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3 회: 쪽박 or 대박? -- >
3
목욕을 끝낸 이진은 곧 준비된 옷으로 갈아입었다. 이후 그는 금란의 안내로 자신이 거처하는 방으로 갔다. 미리 기다리고 있던 부인 허 씨가 그를 맞았다.
“어서 옵소서. 군 마마!”
“술 좀 내오오.”
“아니 되시옵니다. 마마! 방금 쾌차하셨는데 술이라니요?”
이진은 부인의 반대보다도, 자신의 입에서 불쑥 튀어나온 말에 자신이 더 놀랬다.
의도한 바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무슨 생각인지 고개를 끄덕이는 이진이었다. 그가 어느 책에서 읽은 기억에 의하면, 심장 이식을 받은 환자 중에는 종종 성격과 식성이 크게 변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조용하던 사람이 거칠게 변한다던지, 식성도 채식주의자가 육류를 탐한다던지 하는 등의 변화를, 미국 의학계는 많이 보고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하물며 남의 몸에 통째로 빙의한 자신이야 말로, 그런 일이 있다 해서 하등 놀랄 일이 아니라 생각한 이진의 끄덕임이었다.
“헌데 부인 내 거처가 이곳인 모양인데 왜 나를 그런 허름한 곳에 방치했소?”
“정녕 기억을 잃으신 것입니까?”
“아직은 그렇소.”
“휴.........!”
가볍게 한숨을 쉰 허 부인이 말했다.
“방치가 아니라 전염성이 강하다고 어의 허준이 외딴채로 모시라 한 것입니다.”
하긴 말을 듣고 보니 허준의 처치가 옳았다.
자신이 왕족이니 그나마 외진 행랑채에 모셔졌지, 서민이라면 움막 아니면 집에서 쫓겨나 밖에 방치되었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조선의 풍습을 보면 이렇게 마마를 앓다가 죽은 환자는 그 시체가 다 섞을 때까지 들판에 버려지거나 나무에 달아매어진다 했다.
뼈다귀만 남아서 묻어야만 마마님이 노하지 않는다고 믿은 풍습에서 생긴 폐해지만, 그 간의 악취와 전염성을 생각하면 참으로 무지의 소치가 아닐 수 없었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니 그나마 왕족으로 환생한 것이 천만 다행이 아닐 수 없었다.
“부인, 우리가 결혼한 지 몇 년이나 되었소?”
“삼 년이옵니다.”
“아이가 없소?”
“아직은 요.”
고개를 젓는 허 부인의 아름다운 얼굴에 그늘이 졌다.
“내가 괜한 것을 물은 것 같소?”
“이 몸의 부덕의 소치가 아닌가 하옵니다.”
역모 죄로 사사된 이진의 기록은 많이 남아 있지를 않다. 그 기록에 따르면 허 부인은 자식을 낫지 못한 것으로 되어 있었다.
즉 실록 그 어디에도 그녀가 자식을 낳았다는 기록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원 역사에서 가토 기요마사에게 이진이 넘겨졌을 때, 함께 넘겨진 것으로 추정되는 아들과 딸이, 일본의 스님이 되었다는 설도 있으나 그것은 단언할 수 없는 설이다.
아무튼 자신의 나이 올해 열다섯 살인 점을 생각하면 앞일은 모른다고 생각한 이진은 곧 밝은 미소를 띠고 말했다.
“너무 괘념치 마오. 이제 내 나이 열다섯 아니오?”
이진의 말에 급 화색이 도는 허 부인이었다.
“시장 하시죠?”
“먹을 것 좀 내와 보오.”
“그런데 이것들이, 음식 준비 시킨 지가 언제인데........”
일어나던 허 부인이 할 말이 있는 듯 다시 주저앉으며 말했다.
“마마께서는 너무 종들을 방기하십니다. 아주 버릇이 없다고 소문이 자자하옵니다. 앞으로는 좀 엄하게 다루어 그런 말을 듣지 않도록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알겠소. 내 그들을 단단히 교육시키리다. 그런데 우리 집안의 종복들은 얼마나 되오?”
“우리 집안에 기거하는 아이들이 200명이 넘는 것으로 알고 있사옵고, 근교나 지방에 거주하는 아이들이 수천 명 되는 것으로 알고 있사옵니다.”
부인의 말에 깜짝 놀라 되묻는 이진이었다.
“뭔 놈의 종들이 그렇게 많소?”
입을 가리고 곱게 웃는 낯으로 눈을 흘긴 허 부인이 말했다.
“이게 다 군마마의 욕심이 빚은 산물 아닙니까?”
“그것 참........!”
입맛을 다시는 이진이었다.
기록에 따르면 조선시대 가장 많은 노비를 가졌던 인물은 세종의 여덟 째 아들 영응대군으로, 무려 1만 여명의 노비를 소유했다는 기록이 있고, 임해군 또한 한양에만 300여명, 지방에는 수천 명의 노비를 소유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식사가 끝나는 대로 수노(首奴)를 만나 보아야겠군.’
나름 생각하는데 조용히 문이 열리며 많은 여종들이 줄줄이 음식을 내오기 시작했다. 교자성에 차려지는 음식들을 보니 입이 딱 벌어지는 이진이었다.
조선시대는 주로 독상 문화이므로 현대와 같이 교자상이 크지는 않아 상 2개를 이어 붙였다. 그리고 그 상 위에는 큰 놋주발에 고봉으로 올린 하얀 쌀밥에 탕기에 담긴 무소고기 국, 숭늉과 냉수가 담긴 각각 1개의 대접, 보시기에 담긴 백김치, 물김치, 깍두기, 조칫보에 담긴 닭찜, 종지에 담긴 간장, 초장, 된장 등외에도, 쟁첩에 담긴 반찬이 따로 12가지가 또 있었다. 주로 숙채, 생채, 구이, 조림, 전, 마른반찬, 회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기본 반찬 외에 쟁첩에 담긴 반찬만 총 12가지. 이는 임금의 수라상이라는 12첩 반상이 아닌가! 사대부라야 9첩 반상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 이진의 상차림은 임금의 상차림이니 무엄한 바가 있었다. 하긴 이것으로서 평소 그의 행실이 어떠했는가를 증명해주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무언가 잘못 되었습니까?”
“앞으로는 9첩 이상 올리지 마오.”
이상하다는 눈으로 바라보는 부인을 향해 이진이 말했다.
“분수를 지켜야 할 것이오.”
“알겠사옵니다. 군 마마!”
이진의 말에 활짝 개는 허 부인이었다.
“같이 듭시다.”
“아녀자가 어찌 겸상을 한단 말입니까? 절대로 안 될 말씀이옵니다.”
“알겠소.”
대충이나마 조선의 풍습을 알고 있었으므로 이진은 더 권하지 않고 식사를 시작했다. 이에 곁에 앉아 생선 가시를 발라주는 등 음식 시중을 드는 허 부인과 금란이었다. 밥은 물론 반찬까지 상차림의 절반도 못 먹고 상을 물린 이진이 금란을 향해 말했다.
“수노를 데리고 오너라!”
“네, 마마님!
그녀가 조용히 물러나자 허 부인도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저도 이만 가보겠사옵니다.”
“밤에 뵙겠소이다.”
이진의 말에 사르르 얼굴을 붉히며 사뿐 사뿐 멀어지는 허 부인이었다.
부인이 연락을 했는지 잠시 후 계집종 세 명이 나타나 상을 전부 치우고 나자 사오십 줄의 중늙은이 네 명이 금란의 뒤를 따라 대청 뜰 앞마당에 부복했다. 수노(首奴) 즉 우두머리 노예라고 해서 하나 인줄 알았더니 네 명이나 불려왔다.
하긴 종이 수천 명이라니 더 많을 지도 몰랐다. 그들을 호기심어린 눈으로 내려다보던 이진이 곧 표정을 굳히고 물었다.
“다른 놈들은 어디 간 게냐?”
“농사철이라 근교나 지방으로 갔사옵니다.”
가장 우측의 머리가 희끗희끗한 자가 말했다. 이진이 지레짐작으로 물은 것이 맞는 모양이었다.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던 이진이 곧 입을 열었다.
“내 너희들에게 명할 것이 있다.”
“무엇이든지 하명만 하십시오.”
우측에 있는 자가 대표로 대답을 하고 나머지는 땅바닥에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었다.
“조선 팔도에서 유명하다는 검객이 있으면 모두 모아라.”
여전히 우측에 있는 자가 굉장히 놀랍다는 눈으로 물었다.
“하옵시면........?”
“무슨 생각들을 하는 게냐? 내 근일 간에 지방으로 출타할 것인즉 수행원으로 삼을 참이니라.”
“명 받자옵니다. 군 마마님!”
일제히 일어나 돌아나가려는 그들의 뒷덜미에 다 대고 이진이 한마디 덧붙였다.
“꼭 검객이 아니더라도 무예가 능한 자면 가하니라. 신분에 구애받을 필요는 더 더 없을 터인즉 그리 하라! 그리고 조만간에 내 일제히 재물 조사도 취할 터인즉 그에 대한 준비도 철저히 하라.”
“네, 군 마마님!”
무엇 때문인지 흠칫하는 그들에게 곧 시선을 거둔 이진이 뜰에 서 있는 금란에게 말했다.
“너는 내 기억이 아직 온전하지 않은 것을 알 것인즉 수노들의 명단을 적어 내게 보고하라.”
“네, 군 마마님!”
“그만 물러가라!”
“네, 마마님!”
조용히 뒷걸음으로 사라지는 금란이었다.
이진은 곧 서안을 끼고 앉아 앞으로의 일에 대해 곰곰이 생각을 했다. 어떻게 권력을 쥘 것이며, 임진왜란을 막을 것인가에 대한 세밀한 계획이었다. 깊은 생각에 빠졌는지 톡톡 손가락으로 서안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이는 이진이 생각을 집중했을 때하는 무의식적인 버릇이었다. 그의 생각이 점점 깊어질 때 이를 깨우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군 마마님, 소인 김덕삼 이옵니다. 구봉 송익필이라는 자가 마마님을 뵙겠다고 떼를 쓰고 있사온즉 어찌 처결하오리까?”
“송익필?”
그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기 위해 스스로에게 반문하며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대청 앞뜰에는, 수노 중에서도 가장 우두머리인 듯한 중늙은이가 서있었다.
송익필에 대해 일차적으로 생각나는 것은 그가 기축옥사의 배후 조정자로 ‘조선의 제갈량’이라 불릴 만큼 지모에 밝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의 신분이 오르락내리락 했다는 것이다. 그의 부친이 역모 죄를 고변한 공로로 공신에 책봉되어 당상관이 되었다가, 이것이 날조되었고, 그의 신분 또한 그 집안의 가노인 것이 밝혀져, 하루아침에 다시 나락으로 떨어졌다는 기억이었다.
이에 송익필은 숨어 지내다가 여차여차 하는 기억인데 지금쯤 아마 그는 다시 노비의 신분이 되어 숨어 지낼 때가 아닌가 싶었다. 또 이 자와 임해군과의 상관관계를 기억하려하나 전혀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하늘이 자신을 다시 조선으로 보냈을 때는 무슨 합당한 이유가 있을 터, 그 연장선상의 나비효과가 아닌가 생각하는 이진이었다.
‘흐흠........! 잘만 하면 큰 원군을 얻는 셈이군!’
마침내 생각을 정리한 이진이 수노 김덕삼에게 명했다.
“들여보내라!”
“네, 군 마마님!”
곧 그가 물러가고 잠시 후에는 송익필이라는 자가 이진의 면전에 당도했다. 헌데 이 자의 행색과 행동이 기이했다. 도망자라는 사실을 방증하듯 남루한 옷차림에 삿갓을 쓰고 있었으나, 노비 주제에 자신을 보고도 부복하기는커녕 전혀 한 점 흔들림 없이, 삿갓 사이로 오히려 자신을 탐색하고 있었던 것이다.
“네 이놈! 방자하도다! 종놈 주제에 감히........!”
“흥, 역시 그릇이 아니었던가?”
이진의 짐짓 노호성에 오히려 콧방귀를 뀌고는 바로 돌아서서 걸어 나가는 송익필이었다.
“멈추어라!”
이진의 일갈에 우뚝 걸음을 멈추었으나 뒤돌아보지는 않는 그였다.
“네가 여기까지 왔을 때는 할 말이 있을 터, 그냥 가다니........”
“길이 아닌 길을 가려는 내가 어리석었소. 역시 세상의 평가가 헛것만은 아닌 것 같소.”
다시 또 뚜벅뚜벅 걸어 나가는 송익필이었다.
“존체에 굳이 그대의 발치에 엎드려야겠는가?”
이진의 말에 우뚝 걸음을 멈추고 이내 천천히 돌아서서 다시 걸어 들어오는 송익필이었다. 이를 보고 희미하게 미소 짓는 이진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순간 싹 미소를 지운 이진이 말했다.
“청위로 올라오라!”
이진의 말에 말없이 헤진 짚신을 벗더니 대청 위로 올라와 삿갓을 벗고 부복하는 송익필이었다.
그간 간난의 신고를 말해주듯 삿갓을 벗은 그의 얼굴은 오십 중반답지 않게 굵은 주름이 잡혀있었다.
“그대는 내게 무슨 쓰임이 있는가?”
“첫째는 품안으로 날아든 궁조(窮鳥)를 쫓지 않은 자비로운 마음을 궁극으로는 유림에 과시할 수 있사옵고, 둘째는 군마마의 도모하는 바를 이루어드릴 수가 있을 것이옵니다.”
“도모하는 바라........?”
그의 말에 이진이 다시 톡톡 서안을 두드리며 생각에 잠기는데 송익필이 말했다.
“도모하는 바가 없다면 소인의 쓰임도 없을 것인즉 이만 돌아가겠나이다.”
“하하하........! 내 옆방에 그대의 거처를 마련해 줄 터인즉 그곳에 기거토록 하라!”
“감읍하옵나이다. 군 마마님! 성심성의껏 보필하여 광영 된 지위에 나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나이다.”
“고맙소!”
비로소 그의 손을 덥석 잡으며 그를 일으켜 세우는 이진이었다.
* * *
그날 밤, 해시 초.
이진은 금란을 앞세워 허 씨 부인의 방으로 향했다.
부인의 방으로 향하는 이진의 입가에는 음흉한 웃음이 걸려있어 그 의도를 의심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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