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164화 목가 (2)
“이 술은 어디서 구했나?”
“······ 빨리도 물어보시네요.”
목천추의 물음에 시후는 조그맣게 투덜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세 시진이 넘도록 침묵을 지켰다.
덕분에 아직 ‘부탁’의 ‘부’자도 꺼내지 못했다.
하지만, 시후는 애써 미소 지으며 살갑게 입술을 뗐다.
“하오문을 통해서 구한 거라, 저도 어디서 구했는지는 몰라요.”
거짓말이다.
물론, 사실도 섞여 있긴 했다.
하오문을 통해 구했다는 건 사실이니깐.
“하오문이라······. 그렇지. 하오문이라면 구했을지도 모르겠군.”
워낙 당당하게 말한 탓인지, 의심하는 기색은 전혀 없었다.
되려 시후를 바라보는 눈빛 속에 고마움이 가득했다.
“부탁이 뭔지 말해 보게. 내, 들어줄 수 있는 선에선 최대한 돕겠네.”
그가 진지한 눈빛을 보내자 잠시 고민했다.
지금 말해도 괜찮은가?
하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
조금 더 그의 감정선을 자극할 필요가 있었다.
“그보다, 한번 가 보셨는지요?”
“어딜 말인가?”
시후는 그가 되묻자 고개를 쓱 돌렸다.
순간, 목천추의 얼굴에 짙은 구름이 드리웠다.
그는 시후와 마찬가지로, 대답 대신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나고 자란 곳.
비록 오래전 집을 나오긴 했으나 인연을 끊은 건 아니었다.
집에서 바라는 것과 그가 추구하는 삶이 달랐을 뿐이다.
“그때 이 녀석이 있었으면, 뿌려 드렸을 텐데 말이야.”
그는 짐짓 쾌활할 척 손에 들린 백자를 흔들며 말했다.
안에 담긴 술은 정말 별거 없었다.
운봉산에서 주저리주저리 떠들었던 모태주는 물론이고, 어느 정도 이름 있는 술보다 가치가 떨어지는 술이었다.
하지만, 그에겐 그 어느 술보다 귀한 술이었다.
“천향목주(天香睦酒)라니. 너무나 과분한 이름이었지. 맛과 비교하면 너무 거창한 이름이 아니냐는 소리를 하루에 열 번도 들은 적이 있었으니 말이야. 내가 오죽 궁금하면 열두 살이 되던 해······.”
그는 추억을 회상하느라 눈빛이 아련하게 변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의 얼굴엔 슬픔이 번졌다.
시후는 고개를 떨군 그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 정도면 충분하다.
“혹시, 생존자가 있다는 소리는 못 들으셨나요?”
“조카 하나가 화를 피하긴 했지만, 관에 도움을 구하다가 어느 날 사라졌다고 들었네. 필시······.”
“살아 있다면요?”
시후의 말에 그의 눈이 커졌다.
“본래 화를 피한 아이는 둘이었지만, 살아남은 아이는 대협의 말대로 하나입니다.”
“아, 알고 있나? 그 아이를 알고 있나?”
‘알다마다.’
시후가 짧게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그가 손을 덥석 잡았다.
“부탁하네.”
그가 애절한 눈빛을 보냈다.
직계는 아니지만, 한 뿌리에서 나온 핏줄이었다.
혈연은 그 무엇보다 유대감이 강한 법.
꽉 잡은 손에서 그의 간절함이 느껴졌다.
“알려드리는 건 어렵지 않은데······ 만나러 가는 게 쉽지만은 않으실걸요.”
“무슨 소리! 근래 무공을 등한시하긴 했지만, 십오 년 전만 해도 강호에 내 이름을 모르는 자가 없었네! 아, 혹시 제법 멀리 있는가? 그렇대도 문제없네. 말 한 필 살 돈도 없을 것 같은가?”
“뭐, 제법 멀리 있죠.”
시후는 능청을 떨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동시에, 목천추는 시후의 손을 더욱 강하게 쥐었다.
눈빛은 한결 더 간절해졌다.
“그만 애태우고 말해 주게. 어디에 있든지 보러 갈 테니 말일세.”
시후는 그의 말에 짐짓 표정을 굳혔다.
“먼 길이 될 것입니다.”
“천릿길, 만릿길이라도 가겠네.”
“신념을 굽혀야 할지도 모릅니다.”
목천추는 갑자기 신념을 거론하자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어디에도 발설해선 안 됩니다.”
시후는 몇 번이고 다짐을 받아 냈다.
슬슬 짜증이 나는지 그의 얼굴에 노기가 스칠 무렵, 시후는 주변을 살피며 목소리를 내리깔았다.
“일단, 마공을 익히시죠.”
* * *
시후는 소림에 도착하자마자 신의를 찾았다.
정확히는 신의가 돌보고 있을 백리은의 상태를 보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미 자리에 없었다.
“어디로요?”
“그건 말 안 했네. 다만, 아무리 못해도 보름 내로는 돌아올 것이라고 말했네.”
“하······. 빌어먹을.”
“더 안 좋은 소식이라면, 그 정도 자리를 비우겠다고 말했다는 건, 더 걸릴 가능성도 있지 않겠냐는 것이지.”
신의의 대답에 시후는 얼굴을 구겼다.
잊고 있었다.
팔황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제멋대로 구는지.
“그리 성내지 말게. 왠지 자네한테 보답하기 위해서 자리를 비운 것 같으니 말일세.”
“보답이요?”
시후의 물음에 신의는 방 한쪽을 가리켰다.
그의 손끝이 가리킨 물건을 보자, 인상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신의가 가리킨 건 독각혈망의 뿔을 정제한 가루였다.
“그 양반이 저것에 못지않은 물건을 가져다줄 모양이더구나.”
빌어먹을.
시후가 바란 건 이게 아니었다.
비슷한 값어치의 물건을 받는 게 아니라, ‘부활한 조가창식’의 해결을 원했다.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라는 건가.
신의는 시후의 표정이 풀어질 줄 모르자, 고개를 갸웃거렸다.
“다른 이야기는 없나요?”
“아, 천태를 찾았다고 하네. 곤륜에서 시름을 덜었지.”
마교가 발호하면, 그들의 선봉대와 직접 부딪히는 건 곤륜이었다.
그렇기에 팔황급 존재는 무조건 곤륜에 있어야 했다.
마교에 독마 같은 고수가 모래알처럼 많은 건 아니지만, 그래도 손가락을 가득 채울 만큼은 있었으니깐.
“천만다행이네요. 어디에 있었대요?”
“천극봉에서 조그만 실마리를 얻어 달려 보았는데, 하필이면 달리던 와중에 깨달음을 얻었다지 뭔가? 정신을 차려 보니 서장이었다고 하네.”
“역시 팔황 정도 되면 깨달음을 얻는 것도 남다르네요.”
“내가 볼 때는 그냥 두 무공을 묶는 걸 성공해서 잔뜩 신이 났던 것 같았네. 원래 그 친구가 단순하거든.”
신의가 천태를 잘 아는 척 말했다.
이어, 뭔가가 생각났다는 듯 재차 말을 이었다.
“그리고 자네한테 손님이 찾아왔네. 아까 소림을 둘러본다고 나갔는데, 곧 돌아올걸세.”
“손님이요?”
“두 놈과 한 명일세. ”
신의에게 ‘놈’이라 불리는 사람이라면, 별로 좋은 관계는 아니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한 명’이라 말할 때 그의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했다.
신의에게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미소를 안겨 주는 이가 누가 있던가.
시후는 머릿속을 헤집어 봤지만, 딱히 떠오르는 인물은 없었다.
“마침 오는군.”
그의 말에 상념에서 빠져나와 귀를 쫑긋 세웠다.
그와 동시에 눈이 커졌다.
“밤에 몰래 치는 건 어떨까?”
“그거 좋겠군. 어차피 밤중에 몰래 움직인다면 가는 데는 문제 없지.”
“그럼 빠져나오는 길을 생각해서······.”
익숙한 두 목소리.
분명 신의가 ‘놈’이라 부를 만한 사람들이었다.
그렇다면 자연스레 한 명도 알 수 있었다.
“뭘 몰래 친다는 거예요! 허락받고 치는 거 아니면 칠 생각 없어요!”
뾰쪽한 여아의 목소리가 경내에 울려 퍼졌다.
“혜아야, 부처님은 대자대비하니 용서해 주실 게다.”
“그럼, 그럼. 누가 범종을 부수기라도 하는 것처럼 굴더구나. 땡중 놈들은 그렇게 쪼잔하게 구니깐 머리가 없는 게야.”
“응? 제 놈들이 미는 게 아니었나?”
“무슨 소리, 정각 고놈 머리 제대로 안 봤나? 자랄 수 없는 불모지의 땅이었네.”
시후는 이 자리에 정각이 없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저 말을 들었다면 당장 소매를 걷어붙였을 테니깐.
철딱서니 없는 두 사람을 나무라는 혜아의 목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화준 할아버지, 들어보세요. 글쎄 두 분이······.”
문을 벌컥 열며 들어오던 혜아가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뒤를 바짝 따라오던 쌍괴의 반응도 마찬가지였다.
“안휘에 갔다더니 벌써 왔는가?”
“일이 생각보다 잘 풀려서요. 게다가 말만 안휘였지, 하남 끝자락이나 마찬가지였거든요.”
“안 그래도 혜아가 어찌나 아쉬워하던지, 달래 주기 위해서 절간을 돌아다니다가 오는 길이네.”
혜아의 발개진 볼을 보니, 쭉 잡아당기며 괴롭히고 싶은 마음이 뭉클뭉클 피어났다.
시후는 그 생각을 지우고자 말을 돌렸다.
“범종 이야기는 뭔가요?”
“아, 마침 종루(鍾樓)를 지나는 길에 녀석들이 종을 치더구나. 혜아가 치고 싶다고 해서 물어보니, 아무 때나 치는 종이 아니라고 말하던데, 그게 어찌나 고깝던지······.”
시간이 시간인 만큼, 정론각에 사람을 모으기 위해 종을 쳤을 것이다.
그 상황에서 다시 종을 치면 난리가 날 것이다.
이에 관해선 나중에 설명해 주기로 하고, 두 사람에게 가장 묻고 싶은 걸 물었다.
“그보다 그쪽 볼일은 끝난 거죠?”
“응? 아, 그럼. 완전히 끝났고말고.”
어느 방향으로 완전히 끝낸 것인지 모르겠지만, 캐묻진 않았다.
쌍괴가 바라는 건 혜아의 행복일 것이고, 둘은 그렇게 만들어 줄 테니까.
시후는 쌍괴와 눈을 마주치며 그들이 들어온 문 뒤편을 가리켰다.
“그럼 가시죠.”
“응? 어딜 가?”
서괴의 물음에 시후는 그들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괴’라는 별호를 벗어 던질 때까지 정의맹에 들어가겠다고 하셨잖아요?”
* * *
아니나 다를까, 다들 정론각에 모여 있었다.
뒤늦게 시후가 들어서자, 친분이 있는 몇몇 사람이 눈인사를 건넸다.
시후는 고개를 살짝 숙이며 화답하곤 문밖을 향해 손짓했다.
잠시 뒤, 쌍괴가 쭈뼛거리며 얼굴을 비추자 각양각색의 반응이 나왔다.
“으음······.”
말은 하지 않았지만, 은연중에 불쾌한 기색을 내비치는 사람과.
“허, 무슨 생각으로······.”
대놓고 눈을 부라리는 자들까지.
두 부류가 대다수를 차지했다.
시후는 재빨리 눈알을 굴리며 자신에게 힘을 실어 줄 수 있는 사람을 찾았다.
가장 먼저 눈에 띈 건, 다소 구부정한 자세로 앉아 있는 추나행이었다.
시후의 눈길을 밭은 추나행은 슬그머니 일어나며 주위를 둘러봤다.
“거, 일단 조용히 하고 이야기나 들어보세. 녹림채 놈들을 상대할 때 누가 도와준 것인지 잊었는가?”
“그건······.”
“제기랄, 그러고 보니 그때 뒤에 숨어 있던 놈들이 몇 명 눈에 띄는데?”
그의 말에 얼굴을 붉히는 자가 몇몇 눈에 들어왔다.
추나행은 그때도 용감히 파양도와 맞서다가 생사의 갈림길에 서지 않았던가.
군소리가 쏙 들어갔다.
표정이야, 여전히 썩어들어 가는 자들은 있었지만, 정론각 내부에 있는 자들 가운데 추나행보다 협객에 가까운 자는 드물었다.
시후는 추나행에게 고개를 살짝 숙이며 감사를 표한 뒤 쌍괴를 안으로 들였다.
아무리 두 사람이 유명하다고 한들, 소개는 해야 했기에 목을 가다듬으려 했지만, 서괴가 먼저 선수를 쳤다.
“강호 동도들에게 서괴라 불리는 추비룡이라 하오.”
“후괴 철지탁이오.”
“우리 두 사람은 정의맹의 일에 힘이 되고 싶어 찾아왔소.”
시후의 생각과 달리, 쌍괴의 선택은 정면돌파였다.
덕분에 파급력은 굉장했다.
두 사람이 얼굴을 보였을 때보다 정론각 내부는 더욱 시끄럽게 변했다.
대다수가 보이는 반응은 ‘왜?’ 였다.
그도 그럴 것이, 쌍괴가 녹림과의 일에 끼어든 건, 그들이 생각하기에 단순한 사고에 불과했으니깐.
“일평생을 제멋대로 살아온 두 분께서 왜 정의맹이라는 족쇄를 차려고 하시오?”
비아냥대는 질문에 화가 날 법도 했다.
아니, 화를 낼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두 사람은 마음을 굳게 다지고 온 듯 미동조차 없었다.
“우리의 목숨을 구해 준 여인이 있었소. 그리고 그 여인은 죽고 난 뒤, 세상에 홀로 버려진 아이가 있소. 우린 그 아이에게 부끄럽지 않은 보호자가 되고자 하오.”
“다른 사람의 시선을 생각지 않고 강호를 종횡하던 우리지만, 아이가 그 모습을 보고 배울 게 무엇 있겠소? 이제라도 의를 행하고 협을 세우겠소.”
서괴와 쌍괴는 미리 준비해 둔 듯한 말을 꺼냈다.
시후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아직 불편한 시선은 끊기지 않고 있었다.
그 시선들 속에서 정진 대사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시선을 모았다.
“일단 두 시주의 말씀은 잘 들었습니다.”
이곳의 가장 웃어른은 팔황이지만, 정의맹의 중심이 되는 사람이 정진 대사였다.
소림의 방장이며 정의맹의 구심점인 정진의 의견은 어중간한 열 사람의 의견보다도 중요했다.
그는 짧은 침묵으로 긴장감을 잔뜩 끌어 올린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앉을 자리가 없군요.”
그와 동시에 몇몇의 입가에 웃음꽃이 피었다.
쌍괴의 표정이 굳어지려 했지만, 그의 말은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오늘은 서 있으셔야 할 거 같습니다. 다음번에는 자리를 준비해 드리지요.”
- 165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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