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4 회: 쪽박 or 대박? -- >
14
모두 말을 타고 있었다. 속도를 내기 위해서였다. 가마를 타는 한 사람 때문에 지체되는 것을 피하기 위한 고육책이었다. 아무튼 이 때문에 군부인 허 씨는 물론 금란, 옥란마저도 치마 위에 펑버짐한 군의를 입고 조랑말에 올라 흔들리고 있었다. 머리에는 따가운 햇살을 피하기 위해 전모(氈帽)를 쓰고 있었다.
또 여러 필의 예비 조랑말 등 위에는 그들이 중간에 양식으로 사용할 여러 말의 쌀과 허봉이 명나라에서 구해온 감자, 고구마, 땅콩 등의 일부가 실려 있었다. 당연히 종자용으로 심으려 함께 가져가고 있는 것이다.
한양 도성에는 송익필과 수노 중에서도 우두머리인 덕삼을 남겨 만일의 사태에 대비케 했고, 명국에서 귀환한 허봉이 송익필을 대신하여 수행하고 있었다. 또 수노 중의 1인인 효삼을 종들의 우두머리로 삼아 이들을 통솔케 하며 함께 가고 있는 중이었다.
뿐만 아니라 어의 허준 또한 이진의 거짓말에 의해 선조 이연의 명에 의해 함께 동행하는 것은 당연했다. 확실히 길을 나서니 고생이었다. 그 고생은 셋째 날부터 확연해졌다. 둘째 날 광주의 사옹원 분원에서 머물 때만해도 덜했지만, 셋째 날의 머물 숙소를 구하는 데서부터 애를 먹었다.
이진이 생각했던 것보다도 조선 사회는 더 가난했다. 날은 저물어 가는데 수백호가 되는 큰 동네지만 모두 초가집뿐 기와집 한 채 없었다. 이 당시의 초가집이라는 것이 정말 초가삼간(草家三間)이라는 말과 명실상부 부합했기 때문에 머물 공간이 없었다.
방 한 칸이 딱 1평씩 이 중에 부엌을 제외하면 두 칸이 남는데 이 두 칸 즉 2평에서 3대가 생활을 하니 얼마나 비좁은가. 거의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대동소이한 이런 초가집에서 이 많은 일행이 머물 집을 구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도 토호쯤 되면 기와집을 짓고 사는데 이런 집을 오늘따라 만나기 어려웠던 것이다. 그래도 다행히 일행은 어둠이 몰려올 즈음에는 다음 고을에서 큰 기와집 하나를 찾아들 수 있었다.
주막에서 자면 되지 않느냐고? 이는 17세기 현종 이후에나 출현하는 것이고 지금은 당연히 주막이라는 것이 없었다. 주막이 있다 해도 당시의 열악한 주막 실정으로는 이들이 머물 수도 없겠지만 말이다.
아무튼 제법 큰 기와집을 찾아들어 조랑말 위에 실려 있던 쌀을 내어주니 주인집에서 이것으로 밥을 지어 반찬과 함께 저녁상을 내왔다. 기와집이라도 방 한 칸을 겨우 배정받아 받은 저녁상도 순서가 있어, 우선 이진과 부인 허 씨 그리고 허봉만이 먼저 식사를 하게 되었다.
상과 함께 인사치레로 집주인 양반 조 씨라는 위인이 이들이 배정받은 사랑채로 나왔다.
“찬은 없지만 많이 드시지요.”
“고맙소이다.”
이진은 자신의 신분을 밝히지 않았다. 단지 이 진사라고 하여 선비임은 분명히 밝힌 상태였다. 아무튼 이진은 이 밥상머리에서 세 가지에서 놀랐다. 첫째는 모두 고봉으로 퍼 올린 밥사발의 양에 놀랐고, 둘째는 반찬에서 놀랐다. 셋째는 우연히 본 조 씨라는 자의 새끼손톱 길이에 놀랐다.
나중에 이진이 접해본 조선 사회가 오늘 경험한 것과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대동소이했다. 평균적으로 조선 사람들은 남자는 대개 요즈음의 8인분 식사를 한꺼번에 했고, 여자들은 대체로 5인분 정도는 먹었다. 아이들도 마찬가지여서 목구멍까지 올라오도록 한 끼의 식사를 권했고 먹었던 것이다.
이는 언제 다시 먹을지 모를 공포감에 기인한 것이 아닌가하는 이진 나름의 분석이었다. 둘째로 대접을 한다고 나온 반찬에 쇠고기가 있었던 것이다. 나름 융숭한 대접에 고마워했지만 실상은 조선 사회는 돼지고기보다 소고기를 즐겨먹었다. 실제로 돼지고기가 더 비싸기도 했다.
그 요인은 소는 여름에는 방목으로 풀을 먹고 겨울에는 여물이라 해서 볏짚을 먹었지만 돼지는 꼭 곡물을 먹었기 때문에 가난한 농촌에서는 키울 여력이 없었던 것이다. 사람도 굶는 판에 돼지 먹일 짬밥도 곡식도 없었던 때문이었다.
개들을 돼지보다는 많이 길렀는데 이는 개들이 대부분이 분을 먹고 자랐기 때문이었다. 즉 똥을 먹고 자란 분견인 것이다. 아이들이 똥을 누우려 하면 일부러 개를 불러 핥게 했고 먹였다. 그러다 개가 아이의 고환을 뜯어먹어 환관을 배출하는 경우도 왕왕 있는 것이 조선 사회의 현실이었다.
셋째로 양반 조 씨가 새끼손톱을 길게 길렀듯 무위도식의 대명사 양반 계층에는 때로 자신의 신분을 과시하기 위해 새끼손톱을 기르는 자들이 꽤 많았다. 즉 새끼손톱을 기르면 거추장스러워 일을 제대로 할 수 없다. 그러니까 내가 지금 백수다 하고 자랑을 하는 것이다.
또 하나 일상생활과 양반들을 접하면서 느낀 점은 양반들의 넓은 소맷자락이었다. 소매가 넓으니 매사에 성가신 것이 이놈이었다. 오죽하면 임란 당시 명나라 장수들이 조선양반들이 그 넓은 소매를 가지고 어떻게 전투를 하는지 의아해하고 놀린 일도 있었다. 시급히 개선해야할 과제중의 하나였다.
아무튼 이렇게 이진이 민가에 묵다보니 방 한 칸에 여럿이 묵을 수가 없어 어의 허준과 허봉부터가, 밖으로 나가 처마 끝에서 떨어야 했다. 비좁은 한 평에 이진과 부인 허 씨 그리고 두 계집종만이 자고 허준과 허봉부터 밖에서 선잠을 자야했다.
하인들이 처마 끝에서 선잠을 자듯 이진 또한 제대로 잠을 이룰 수 없었으니, 다름 아닌 모기와 파리들의 등쌀 때문이었다. 아직 늦더위가 남은 초가을이라 모기를 쫓기 위해 밤새 생풀을 태우는 연기와 시도 때도 없이 왱왱거리는 파리, 거기에 양반가라도 하룻밤을 자고 나니 빈대 벼룩이 도저히 스멀거려 옷을 연신 바꿔 입은 이진이었다.
아무튼 이런 고생 속에서 이진 일행이 이천을 거쳐 충주에 도착한 것은 집을 떠난 지 팔일 만이었다. 그래도 어느 말보다도 지구력이 강한 조랑말 덕분에 이 정도 밖에 걸리지 않은 것이다.
이들 일행이 충주부근 앙성에서 하룻밤을 묵고 충주 시전에 도착한 것은 사시 끝 무렵이었다. 즉 오전 11시쯤 된 시각이었다. 그런데 하필 이날이 장날이라 이진은 조선에 와서 생전 처음으로 제대로 된 시골의 5일장을 구경하게 되었다. 헌데, 여기서 이진은 아직도 물물교환 방식과 다름없는 거래 방식에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
지폐는 말할 것도 없고 철전마저 없어 주로 면포가 화폐 대용으로 쓰이고 있었다. 면포 한 필은 쌀 2말(16kg) 가격으로 거래가 되었다. 즉 면포 5필에 쌀 한 가마 시세였다. 여기서 면포는 세금을 내는 수단이기도 해서 아예 경국대전에 그 규격이 정해져 있었다.
즉 정포는 길이 16m에 폭 33cm를 한 필로 하되, 질을 일정하게 하기 위해서 1승을 80가닥으로 하는 5승(400가닥)을 정포라 했다. 그러나 이는 세금 납부용이고 시장에서는 이보다 거친 3승(240)이 주로 통용되었다.
이 면포가 화폐 대용이니 거스름돈으로 면포를 잘라주거나 또는 옷감으로 사용할 수도 없는 2승 포가 거래를 위해 유통되고 있기도 했다. 참으로 한심한 현실이 아닐 수 없었다. 어쨌거나 그나마도 면포 한 필을 짜려면 아낙이 꼬박 1주일은 매달려야 했다. 이나마도 이일 저일 하다보면 10일에 1필 짜기도 어려운 것이 현실이었다.
게다가 일 년 내내 이 부업을 행할 수도 없는 것이 목화를 재배하는 량이 있기 때문에 면사가 떨어지면 이나마도 할 수 없는 것이 농촌의 현실이었다. 아무튼 이진으로서는 조속히 화폐 유통을 시켜야겠다고 결심한 좋은 나들이였다.
시장을 거쳐 일행은 남하를 했다. 처가가 시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일행은 달천 강을 건너 남하를 하는데 제대로 된 제방도 없어 장마만 지면 범람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강물은 중앙에 낮게 흐르는데, 이를 중심으로 양쪽 1km는 오랜 세월 퇴적된 모래와 자갈밭이었다.
제방을 쌓으면 지금의 농경지는 물론 절반 정도는 옥토로 개간이 가능하겠다는 생각에 이진은 절로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다. 누렇게 익을 벼와 수수 조밭을 지나 반 시진쯤 더 가니 처가가 나타나 고생의 끝이 보였다.
북으로 나지막한 산을 배경으로 앞에는 달천 강의 지류가 흐르는 경사지에 150여 호의 인가가 올망졸망 모여 있었다. 동네에 들어서니 어느 농가와 다름없이 두 사람이 간신히 비켜설 정도의 좁은 길을 중앙에 두고 양 옆에 초가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그 많은 초가 중에서도 유일하게 기와집 한 채가 있어, 이진은 직감적으로 그 집이 처가임을 알았다. 그의 예상대로 가장 먼저 그 집을 향해 조랑말을 재촉하는 허 부인이었다. 일행이 동네어귀에 나타날 때부터 기별이 갔는지 장인 영감으로 생각되어 지는 사람이 쫓아 나왔다. 또 그 뒤에는 약관의 청년과 그 보다는 많을 듯한 사람이 뒤를 쫓아 나왔다.
딸은 본체만체한 허명이 똑바로 이진에게 다가와 먼저 인사를 했다.
“어서 오시오. 군 마마님!”
처음 보는 사람이지만 즉각 장인임을 알아본 이진이 하마해 인사를 했다.
“평안하셨습니까? 장인어른!”
“덕분예요. 자, 자 길거리에서 이럴게 아니라 어서 집안으로 듭시다.”
“그러지요.”
“강녕하셨습니까? 군 마마님!”
“평안 하셨는지요? 군 마마님!”
두 사람의 인사에 이진이 미처 대답할 새도 없이 장인이 둘을 이진에게 소개했다.
“각각 군 마마님의 처남으로 큰 아이가 박(博), 둘째아이가 조(造)라 합니다.”
고개를 끄덕인 이진이 미소로 답례하고 장인의 뒤를 따랐다. 그러자 두 사람도 이진의 뒤를 쫓아 걸음을 재게 놀렸다.
집에 들어가니 제법 넓은 마당에 사랑채와 행랑채가 잇달아 지어져 있었다. 근동에서는 제법 큰 부호소리를 듣는 모양이었다. 이진이 대충 집안을 살펴보고 있는데 허 부인이 장모라 생각되어지는 오십 초반의 여인의 손을 잡고 나왔다.
“어서 오세요. 군 마마님!”
직감적으로 장모임을 알아본 이진이 답례를 했다.
“평안하셨습니까? 장모님!”
“누추한 집을 찾아주셔서 고맙습니다.”
“별 말씀을.........”
겸양하고 이진은 장인이 안내하는 대로 사랑채에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제일 황당한 사람은 허준이었다.
환우가 있다는 이진의 장인 장모가 멀쩡했기 때문이었다. 환자가 없는 것이 좋으련만 볼이 부어 돌아앉는 허준을 보고 아차 한 이진이 또 한 번의 거짓말을 해야 했다.
“주상께서 제가 처가를 방문한다니 두 분의 건강을 한 번 살펴보라고 어의까지 동행을 명하셨습니다. 이 분이 어의 구암 선생이십니다.”
“주상의 은혜가 백골난망이옵니다.”
이진의 말에 급히 북쪽을 향해 절을 올리는 장인 허명이었다. 이를 보고 울지도 웃지도 못하는 이가 있으니 허준이었다. 그런 그를 보고 이진은 눈을 껌벅이며 빙그레 웃었다. 이제와서 허준 또한 어쩌겠는가. 헛웃음과 함께 허명과 그 부인을 진맥해 아주 건강하다는 말 밖에 할 말이 없었던 것이다.
이런 소란을 피우고 나니 정오가 한참 지나 저녁 새참 무렵이 가까운 시각이건만, 진수성찬이 들어왔다. 한양에서 사위가 왔다고 급히 닭은 물론 기르던 소마저 한 마리 때려잡은 모양이었다.
이진의 청에 의해 장인 부자 세 명과 이진 그리고 허준, 허봉까지 여섯 사람이 각각 독상을 받아 식사를 하고, 상을 물린 후 그 외 다섯 사람이 있건 말건 이진이 물었다.
“왜 한양으로 올라오시지 않고요?”
“주상의 사돈이 되어 조정에 누가 될까봐 아예 낙향했습니다. 아니었더라면 지난번 군마마의 청에 바로 한양으로 올라갔겠지요.”
“아시겠지만 제가 철모르고 좀 방자하게 놀았더니 주변이 외롭습니다. 해서 장인어르신의 처지가 그렇다면 처남들이라도 출사를 해서 도와주었으면 좋겠습니다만?”
“식년 문과에 모두 응시할 예정이나 재주가 될 런지 모르겠사옵니다.”
“기재가 있으니 되겠지요.”
“그렇게만 된다면 더 바랄 나위가 없겠습니다.”
“그건 그렇고 다름 아니라 내 새로운 작물을 종자용으로 가져왔는데, 이를 여기서 잘 길러 보급을 할 수 있도록 했으면 좋겠습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군 마마의 뜻에 따르는 것이 도리지요.”
“고맙습니다.”
호쾌한 장인의 승낙에 이진은 감사를 표하고 또 하나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말했다.
“아무래도 인동이니 무극 쪽에 밭을 위주로 좀 사고 싶습니다만?”
“농토가 여기저기 많은 것으로 아는데 또 장만하시려 합니까?”
모처럼 큰 처남이 끼어들어 묻는 말에 이진이 대답했다.
“종전에 말씀드린 신 작물과 삼을 인공으로 한 번 재배해 보고 싶습니다.”
“삼이 인공으로 재배가 가능할 까요?”
“개성과 풍기에서는 일부 시험재배에 성공한 것으로 압니다. 그곳도 비슷한 토질이라는 말을 들어서요.”
“그렇다면 먼저 종놈들을 파견하여 나온 밭이 있는지 한 번 알아보도록 하지요.”
“조금 비싸게 치이더라도 많이 사줬으면 좋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군 마마님!”
지금까지의 이야기가 사실이지만 이진의 제일 중요한 생각은 무극의 금광개발에 있었다. 이진이 지리교과서에서 배울 정도로 무극과 구봉 광산은 금광으로 유명한 바가 있었다. 20세기에도 그러했는데 지금은 더 처녀광일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충삼이 데리고 오는 양인을 시켜 금광을 개발하는 것을 위장하고자 많은 땅을 소유하여 종들을 이곳에 파견하려는 목적이었다. 즉 종들의 집 가운데 양인(洋人)의 집도 있을 것이고, 양인은 그곳에 기거하면서 금광개발을 하도록 하려는 것이다.
집은 가급적 기존 인가와 떨어진 산속에 개척할 생각을 하고 있는 이진이었다. 그래야 당분간 정체가 발각되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또 산은 대체로 나라 소유지만 혹시라도 주인이 있다면 금광의 노두가 있는 산 전체를 살 생각도 가지고 있는 이진이었다.
이런 자신의 생각을 솔직히 토로하고 이진은 이들의 도움을 확약 받았다. 이들이 이진의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는 것이 이들은 이진 자신과 한데 묶인 운명공동체였기 때문이었다.
즉 이진이 잘못되면 최소 3족 더 나아가 9족이 연루되는 조선사회에서 이들만이 자유로울 수만은 없는 어쩔 수 없는 운명의 동반자였기 때문이었다. 이 모두를 장인의 주관 하에 두 처남이 맡아서 처리하도록 하고 몇 가지 주의 사항을 일러주는 것도 이진은 잊지 않았다.
첫째로 절대적으로 양인의 신분을 여하한 일이 있더라도 노출시키지 말 것. 두 번째는 작물 재배에 관한 것으로 종자가 봄이 되어 파종할 때까지 얼지 않도록 잘 보관할 것. 또 하나는 재배방법으로 감자는 씨눈을 떼어 심고, 땅콩은 모래와 같이 척박한 땅에도 잘 자라니 그런 땅에 시험재배해 볼 것 등을 권했다.
이 모든 일을 끝내고 삼 일을 더 처가에 머문 이진은 이를 보조할 효삼을 비롯한 몇몇 종들을 처가에 남기고 이진은 다시 귀환 길에 올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