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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자임해-22화 (22/210)

< -- 22 회: 왕으로서의 고단한 하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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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오 일 후.

전격적으로 새로운 내각이 꾸려졌다.

영의정: 이발

좌의정: 성혼

우의정: 이산해를 삼정승으로 삼았다.

영의정 이발은 이진의 스승으로서 동인을 영도하고 있는 사람 중의 하나였다. 대사간을 지냈으며 정철과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내년 즉 1589년에 일어나는 정여립 모반사건에 연루되어 모진 고문 끝에 장살된 사람이었다.

이진이 그를 영의정으로 삼은 것은 아무래도 이 시기에는 모든 관직에 많은 동인이 진출해 있어, 동인을 배려치 않으면 정국을 이끌어나가기 어렵기 때문에 등용한 면도 있지만, 모든 상황을 대국적인 견지에서 파악하고, 권력투쟁 자체를 위해 당파를 가르는 사람은 아니라는 그에 대한 인식이 있기 때문에 등용한 것이다. 또한 개인적으로 사부로 모신 정리도 일정 부분 작용했다 할 것이다.

좌의정 성혼은 이율곡의 죽음 이후 어느덧 정철과 함께 서인의 영수가 되어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벼슬에 별로 뜻이 없는 사람이었다. 선조 이연이 수없이 불렀으나 그때마다 사양하고, 때로 관직에 머물렀으나 그 기간은 아주 짧았다.

이번에도 이진이 불러 억지로 상경을 하긴 했으나, 병을 핑계로 응하지 않아 사체(辭遞:사양하여 임명이 보류됨) 상태였다. 그러나 개혁적인 성향이 있는 사람으로 이진은 당파의 배려차원을 떠나 꼭 등용하고자 마음먹은 사람이기도 했다.

우의정으로 임명된 이산해는 지난번 이조판서에서 승진을 시킨 사람으로 당파로는 동인에 속했다. 어려서부터 신동으로 이름을 날렸고, 서화와 문장도 일가를 이룬 사람이기도 했다. 여러 관직을 거쳐 실무에 능했고, 모략도 있는 사람이었다.

다음은 육조 판서로 아래와 같았다.

이조판서: 정인홍

호조판서: 윤두수

예조판서: 정철

병조판서: 정언신

형조판서: 윤탁연

공조판서: 김명원

정인홍은 남명학파를 대표하는 사람으로 어느덧 동인의 영수 반열에 오른 사람이었다. 원 역사에서 끝까지 광해군을 모신 의리가 있는 사람으로, 강려(剛戾)한 성품과 지나치게 경의(敬義)를 내세우는 행동 등으로, 좌충우돌 많은 물의를 일으킨 사람이기도 했다. 이로 인해 그는 1623년 인조반정으로 참형되고 가산이 적몰(籍沒)당했으며, 끝내 신원되지 못하였다.

호조판서로 내정된 윤두수는 서인의 한 사람으로 문장이 뛰어났고 글씨도 일가를 이룬 사람이었다. 서인 배려차원과 호조판서 재직 경험이 있어 다시 부른 것이다.

예조판서로 내정된 정철은 함경도 관찰사를 끝으로 현재 고향에 내려가 있는 것을 서인의 배려차원에서 등용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기축옥사를 일으키는 등 직정적인 성격으로 많은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이니 두고 볼일 이었다.

병조판서 정언신은 니탕개의 난에서 보여주듯이 문신이면서도 군무에 밝아 이진이 육조판서를 선정하는 과정에서 제일 먼저 선정한 사람이기도 했다. 그의 활약에 기대하는 바가 크다 할 것이다.

형조판서 윤탁연은 세 차례나 형조판서와 호조판서를 지낸 사람으로 실무에 아주 밝은 사람이었다. 이에 재기용 된 것이다. 당파로는 동인에 속했으나 크게 색깔이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공조판서 김명원은 직전에서도 형조판서를 역임했던 사람으로 유학에 조예가 깊고, 병서(兵書)와 궁마(弓馬)에도 아주 능한 사람이었다. 임진왜란 때는 팔도도원수로서 임진강방어전을 전개하여 적의 침공을 지연시켰고, 1597년 정유재란 때는 병조판서로서 유도대장(留都大將)을 겸임하고 좌찬성, 이조판서, 우의정을 거쳐, 1601년 부원군에 진봉되고 좌의정에 이른 사람이기도 했다.

다음은 언론 삼사라는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 수장들의 교체였다. 그 명단은 아래와 같았다.

대사헌: 정언지

대사간: 황섬

대제학: 이해수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대사헌으로 임명된 정언지, 대사간으로 임명된 황섬은 직전까지만 해도 승정원에 근무했던 사람들로, 이진이 그들을 측근으로 분류해, 그들의 자신에 대한 칼날을 좀 무디게 하는 차원에서 임명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모두 승정원 출신들로만 대간을 구성할 수는 없어 임명한 사람이 대제학 이 해수였다. 대제학 이해수는 당파로는 서인에 속했으며, 아버지 탁(鐸)이 영의정을 지낸 것으로 알 수 있듯이, 대사간, 도승지 등 요직을 두루 거친 사람이었다. 성격이 강직 단아하고 특히 시와 예서에 뛰어난 사람이었다.

아무튼 몇 사람을 승정에서 차출하다보니 승정원에도 결원이 생겨 세 사람을 새로 뽑았다. 그 명단을 보면 아래와 같았다.

도승지: 유성룡, 좌승지: 이항복, 우승지: 이덕형

좌부승지: 허봉, 우부승지: 이원익 동부승지: 이호민

위의 직책에서 보듯 우승지였던 이항복이 좌승지가 된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승정원 또한 나름의 규율이 엄격해서, 전 사람이 무슨 사유로 결원이 생기면, 후임을 그 자리에 임명하는 것이 아니라, 차례로 승차되고 후임은 끝자리부터 채우는 것이 관례였다.

그렇게 승차되다보니 이항복은 물론 이덕형까지 승진이 되고, 밑의 세 사람은 새롭게 선발된 사람들이었다. 좌부승지가 된 허봉은 색승지로 이진 자신의 사무에만 국한시키고 싶었으나, 승정원 내에도 자신의 사람이 있어야 되겠다 싶어 눈물을 머금고 승차시킨 사람이었다.

또 이원익은 두 말이 필요 없는 조선 중기의 명신으로, 사람과 번잡하게 어울리기를 좋아하지 않아, 공적인 일이 아니면 외출도 잘 하지 않는 성품이었다. 당금 안주목사에 재임하면서도, 양곡 1만여 석을 청해 기민을 구호하고, 종곡(種穀)을 나누어주어 생업을 안정시켰다. 또, 병졸들의 훈련 근무도 연 4차 입번(入番)하던 제도를 6번제로 고쳐 시행하였다.

이는 군병을 넷으로 나누어 1년에 3개월씩 근무하게 하던 것을, 1년에 2개월씩으로 고쳐 백성들의 부담을 경감시킨 것이다. 아무튼 금번 유성룡의 추천으로 승정원에 들게 된 사람이었다.

동부승지가 된 이호민은 어려서부터 천재로 이름을 날린 인물로, 한번은 200명의 이름을 본 일이 있어 이를 암송하여 적게 하였더니, 한 사람도 틀린 사람이 없었다한다. 또 문장에 뛰어나, 특히 임진왜란 때에는 왕명으로 각종 글을 작성하였는데, 그가 지은 교서(敎書)는 내용이 간절하고 표현이 아름다워 보는 이의 감동을 자아냈다고 한다.

또한 한시에도 뛰어나다는 평을 들었다. 아무튼 그는 정4품 응교에서 한 계단 뛰어올라 금번에 육 승지 중의 하나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다음으로 한 사람 더 언급하고 싶은 사람이 있으니 전 좌부승지 홍인서였다. 이진은 그를 지금의 관보(官報)라 할 수 있는 조보(朝報) 발행 책임자로 내정했다.

조보(朝報)란 승정원에서 매일 발행하는 관보로 오늘날의 신문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관보이나 신문이라고 할 수 있는 즉 오늘날 제 4권부라 부를 만큼 언론의 중요성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이진이었기에, 좌천이다 싶은 자리에 측근 중의 한 사람을 배치한 것이다.

아무튼 이로써 중요 요직의 인선이 끝났지만 이진은 차제에 지방의 민심도 점검하고, 관리들의 실태를 조사하기 위해 8명의 암행어사를 선임하여, 전국 팔도로 내려 보냈다. 그 어사들의 명단을 나열하면 다음과 같았다.

한효순, 유영경, 김권, 정숙남, 우성전, 조인득, 노직, 윤방 등이 그들이었다.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어찌 되었든 영의정 노수신 등이 명분상이나마 걸해소(乞骸疏: 나이가 많은 관원이 사직을 원하는 소)를 올려 사직하는 바람에, 이진 자신의 마음에 드는 인물로 새로운 내각을 구성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내각의 중요한 일인인 좌의정 성혼이 아직 사체 상태로, 온전히 자신의 명을 받들지 않는 관계로, 이진은 곧 그를 등대(登對: 임금을 찾아 뵘)하도록 했다. 어명에 어쩔 수 없이 58세의 성혼이 노구(?)를 이끌고 어전에 등장하자, 이진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를 맞으며 말했다.

“어서 오시오. 좌상대감!”

이진의 말에 쓴웃음을 지은 성혼이 급히 부복해 아뢰었다.

“성은이 망극하오나 신 몸이 병약하여 감히 체직을 청하옵나이다. 전하!”

“만나자마자 그만두겠다니, 예의가 아니질 않소?”

이진의 말에 아무런 답 없이 여전히 고개만 숙이고 있는 성혼이었다.

“공의 몸이 부실하다면 과인이 어의라도 상주시킬 것인즉 신병을 핑계로 그만 둘 생각을 하는 것은 안 하는 것이 좋겠소.”

“성은이 망극하옵나이다. 주상전하!”

그래도 임명을 받들겠다는 말을 않는 성혼이었다.

“좌상 대감!”

“.........”

이진이 은근히 불러보나 여전히 대답이 없는 그였다.

“일찍이 과인은 공이 올린 역법과 공법의 민폐를 논하고, 경장을 역설하되 혁폐도감의 설치를 제의한 글을 본 적이 있소. 과인 또한 더 한 개혁이라도 하여 사직을 반석에 올려놓고 싶소. 하고 갈수록 동인의 세상이 되어 가는 요즈음의 현실도 감안해야 하지 않겠소? 금번에 과인은 거의 절반에 가까운 서인을 요직에 등용하였소. 이는 색과 파당을 가리지 않고, 유능한 인재를 골라 쓰겠다는 과인의 의지이기도 하오. 그러니 함께 매일 머리를 맞대고 군국기무를 논하는 것으로 합시다.”

이진의 말에 갑자기 고개를 번쩍 들어 어좌를 한 번 바라본 성혼이, 감히 정시하지 못하고 급히 고개를 숙이며 아뢰었다.

“어리석은 소신이 감히 여쭙건데, 정히 혁페하고 탕평하시겠사옵니까?”

“그야 이를 말이오. 아니었다면 이렇게 서인을 대거 등용하고 물갈이를 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오.”

“믿사옵니다. 전하! 어리석은 소신 감히 급록을 받겠나이다.”

“고맙소. 좌상!”

이진은 급히 어좌에서 내려와 성혼의 손을 잡아갔다.

“전하.........! 흑흑흑.........!”

늙으면 눈물도 많아지는지, 부복해 눈물을 떨구는 성혼이었다.

* * *

성혼이 물러가고 잠시 이진이 이모저모 생각을 하다가 자신의 파문 때문인지 아직 오지 않은 권율을 바로 등대하도록 하고, 또한 송익필을 불러 검계의 세 두령 또한 어전에 등대하도록 명했다.

이때 상선 내관이 갑자기 고했다.

“전 남병사 신립 공 입시옵나이다! 전하!”

“어서 들라 하오.”

“네, 전하!”

이진의 명에 곧 신립(申砬)이 거친 성격답게 활발히 걸어와 그의 면전에 부복해 아뢰었다.

“신 신립 명을 받자와 등대하였나이다.”

“잘 오셨소. 북청에서 오는 여정이 순탄치만은 않았을 것인데 고생 많으셨소.”

“아니옵나이다. 전하! 오히려 못난 무부 때문에 고초를 겪으셨다 들었사옵니다. 그 죄를 청하옵나이다. 전하!”

“어찌 그것이 장군의 죄요. 무반을 정2품 반열에 올려놓으려 하니 문관들이 들고 일어난 것 뿐, 그대의 죄는 아니지. 폐일언하고 석년에 경원부(慶源府)와 안원보(安原堡)에 침입한 야인 1만여 군대를 물리쳤다는 그대의 용맹 또한 일찍이 들은 바가 있소. 또  오직 그대의 용맹 때문에 육진(六鎭)을 지킬 수 있었던 것 또한 잘 알고 있소.”

여기서 말을 끊은 이진의 말이 더욱 위엄 있게 전내에 울려 퍼졌다.

“평상시 철기(鐵騎) 500여 명을 정병으로 훈련시켜 그 민첩함과 귀신같은 용맹으로 야인들을 물리쳤다는 말을, 과인은 그 어느 것보다 높이 사, 그대를 훈련원 지사로 임명한 것이오. 하니 평소 그대가 하던 훈련 방식대로 조련하여 모두 정병으로 거듭나게 해주오!”

“성은이 망극하옵나이다. 전하! 기필코 전하의 높으신 뜻을 받들어 강병으로 거듭나게 하겠나이다.”

“좋소! 만약 부족한 점이 있다면 언제든 말하오. 내 예산 범위 내에서 최대한 지원을 해 줄 테니.”

“신 비로소 명군을 만난 느낌이옵나이다. 기필코 전하의 명에 누가 되지 않는 정병을 육성해 놓겠나이다.‘

“고맙소!”

비로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이진이 신립의 면전 앞으로 가 그를 잡아 일으켰다.

“전하!”

장대하게 울려 퍼지는 그의 목소리에서 이진은 그의 불타는 우국충정을 보고 감개가 무량해졌다.

그의 거친 두 손을 잡은 이진이 비장한 음성으로 말했다.

“과인이 단언컨대 우리 조선은 4년 내에 큰 병화를 입을 것이오. 하니 지금부터 적극 강병을 육성하고, 무기 확충에도 힘을 기울여야 할 것이오.”

“전하의 옥음을 들으면 문신들이 들고 일어날 것 같사옵니다. 전하!  껄껄껄........!”

그의 웃음에 이진이 빙그레 따라 웃으며 말했다.

“그렇다고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글까 보냐! 철저히 준비는 해야지.”

“영명하시옵니다. 전하!”

무반들에게 힘을 실어주는 소리가 들리는지 신립이 기분 좋은 얼굴로 또 한 번 껄껄거렸다. 이에 이진은 그의 손을 놓고 자리로 돌아가, 그와 많은 군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다보니 전에 부른 검계 두령들이 등대했다는 소리에 이진은 신립을 지체시키고, 그들을 맞이하였다. 이때가 곧 중참 무렵이었으므로 이진은 곧 중참을 이곳 사정전으로 내오도록 하고, 그들을 맞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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