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자임해-23화 (23/210)

< -- 23 회: 왕으로서의 고단한 하루 -- >

6

“소인 백일문 이하 주상전하의 명받자옵고 등대하였나이다.”

“어서들 오오. 그동안 국상이다, 취임식이다 소홀하였으나, 과인이 그대들에게 특별히 당부할 것이 있어 불렀은즉 그런지 아오.”

“황공하옵나이다. 전하!”

다시 한 번 부복하여 고개 조아리는 그들을 흐뭇한 웃음으로 바라보던 이진이 말했다.

“다름이 아니라, 금번 훈련원 지사를 여기에 있는 신립 장군으로 새로 임명한 바, 그대들에게 속한 자들을 금번에 모두 입교시키도록 하오. 해서 한 육 개월 정도 교육을 받고나면 정히 과인이 중히 쓸 곳이 있으니 그리하도록 하오.”

여기서 잠시 말을 끊었던 이진이 다시 말했다.

“만약 입교를 거부하거나 중간에 훈련을 따라가지 못해 퇴소당하는 자들은, 아예 과인이 쓰지 않을 뿐더러 무조건 검계에서 추방시키도록 하오. 알겠소?”

“네, 전하!”

“하고 신립 장군도 같이 들으시오.”

“네, 전하!”

“이번 훈련에 임하는 자들부터는 우선 봉미 한 말씩이라도 나라에서 매달 꼬박 꼬박 지급할 테니, 나라의 녹을 먹는다는 긍지를 심어주고, 또한 나라의 형편이 피면 더 올려줄 것인즉 과인이 당부한 대로 정예로 거듭 키워주오.”

“망극하옵니다. 전하!”

“성은이 망극하옵나이다. 전하!”

비록 한 달 녹봉으로 쌀 한 말이나 아주 감격스러워하는 세 검계 두령과 신립 장군이었다.

이때 미리 준비가 되었던지 중참 수라가 안으로 들어왔다. 이진이 명하길 이들에게도 수라상을 차려주도록 하니, 감격한 넷이 울음으로 수라를 드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잠시 후 식사가 모두 끝나자 이진은 신립을 먼저 내보내고, 검계 두령 셋에게 은밀한 지시를 내렸다.

즉 전라도 진안 죽도(竹島)로 가서 정여립을 체포해 오고, 물증이 될 만한 자료들까지 모두 압송해오도록 했다. 빠른 진행을 위해 모두 기마로 갈 것이며, 혹시 모를 저들의 반항에 대처하기 위해, 인원도 10인 이상으로 구성하여 갈 것을 당부했다.

즉시 그들이 명을 받고 어전을 빠져나갔다. 정여립을 체포해오는 이유는 다른 무엇보다도 기축옥사를 일으키지 않기 위해서였다. 이 기축옥사로 인해 동인의 정예 인사 1,000여명이 제거되니, 동인의 인재는 씨가 말랐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여기에 연루되어 죽은 가족들은 또 얼마인가? 뿐만 아니라 이 피 비린내 나는 사건으로 당쟁이 더욱 격화되니 이로써 동서인 간에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해서 이런저런 이유로 이진은 이를 사전 예방차원에서 그를 잡아들이려 하는 것이다. 아무튼 이들을 내보내고 나니 곧 권율이 등대했다.

“신 권율 주상전하께 면목이 없어 찾아뵙지를 못했나이다. 전하!”

“어찌 그것을 경의 잘못이라 할 수 있겠소. 다 욕심 많은 사람들의 횡포지.”

이렇게 늦게 출사하여 벌써 52세가 된 권율을 위로한 이진은 곧 용포를 떨치고 일어나, 그의 손을 맞잡고 일으켜 세우며 말했다.

“경이 본시 문관이나 과인은 그대가 무예에도 일가를 이룬 것을 잘 알고 있소. 과인이 그대를 타관이 겸직치 못하게 하고 종2품직인 내금위장으로 특차시킨 것은, 그대의 충정을 기리고 과인에 대한 철저한 신변 보호를 하기 위해서요. 과인의 일신을 경에게 맡기노니, 경은 소임을 다하여 과인을 지켜내겠는가?”

“전하!........!”

권율은 단지 한 마디 부르더니 고개만 위아래로 흔들릴 뿐 말이 없었다. 현대인보다는 확실히 단순하고 순진한 면이 있는 이 시대 사람들이었다. 잠시 후 손으로 눈가를 문지른 권율이, 흘깃 이진의 용안을 훔쳐보더니 얼른 다시 부복해 아뢰었다.

“전하! 소신 간뇌도지(肝腦塗地) 하는 한이 있더라도 전하를 위해서라면 견마잡이라도 마다치 않겠나이다. 전하!”

“고맙소! 장군!”

다시 한 번 권율의 손을 잡고 그의 손등을 두드리며 이진이 말했다.

“과인이 알기로 내금위 소속원이 400명으로 알고 있소. 뽑을 때부터 가려 뽑았다지만 계속 갈고 닦지 않으면 명검도 녹이 스는 법. 더 엄격한 훈련과 정신무장으로 추호도 호위에 허점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오.”

“명심하겠나이다. 전하!”

“과인이 할 말은 다 했고, 경이 할 말이 있으면 해보오.”

“소신이 알고 있기에 내금위에 속한 자들은 대부분 권문세족의 자제들인 것으로 알고 있사옵니다. 해서 소직에게 임면(任免)권을 주시옵소서. 하면.........”

“무슨 말인지 알겠소. 당장이라도 게으름을 피우거나 말을 듣지 않는 자들은 집으로 쫓아 보내도 좋소. 과인이 그대에게 임면권을 주리다.”

“성은이 망극하옵나이다. 전하!”

다시 한 번 부복해 찔끔거리는 그를 다독여 이진은 한동안 그와 내금위의 강화책에 대해 논의했다.

* * *

다음 날 조강이 끝나자마자 신임 승지 셋을 포함한 승정원 회의가 사정전에서 열렸다. 매 회의 때마다 이들 육 인 외에도, 사관 한 명과 주서 한명이 이들의 발언을 매일 기록하고 있었다.

요즘 말로 하면 속기록을 작성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튼 이들 외에도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송익필 또한 가주서라는 직함으로 항상 회의에 참석하고 있었다. 이는 승정원 회의뿐만 아니라 조회에도 적용되는 관례였다.

장내를 조용히 한 번 쓸어본 이진이 무겁게 입을 떼었다.

“오늘 과인을 처음 대면하는 사람도 있는 것으로 아오. 어쨌거나 군왕을 최측근에서 보필하는 여러분들이야 말로 실세 중의 실세요, 그 임무가 가장 막중하다 할 것입니다. 이를 명심하시고 지금부터 회의를 시작합시다.”

이진의 말이 끝나자 도승지 유성룡이 발언에 나섰다.

“영남 유생 손 휴 외에 수백 명의 연대 상소가 올라와 있습니다. 서얼허통을 주장하는 상소이옵니다. 전하!”

“흐흠.......!”

이진이 침음하며 생각에 잠기자 신기하다는 눈으로 바라보는 동부승지 이호민이었다. 15세의 어린 군왕이 너무 의젓하다할까, 애늙은이 같다는 눈빛으로 잠시 바라보다가, 이진의 시선이 정면으로 돌려지자 얼른 두 눈을 깜박여 예의 모습을 지우는 이호민 이었다.

“새로운 국왕이 즉위하면 새로운 군왕의 서얼에 대한 정책을 묻고자, 전고에도 국왕 즉위 초년에 그런 상소가 많이 올라온 것으로 아옵니다.”

좌승지 이항복의 첨언에 이진이 여전히 이 ‘뜨거운 감자’를 안고 생각에 잠겨 있을 때였다.

느닷없이 승지로서는 최 말단인 동부승지 이호민이 발언에 나섰다.

“선위사의 보고에 의하면 문경 다리를 지나던 일본 객인이 다리가 무너지는 바람에 크게 다쳤다 하옵니다. 이에 문경 현감 조종도의 체직을 청하고 있사옵니다. 전하!”

미처 이진이 무어라 대꾸하기도 전에 우승지 이덕형이 이호민을 크게 꾸짖었다.

“발언에도 순서가 있는 것이오. 감히 동부가 벌써 나서다니........”

“죄송합니다. 우승지 영감!”

이호민의 급 사과에 이덕형이 떨떠름한 표정이나 인정을 하고 더 이상 아무 책망을 않자 좌중은 더 이상 이 문제를 거론하지 않았다. 사실 승지의 발언에도 엄연한 서열이 있어 차례로 발언을 하게 되어 있었다.

어느 때인가는 이 문제로 우승지가 먼저 발언을 했다고 도승지가 그의 체직을 청하는 사건도 있을 만큼 승지 내부의 서열은 엄격했다. 그런 관계로 도승지가 사나흘에 한 번 직숙을 한다면, 반대로 최 말단 승지인 동부승지는 사흘 직숙을 하고 하루 쉬는 정도였으니, 승정원 내 내부 서열이 얼마나 엄격한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아무튼 생각을 정리한 이진이 입을 열어 도승지 유성룡에게 물었다.

“이 문제가 오늘 조회 시간에 의제로 올라오겠지요?”

“그렇사옵니다. 전하!”

“과인의 생각으로는 허통에 좀 더 유연성을 두고, 여기 있는 대언(代言)들 모두가 조회 시간에 발언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하오나 전하.........!”

“됐소!”

이덕형의 발언을 한 마디로 막은 이진이 좌중을 둘러보았다. 그러자 좌부승지 허봉이 보고를 했다.

“삼척 동산 현 현감의 보고에 의하면 근자에 왜구의 침탈로 인하여 수많은 무릉 도민이 피살되고 일부는 이를 피해 피신해왔다 하옵니다.”

“무릉? 왜구?”

이진의 의아한 얼굴로 묻자 좌승지 이항복이 의문에 답을 했다.

“신라 때에는 우산국이라 불렸던 곳으로 태종 대왕 때에  공도(空島) 정책을 명하시어, 세종 년간에 수차에 걸친 쇄환 정책으로 지금은 공식적으로 아무도 살 수 없는 지역이 되었사옵니다. 하지만 세금과 부역을 피해 또는 범법자들이 스며들어 살았을 것으로 추정은 되옵니다. 이들이 아마 왜구의 침략으로 변을 당한 것이 아닌지 사료되어집니다.”

‘벌써 왜구들이 그곳까지 가서 설친단 말인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은 이진이 좌중을 향하여 물었다.

“그래, 경들은 이를 어찌 처리했으면 좋겠소?”

“우선 무릉 경차관을 파견하여 정확한 실태를 조사할 필요가 있을 것 같사옵니다.”

허봉의 답변에 고개를 끄덕인 이진이 말했다.

“과인으로서는 그런 일시적인 미봉책이 아니라 공도와 해금(海禁)정책부터 근본적으로 재검토하는 것이 좋겠소. 이를 조회 시간에 안건으로 회부해, 다 같이 중지를 모아봅시다.”

“알겠사옵니다. 전하!”

이후 특별한 안건이 없어 회의를 파하자 조보를 책임진 홍인서가 오늘 발행될 조보 초안을 가지고 이대로 발행해도 좋을 지에 대한 하교를 바랬다. 이진은 잠시 그를 넌지시 바라보다 슬며시 물었다.

“서운하지는 않소?”

“주상전하께옵서 소신에게 조보만을 책임지는 색승지로 임명하실 때는 다 그만한 연유가 있는 줄로 아옵니다.”

“하하하.........! 확실히 똑똑하오. 옳게 보셨소이다.”

이진의 칭찬에 겸연쩍어 하는 홍인서를 잠시 바라보던 이진이 정색을 하고 말을 하기 시작했다.

“앞으로는 조보를 담당할 경의 임무가 실로 막중하다 할 것이오. 과인은 조보를 삼사에 이은 또 하나의 언로(言路)로 육성시키고 싶소. 국정의 대소사나 관리의 임명 등을 게재하는 차원을 넘어, 국정의 새로운 홍보수단으로 자리매김할 뿐만 아니라, 중앙과 지방할 것 없이 관리들의 비위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도하여, 관피아, 험험, 관료사회에 일대 경종을 울려야 할 것이오. 또한 상시로 사설란을 마련하여 온 백성들을 계도함은 물론, 구황작물 등의 보급 방법 등 백성들의 일상생활에도 이를 적극 활용했으면 좋겠소.”

“전하의 말씀대로라면 정히 조보의 기능이 막강해질 것 같사옵니다. 전하!”

“그러기 때문에 신임하는 경을 이의 책임자로 내정한 것이 아니 오. 그래서 내 몇 가지 확실히 묻고자 하오.”

“하문 하시옵소서 전하!”

“과인이 알고 있기로 지금까지는 조보소에서 이를 1차적으로 필사해 이를 중앙관청에 보내면, 그곳에서는 또 이를 담당하는 관원들이 이를 다시 필사해 하급기관으로 내려 보내는 것으로 알고 있소. 또 교통 문제로 지방 관아는 이를 오륙 일 후에나 받아보는 것으로 알고 있소. 맞소?”

“그렇사옵니다. 전하!”

“이는 너무 전 근대적인 방법이니 매일 필사를 할 것이 아니라 아예 금속활자로 이를 인쇄해 대대적으로 보급시키되, 한 부는 한자 또 한 부는 언문으로 발행하여 이를 백성들도 알 수 있게 했으면 좋겠고, 이것이 어렵다면 사설지국을 허용하여 백성들에게 보급하는 방안을 한 번 강구해 보도록 하오.”

“사실 전하의 말씀 전에도 사설지국이 있었사옵니다. 즉 개인 몇몇이 생계를 위하여 활자로 인쇄하여 이를 돈을 받고 원하는 사람들에게 판매하던 적도 있었사오나, 승하하신 선조대왕께옵서 이는 국가의 기밀을 유출하는 행위라 하여, 이들 모두를 유배 보내 아직도 형을 살고 있는 것으로 아옵니다.”

“그래서는 안 되지. 그들을 모두 방면할 것이니 그런 줄 알고, 사설조보소를 인정해주되, 사설 조보소의 인가를 받은 자들에 한해서만 이를 발행할 수 있도록 하오.”

“알겠사옵니다. 전하!”

접견을 마친 이진은 곧 조보 문안을 검토해 이상이 없자 그대로 발행을 허가했다.

* * *

사시 정(巳時 正: 오전 10시)

왕대비 의인왕후 박 씨가 주렴 뒤에 자리한 가운데 상견례를 겸한 첫 조회가 열렸다. 잠시 이진은 새로운 면면들을 아무 말 없이 둘러보았다. 이로 인해 장내에 무거운 긴장감이 조성되었다.

그리고 곧 이진이 입을 떼었다.

“오늘 여기 묘당에 모인 공경대부 치고 국사(國士)의 풍모를 지니지 아니한 사람이 없다할 것이오. 허나 국사를 돌봄에 있어서는 분명한 기준이 있어야 할 것이오. 본인이 발언하고 행동하는 하나하나가 종묘사직과 진실로 백성들을 위해 하는 일인지, 먼저 헤아린 다음 발언하고 행해야 할 것이오.”

여기서 말을 끊고 장내를 다시 한 번 돌아본 이진의 말이 이어졌다.

“내가 말하고 기안하는 정책이 진정으로 어렵게 사는 백성들을 위한 정책인지 자문해 보시고, 혹여 내가 하는 발언이 나와 문중, 더 나아가 양반들만을 위한 것은 아닌지 되돌아보아야 할 것이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첫 주제로 승정원에서 상정한 서얼허통을 요구하는 상소에 대해 심도 있게 토론해 봅시다. 먼저 영상 대감부터 이에 대해 한 말씀 해주시죠.”

지적을 받은 영의정 이발이 곧 발언에 나섰다.

“신 영의정 이발 돈수하옵고 아뢰옵나이다.”

실제로 머리가 마루바닥에 닿도록 절을 한 것이 아니라, 말만 그렇게 하고 바로 입을 여는 이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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