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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자임해-32화 (32/210)

< -- 32 회: 왕으로서의 고단한 하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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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조회를 파하고 나오는 길이었다.

“전하! 망극하옵나이다! 흑흑흑........!”

“전하! 흑흑흑.........!”

이진의 발치에 부복해 흐느끼는 세 사람이 있었다.

내시 중 정3품 상온에서 종2품 상선으로 파출당한 오상선 대신 특차한 최 내관과, 대전내관으로 정4품 상전에서 왕의 특지(特旨)에 의해 특별히 당상관인 정3품 상온으로 승진된 장 내관의 울음이 그 둘이었다.

‘전하!’라고 외마디 부름을 토해내더니 내관들과 같이 감사할 줄도 모르고 무조건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끼는 여인 하나가 또 있으니, 이 또한 이진의 특명에 의해 종9품에서 졸지에 종6품 상정으로 상궁 반열에 오른 금란이 그녀였다.

“그만들 일어나거라! 과인이 갈 수가 없지 않느냐?”

“네, 전하! 흑흑........!”

이진의 명에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길을 텄지만, 한 옆에서 아직도 어깨를 들썩이고 있는 세 사람을 빙그레 웃는 낯으로 바라본 이진이 한마디 했다.

“면신례깨나 당하겠구나! 하하하.........!”

이진의 말에 흠칫 모두 온몸을 떠는데, 어느새 울음이 싹 가시고 공포의 기색이 완연한 세 사람이었다.

‘요즘 젊은 것들은 버르장머리가 없다’

지금으로부터 5천 년 전 스메르의 점토판에도 나타나는 글귀다.

조직사회에서 신입이 잘난 척하고 설쳐대면 기강이 무너진다. 그래서 이를 바로잡기 위한 신고식 문화는 동서를 막론하고 유구한 역사를 자랑했다.

현대에서도 폭탄주로 유명한 검찰청의 신임 검사 환영회와, 의사 진입을 앞둔 레지던트의 환영회에서 실신해서 응급실로 실려 갈 때까지 계속되는 음주문화는 아주 유명하다. 그러나 이 정도는 조선 관료사회의 신고식 문화에 비하면 문자 그대로 조족지혈이었다.

과거에 합격하면 신입 관료에게는 허참례와 면신례가 기다리고 있었다. 허참례는 예비 신고식이고, 면신례는 정식 신고식이었다. 허참례가 끝나기 전까지는 동료관원으로 인정을 하지 않아 어느 자리에도 끼워주지를 않았다. 또 면신례가 끝나기 전까지는 관직 이름도 부르지 않고 무조건 ‘신래(新來:신참)’라고만 불렀다.

아무튼 신래가 되면 허참례라고 하여 무조건 선임자들에게 크게 잔치를 베풀어야 했다. 이때의 잔치음식을 ‘용두봉미(龍頭鳳尾)’라 했는데, 여기서 용두는 생선을, 봉미는 닭을 지칭하는 은어였다.

이런 허참례는 고관이라고 해서 예외가 없었는데, 아무리 직급이 높아도 다른 부서에 가면 한턱을 내기 전까지는 아랫사람들에게 인사도 제대로 받지 못했다. 심지어 건방진 놈들은 고관의 이름을 면전에서 막 부르기도 했다.

성종 때 정2품 도총관에 새로 부임한 변종인은 훈련원의 하급관리들에게 갖은 수모를 다 당해야 했다. 이유는 허참례를 베풀지 않았다는 것이다. 출근할 때 뜰에 나와 맞지도 않았고, 존댓말을 하지 않음은 물론 아예 면전에서 대놓고 이름을 불러대는 놈도 있었다.

이에 화가 날대로 난 변종인은 왕을 찾아가 이를 사실 그대로 고하는 한편, 아예 못해먹겠다고 사직원을 제출해버렸다. 이를 들은 왕이 노하여 그 하급관리들을 모두 체직시켰으나, 이번에는 사간원에서 들고 일어났다.

그것은 관례라는 이유였다. 사간원들의 신고식은 제일 혹독한 부서중의 하나였으니,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자신들이 먼저 들고 일어난 것이다. 이에 왕도 할 수 없이 하급관리들을 다시 복직시킨 예가 있었다.

들고 일어난 사간원의 예를 보면 처음 신래가 들어오면 그를 세워놓고 맨 윗사람부터 차례로 신래의 무릎을 쳤다. 오늘날 군대의 줄빠따와 비슷한 개념이었다. 그리고 신래를 연못  물에 빠트려 사모로 물고기를 잡게 하고, 그것도 부족해 거미를 잡는다고 부엌으로 끌고 가 시커먼 그을음을 손으로 만지게 하는가 하면, 또 검은 손을 씻게 해 그물을 마시게 끔 하기도 했다.

또 면신례에서는 윗사람 모두를 기방으로 끌고 가 의례히 기생 하나씩을 안겨야 했으며, 제일 윗사람에게는 기생 둘을 안겨야 했다. 부처님이 양옆에 보처를 거느리듯 이를 ‘좌우보처’라 했다.

이런 예는 유명 인물도 비껴갈 수가 없어서 ‘구도장원공’으로 유명한 이이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그 또한 처음 승문원에 배속되었을 때에 면신례를 거부했다가 쫓겨나기도 했다. 이에 이이는 이를 끝까지 기억하고 있다가 병판이 된 후, 이런 악습을 바로잡아야 한다며, 병조부터 이를 근절하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이는 이이가 재직할 당시만 먹히는 듯했다가 곧바로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아무튼 이 신고식의 악폐는 관료사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중인, 노비 심지어 감옥에서까지 철저히 행해지니 조선 전체에 번진 폐해라 할 수 있었다.

이러니 상궁이나 내관 사이에도 예외는 아니어서, 이들 또한 고관이 되었든 신참이 되었든 한동안은 눈에 보이게 때로는 보이지 않게, 기존 것들에게 시달림을 당해야만 할 것이다. 이를 사저에 있을 때 대충 들어서 알고 있던 이진의 한 한마디에, 세 사람은 앞일이 걱정되어 금방 울음을 그치게 된 것이다.

이들의 모습이 가관이어서 이진이 허허거리고 있는데 저쪽에서 실실거리며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구봉 송익필이 그였다. 그의 좌우에는 승 의연과 도사 지함두가 호종하듯 따르고 있었고, 뒤에는 김체건이 느린 듯하나 여유로운 걸음걸이로 이들을 쫓고 있었다.

조회시간에도 항상 임하는 송익필이었지만, 오늘 아침 승정원의 보고로는 특별한 안건이 없다하기에, 조회 시간을 이용하여 둘을 시험해 보도록 한 바, 무엇이 즐거운지 멀리서부터도 웃음이 묻어나오고 있는 송익필이었다.

“무엇이 그리 즐거워 아침부터 싱글벙글 이오?”

“허허, 그것 참..........!”

채 자세한 이야기를 못하고 연신 웃음만 흘리는 송익필이었다.

“전하! 재주가 아깝습니다. 재주가 아까워.”

“밑도 끝도 없이 그게 무슨 말이오. 자세한 정황을 얘기해야 알아듣지.”

“아, 글쎄, 이 중놈과 김 도사(都事)가 겨루었는데, 반 초 차이로 패할 정도로 무예가 아주 빼어났지 뭡니까?"

“그래요?”

의외의 결과에 이진도 놀라 자신도 모르게 반문을 하고 말았다. 여기서 김체건을 송익필은 도사(都事)라 불렀는데, 이는 이진이 그와 김명순을 그동안 종5품으로 승급시킨 결과였다.

“그럼, 재고해 보아야겠는데?”

그러나 송익필은 고개부터 흔들었다.

“아닌 것은 아닌 겁니다. 주상전하!”

“아니오. 그 재주를 썩히기에는 너무 아깝소.”

결심을 굳힌 이진은 지근거리에 서있는 내금위장 권율을 손짓으로 불렀다.

“이리와 보오. 권 장군!”

“네, 전하!”

이진의 부름에 함께 호위에 임했던 내금위들까지 50여 명이, 같이 움직이지는 않았지만 귀를 쫑긋 세웠다.

“불러계시옵니까? 전하!”

웃음 띤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이진이 말했다.

“여기 있는 이자를 금일부로 종8품 부사맹(副司猛)에 봉하니, 그 무예를 한 번 더 시험해 보고 또한 충성심을 파악해 보시오.”

“알겠사옵니다. 전하!”

권율이 복명하고 의연을 끌고 가려하자 이진은 잠시 의연을 불러 세워놓고 말했다.

“네 재주 비상하나, 그 마음을 알 수 없어 우선 종8품의 벼슬을 준다. 허나 네가 과인에게 충성을 바치겠다면 그 장래가 양양할 것이야.”

“.........”

가타부타 말없이 꾸벅 고개를 한 번 조아린 중 의연은 스스로 걸어 내금위 속으로 들어갔다. 그 모양을 지켜보다 이번에는 시선을 지함두에게 돌린 이진이 송익필에게 물었다.

“이 자는 어떻소?”

“소신과 고금을 논해보았으나 막히는 곳이 없었습니다. 허나 이 자의 과거 행적을 조사케 했더니, 간형(奸刑)을 받고 황해도에서 전라도로 스며든 자였습니다. 재주에 비해 행실이 아주 고약한 자입니다.”

“흐흠.........”

‘낭패로구나!’

이진으로서는 그의 재주 아까워 중히 쓰려했으나 현행범이라니 이를 그냥 묵과할 수만은 없었다. 해서 이진이 명했다.

“장 100대를 안겨 죄를 사면케 하라!”

“네, 전하!”

이진의 의중을 짐작한 송익필이 지함두를 이끌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 * *

다음날 조회시간이었다.

오늘도 특별한 안건이 없어 바로 마치려하는데, 대사헌 정언지가 발언에 나섰다.

“신 대간 돈수하옵고 아뢰옵나이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주상께서 어제 천인인 중 의연을 내금위에 그것도 8품직에 적을 올렸다 들었습니다. 이는 한마디로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옵나이다. 군왕을 수호하는 자리라 의당히 양반 고위자제로 충원되는 자리에, 천한 것을 임명한다는 것은 기존 질서에 반하는 일이옵나이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전하! 정 천한 것의 재주 아까와 쓰시려하시면 겸사복(兼司僕)에 적을 두게 하는 것이 가한 줄 아뢰옵나이다.”

‘허허......! 이것 왕의 행실을 간쟁하는 자리라 그래도 믿는 놈이라고 올려놨더니, 칼이 무디어지기는커녕 그냥 시퍼렇게 살아 있잖아!’

내심 혀를 차면서도 그의 충언(?)을 새기지 않을 수 없어서 겸사복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겸사복(兼司僕)은 종2품아문으로 조선군대 중 가장 정예한 기병부대로, 주요 임무가 왕의 신변보호와 호위, 친병(親兵)양성이었다. 그래서 다른 무엇보다 무재(武材)가 있는지 없는지가 제일 중요시 되었고, 신분보다 무재와 국왕에 대한 충성도를 중요시 해, 양반뿐만 아니라 서얼 , 상민, 천민, 노비, 경우에 따라서 귀화한 왜인까지도 겸사복이 될 수 있었다. 겸사복의 현 인원은 50명 정원이나 현재는 약 200백 명으로 이진은 알고 있었다.

부대가 부대인 만큼 설마 중이 말을 타랴 싶어 그곳은 생각도 않았는데, 생각해보니 자신의 생각이 짧았다. 이 부대 역시 자신을 호위하는 친위부대인 만큼 이 부대에 넣어도 하등 상관이 없었다. 승마야 타고날 때부터 익히고 나오는 것이 아니니, 정 못타면 배우면 될 터. 생각이 이쯤에 이르자 더 논쟁이 번지기 전에 이진은 재빨리 진화하기로 마음먹고 말을 했다.

“허허........! 경의 말을 듣고 보니 과인의 생각이 짧았소. 경의 말이 옳소. 내 그의 적을 변경하도록 할 테니 그에 대해서는 더 이상 발언을 삼가 주시오.”

이렇게 발언하는 이진의 속내는 쓰렸다.

왕의 권위라는 것이 있는데, 자신의 행위에 대해 잘못을 시인하고 이를 여러 대신 앞에서 수용한다는 것이 무척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무슨 일을 행하시던지 전후 인과를 살핀 후에 행하시는 것이 정사를 폄에 있어서 과오를 줄일 수 있는 최선의 길이 아닌가 합니다. 전하!”

예판 정철의 발언이었다.

기껏 발언을 말라는데도 한마디 하고 넘어가는 심보를 보니 괜히 조정에 불러들였다는 생각이 드는 이진이었다. 차라리 저 자는 어디 관찰사로 보내 음풍농월이나 즐기면 딱 인 것을........ 저 놈의 성격 때문에......... 내심 혀를 차면서도 기분이 나쁜 것은 나쁜 것이었다.

“끙.........! 그만 하오, 이제.”

기분 나쁘다는 뜻으로 신음소리를 내뱉으며 한마디 하자, 이진으로서는 더는 이 문제를 거론하지 않을 줄 알았다. 정철과 그런데 버금 아금 가는 인물 또 하나 있으니 이판 정인홍이 나서서 또 한마디 했다.

“무릇 군왕의 한마디는 천금. 이에 백성들의 생사가 달려 있사온 즉 모든 결정을 내리시기 전에 숙고함이 있어야 할 줄 아옵나이다. 전하! 이를 유념하시옵소서! 전하!”

‘이것들이.......... 정말!’

내심 분기가 확 솟구치는 이진이었다. 왕이 두 번씩이나 말을 삼가라는 데도 이를 무시하고, 건수 하나 잡았다는 식으로 연이어 발언을 하니, 자존심 차원을 넘어 이제는 와락 화가 치미는 이진이었다. 그래서 그의 미간이 꿈틀거리더니 한마디 톡 쏘듯 뱉었다.

“차제에 지난번 보류되었던 서얼허통 문제에 대해 논의해 봅시다.”

그들의 아킬레스건을 걸고넘어진 것이다.

“그 문제는 이미 왕대비께서 허용치 않는 게 좋겠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전하!”

정철의 깐죽에 이진이 대답했다.

“왕대비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셨는지 몰라도 과인은 이를 수용하고 싶은 생각이 추호도 없으니, 이 자리에서 다시 논해 봅시다. 하고 말이 나온 김에 좌상대감!”

“네, 전하!”

이진의 부름에 좌상 성혼이 급히 부복했다.

“공을 과인이 임명할 때 혁폐도감 운운하지 않았소?”

“네, 전하! 말씀이 계셨더랬습니다.”

“그것을 좌상이 수장이 되어 산하에 설치토록 하시오. 해서 기존 좌상의 생각에 암행어사들이 올리는 서계(書啓)를 참조하여, 차제에 고칠 것은 과감히 혁파해 나가도록 합시다.”

“전하! 이 평화로운 시기에 무슨 혁폐도감이옵니까?”

“태조께서 사직을 개창한 이래 어언 이백년이 흘렀소. 그동안 쌓인 적폐를 과감히 수술하자는 것이 뭐가 잘못이란 말이오.”

“전하!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만일 시정할 일이 있으면 지금과 같이 하나하나 논의하여 바로잡으면 되지, 무슨 옥 상 옥을 만들어 번거로움을 자초하십니까? 전하!”

깐죽이 정찰과 정인홍 대신 이번에는 동인인 우상 이산해와 영상 이발이 나서는 모양새가, 아무래도 혁폐도감이 설치되어 서인에게 힘이 실리는 것을, 역력히 견제하는 눈치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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