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자임해-34화 (34/210)

< -- 34 회: 백성 앞으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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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이 ‘동국통감(東國通鑑)’의 한 구절을 가지고 경연을 마치고 나오니, 일찌감치 모여든 육 승지들이 오늘은 웬일인지 서둘렀다.

“전하! 속히 임어하시옵소서!”

“간밤에 무슨 일이 있었소? 도승지!”

유성룡의 말에 그를 보고 자리에 앉으며 묻는 이진이었다.

“파발에 의해 간밤에 올라온 평안감사 김수의 보고에 의하면, 평안도 지방에 역질이 창궐하고 있다는 긴급 장계이옵니다.”

“흐흠.........! 그것 참, 큰일이군. 그런 중대하고 긴급한 사안이라면 경연전이라도 보고를 하지 그랬소?”

“역질에 관한 한 지금까지는 그런 예가 없었던지라........!”

“됐소. 앞으로는 그런 긴급 사안은 과인이 취침중이라도 관여치 말고 바로 보고토록 하시오. 이 순간에도 얼마나 많은 백성들이 죽어나가겠소.”

“네, 전하!”

“하고 허준은 어떻게 되었지?”

“목멱산(남산)에 부처(付處)되어 있사옵니다. 전하!”

“흐흠........! 곧 그를 신원 복작하고 바로 이곳으로 데려오는 것으로 하오.”

여기서 부처(付處)란 유형의 거리 내에서 가족과 함께 머물러 살 것을 명하는 것으로 가장 가벼운 유배형의 일종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거주 강제의 규율도 미약하여 형벌이라기보다는 근신격리의 의미에 가까웠다.

원래 이진으로서는 허준에게 다른 어의들과 달리 어떤 형벌도 내리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다른 어의들이 모두 교동도로 유배를 떠나는데, 허준만 처벌을 않으니 대신들이 들고 일어났다.

이에 이진은 할 수 없이 좌상 정유길과 허 부인의 치료가 끝나자 그를 처벌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어의들이 모두 유배를 떠났기 때문에 형평상 그도 유배를 보내긴 보내되, 유배 중에서는 가장 가벼운 벌을 내렸던 것이다.

그 거리도 일단 유사시에 바로 등대할 수 있도록 가장 가까운 목멱산으로 유배를 보냈고 가족과 함께 살도록 했던 것이다. 이 조치에 대신들도 인지상정이라고 더 이상 불만을 토로하지는 않았다.

그들도 허준이 임해의 두창을 치료해준 일이 있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팔은 안으로 굽는다는 이치로 이해하고 넘어갔던 것이다. 또한 이진이 처음부터 허준의 벌주는 것을 탐탁지 않게 생각했기 때문에, 자신들의 주장이 관철된 것으로 만족한 면도 있었다.

아무튼 이어 이진은 다른 조치도 재빨리 병행해 나가기 시작했다.

“교동도로 유배를 보낸 어의들은 어떻게 되어 있지?”

이진의 질문에 형조를 분장하는 이원익이 답변을 했다.

“이미 교동도에 안치(安置)되어 있는 것으로 아옵니다. 전하!”

“그들 역시 신원 복작시키되, 업무에 복귀하는 대로 바로 어전으로 등대하도록 하오.”

“네, 전하!”

오늘은 때가 때인 만큼 육 승지들도 아무 반대 없이 명을 받들고 있었다. 아무튼 중요사항이 결정되자 이진은 속히 이를 집행하기 시작했다.

“게 아무도 없느냐?”

“네, 전하! 박 대전내관 대령이옵나이다. 전하!”

“즉시 목멱산의 허준, 교동도의 네 어의를 신원 복작시킨다는 명을 전하고, 당상관 이상의 고관들을 즉시 어전으로 들라 이르라!”

“네, 전하!”

이진의 긴급한 명령에 대전 내관이 바로 달려 나갔다(?). 표현은 이래도 사실 이놈들은 뛰는 적이 없었다. 양반들이야 한 술 더 떠 소나기가 쏟아져도 팔자걸음으로 어슬렁거렸다. 참으로 여유가 넘치는 족속들이었다.

대충 긴급 조치를 취한 이진은 곧 수라상을 이곳 편전으로 내오도록 했다. 겸하여 육 승지와 주서들의 것도 함께 내오도록 일렀다. 곧 수라상이 들어오고 이진은 곧 식사를 끝내고 잠시 숨을 돌리고 있자니, 고관들이 하나 둘 들이닥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전 고관들이 다 모이려하니 어느덧 사시 정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부산을 떨었어도 조금 이른 시간에 조회가 열리게 된 것 뿐이었다. 모두가 품계와 서열에 따라 자리를 잡은 엄숙한 순간 이진의 말이 편전에 울려 퍼졌다.

“평안도에 역질이 창궐하고 있다는 평안감사 김수의 긴급 장계에 따라, 평소보다는 조금 이른 시각에 모시게 되었소. 장차 이일을 어떻게 처리할지 고견들을 들려주오.”

비록 어제의 감정들이 남아 있어 서로 떨떠름한 표정들이었지만 중대 사안에 임하자, 그런 감정들은 표출 못하고 서로를 바라보나 특별한 대책이 없는지 눈알만 열심히 굴리고 있는 제 대신들이었다.

이때 좌중의 침묵을 깨고 발언하는 자가 있으니 오랜 관록의 형조판서 윤탁연이었다.

“관원을 보내 제사를 지내는 것이 합당하옵니다. 전하!”

아니 천연두를 앓고 있다고 그 방책을 진언하라는데 웬 제사?

실로 현대인의 시각으로 보면 해괴한 제안이 아닐 수 없었다.

“마마를 앓고 있다는데 지금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요? 제사로 그들이 쾌유라도 된단 말이오?”

이진의 버럭에도 윤탁연은 침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마마신이 강림하셨으니, 얼른 제사 받아 잡숫고 떠나시라는 의식이죠.”

“허허.........! 참, 내.........!”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웃고 있는 이진을 오히려 제 고관들이 이해를 못하겠다는 표정들이었다. 하긴 지금 이 사람들의 생각은 마마신이라는 것이 있어, 이 신이 이 병을 전파한다고 보았다. 그러니 이런 발상이 가능한 것이다.

아무튼 당시 누가 진언했는지는 몰라도 왕조실록을 보면 평안감사의 보고 후, 선조가 내린 조치는 열흘이 지난 시점에 평안, 황해도에 제사를 지내라는 조치였다. 이진이 생각하기에는 어이없는 일이었지만 이들로서는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이들의 상태를 이해하고 마음을 고쳐먹은 이진이 한결 안정된 목소리로 말을 했다.

“다른 대책을 강구해 보시오.”

“환자들을 격리 조치하고, 더욱 심하다면 병근(病根)이 되는 곳은 불태울 뿐 달리 도리가 없는 것으로 사료되어 집니다. 전하!”

이진이 발언자를 보니 우의정 이산해였다. 이 역시 오랜 관료 생활로 경험이 풍부한 사람 중의 하나였다.

“좋소! 과인이 보기에 이 시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 병을 다스릴 어의들의 신원 복작 문제인 것 같소. 해서 과인은 이미 목멱산과 교동도로 파발을 띄워 이들을 한시 바삐 도성으로 들라했소. 이의 있소?”

“하오나 전하..........!”

정철의 발언을 손을 저어 만류한 이진이 말했다.

“이 순간에도 얼마나 많은 백성들이 죽어나갈지 모르는 판국에 그들의 죄의 경중을 가지고 논하지는 맙시다. 과인도 그들의 죄가 무거운 것은 알지만, 지금 당장 그 사람들이 필요하니 불러 써야지, 제사나 지낸다고 역질을 앓던 사람이 금방 완쾌되어 돌아다니겠소. 모든 것을 떠나 과인이 이미 행한 일이니 이 문제에 대해서만은 더 이상 중언부언 마오.”

아예 단단히 쐐기를 박은 이진은 이 어의 문제를 누가 거론할 세라, 한 사람을 지목해 발언을 시켰다.

“영상 대감은 할 말이 없소?”

“조정에서라도 배송굿을 하여 마마신이 하루 빨리 떠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사옵니까?”

“흐흠.........! 과인의 생각으로는 여러 대신들의 믿음이 그렇다니 직접 황해도로 가서 제사를 올리고 오고 싶소!”

“전하! 아니 될 말이옵니다.”

“전하! 천부당만부당 말씀이옵니다. 전하!”

이때였다. 대신들이 이진의 행위를 결사적으로 말리고 나선 가운데, 대전내관의 외침이 있었다.

“어의 허준 입시옵나이다. 전하!”

“어서 오오!”

이진은 허준의 등장에 한 걸음에 달려 나가 물었다.

“그래, 두창예방약은 얼마나 만들어져 있소?”

“만든다고는 만들었으나, 크게 많지는 않사옵니다. 전하!”

“흐흠........! 그것 참, 큰일이로고!”

침음하며 돌아서는 이진의 이마에는 절로 내 천자가 그려져 있었다.

다시 어좌에 돌아와 앉은 이진이 한참 더 침묵을 유지했다. 바늘 떨어지는 소리도 들릴 정도로 고요한 장내에 생각을 정리한 이진이 발언을 시작했다.

“제 대신들은 잘 들으시오. 지금 이 시점에 두창을 예방할 약이 있다면 공경들은 믿겠소?”

“전하! 무슨 해괴한 말씀을.......!”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릴.........!”

좌중에 잠시 소란이 일며, 모두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이진을 성토하는 분위기였다.

“과인이 말을 하면 신뢰가 덜할 것인즉 어의께서 직접 말해보시오.”

이진의 말에 따라 허준이 공손히 허리를 굽혀 제 대신들에게 인사를 올린 후 입을 열었다.

“여기앉아 계신 공경대부들이 잘 아시다시피 금년 초 주상전하께서 마마를 앓으셨다가 쾌차하신 것을 모두 기억하고 계실 겁니다. 그때 전하께서 소인에게 이르기를, 이러저러한 방법을 써보라 하시기에 그대로 행했던 바, 사전에 예방을 한 사람은 너나 할 것 없이 마마 신께서 피해가셨습니다. 해서 소인은 방금 전하가 말씀하신 대로 그 약이 분명 효험이 있다고 자신하고 있사옵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정말 그런 일이 있었소?”

다른 사람들의 믿기지 않는다는 반응을 대신해 영상 이발이 목소리에 힘을 주어 물었다.

“정녕 틀림이 없사옵니다. 영상 대감!”

“허허........! 그런 일이.........!”

“그 문제는 이쯤 해두고, 과인은 이 약을 가지고 직접 어리석은 백성들에게 투약을 시키는 한편, 마마 신께 현지에서 직접 제사를 드리려 하오.”

“전하!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아니 되옵니다. 전하! 일찍이 국본께서 그렇게 가벼이 움직인 예가 없었사옵니다. 전하!”

“전하 아니 되옵니다. 전하!”

금방 이진이 죽으러 가기라도 하는 양 한결같이 말리고 있는 제 대신들이었다. 이 모양을 보니 그렇게 지지고 볶아도 코끝이 찡해지며, 왠지 이들이 남과 같지 않다는 생각이 절로 드는 이진이었다.

그러나 이진은 황해도에 꼭 갈 결심을 세우고 있었다. 민간에 널리 퍼진 임해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이번 기회에 씻어버리기 위함이 가장 큰 이유였다. 두 번째 이유를 들라면 아무래도 감히 대신들도 못할 일을 한 차원 높은 곳에서 행함으로써, 이들의 콧대도 꺾고 싶은 것이 또 한 이유였다.

그곳에 가면 죽는 줄 아는 대신들과는 이참에 격이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려 함이었다. 백성들이 아픈 곳이라면 그 어디라도 가겠다. 백성들이 환란을 당하는 곳이라면 그 어디에라도 임하겠다.

이런 이미지를 백성들 전체에 심어주어, 이로부터 얻은 인심을 바탕으로, 서자라는 신분상의 불리함을 극복하고, 그간 널리 퍼진 소문을 불식시켜, 국정을 이끌어가는 추진 동력으로 삼겠다는 것이 이진의 진실한 복안이었다.

또 한 이유를 들라면 허준과 함께 이번에 분명히 이 약을 시험을 해, 백성들에게 이약이라면 믿고 나중에 아무 저항 없이, 예방접종을 받도록 하고 싶은 것이 또 하나의 바람이었다. 이런저런 이유로 이진은 내심 해주행을 확고하게 결심했지만, 지금 대신들의 분위기를 보아하니 절대 찬성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래서 이진은 몰래 궁을 빠져나갈 결심을 굳혔다. 그러자면 그 전에 여러 가지 조치를 취해야 했다. 그래서 이진은 더 토의해봐야 이 문제에 관한한 도움도 안 되는 대신들과의 회의를 파하기로 하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아무튼 지금 조정에서 취할 방도는 내의원에서 그래도 효험이 있다고 인정되는 약재를 신속히 평안, 황해에 보내는 것이고, 또 하나는 여러분들의 제안대로 마마 신께 제를 올리는 것이오. 그 관원 선발은 제 경들께 위임할 테니, 논의하여 파견하는 것으로 하시오. 이상 먼저 자리를 뜨겠소.”

말을 마치자 이진은 천천히 자리를 빠져나왔고, 허준 또한 이진을 뒤따라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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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

좋은 날들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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