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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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화 마교 (5)
화답하듯 쏘아 올려진 신호탄의 거리가 가깝다고 한들, 버텨야 한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었다.
“자네가 앞에 서게! 난 기회를 엿보겠네!”
추나행은 당당히 뒤로 빠지겠노라 선언했다.
시후는 그런 그를 향해 욕을 한바탕해 주려 했지만, 혈랑은 그 틈마저 주지 않았다.
그의 양손이 번뜩였다.
“건곤권(乾坤圈)이다!”
어떤 식으로 공격하는지 물어보려는 찰나, 혈랑은 직접 알려 주겠다는 듯 아래로 뛰어내리며 왼손을 쭉 뻗었다.
빠르다.
생각보다 더.
시후는 바짝 끌어당겼던 창을 급히 옆으로 휘둘렀다.
챙!
건곤권의 무게는 기껏해야 두 근을 넘기기 힘들 터.
하지만, 원하는 방향으로도 튕겨 내지 못했다.
게다가 미세하게나마 몸이 뒤로 밀렸다.
무기에 실린 힘의 차이가 터무니없이 큰 것이다.
아무리 급히 휘두르느라 내공을 제대로 싣지 못했다곤 하지만, 못해도 시후보다 두 수는 더 위였다.
아니, 그보다 더 큰 격차가 존재할지도 모른다.
상대 또한 전력을 다한 게 아닐 수도 있으니 말이다.
혈랑은 바닥에 내려섬과 동시에 튕겨 나온 건곤권을 낚아챘다.
잠시 공격이냐 수비냐를 두고 고민했지만, 이내 양발을 어깨보다 조금 넓게 벌린 뒤 팔을 가볍게 늘어트렸다.
동시에 앞으로 달려드는 혈랑.
“붕악굴천!!”
혈랑은 시후가 앞으로 내지르는 창을 보더니, 건곤권을 교차시켰다.
순간, 시후의 팔에 소름이 돋았다.
자운유성창을 급히 뒤로 잡아당기며 뒤로 도약했다.
판단은 틀리지 않았다.
건곤권은 안에 월아(月牙)라는 보조 칼날이 있기는 하지만, 전체적으로 본다면 가운데는 비어 있다.
혈랑은 정면으로 받아 낼 듯하더니, 그 사이로 붕악굴천을 흘려보냈다.
물러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지만, 혈랑은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땅에 내려서기가 무섭게 건곤권이 날아들었다.
그와 동시에 앞으로 쇄도하는 혈랑.
순간 저울질을 시작했다.
어느 쪽이 더 위협적인가.
결론은 금방 내려졌다.
“핫!”
시후는 ‘승천호’에 이어서, ‘와룡등천’으로 초식을 펼쳤다.
그 사이 좌측에서 날아오는 건곤권은 시후의 뒷덜미를 향했다.
그대로 둔다면 목이 잘려나가겠지만, 혈랑을 상대하는 건 시후 혼자만이 아니다.
“어딜!”
추나행이 시후의 의도를 파악한 듯 날아드는 건곤권을 올려 찼다.
그와 동시에 자운유성창과 혈랑의 손에 들린 건곤권이 부딪혔다.
바닥에 그려진 깊은 홈.
디딤이 좋았기에 망정이지, 뒤로 두세 발짝 물러나도 이상하지 않았다.
혈랑은 그 기세를 몰아 좌수를 휘둘렀다.
시후는 힘을 주어 건곤권을 밀어냄과 동시에 바닥을 굴렀다.
흔히 ‘나려타곤(懶驢打滾)’이라 부르는 이 행동은 무림에서 금기시되었다.
부끄러움의 문제가 아니었다.
땅을 구른다는 것은, 다음 공격에 무방비하게 노출됨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물론, 시후가 혼자였다면 그럴 것이다.
건곤권을 발로 차낸 추나행이 허공에서 몸을 뒤집었다.
그의 발끝에서 달빛이 쏘아졌다.
시후를 향해 재차 손을 휘두르려던 혈랑은 좌수를 휘둘러 그의 야월각(夜月脚)을 쳐 냈다.
그와 동시에 혈랑의 몸이 뒤로 튕겨 나갔다.
추나행의 표정이 얼떨떨하게 변했다.
“어? 봐, 봤느냐? 이게 바로······.”
그가 우쭐거리다 말고 입을 닫았다.
하지만, 혈랑은 추나행의 야월각을 이용했을 뿐이었다.
혈랑은 뒤로 튕겨 나가면서, 조금 전 추나행이 걷어 냈던 건곤권을 회수했다.
“잘 보이네요.”
추나행의 귓불이 붉어졌다.
“크흠, 건곤권을 쓰는 놈들은 보통 적수공권(赤手空拳)에도 능한 법이다. 조금 전처럼 건곤권을 쥐고 있지 않은 손도 유의해야 하는 법이지.”
“뒤에서 말로만 설명하지 말고 직접 몸으로 보여 주시지 그래요?”
“내 추혼비각이 아무리 대단하다고 한들, 녀석의 건곤권의 움직임을 따라갈 수 있을 거 같진 않구나.”
시후가 ‘아니라고 할 수도 있지 않냐’라고 말하려는 찰나, 혈랑이 회수한 건곤권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왼손은 등 뒤에 숨긴 채로.
“내가 오른손을 맡으마!”
혈랑의 건곤권을 날려 보낸 전력이 있어서일까.
추나행은 기세등등하게 외쳤다.
덕분에 시후는 등 뒤로 숨긴 왼손에 집중할 수 있었다.
혈랑이 손목을 비틀어 건곤권을 날렸다.
내공에 회전력이 가미되자, 건곤권은 무시무시한 소리를 내며 날아왔다.
단순히 날아오는 공격이라면 받아치지 못할 게 없었다.
추나행이 이전과 똑같이 건곤권을 걷어차려는 순간, 혈랑의 오른손이 등으로 향했다.
“뭐······.”
등 뒤에서 나온 그의 오른손에는 건곤권이 들려 있었다.
건곤권이 재차 날아들었다.
시후가 급히 창을 내지르려 했지만, 추나행이 허공에서 몸을 틀어서 재차 건곤권을 차 냈다.
그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지만, 시후의 얼굴에는 다급함이 어렸다.
혈랑이 쌍장(雙掌)을 휘두른 것이다.
그것도, 추나행을 향해서.
“피해!”
허공을 박차고 몸을 노닌다는 곤륜의 ‘운룡대팔식’이나, 구름 위를 유영한다는 무당의 ‘제운종’이 아닌 이상, 공중에서 자유로울 순 없었다.
그건 추나행도 마찬가지였다.
시후가 급히 그의 앞을 가로막으려 했지만, 막아 낸 빛줄기는 하나에 불과했다.
혈랑의 왼손에서 쏘아진 새하얀 빛무리가 추나행의 가슴을 그대로 강타했다.
“커흑!”
“추 장로님!!”
그는 짧은 비명을 남기곤, 족히 오장 거리를 날아가 담벼락에 틀어박혔다.
무너진 담벼락은 마치 처음부터 석분(石墳)이었던 것처럼 변했다.
자운유성창을 붙잡은 시후의 두 손도 저릿할 정도의 공격이었다.
당장 절명하지 않았다고 한들, 무언가 조처를 하지 않는다면 곧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혈랑은 시후를 지긋이 바라보다가 무너져 내린 담벼락을 흘겨보았다.
시후는 그 시선의 의미를 깨달았기에 입술을 깨물었다.
선택을 강요하고 있었다.
추나행을 살릴 것인가.
아니면, 같이 죽을 것인가.
시후가 추나행의 곁으로 간다면 혈랑은 독마를 도와 백리은을 죽일 것이다.
“그럴 순 없지.”
시후가 자운유성창을 들어 올리자, 혈랑의 손이 이전보다 훨씬 새하얗게 물들었다.
알 수 있었다.
저 손이 곧 붉게 물들 것을.
“등룡적출! 분혼파쇄! 파천도래!!”
선수가 필승은 아닐 테지만, 시간을 벌 수 있을 것이다.
시후는 내공을 아낌없이 쏟아부었다.
한 번 창을 휘두를 때마다 단전의 공허함이 커졌다.
얼마나 미친 듯이 내공을 소모했냐면, 고작 초식 다섯 개를 펼쳤을 뿐인데 이 갑자가 넘던 시후의 내공이 어느새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시후는 호흡을 고르며 창을 늘어트렸다.
단 한 초식.
마지막 한 초식을 위해 내공을 아껴놨을 뿐이다.
‘들어와라.’
자운유성창을 붙잡은 손가락이 간질거렸다.
혈랑은 시후를 한차례 훑어보더니 자세를 낮췄다.
하지만, 그는 앞으로 달려드는 대신 몸을 돌렸다.
지금 죽이지 않아도 상관없다는 듯이 말이다.
“붕악굴천!!”
혈랑을 놓아 줄 수 없다는 생각이 시후에게 조급함을 불러왔고, 그 조급함은 마지막 남은 내공을 쥐어짜게 했다.
그 공격이 적중했다면 좋았겠지만, 혈랑은 공격이 날아올 걸 짐작이라도 한 듯 몸을 돌려 막아 냈다.
그는 비틀거리는 시후를 향해 손을 살짝 털었다.
퍼엉!
가죽 터지는 소리와 함께 시후는 뒤로 날아갔다.
자운유성창이 혈랑의 기운을 상쇄시켜 준 덕분에 치명상은 아니었다.
시후는 땅을 구르다가,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혈랑은 시후를 향해 재차 손을 휘두르려다 말고, 돌연 옆으로 굴렀다.
콰과과광!!
조금 전까지 그가 서 있던 자리에 긴 고랑이 패였다.
“이걸 피해?”
익숙한 목소리.
시후는 당장 바닥에 주저앉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직접 눈으로 보기 위해 고개를 들었다.
혈랑을 내려다보는 냉랭한 표정이 그토록 반가울 수 없었다.
“검후.”
검후의 얼굴을 보자마자 긴장이 풀렸다.
하지만, 아직 할 일이 남아 있었다.
아직 늦지 않았길 바라며 추나행이 쏘아진 곳으로 다가갔다.
시후는 가장 위에 쌓인 돌부터 차근차근 걷어 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추나행의 팔이 보였다.
정신을 잃는 와중에도 머리를 끝까지 보호한 듯했다.
손목을 붙잡아 보니, 천만다행으로 맥이 뛰고 있었다.
하지만, 당장이라도 끊어질 듯 한없이 약했다.
“여기서 뭐 하나?!”
시후는 뒤에서 들려온 성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다소 낯익은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분명 검후와 함께 신강 가장 북쪽으로 떠났던 인물이다.
곡진이라 했던가.
시후가 다급히 도움의 손짓을 보내자, 그는 뒤편의 싸움을 힐끔거리면서도 다가왔다.
무너진 돌무더기를 내려다본 그의 눈이 커졌다.
“나행!!”
“살아는 있습니다.”
조심스럽게.
하지만, 신속하게.
두 사람이 함께 움직이자 돌은 순식간에 치워졌다.
상태는 안 좋았다.
생각보다 더.
고개를 푹 숙인 추나행의 입에서 흘러나온 검붉은 피가 이미 앞섶을 흥건히 적신 뒤였다.
“어떤가요?”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만큼 절망적이라는 건가.
시후는 안일했던 자신의 행동을 욕했다.
독마와 혈랑이 마교를 떠났다는 걸 알자마자 연락을 취해야 했었다.
혈랑의 무공 수위가 이 정도일 줄 몰랐다는 건 변명이다.
어쭙잖은 실력이었다면, 왜 독마와 단둘이 보냈겠는가.
뒤를 돌아보니, 혈랑은 검후를 상대로 건곤권이 없음에도 아직 버티고 있었다.
“대환단이라도 있으면 모를까······.”
곡진은 고개를 푹 숙이며 힘없이 중얼거렸다.
소림의 ‘대환단’.
무림인이 복용하면 일 갑자의 내공을 얻으면, 일반인이 먹으면 평생을 무병장수한다는 소림의 보물.
개방에서 구하려 든다면 못 구할 것도 없었다.
소림에 사정을 설명한다면 내어줄지도 모른다.
하지만, 숭산은 멀고 추나행의 죽음은 가까웠다.
시후는 자리에 털썩 주저앉으며 고개를 돌렸다.
차마 추나행을 쳐다볼 용기가 안 났으니깐.
시후의 눈에 혈랑의 건곤권에 반 토막이 난 현판이 눈에 들어왔다.
그 현판을 바라보는 시후의 눈이 점차 가늘어졌다.
잠시 후, 시후는 곡진에게서 등을 돌린 채 품을 뒤졌다.
그리곤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추나행을 바라보고 있는 곡진의 어깨를 잡아 흔들었다.
“이거! 이거!!”
시후는 손에 들린 목함을 그의 얼굴로 들이밀었다.
곡진은 자신의 뺨을 짓누르는 목함을 밀어냈다.
하지만, 시후는 그의 얼굴이 구겨지든 말든 재차 들이밀었다.
“뭐 하는 짓인가!”
“이거요!!”
“이게 뭐라고!”
곡진이 목함을 낚아채며 바닥으로 던지려 했다.
“대환단!”
시후의 다급한 외침에 그의 손이 멈췄다.
그는 떨리는 동공으로 목함과 시후를 번갈아 바라봤다.
“대환단. 대환단이 그 안에 있습니다.”
“갑자기 대환단이라니? 대환단이 누구 집 개 이름도 아니고······.”
시후는 급히 손을 저으며 그의 말을 끊었다.
“남궁세가에서 받은 물건입니다.”
곡진은 시후의 말을 듣고, 목함을 부술 듯 거칠게 열었다.
뚜껑만 열었을 뿐인데 청량하면서도 그윽한 향이 흘러나왔다.
“어, 어떻게?”
“그걸 물을 시간에 빨리 먹여요!”
시후가 버럭 소리를 지르자 곡진은 바로 추나행의 옆에 앉더니 그의 목을 받쳤다.
그는 목함을 바닥에 조심스레 내려놓곤 추나행의 혈도 몇 군데를 짚었다.
추나행이 재차 각혈을 토해냈다.
곡진은 피로 얼룩진 그의 입을 억지로 벌린 뒤 바로 대환단을 집어넣었다.
저 스스로 넘기지 못할 게 당연했지만, 곡진은 혈 이곳저곳을 두들기며 강제로 삼키게 했다.
곡진은 곧바로 추나행을 앉힌 뒤, 그의 등에 장심을 가져다 댔다.
그가 따로 말은 안 했지만, 시후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당장에 주저앉고 싶은 마음을 뒤로 한 채 자운유성창을 들어 올렸다.
곧 등 뒤에서 뜨끈뜨끈한 열기가 뿜어져 나왔다.
시후는 반으로 쪼개진 ‘막안’과 ‘객잔’이라는 현판을 바라보며 기도했다.
추나행이 다시 일어나길.
그가 검후라는 안전장치를 마련해 주었듯, 대환단이 그의 목숨을 구해 주는 안전장치가 되어 주길.
- 163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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