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182화 변수 (4)
시후는 정신을 차리자마자 알람을 쭉 확인한 뒤 고개를 끄덕였다.
흔히들 말하는 정·기·신 가운데 신(身)을 완성했다.
가장 기본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본디 기본이 가장 중요한 법이다.
튼튼한 집을 짓기 위해선 굳건히 다져진 땅이 필요하니깐.
그리고 정과 기는 신에 비해 완성하기 어렵다지만, 이미 세 가지는 그 하나하나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즉, 나머지 둘은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완성할 수 있다는 말이다.
“문제는 시간인데······.”
시후는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포달랍궁에 들어오기 위해 소모한 시간은 무려 일주일.
도마가 귀환하지 않았으니 마교는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바로 서장으로 쳐들어오는 수를 두진 않을 테지만, 최소한 사람을 보낼 터.
도마의 죽음을 확인하면 그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절대 곱게 넘어가진 않을 게 분명하다.
다만, 서장과 정의맹이 결탁했다는 것을 눈치챈다면 반응이 달라질 수도 있다.
지금쯤이면 남궁세가를 비롯한 구파와 팔대 세가의 핵심 전력이 합류했을 테니, 계획대로 청해를 벗어나 신강의 경계에 다다랐을 것이다.
턱밑에 다다른 정의맹을 두고 서장으로 병력을 보내는 건 미친 짓이다.
“그렇다고 마음을 놓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니, 최대한 빨리 서장을 떠나는 게 좋은데······. 그럼 열흘 정도인가?”
가장 짧게 가정한다면 그쯤이다.
열흘.
긴 시간은 아니다.
하지만, 정은 서장을 떠난 뒤에 완성할 수 있는 부분이니, 최소한 기의 완성만을 목표로 한다면 불가능하지도 않았다.
“일단······.”
시후는 투전옥을 나서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시간이 늦었다.
그건 문틈 사이로 들어오는 빛의 세기로 알 수 있었다.
문을 열고 나가기 직전 뒤돌아 투전승불의 마지막 터럭으로 만들어진 동상을 바라봤다.
녀석은 언제 움직였냐는 듯 제자리에 있었다.
동상을 뒤로한 채 밖으로 나가자 가을 홍시처럼 붉은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시후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주먹을 쥐었다 펴길 반복했다.
“확실히 신이 완성되니깐 이거 말도 안 되네.”
몸이 놀라울 정도로 가볍다.
몇 날 며칠 동안 달려도 지치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지금이라면 가능하려나?”
시후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다가 고개를 저었다.
제아무리 신을 완성했어도 팔황의 한 수를 받아넘기기엔 무리다.
그들이 마음을 다한 공격을 받아내기 위해선 정기신을 완성해야 한다.
아니, 최소한 기는 완성해야 한다.
그래야 불안정하더라도 강을 사용할 수 있을 테니깐.
그러기 위해서는······.
시후는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휙 돌렸다.
저 멀리서 지켜보고 있던 노승과 눈이 마주쳤다.
노승의 두 눈에 놀람이 가득했다.
그와의 거리는 족히 삼십 장이었으니깐.
잠시 후, 창문 너머로 보이던 노승은 건물 안으로 모습을 감췄다가 이내 문을 열고 나왔다.
그는 앞으로 다가와 위아래를 훑어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그의 표정은 감탄보다는 경악에 가까웠다.
“일신우일신이라 하지만······.”
“포달랍궁의 자비에 한 발자국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노승은 정말 그렇게 생각하냐는 듯 빤히 바라봤다.
그에 시후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한점의 거짓도 없는 발언이었다.
포달랍궁이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면 이토록 빨리 신을 완성하지 못했을 것이다.
투전옥의 투전성불은 오롯이 일원신공을 익힌 이에게만 반응하니깐.
* * *
“이런 개 후레자식이?”
적시걸은 시후를 보자마자 바로 욕설을 날렸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무려 여드레다.
포달랍궁에 머물렀던 시간이 말이다.
적시걸이 화를 내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에게 포달랍궁은 넘어야 하는 산이지만, 넘을 수 없는 산이기도 했다.
그런데 인질로 남겨진 시후가 포달랍궁에 있는데, 데려오지 못한다는 건 그에게 치욕이나 다름없었다.
그렇기에 그는 잔뜩 성이 난 듯 팔을 걷어붙이며 다가왔다.
“내 정의맹과 척을 지는 한이 있더라도 네놈의 다리를······.”
하지만, 그는 팔을 걷다 말고 굳었다.
화난 와중에도 전혀 달라진 기도를 읽은 것이다.
그는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시후를 바라보다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제 뺨을 꼬집었다.
잠시 후, 그는 시뻘게진 뺨을 문지르며 물었다.
“어떻게?”
그의 질문에 시후는 어깨를 으쓱였다.
설명하려면 일원신공에 관해서도 이야기해야 한다.
그에게 굳이 설명할 필요도, 이유도 없는데 왜 모든 패를 깔 것인가?
“맹에서 사람이 왔나요?”
“아니,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중요하죠. 지금 가장 중요한 게 뭔지 잊으신 건 아니죠?”
무인으로서 그에게 가장 중요한 건 짧은 시간에 어떻게 경지를 이토록 높이 끌어 올렸냐는 것이겠지만, 서평회를 이끄는 그에게 가장 중요한 건 마교와의 싸움이다.
그는 시후의 물음에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더니, 주머니에서 잔뜩 구겨진 서찰을 꺼내 던졌다.
꼬깃꼬깃한 서찰에는 현재 정이맹이 어떻게 마교를 압박하고 있는지, 마교는 그에 대해 어떻게 대응하고 있는지 간략하게 적혀있었다.
그리고 서장에서 어떻게 행동해 줬으면 하는지도 적혀 있었다.
“비등비등한 전력이 모였으니 뒤로 움직이기만 해도 효과를 쏠쏠히 보겠네요.”
“일 없다! 마교 놈들이 뒤돌아선다면 우리가 놈을 상대해야 하는데, 우리가 그런 위험부담을 감수할 이유는 없지.”
“에이, 놈들이 뒤돌면 뒤를 정의맹에 잡히는데 그런 악수를 누가 둬요?”
“일말의 가능성도 없다고 확언할 수 있느냐?”
일이 어떻게 흘러갈 줄 알고 확답을 내리겠는가.
그는 시후가 대답하지 못하자 곧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젖혔다.
“확신도 없는 일에 뛰어드는 건 멍청한 짓이지.”
“그럼 합류하시죠.”
“합류한다면 분명 우리를 앞세우겠지.”
이리저리 싫은 기색을 내비치는 걸 보아하니 뒤에서 관망하겠다는 의지가 엿보였다.
물론, 그에게 기대했던 역할은 도마를 잡는 것이었으니 이것으로 충분하다.
하지만, 놀게 놔둬서 뭣하겠는가?
“정의맹과 마교가 본격적으로 붙으니 한발 뒤로 빼겠다는 것으로 들리는데, 아닙니까?”
“빼겠다니? 이미 정의맹과 한배를 탄 몸인데 그럴 리 있나?”
“그럼?”
“크흠, 본래 전력을 모두 드러내고 싸우는 것만큼 멍청한 건 없지.”
개소리다.
싸우기 전이라면 모를까 싸우는 도중에 힘을 숨길 필요가 무엇이 있겠는가.
분명 다른 목적이 있다.
그의 입장에서 어떻게 하면 이번 정의맹과 마교의 싸움에서 더 큰 이득을 취할 수 있을지 생각해 보자 답이 나왔다.
분명 정의맹이 힘겨워할 때 극적으로 도우려는 것이다.
그는 시후가 지긋이 바라보자 허공에 원을 그려가며 설명했다.
“딱 이 정도 힘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추가로 내가 합류해 봐. 마교 입장에서는 정의맹에서 숨겨둔 힘이 더 있지 않을까 생각할 거 아냐? 그럼 그 기세를 몰아서 단번에 몰아칠 수 있겠지. 안 그래?”
아니, 애초에 처음부터 몰아치면 그만이다.
하지만, 시후는 그의 말에 반박하는 대신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도 일리가 있네요.”
“그치? 그리고 내가 극적으로 나타나면 나타날수록 정의맹의 사기도 더 올라가지 않겠어? 본래 예기치 못한 아군의 등장만큼······.”
“그런데 그거 아세요?”
시후는 그의 말을 자르며 주변을 살폈다.
뭔가 조심스럽게 할 이야기가 있다는 듯한 태도였기에 적시걸은 좌우를 살피더니 고개를 가까이했다.
“여기 계시면 죽어요.”
“뭐? 무슨 개소리를······.”
“포달랍궁.”
단 네 글자로 이뤄진 한 단어는 불같이 화를 내던 그의 입을 다물게 했다.
하지만, 침묵은 분노의 침묵이었다.
조금 전보다 더욱 화가 난 듯 그의 기세가 흉흉해졌다.
시후는 아랑곳하지 않고 뒤편을 가리켰다.
“얼마 안 지나면 포달랍궁이 문을 열고 나올 거예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적시걸은 시후를 죽일 듯 노려보았다.
기와 신을 완성했음에도 절로 살이 떨릴만한 가공할 살기였다.
그는 잠시 숨을 고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 거짓이면 혀를 자를 것이다.”
“제가 거짓말을 해서 얻을 게 뭐 있다고요?”
거짓이 아니다.
시후가 기(氣)를 완성하는 과정에서 얻은 부산물은 포달랍궁이 삼십 년간 애타게 찾던 것이었다.
* * *
적시걸은 뒤를 힐끔 바라보더니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그의 시선이 닿은 곳은 박살 난 서평궁이었다.
서평궁은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포달랍궁이 칩거를 깬다면 적시걸을 비롯한 서평회는 모두 서장을 떠나야 한다.
아무리 나름의 정의를 세운 악이라고 하나, 그들이 서장 민초들의 피를 빨아먹으며 기생했다는 점은 변하지 않는다.
물론, 포달랍궁을 상대로 승리한다면 문제없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해서 그렇지.
“젠장, 그래도 살아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게 다행이군.”
“빌어먹을 다 챙겨오지도 못했는데 뭐가 다행이야?”
“지금이라도 가서 챙겨오던가?”
앞에서 두런두런 들려오는 이야기에 적시걸의 한숨이 더욱 깊어졌다.
그는 시후가 말할 때 반신반의했다.
하지만, 다음날 해가 뜨기 무섭게 삼백의 라마승들이 서평궁을 포위하자 그는 경악했다.
아무리 팔황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고 하더라도 숫자 앞에 장사 없다.
게다가 포달랍궁의 라마승들은 어중이떠중이도 아니다.
삼십 년간의 봉문으로 열 살 아이는 마흔이 되었고, 스무 살 청년은 오십의 중년인이 되었다.
그 사이 무엇을 했겠는가?
무공을 닦고 또 닦았다.
내공은 깊어지고 무공은 고절해졌다.
최소 쌍괴의 수준의 고수만 해도 양손으로 헤아릴 수 없었다.
팔황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그의 한 수를 무리 없이 받아낼 수 있는 이가 열이 넘는다는 말이다.
그들이 일시에 달려든다면 적시걸이 숨겨둔 수를 모두 꺼낸다고 필패다.
하지만, 그는 터럭 하나 상하지 않고 랍살을 벗어날 수 있었다.
시후의 중재 덕분에 말이다.
물론, 포달랍궁이 그를 보내준 이유는 단순히 시후의 간청 때문만은 아니었다.
“빌어먹을, 꼬여도 이렇게 꼬이다니.”
시후는 적시걸이 그간의 죄를 씻어내기 위해 개과천선했다고 말했다.
그 증거로 마교를 몰아내는 데 손을 보탰던 이야기를 하였다.
“남은 생 동안 포달랍궁의 추격을 피해 다니는 것보다, 이번에 확실히 인식을 바꿔보는 건 어때요?”
“개뿔.”
“적극적으로 도우면 콩고물이 떨어질지도 모르잖아요?”
“콩고물은 무슨. 중원은 이미 정의맹 놈들이 꽉 잡고 있지 않으냐? 젠장, 이럴 줄 알았으면 마교 밑으로 들어가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을 텐데······.”
“요동 어때요?”
시후의 말에 적시걸은 얼굴을 구겼다.
소식이 어두워도 이렇게 어두울 수가 없다.
“모용세가가 멸문했어요. 그 빈자리를 채울 곳이 마땅치 않은데, 서평회 정도라면 그 빈자리를 어느 정도 채울 수 있겠죠. 물론, 서장에게서처럼 민초들의 고혈을 빨아먹고 지낸다면, 정의맹이 아니라 전군도독부를 상대해야 할지도 모르지만요. 아, 가장 중요한 건 이번 마교와의 싸움에서 서평회가 얼마나 활약하냐는 거겠네요.”
“······ 그런 촌구석 관심도 없다.”
적시걸은 나지막이 말을 내뱉은 뒤 조금씩 거리가 멀어졌다.
걸음걸이가 빨라진 것이다.
그리고 그는 서평회 이들을 다그치며 속도를 높였다.
시후는 그런 그를 바라보면 많은 말을 삼켰다.
서평회가 요동을 차지하기 위해선, 이번 마교와의 싸움에서 공을 세우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가장 먼저 화산과 원한이 깊은 염수라는 자를 내놓아야 할 것이다.
그를 비롯한 이들이 한둘이겠는가.
하지만, 지금 불타고 있는 그의 마음을 꺼트릴 이유는 없다.
그가 날뛸수록 피해는 조금이라도 더 줄어들 테니깐.
“포달랍궁이 네놈들의 만행을 들으면 살려둔 것을 후회하고 추격해 올 것이다! 어서 걸어!”
시후는 다그치는 적시걸의 목소리를 흘려들으며 대열 가장 후미로 이동했다.
그리곤 뒤통수를 만지작거렸다.
정확히는 뒤통수에 자리한 굵은 황금빛 머리카락 한 가닥을 말이다.
- 183화에 계속 -
<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