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168화 대화합 (4)
서괴의 예상은 정확했다.
이천에 달하는 신청자 중에서 시험을 통과한 사람은 절반에 불과했다.
적다면 적은 숫자다.
하지만, 신청자 가운데 구파와 팔대세가 등 거대 문파의 참가가 저조했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대단히 많은 숫자다.
대부분 어린 제자들을 제외하면 절정이라는 기준치를 통과하지만, ‘대화합’이라는 취지를 생각한다면 참가 인원을 조절함이 옳았다.
가장 많은 인원을 내보낸 화산조차 넷에 불과했으며, 소림 같은 경우는 사람을 아예 안 내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단순히 숫자가 적을 뿐이었다.
무당제일검 운허와 매화검자 주화수를 비롯해서, 청성의 표풍검 신오적, 팽가의 철혈도 팽준경 등.
누구 하나 만만히 볼 사람이 없었다.
덕분에 호사가들의 입이 바빠졌다.
“자네는 누가 우승할 거 같은가?”
“당연히 무당제일검 아니겠나? 그의 검은 구름을 벨 정도라고 하지 않은가?”
“매화검자의 검에선 열두 송이의 매화가 피어난다고 하던데?”
“그 또한 표풍검의 검 앞에 날려갈 테지.”
“바람이 불어온다고 철혈도가 미동이나 할까?”
다들 누가 이번 비무 대회에서 우승할지 의견이 분분했다.
무당제일검의 우승을 예상하는 자가 많긴 했지만, 그렇다고 그리 압도적인 비율을 차지하진 않았다.
그러던 와중 누군가 다른 의견을 내놓았다.
“소검후는?”
그의 말에 몇몇은 곰곰이 생각해 보는 듯했지만, 대다수는 생각해 볼 일말의 여지조차 없다는 듯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십 년 뒤라면 모를까, 지금은 무리지.”
“당연하네! 작년 용봉지회 때 얼굴을 비춘 이후로 뭘 했는지조차 모르지 않나? 그맘때의 검후를 생각한다면, 너무 미진한 행보지.”
소검후에 이어 중소 문파의 인물들과 낭인 중에서도 이름깨나 날린 자들도 거론되었다.
“패력도는 어떤가?”
“끽해야 3차전을 통과할 수준이라고 보네. 그자보다는 차라리 운룡풍섭이 더 낫다고 보네.”
“운룡풍섭은 무슨······ 토룡이라고 부르게. 그자는 일전에 장강삼웅이라는 놈들에게도 졌다며?”
누군가 이름을 꺼내면 또 다른 누군가는 깎아내리며 다른 자를 거론했고, 그자 또한 까이기 일쑤였다.
그러는 와중 시후가 거론되었다.
“그렇다면 비무광자는?”
“최근 섬전창이라 불릴 정도로 빼어난 무공 실력을 보여 준 것도 맞고, 최근 엄청난 활약을 선보이기도 했지.”
“우승은 무리겠지만, 난 대진이 좋다는 가정하에 7차전 혹은 8차전까지도 갈 수 있다고 보네.”
비령을 거론할 때와 달리, 반응은 꽤 호의적이었다.
하지만, 시후가 그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뿌우우우우우우~!
길게 울리는 나팔 소리에 맞춰 병장기를 패용한 무림인들이 여기저기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시험을 통과한 무인들이다.
일제히 비무를 치르면 좋겠지만, 비무대의 숫자는 인원과 비교하면 턱없이 모자랐다.
“뒷자리가 십의 배수에 해당하는 대협께서는 이쪽으로 모이십시오!”
“뒷자리 끝의 숫자가 일 번대인 대협은 이쪽입니다!”
천에 달하는 숫자를 열 무리로 나누었다.
그래도 백이다.
그렇다면 최소 오십 번의 비무가 치러져야 하고, 그다음은 스물다섯 번을 치러야 했다.
오늘 하루 만에 1차전도 끝내기 힘들 것이다.
게다가 아직 추첨도 하지 않았으니, 시간은 더욱 부족하리라.
“모두 주목해 주시오!”
그러는 사이, 염소처럼 수염을 기른 한 중년인 비무대 위로 올라갔다.
여기저기서 웅성거림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는 공동파의 장문인, 취주홍이었다.
“비무에 관하여 설명할 테니, 다들 잘 듣고 다시 말하는 일이 없도록 도와주면 고맙겠소! 먼저 첫 번째 비무는 최대 삼백 명까지만 통과될 것이오!”
지독한 침묵이 찾아왔다.
수천의 군중이 모여 있었음에도 누구 하나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최대 삼백.
최소는 말하지도 않았다.
칠 할에 가까운 인원을 한 번에 떨어트린다는 말이니, 놀라는 건 당연했다.
취주홍은 주변을 쓱 훑어보다가 재차 말을 이었다.
“조건은 간단하오.”
그의 손가락이 두 개가 펼쳐졌다.
몇몇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지 알아차린 듯 신음을 흘렸다.
“2승. 2승을 챙기면 되오. 단, 비무는 연석(聯席)으로 치러질 것이오.”
‘연석’이라는 말에 다들 황당하다는 듯 비무대 위를 바라봤다.
하지만, 취주홍의 표정은 단호했다.
“무슨 연석으로 상대한단 말이오? 세상천지에 비무를 그렇게 치르는 경우가 어디에 있소이까?”
“맞소! 이건 말이 안 되오!”
누군가 입을 열자, 불길은 순식간에 사방으로 번졌다.
취주홍은 더 말해 보라는 듯 팔짱을 낀 채로 듣고만 있었다.
그는 힐난 어린 말들을 모두 들은 뒤,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교 놈들에게도 그리 말하겠소? 일대일로 정정당당히 붙자고?”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취주홍은 주변을 쭉 돌아보더니 비무대 위를 가리켰다.
“이 자리를 가볍게 보지 않길 바라오. 자, 그럼 자신 있는 분들은 각자 비무대 위로 올라오시길.”
그는 할 말을 마친 뒤 바로 비무대 아래로 내려갔다.
비무대는 총 열 개였지만, 올라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모습에 비무대에서 멀어지던 취주홍이 내공을 담아 외쳤다.
“비무대에 올라왔는데 스물을 셀 동안 아무도 올라오지 않는다면 그분은 자동으로 진출이오!”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비무대 위로 올라서는 자들이 있었다.
호사가들의 입에 오르내리던 무당제일검과 매화검자 등, 각 문파를 대표하는 고수들이 거리낌 없이 올라왔다.
시후도 마찬가지였다.
덕분에 지켜보는 이들의 눈을 반짝이며 비무대 위를 바라봤다.
그들의 무공을 견식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으니깐.
하지만, 같은 뒷번호를 공유하고 있는 이들에겐 올라갈 이유가 하등 없었다.
어차피 자리는 보장되어 있었다.
고작 한 자리가 줄어들 뿐이었다.
다들 그렇게 생각했다.
다음 한자리가 줄어들기 전까지는.
하지만, 백 명이 서른 자리를 두고 경쟁하는 것과 아흔여덟 명이 스물여덟 자리를 두고 경쟁하는 건 다르다.
게다가 가만히 있다간 겁쟁이라 불리기에 딱 좋은 상황이 아니던가.
뒤늦게 상황을 눈치챈 사람들의 눈이 번뜩였다.
“올라오실 분 없으면 숫자를 세겠습니다. 하나, 둘, 셋······.”
“내가 상대하겠소!”
삼십 대 초반의 도객이 공동파 도인의 말을 끊으며 시후가 있는 비무대 위로 올라왔다.
시후는 그를 바라보며 자운유성창을 꽉 움켜쥐었다.
“고의로 살수를 펼칠 시, 비무를 중단시킴은 물론이거니와 패배로 간주한다는 건 기억하고 계실 거라 믿습니다. 그럼, 시작하십시오.”
시후는 말이 끝나기 무겁게 내공을 잔뜩 끌어올렸다.
그와 동시에 금빛 휘광이 몸을 감쌌고, 지켜보는 도객의 눈에 당혹감이 어렸다.
시후는 애초에 2승을 챙길 생각은 없었다.
압도적인 무력을 보여 준다면 다음 도전자는 없을 테니 말이다.
* * *
“생각보다 더 적을 수도 있겠는데?”
시후는 비무대 위를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비무는 매우 치열했다.
시후를 포함한 몇몇은 다음 상대가 올라올 생각을 날려 버리는 압도적인 무위를 선보였지만, 대다수는 그러지 못했다.
치열한 공방을 주고받으며 내공이 소진되었고, 그건 다음 비무에서 패배로 이어졌다.
하지만, 패배를 안겨 준 상대방에게 곱게 승기를 안겨 줄 만큼 맘씨 고운 사람이 있겠는가.
죽어라 물고 늘어지며, 내공을 악착같이 소모하게 했다.
“대오 표국의 총표두, 종두칠 대협과 절강성 총방수사(聰訪秀士) 혁기오 소협의 비무가 치러지겠습니다!”
그러는 와중에 놈이 비무대 위로 올라갔다.
시후는 흥미롭게 비무대를 바라보는 도중, 뒤에서 다가오는 인기척을 느꼈다.
하지만, 굳이 뒤돌아 확인하진 않았다.
자박자박 귓가를 간지럽히는 걸음 소리는 지극히 귀에 익었으니깐.
“어느 정도를 보여 줄 건지 모르겠군.”
추나행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놈이 압도적인 힘으로 찍어 누르며 이기진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너무 시선이 쏠릴 테니깐.
과연 어느 선까지의 경지를 드러낼 것인가.
전부는 아닐 테지만, 최소한의 선을 드러내긴 해야 한다.
“식충이를 올려보내 볼까?”
시후도 추나행이 말하는 ‘식충이’가 개방의 수많은 후개(後丐) 중 하나임을 모르진 않았다.
그가 올라간다면 놈은 어느 정도 힘을 드러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일단 보고 생각하죠.”
그와 동시에 비무가 시작되었고, 놈은 허리 양쪽에 매달린 도를 뽑았다.
쌍도(雙刀).
쌍수 무기를 사용할 때 가장 중요한 건 힘의 배분이다.
하지만, 그보다도 더 중요한 건 상대다.
정확히는 상대의 무기.
시후가 화정을 쉽게 이길 수 있었던 이유는 실력도 앞섬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병기의 이점이 컸다.
“음······. 공방이 자유롭구나.”
상대가 대응을 제대로 못 하는 점도 있지만, 놈은 몰아치고 물러나야 할 시점을 매우 잘 알고 있었다.
물 흐르듯 이어지는 공방 속에 상대는 연신 뒤로 밀려날 뿐이었다.
“이래서야······.”
“금방 내려오겠군.”
두 사람의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종두칠은 비무대 아래로 떨어졌다.
그 역시 일 승을 챙긴 뒤였기에 아쉬움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다들 눈치를 살피는구나.”
그럴 수밖에 없었다.
종두칠을 상대하면서 내공을 많이 쏟아부었느냐 묻는다면 아니라 할 수 있었고, 어느 정도 역량을 가졌는지도 파악되지 않았다.
시후는 추나행의 의견대로 개방의 후개를 올려보내야 하나 고민했지만, 곧 고민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삼양문의 웅력거도 광시혁이라고 하오!”
쩌렁쩌렁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자, 어깨에 거도를 짊어진 사내가 눈에 들어왔다.
그를 본 시후는 낮게 혀를 찼다.
“젠장.”
장병(長兵)은 단병(短兵)을 상대하기 좋다.
그 사실은 누구나 동의할 것이다.
그리고 쾌(快)는 중(重)을 넘어서지 못한다.
이 사실도 강호 불변의 진리였다.
하지만, 그건 비슷한 수준에나 통하는 말이지, 저 정도 격차면 의미가 없었다.
자신을 ‘웅력거도’라고 소개한 광시혁은 덩치가 매우 좋았다.
게다가 외공을 극한까지 단련한 듯, 우락부락한 근육이 시선을 잡아끌었다.
하지만, 느껴지는 내공은 극히 미미했다.
시후는 자신이 느끼지 못할 정도로 내공 갈무리를 잘하는 것일까 생각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볼 것도 없네요. 다른 놈들이나 신경 써 주세요.”
“알았네.”
추나행이 자리를 뜨기 무섭게 두 사람이 격돌했다.
시후의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혁기오는 얼굴에 웃음을 잔뜩 머금은 채 비무대를 내려왔다.
그는 곧 시후를 발견하더니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어? 보고 계셨소?”
“변칙적이더군.”
“하하, 익힌 무공이 보잘것없다 보니 번잡하게 싸우는 편이오. 그보다, 과연 섬전창이라는 말이 아깝지 않았소. 아니, 되레 부족하다고 느꼈소만.”
이어지는 칭찬 세례에 시후는 다소 거만한 태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실력보다 저평가되고 있음은 사실이지.”
“충격적이었소. 피할 공간을 전혀 주지 않는 빽빽한 강기의 폭풍이라니.”
혁기오는 시후의 첫 번째 비무를 회상하듯 말을 이었다.
그의 말대로, 시후는 비무를 지켜보던 모두에게 충격을 안겨 주었다.
상대를 향해 무공을 펼치는 게 아니라, 비무대 위에 모든 것들을 지워 버리겠다는 듯 사방으로 강기를 배출했으니깐.
압도적인 무력.
하지만, 다소 위험한 행동이었다.
“그보다 상대가 비무대 아래로 내려가지 않았다면 어쩔 생각이셨소?”
“느리게 펼쳤으니, 죽지 않으려면 비무대 아래로 뛰어내려야지. 그게 싫거든 제 재주를 믿고 막아서던가.”
“하하······.”
그는 시후의 거침없는 발언에 당황한 듯 헛웃음을 흘렸다.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처럼 불편했지만, 이 정도는 보여 줘야 했다.
그래야 자연스럽게 정보를 흘려 주지 않겠는가.
독이 든 정보를.
- 169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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