 해서 이진은 이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 뒤쳐져 따라 오고 있는 유성룡을 불렀다.
“도승지!”
“네, 전하!”
이진의 부름에 유성룡이 어마 곁으로 급히 다가와 고개를 조아렸다.
“과인이 사저에 있을 때 다녀본 바로는 남쪽 역참로는 이곳의 반 밖에 되지 않았소. 그 이유가 뭐요?”
“이는 당연히 북쪽 길은 상국 명나라의 칙사를 맞기 위함으로 보다 넓사옵고, 남쪽은 혹시 모를 왜변에 대비하여 길이 좁사옵나이다.”
“그들이 쳐들어오면 빠른 진공을 막기 위해 그렇단 말이오?”
“그렇사옵니다. 전하!”
“허허........! 그것 참..........!”
조선에 와 살면서 매일 한 두 번은 놀라는 일이 생기는 이진이었다.
겸사복 기병 50명과 함께 도정 이춘길이 선두에 서고, 이진은 행렬 중간에 묻혀갔다. 주위로는 가까운 측근들이 둘러리서고, 그 주위를 내금위 위사들 200명이 에워쌌다. 또 그 후미에는 기병 50명이 후미를 차단하며 이진 일행은 일로일로 북으로 향했다.
이렇게 가다보니 어느덧 신시 정(申時 正:오후 4시)이 되어가는 데 전방에 그럴듯한 건물 하나가 보였다. 이에 이진이 대전 내관을 불러 물었다.
“저 건물은 무엇이 더냐?”
“역관(驛館)인 줄 아뢰옵나이다. 전하!”
“역참이 아니고?”
“네, 전하! 명국의 사신이 머무는 곳으로 역참과는 다르옵나이다. 전하!”
“흐흠........! 어쩐지 여느 건물보다는 다르다고 생각했다. 곧 해도 떨어질 테니 오늘은 저기서 묵기로 하자.”
“하오나 전하, 오늘은 파주 동헌에서 유하기로 예정되어 있사온 바........”
“괜히 바쁜 관리들에게 폐 끼칠 것 없다. 저곳으로 준비하도록 하라.”
“네, 전하!”
이진의 명에 박 내관이 황급히 말을 타고 달려 나가고 일행은 꾸불꾸불 여전히 길을 재촉하고 있었다.
곧 이진의 어가행렬이 당도하자 그곳에 근무하던 관군(館軍), 일수(日守), 조역백성(助役百姓) 등이 나래비를 서서 황급히 부복하는 가운데 이진은 역관 내부로 안내되어 들어갔다. 내부를 일별해보니 명국의 사신이 오가며 머무는 곳이라 그런지 제법 잘 꾸며놓았다.
잠시 점잔을 빼고 앉아 있자니 무료함을 느낀 이진이 관사 밖으로 나왔다. 밖에는 한창 전쟁이 벌어져 있었다. 뜻밖의 어가를 맞아 전혀 준비가 없었던지라 모든 것이 태부족이었다. 군사들은 장막을 치느라 법석이고, 임시 수라간에서는 왕의 수라는 물론 경호군의 식사마저 준비하느라 경황이 없는 모습이었다.
그 모습이 이진에게는 안타깝게 다가왔으나 내심 자위거리는 있었다. 정조의 화성 행차에 나타난 바와 같이 정식 행렬을 꾸미지 않았으니, 지역민들이 길 넓히느라 부역에 동원된 일이 없고, 한강을 건너기 위해 배다리를 건설한다고 공짜로 생계유지 용 서민들의 배를 동원해 원성을 살 일도 없었다.
사전에 징발되는 선박에 한해 다 왕실재정비용인 내탕금으로 지급한다 했으니 민폐란 거의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진이 머무는 숙사 부근만은 고역을 피할 수 없는 것이 흠이라면 단 하나의 흠이었다.
그런데 이진이 가만히 서서 생각해보니 숙박시설이 태부족이라 숙위군 대부분이 한 대 잠을 자야 된다는 소리인데 벌써 초겨울에 접어든 날씨라 보통 춥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에 이진이 소리쳐 불렀다.
“찰방(察訪) 게 있느냐?”
“네, 전하!”
황급히 부복하는 자가 있어 자세히 살펴보니 제법 나이가 든 자로 빠릿빠릿하게 생겼다.
“있는 대로 땔감을 내어 저들이 밤에 춥지 않게 자도록 해라.”
“성은이 망극하옵나이다. 전하!”
‘저희들 땔감 때는데 감사할 것까지야.......!’
혼자 내심 중얼거리며 이진은 숙배 후 물러가는 찰방을 유심히 바라보며, 찰방의 입장에서 생각을 해보았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총 537개의 역을 종6품 찰방 23명이, 종9품 역승 18명이 관리하게 하게 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찰방 하나가 수많은 역을 관리한다는 소리였다.
그런데 하필 재수 없게도 오늘 찰방이 이 관에 머무는 관계로 자신을 보게 되었으니, 망극할지 몰라도 신역은 고되게 생겼다. 하긴 인과응보인지도 몰랐다. 이곳 시설이 어느 역참보다 우수해 보이니 머물다가 자초한 행위라 이진은 판단한 것이다.
아무튼 이렇게 하여 이진은 이곳에서 하룻밤을 머물고 다음날 오후에는 임진 나루를 마주하게 되었다. 그런데 오는 내내 꾸벅거리는 꼴들이 추워서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한 모양새들이었다.
내심 안타까운 마음에 들어 차마 꾸짖지 못하고 나루터에 당도하니, 제대로 자신의 명령이 먹혔는지 개성부윤(開城府尹)이 직접 도선(渡船:관아에 속한배로 사신접대 등에 주로 이용되었다)에 승선해 있다가 얼른 땅으로 내려와 부복해 감히 황송해서인지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아 버버거렸다.
이진은 그런 개성부윤을 얼른 잡아 일으키며 말했다.
“경이 고생이 많다. 민선은 얼마나 동원했느냐?”
“32척이옵니다. 전하!”
“그래, 그 경비는 과인이 모두 감당할 테니 절대로 민폐를 끼쳐서는 안 됨이야.”
“하오나, 전하!”
“됐다!”
차갑게 굳은 안색으로 일어서 돌아서는 임금을 본 개성부윤이 놀라, 얼른 맨땅을 기며 아뢰었다.
“전하의 명에 따르겠나이다.”
이진이 풀린 얼굴로 돌아서며 말했다.
“진즉 그랬어야지.”
“성은이 망극하나이다. 전하! 흑흑흑.........!”
‘이치들은 걸핏하면 꺽꺽 거리니 나 원, 참!’
내심 중얼거리며 너무 시간이 제체된 것 같아 이진이 황급히 표정을 갈무리 하고 명을 내렸다.
“해 떨어지기 전에 다음 역에 당도해야 할 것인즉 속히 도강하자!”
“네, 전하!”
곧 개성부윤의 지휘아래 일제히 도강이 개시되었다. 그러나 한꺼번에 모든 사람이 도강할 수는 없어 두 차례로 나누어 강을 건너게 되었다.
그다음부터 이진은 또 다시 역로(驛路)를 따라 나아갔다. 그렇게 한참을 가도 다음 역이 나타나지 않았다. 30리마다 하나씩 있다는 역이 어디로 달아나기도 했는지, 어가가 청교역(靑郊驛:지금의 개성 개풍군)에 도착한 것은 이미 해가 떨어진 다음이었다.
이에 횃불에 휩싸인 어가가 마침내 청교역에 도착하니, 역장(驛長)이하 역리(驛吏), 역졸(驛卒), 역정(驛丁) 외에도 부인들로 보이는 아녀자들까지 모두 동원되어, 횃불을 밝히고 줄지어 서 있다가, 황급히 어가를 맞아들였다. 이미 기별이 되었던 모양이었다.
제법 눈치가 있는 역장인지 벌써 많은 준비가 되어 있었다. 역참 마당에 임시로 설치된 아궁이에는 큰 가마솥 여러 개가 걸려 있어 김이 무럭무럭 피어오르고 있었다. 이진의 등장에 역장 이하 일제히 부복하여 조아리는데 횃불이 사방으로 내동댕이쳐져 그 빛을 잃었다.
“전하! 흑흑흑........!”
너무나 황감한지 부복해 울음을 터트리는 치들을 바라보고 있자니 만감이 교차하는 이진이었다. 그러나 마음을 추스린 이진이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모두 때 아닌 어가를 맞느라 고생들이 많았다. 모두 얼른 일어나거라!”
“네이~! 전하!”
허나 한참을 더 그렇게 부복해 있다가 일어난 역장이 눈가를 문지르며 아뢰었다.
“전하! 찬은 없사오나 저녁 준비가 다 되었사옵니다. 곧 수라를 올리겠사옵니다. 전하!”
“그래? 거, 눈치가 빠른 자로구나. 이름이 뭐 더냐?”
“황 인철이라 하옵나이다. 전하!”
“좋다! 모두 식사를 할 수 있도록 하고, 과인이 은상을 내릴지니 사양치 말지어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
이진은 곧 제조상궁 정옥빈을 불러 은자를 하사하도록 했다.
* * *
그렇게 육 일이 걸려 해주에 들어선 이진의 어가 행렬이었다. 아직은 햇살이 제법 남았는데, 지나는 민가의 낮은 담장 너머로 풍악소리가 들려 이진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 알아보아라.”
“네, 전하!”
대전 내관이 달려가더니 금방 돌아 나와 아뢰었다.
“배송 굿을 하고 있사옵니다. 전하!”
“그래? 하면 벌써 이곳까지 역질이 번졌다는 얘기 아니냐? 한 번 들어가 보도록 하자.”
이진의 명에 어쩔 수 없이 유성룡과 허준을 비롯한 몇몇 측근들만이 기와집 안으로 들어갔다.
마당 안으로 들어가니 어가가 도착했는지도 모르고 굿이 한창 진행 중이었다. 북과 징소리 요란한 가운데 화려한 치장을 한 무당이 펄쩍 펄쩍 뛰어오르며 한창 신명이 올라 있었다. 그런데 이진의 눈에 요상한 물건이 들어왔다.
짚으로 엮은 개 형상인데 그 위에는 붉은 깃발마저 꽂혀 있었고 등에는 말안장 형상까지 얹혀 있었다. 꼴을 보아하니 웃음이 나왔지만 하는 양을 보니 대충 그 의도를 알 수 있었다. 즉 마마 신을 개 인형에 태워 이 집안에서 내보려는 의도로 연신 그 시늉을 재현하고 있었던 것이다.
약은 없고 빨리 낫기를 바라는 백성들의 간절한 마음이 전해져, 차마 더 지켜보지 못하고 이진은 그대로 발길을 돌려 나왔다. 아니 집안의 백성들이 무언가 알아차리고 달려 나오자 번거로움을 피하기 위해 나왔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이진은 해주 감영에 어가를 들여 이곳에 하루를 묵었다.
그리고 다음 날에는 제법 크게 고사 상을 차려놓고 마마신이 물러가도록 축원하는 제를 지냈다. 이 자리에는 유성룡은 물론 해주목사 이응기까지 참석하여 수없이 절을 하였다. 한편 허준은 이진의 명으로 해주에 본영을 차리고 아직 감염되지 않은 자를 상대로 예방약을 투여하도록 했다.
원했던 모든 행사를 치르자 이진은 곧 귀로에 올랐다. 그로부터 다시 육 일 후 이진은 다시 궁궐 내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 이튿날 조보에는 이진이 행한 일이 자세히 묘사되어 실렸다.
<백성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군주>라는 제목 하에 사설도 실리고, 이진의 행적이 자세히 묘사되었는데 그 내용의 일부를 옮기면 이러 했다.
‘가는 역로 이르는 곳마다 상께서는 친히 천역 노비 할 것 없이 그 노고를 치하하시니, 감동한 자들의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다.’
‘상께서는 친히 어린 환자의 뺨을 어루만지며 빨리 낫기를 기원하시니, 그 부모와 식구들은 물론 이를 지켜보던 조정 대신들 또한 그 지극하심에 감동하여 함께 목 놓아 울었다.’
‘마마 신이 물러가기를 기원하는 제전에서는 그 간절함이 얼마나 사무치시는지 함께 제에 참여했던 자들이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하였다.’
‘귀로의 행로에서는 백성들의 곤궁한 살림을 보시고 크게 가슴 아파하셨다. 이에 따르는 이들 모두 숙연함을 금치 못했다.’
‘마지막으로 상께서 이르시기를 마마를 물리칠 약을 내의원에서 개발 했은즉, 오년 내에 전국 방방곡곡의 신민들이 함께 널리 혜택을 볼 것이니라 하셨으니, 이 땅에서 마마가 물러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하겠다.’
백성들에게 큰 희망을 주는 것으로 기사는 끝이 나 있었다. 이를 읽어 본 이진이 크게 흡족하여 홍인서를 상찬하니, 그 나이에도 홍인서는 얼굴을 붉히며 얼굴을 어디에 둘 줄 모르고 허둥거렸다.
이에 이진이 홍소(哄笑)를 터트리니, 더욱 몸 둘 바를 모른 홍인서가 급히 밖으로 몸을 피신하는 것으로 조보는 활자화되기 시작했다.
* * *
돌아와 보니 병색이 완연하던 전 좌의정 정유길이 졸하였다. 이에 이진은 장례에 필요한 물목을 내리고, 도승지 유성룡을 보내 조문케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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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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