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196화 수세 (4)
코끝을 파고드는 비릿한 혈향과 고막을 강타하는 처절한 비명.
눈을 감았기 때문일까.
모든 것들이 선명히 느껴졌다.
시후는 그대로 감각을 조금 더 끌어올렸다.
그러자 지근거리에서 손을 섞고 있는 천마대주와 전여린의 기운이 더욱 선명히 느껴졌다.
전여린이 강한 공세를 통하여 천마대주를 조금 뒤로 물렸기에 지금의 안전은 보장되었다.
‘기회다.’
시후는 곧바로 운기조식에 들어갔다.
눈앞에서 전여린과 천마대주가 격돌하는 상황에 운기조식이라니.
누군가 보았다면 미친 게 아니냐고 물었을 것이다.
하지만, 시후의 이런 행동에는 여러 가지 근거가 있었다.
한 손으로 휘두를 수 있는 공격은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모든 공격을 막아 줄 순 없지만, 그 정도 공격이라면 전여린이 막아 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조금 전 시후처럼 내공을 무지막지하게 쏟아부은 공격을 감행한다면, 천룡멸섬을 펼치느라 내공을 적잖이 소모한 전여린으로서는 피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정도 공격을 감행한다면 전조가 보이기 마련이다.
유일 등급에 오른 일원신공은 운기조식 도중에 멈춘다고 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낌새가 보인다면 그냥 훌훌 털고 일어나면 그만이었다.
시후의 단전으로 실 줄기 같은 내공이 모여들었다.
실과 같은 내공을 돌돌 말아 좁쌀만 한 크기로 키웠다.
좁쌀이 밤톨로, 밤톨이 주먹만 한 크기로 바뀌었다.
하지만, 부족했다.
단전을 가득 채우려면 이보다 몇 배는 더 커져야 했다.
그러기 위해선 시간이 한참이나 더 필요했다.
시후는 최소한의 내공만을 회복한 뒤 자리에서 일어나 주변을 살폈다.
전여린이 천마대주를 제압하는 건 생각보다 오래 걸릴 듯했다.
그녀는 천룡멸섬을 펼치느라 적잖은 내공을 소모했고, 천마대주는 손을 잃었을 뿐이지 내공은 여전했기에 그 힘을 바탕으로 버티고 있었다.
하지만, 말 그대로 버티는 것에 불과하다.
승자가 정해져 있는 싸움이었다.
시후는 이내 관심을 거뒀다.
“천이 형님은······.”
남궁천은 천마대원 둘을 상대로도 전혀 밀림이 없었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조금 버거워 보이는 이들이 몇몇 있었지만, 대다수는 상대를 압도했다.
실력도 실력이지만, 천마대주의 손이 날아간 것이 전체 사기의 한몫을 차지했을 것이다.
“그보다······.”
주변이 어둡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드러눕기 전까지 더할 나위 없이 맑았던 하늘은 온데간데없고, 짙은 구름만이 자욱했다.
“끙······. 골치 아프네.”
새하얀 구름이 아니라 짙은 먹구름이다.
즉, 비뿐만 아니라 번개를 동반할 여지가 있다는 말이었다.
문제는 이곳에 널린 날붙이가 한둘이 아니라는 점이다.
벼락이 떨어진다면 이곳으로 쏠릴 게 분명하다.
이런 변수는 달갑지 않았다.
최대한 빨리 끝낼 필요가 있었다.
시후는 고개를 내려, 이번엔 천마를 바라봤다.
검마의 내공을 흡수한 그는 여전히 건재했다.
시후의 속이 타들어 갔다.
저쪽은 돕고 싶어도 도울 수 없었다.
내공이 충만하더라도, 개입해선 안 된다.
팔문금쇄진을 이루고 있는 여덟에 시후가 더해져 봤자, 되려 진이 약해질 뿐이니깐.
시후는 현재 가장 위협이 되는 천마대주에게서 거리를 벌린 뒤 재차 운기조식을 취했다.
주먹만 하던 내공을 어린아이 머리 정도의 크기로 덩치를 키웠을까.
툭.
뺨을 때리는 차가운 감각.
기어코 비가 내렸다.
빗방울들은 포식자의 눈을 피해 풀숲으로 몸을 숨기는 메추라기처럼 시후의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그 차가운 감각을 무시하며, 조금 더 내력 회복에 집중했다.
한두 방울씩 떨어지던 녀석들은 순식간에 무리를 지어 땅으로 내려오자, 메마른 대지가 촉촉이 젖어 오기 시작했다.
그에 맞춰 시후의 검은 무복 이곳저곳에 음영이 더해졌다.
그리고 빗방울을 잔뜩 머금은 무복의 무게가 적잖이 느껴질 무렵, 시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회복된 내공은 대략 칠할 정도.
만족스럽지도 불만족스럽지도 않았다.
천마대주에게 쏟아부은 내공이 딱 이정도였다.
시후는 손을 쥐었다 폈다를 반복하다가 이질적인 기운에 고개를 돌렸다.
그를 둘러싼 팔문금쇄진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원인은 그 중심에 있는 천마에게서 시작되었다.
시후는 땅에 꽂아 둔 자운유성창을 뽑아 들곤 천마를 향해 달려갔다.
* * *
일전에 제갈마혁에게 팔문금쇄진의 장점에 관해 물은 적이 있었다.
그는 제법 오랜 시간 동안 고민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여덟은 하나, 하나는 여덟인 진법.’
그때는 무슨 뜬구름 잡는 소린지 싶었지만, 시후는 지금 그 말의 뜻을 충분히 이해했다.
팔문금쇄진을 이루는 여덟 명을 색으로 표현한다면 겹치는 색이 단 하나도 없을 것이다.
대표적으로, 같은 사문인 검후와 연설린이 동일한 초식을 펼치더라도 와닿는 느낌은 전혀 다르다.
그러니 다른 이들은 오죽할까.
하지만, 팔문금쇄진을 이루는 그들은 하나였다.
그를 가능케 한 건 단연 제갈마혁의 능력이었다.
“천태 좌 삼 후 일. 쌍익 전이! 공진 우 삼. 금정······.”
그의 입과 손은 쉴 틈이 없었다.
자신을 제외한 일곱의 위치를 계속 지적하며, 끊임없이 천로수변을 날리기 바빴다.
그렇다고 아무런 공격을 하지 않느냐면 그것도 아니다.
천로수변을 쥐고 있지 않을 때는 연신 대천성탄지를 날리며 천마의 움직임을 제한했다.
그런 제갈마혁의 노력 덕분에 팔문금쇄진은 유지될 수 있었다.
하지만, 비가 오기 시작하자 이야기가 달라졌다.
천양지음(天陽地陰)이라는 말이 있다.
하늘과 태양은 높고 밝은 것이 양의 기운을 띠고 있지만, 땅과 바다는 낮고 어두운 것이 음의 기운을 띠고 있다는 말이다.
물론, 땅이라고 음기가 가득한 건 아니다
볕이 드는 곳이라면 양의 기운과 음의 기운이 조화를 이루니깐.
하물며 이렇게 지대가 높은 곳이라면 지형에 따라 되려 양의 기운이 조금 더 강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비가 오는 경우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비가 온다는 것은 수(水)와 지(地)의 합을 의미하고, 그건 곧 음의 기운이 강성해짐을 뜻했다.
즉.
“금정!!”
금정신니가 밀려났다.
팔문금쇄진이 천마를 완벽히 붙잡아둘 수 있었던 이유는 진법의 신묘함과 변하는 상황에 알맞게 변화를 꾀하는 제갈마혁의 빠른 판단도 있었지만, 가장 기본적으로 금정신니가 그 중심을 잘 잡아 줬기에 가능했다.
하지만, 중심인 그녀가 밀려남으로써 진은 크게 휘청거렸다.
천마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더할 나위 없이 튼튼한 올가미가 있다지만, 그 묶은 기둥을 뽑아낸다면 올가미가 무슨 소용이랴.
그의 전신에서 검붉은 내공이 피어올랐다.
그에 맞춰 금정신니도 내공을 끌어 올렸다.
“금정, 물러나면 안 되네!”
제갈마혁의 말에 금정신니는 결의에 찬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어지는 격돌.
“크흑!”
금정신니는 단 한 걸음도 물러나지 않았다.
하지만, 옅은 신음은 충격이 상당함을 의미했다.
그에 반해, 명백한 힘의 차이를 증명하듯 천마의 입가에는 미소가 맺혀 있었다.
허세가 아니라, 느껴지는 기세만으로도 알 수 있듯 여유가 넘쳐 흘렀다.
제갈마혁의 얼굴에는 하늘만큼이나 짙은 어둠이 드리웠다.
“명일만 있었어도······.”
“명일을 찾는 건 죽은 뒤에나 해도 늦지 않소. 나는 이곳에 뼈를 묻을 각오로 싸울 테니 방도나 알려 주시오.”
공진의 말에 제갈마혁은 부끄러운 듯 낯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죽음을 각오한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마교의 발호에 곤륜산이 불타지 않았던 적은 손에 꼽을 정도인데, 빈도의 희생으로 곤륜산이 무사할 수 있다면 그보다 좋은 게 어디에 있겠소이까?”
“같이 손잡고 가시는 게 어떻습니까? 천태 진인과 함께라면 원시천존께서도 반겨 주시겠지요.”
“어허, 공진 진인이 같이 가면 천존께서 날 홀대하지 않을까 걱정되는데, 뒤에 오시면 안 되오?”
천태 진인과 공진은 서로를 치켜세우며 각오를 뽐냈다.
“비령은?”
“괜찮아. 어차피 구천종주도 막바지고, 이제는 자신의 길을 걸을 때잖아요.”
“사매라면 그 길도 알려 줄 줄 알았는데?”
“사저는 날 어떻게 보고 그래요?”
검후의 뾰쪽한 물음에 연설련은 어깨를 으쓱였다.
“제자라면 정신을 못 차리는 팔불출? 솔직히 말해서, 알려 주려고 했어, 안 알려 주고 했어?”
“······ 이정표 정도는 알려 주려고 했죠. 그보다, 비령은 제 갈 길을 알지만, 초오는 아직······.”
“걔는 저 스스로 올라갈 놈이야. 아, 그보다 비령이와 이어 주려고 했는데 그건 아쉽게 됐네.”
“그건 경쟁자가 있어서 힘들 걸요?”
“경쟁자? 누구? 내 아들이면 누구한테도 꿀리지 않는데 누가 경쟁자라는 거야?”
현월문의 두 제자는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상황 속에서도 태연히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금정신니는 말할 필요도 없다는 듯 투지를 불태우고 있었다.
제갈마혁의 시선이 백리은에게로 향했다.
그는 초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제갈형, 가는 길에 그 진법이라는 것 좀 가르쳐 주시오. 내 수만 가지 무공을 배우고 익혔지만, 진법은 영 배움이 더디어 깊이가 없소.”
가는 길이 어디를 의미하는지는 물을 필요가 없었다.
그렇기에 제갈마혁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려울 것 없지. 그럼 간단하게 삼재진부터 가르쳐 주면 되겠나?”
“······ 누굴 바보로 아시오?”
그의 사나운 눈빛을 무시하며 마지막 남은 일인에게 시선을 돌렸다.
적시걸은 분통이 터진다는 듯 얼굴을 구겼다.
“젠장, 발을 뺄 거면 진작에 뺐어야 했는데······.”
이번 싸움의 승률은 그다지 높지 않았다.
그렇다고, 달아난다고 해서 살아남는다는 보장은 없었다.
아니, 첩첩산중에 숨어 살며 풀뿌리를 뜯어 먹으면 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적시걸의 성격상 절대 그러진 않을 것이다.
그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말을 이었다.
“이번 싸움에서 이기면 서평회가 복건성에 자리 잡을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지원하는 거 잊지 마라!”
“내 세가 돈을 털어서라도 커다란 장원을 지어 주지.”
“아방궁을 지어야겠군.”
적시걸은 이 와중에도 욕심을 드러내며 쌍겸을 고쳐잡았다.
그런 그의 욕심이 마냥 밉게 보이지 않았는지, 제갈마혁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맺혔다.
훈훈한 분위기가 맴돌았다.
물론, 그 시간은 지극히 짧았다.
“더 할 이야기들은 없나?”
천마의 웃음기 맺힌 물음에 공기는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지금 대화를 나눌 수 있었던 건 그가 용인해 줬기 때문이었다.
그는 주변을 쓱 훑어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더 나눌 말이 없어 보이는군. 그럼······. 죽어라.”
그의 신형이 흐릿해지더니 금정신니의 앞에 나타났다.
완벽한 이형환위(移形換位)는 아니었다.
하지만, 당하는 입장에서는 그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금정신니는 급히 가슴 앞에 쌍장을 모으며 천마의 공격을 막았다.
“크헐!”
금정신니는 피를 토해낼 듯한 신음을 터트리면서도, 한 치도 물러나지 않았다.
되려 금나수를 펼치며 천마를 붙잡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녀의 적극적인 의지는 나머지 일곱 명에게서도 드러났다.
각자 방위를 밟으며 천마의 가슴을 비롯해 목, 다리, 어깨 등의 전신을 노렸다.
천마는 바로 금정의 금나수를 뿌리치며, 가장 위협적인 공진의 검을 손바닥으로 때렸다.
의도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그의 검이 튕겨 나가며 적시걸의 겸을 막아 주었다.
하지만, 이어 날아온 검후의 검을 이용하여 연설련의 검을 막아 내자 확신으로 변했다.
그는 적의 공격으로 공격을 방해하며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최대의 효과를 끌어냈다.
천마는 충분한 힘과 그 힘을 바탕으로 한 뛰어난 기교를 통하여 금정신니를 무릎 꿇렸다.
“쿠웩!”
즉, 팔문금쇄진의 붕괴를 의미했다.
- 197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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