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157화 준비 (3)
넓은 정론각에 의자 몇 개가 더해졌다.
그리 많이 놓인 것도 아니다.
다 합쳐도 열 개 미만.
하지만, ‘팔황’이라는 이름에는 있는 것만으로도 정론각을 비좁게 만드는 능력이 있었다.
마지막 빈자리마저 채워지자, 정진 대사는 자리에 앉은 채로 입을 열었다.
“다 왔으니 시작하시지요.”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누군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시선을 모았다.
시선은 자연스레 그에게로 옮겨갔다.
봉두난발에 허리에 매달린 거무튀튀한 흑죽(黑竹).
시후가 개봉에서 만났던 용두방주 구양두였다.
“이렇게 모인 이유를 짐작하는 분도 있겠지만, 아직 모르는 분들도 있을 테니 간략하게 설명해 드리겠소이다. 이번 일은 각기 강서와 호북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소. 녹림이 뭉침과 동시에 관을 위협하는 놈들이 나타났고······.”
그는 그간 있었던 일들을 최대한 간결하게 늘어놓았다.
자금성이 발칵 뒤집힌 사건부터, 최근 사천에서 있었던 일까지.
그는 모든 이야기를 늘어놓은 뒤, 앞에 놓인 찻잔을 들어 잠시 목을 축였다.
“개방과 하오문과 당가와 적극적으로 협력하여 놈들의 꼬리를 붙잡는 데 성공하였소. 놈들의 꼬리는 살짝이라도 잡아당기면 끊어질 듯 약했기에, 최대한 조심스럽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소이다. 그러는 와중에 놈들은 꼬리를 말기 위함인 듯 웅크리기 시작했소.”
“숨었단 말이오?”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곤륜의 우송 진인이 급히 물었다.
“정확히는, 숨어들려고 했다라는 표현이 맞을 것이외다.”
사방에서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들려고 했다’라는 말은 곧, 그렇게 하지 못했다는 것과 같았으니깐.
“다만, 아쉽게도 놈들은 근거지로 돌아가지 않았소. 다음 해 봄을 기다리는 뱀처럼, 안가에 자리 잡고 웅크렸을 뿐이오.”
한숨은 탄식으로 바뀌었다.
“본래, 감시라는 건 지켜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들킬 확률이 높아지오. 그렇게 걱정이 소복소복 쌓여 가는 찰나, 익명의 제보자가 한 가지 제안을 했소이다.”
구양두의 시선이 잠시 시후를 스쳐 지나갔다.
지극히 짧은 시간이었기에 몇몇을 제외하면 눈치채지 못했지만, 가장 상석에 앉은 여섯 사람은 그의 눈빛이 닿은 곳을 정확히 짚었다.
“개인을 감시할 게 아니라 단체를 감시해야 하지 않겠냐고 했소. 그 말을 듣자마자 직시하기 싫어했던 현실을 마주하게 되었소.”
구양두는 잠시 말을 끊으며 정론각 내부를 훑어봤다.
“마교.”
대부분 몸을 흠칫 떨었다.
“당가를 공격하기 위해 동원된 인원은 이백에 달하는데, 이만한 인원을 중원에서 키웠다면 눈에 띄지 않았을 리 없소.”
구양두는 단언에 가까운 말을 내뱉으며 지도를 펼쳤다.
지도는 중원이 아니라 그 주변이 그려져 있었다.
“북녘의 땅은 놈들이 있을 만한 곳이 못 되오. 마교 놈들이 숨어 지내기엔 그곳은 너무나도 확 트여 있으니 말이오.”
그는 지도를 짚으며 재차 시후를 힐끔거렸다.
“이번에 이백이나 되는 인원을 보낸 것으로 보아, 족히 수천에 달하는 무인을 키웠을 것이오.”
그의 말에 아무도 반론하지 않았다.
무림인 가운데 절정의 경지에 다다를 수 있는 무림인은 스무 명 중 한 명꼴이다.
물론, 구파(九派)처럼 재능 있는 자들을 뽑아서 키웠다면 백이면 백 오를 수 있을 테지만, 숨어 지내는 마교의 특성상 그냥 무작정 가르쳤을 것이다.
“수천의 무인을 키우는 데 들어가는 돈은 상상을 초월할 테지만, 그들이 끝까지 무공만을 익히진 않았을 것이오.”
초반 성취가 빠른 마공을 익혔다면 일류까지는 엄청난 속도로 성장한다.
하지만, 마공을 익힌 자들이 최초로 맞닥뜨리는 ‘절정’이라는 벽은 일반적인 무공을 익혔을 때보다 몇 배나 두껍다.
마공을 익혔다면 그 벽을 못 넘는 자들이 부지기수일 터.
그들은 농사를 짓게 하던지 다른 쪽으로 굴렸을 것이다.
일류에 다다른 무인이 농사를 짓는다.
현실적으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그만한 무공을 지녔다면 차라리 어디 표국에 몸을 의탁하는 게 나을 테니까.
하지만, 마교라면 가능하다.
아니, 죽지 않으려면 해야 할 것이다.
“세외에서 수천이 넘는 인원이 자급자족하며 지낼 만한 곳은 그리 많지 않소이다. 게다가 수천이 아니라 만이 훌쩍 넘는다고 가정한다면 더더욱.”
구양두는 주머니에서 목탄을 꺼내 들더니, 지도 몇 곳에 동그라미를 치기 시작했다.
“이곳을 확인하면······.”
그는 뒷말을 아꼈다.
말하지 않아도 다들 알아차리기에 모자람이 없으니 말이다.
게다가 지도에 그려진 동그라미의 숫자는 우연하게도 딱 여섯이었다.
“이 늙은이들을 불러들인 이유는 그 때문인가?”
제갈마혁의 말에 구양두는 허리를 숙였다.
“개방은 앞장서 피를 흘리는 걸 두려워하진 않지만, 단순히 위치를 알아내기 위해 흘리는 피는 무의미하다고 생각합니다. 최소한, 정말 최소한의 정보는 얻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무리 개방의 방주라 할지라도, 팔황의 이름값은 그보다 무겁다.
게다가 하나도 아니고 여섯이다.
구양두의 허리는 펴질 줄을 몰랐고, 정론각 내부엔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정진아, 벽곡단을 넉넉히 챙겨야겠구나.”
“준비하겠습니다.”
소림 방장인 정진에게 말을 놓을 수 있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그리고 정론각 내부에서 정진이 저토록 공손하게 대답할 인물은 단 한 명이다.
명일.
당대의 천하제일을 논할 때 어김없이 등장하는 인물이며, 천하제일권(天下第一拳)임을 부정할 수 없는 권황(拳皇).
“내 것도 부탁함세.”
그를 이어 공진이 답했다.
“육포는 질기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그리고 제갈마혁까지.
최소한 절반이다.
“구천종주는 이번 일이 끝나고 재개하는 게 좋겠군.”
“화정을 잘 부탁하겠습니다.”
검후와 금정신니까지.
남은 건 백리은 하나였다.
너도나도 동의하는 분위기 속에 그가 거절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는 뚱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못 갈 건 없지.”
그제야 구양두의 허리가 펴졌다.
“감사합니다.”
“그보다, 아무것도 모르는 늙은이들을 혼자 보낼 건 아니지?”
“그야 물론입니다. 한 분마다 개방의 장로가 하나씩 붙어서 함께 움직일 겁니다.”
“흐음······.”
구양두의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백리은은 제 수염을 비비 꼬았다.
잠시 후, 그의 시선이 정론각 한쪽을 향했다.
아닐 거다.
아니어야만 한다.
시후는 그의 시선을 마주하며 짧게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야속하게도 백리은의 입가에는 오묘한 미소가 맺혔다.
* * *
마교의 근거지를 찾아내며 정보를 캐내겠다는 핑계로 팔황을 끌어들이는 건 좋았다.
조금이라도 더 빠르게 전력을 갖추는 게 나쁜 결과를 가져올 리는 없으니깐.
구양두의 선견지명도 훌륭했다.
시후의 두루뭉술한 설명을 토대로 추측한 여섯 곳 중에는 분명 마교의 총타가 있었으니깐.
하지만, 최악도 이런 최악이 없다.
마교로 직접 가는 건 시후의 계획에 없었으니깐.
“하······.”
“젊은 녀석이 한숨을 왜 그리 쉬어대는고?”
“안 쉬게 생겼어요?”
백리은이 고른 곳은 여섯 곳 중 가장 서쪽에 치우친 천산산맥(天山山脈)이었다.
정확히는 그 천산산맥의 모봉(母峰)이라고 할 수 있는 천산(天山)에서 400리 정도 떨어진 지점이었다.
그곳에는 천산산맥에 둘러싸인 제법 커다란 호수가 있고, 그 호수를 따라 흐르는 강도 있었다.
사람이 살기에 부족하지 않은 환경.
하지만, 천산산맥을 지나야 다다를 수 있는 극악한 곳이기도 했다.
시후는 뒤를 돌아보며 한숨을 푹 쉬었다.
“이제 반의반을 지났다니······.”
지금 막 감숙성 경계를 지났으니, 정말 반의반을 지났다.
천무를 읽으며 했던 소리가 떠올랐다.
‘그만한 거리를 걸어왔으니 마교가 지독한 것이지.’
직선거리로만 하더라도 칠천 리가 넘는다.
사람이 하늘을 나는 새가 아닌 이상 직선으로 움직일 수 없었다.
가야 할 길은 대략 구천리.
천산산맥을 넘어야 한다는 점에서 난이도는 그보다 더욱 높았다.
그리고 하필이면, 구양두는 이쪽에 추나행을 붙였다.
“옥문관까지 가면 걸어야 할 것입니다.”
“흘흘, 말보단 내 다리로 걷는 게 편한 몸이니 걱정 말거라.”
백리은의 대답에 추나행도 히죽 웃었다.
그 또한 마찬가지였다.
아니,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을 것이다.
일전에 합비에서 제남까지 동행했을 때, 추나행은 혼자서 뛰어가지 않았던가.
이번에는 부득이하게 말을 탔지만, 그로서는 말을 타는 게 썩 내키진 않았을 것이다.
“말을 팔아 치운 다음에 그 돈으로 육포와 옷가지 등을 사고······.”
추나행은 이후의 계획을 상기하듯 중얼거렸다.
시후는 입맛을 다시며 타고 있는 말을 바라봤다.
일전에 사들인 흑마는 소림에 맡겼다.
옥문관에서 말을 판다면 제값의 절반도 받지 못할 것이기에 저렴한 말을 산 것이다.
시후는 말에 두었던 시선을 다른 쪽으로 옮겼다.
대상은 백리은.
시후의 시선을 느꼈는지, 백리은이 말 위에서 몸을 슬쩍 돌려 바라봤다.
“할 말이 있느냐?”
“왜 하필 절 끌고 오셨죠?”
“흘흘, 눈빛이 마음에 들어서라고 하지 않았더냐?”
“반항적인 눈빛을 좋아하신다면 열댓 살 먹은 손주들을 좋아하시겠네요.”
“손주를 싫어하는 할아버지도 있을까?”
항상 이런 식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끌고 올 이유가 없었지만, 물어봐도 도통 대답해 주지 않았다.
“조금 빠르게 말을 몰면 내일이라도 난주에 도착할 수 있을 텐데, 어쩌시겠습니까?”
“그 반대의 경우는 어찌 되느냐?”
“내일까지 산에서 잠을 청해야 합니다.”
“추후 산에서 먹고 잘 일이 많을 텐데, 하루를 더 경험할 필요는 없겠지.”
백리은의 대답에 추나행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 옆구리를 걷어찼다.
그가 올라탄 말이 뽀얀 먼지를 일으키며 내달렸고, 시후와 백리은이 그 뒤를 쫓았다.
『네가 펼치는 무공을 보았다.』
시후는 갑자기 들려온 전음에 깜짝 놀라 말고삐를 놓칠 뻔했다.
기의 흐름조차 느끼지 못했을 정도로 은밀했으니깐.
바로 고개를 돌려 백리은을 바라봤다.
왜 전음을 쓰는 것일까.
물어보고 싶었지만, 추나행에게 안 들킬 정도로 섬세하게 전음을 날릴 자신이 없었다.
그런 시후를 이해한다는 듯 백리은은 고개를 짧게 끄덕였다.
『소림의 아이와 비무할 때, 봉으로 창술을 펼칠 때는 기세가 형편없었는데, 그 창을 쥐고 금정의 제자와 겨룰 때는 완전히 딴판이더구나.』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 것일까.
시후는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혹시, 네가 펼치는 무공이 창에 영향을 받은 것이더냐?』
놀랍다.
백리은은 시후가 무공을 펼치는 걸 단 두 번 보았을 뿐이다.
분명 조가창식은 자운유성창으로 펼칠 때 위력이 배가된다.
그 사실을 알아차린 건, ‘일대종사’라 할 수 있는 그의 능력 때문일 것이다.
시후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백리은의 입가에 미소가 짙어졌다.
그 이후로 그의 질문은 계속되었다.
누구의 무공이냐부터 시작해서, 초식에 관한 질문까지.
물론, 전음으로 답할 수 없으니 고개를 젓거나 입 모양으로 답을 대신했다.
다만, 초식에 관해 물을 때 시후는 그 어떤 반응도 보이지 못했기에 그는 혀를 찼다.
『쯧쯧, 반푼이로군. 혹시 스승 없이 배웠더냐?』
백리은의 물음에 시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눈동자가 커졌다.
스승 없이 배운 무공이라면 그럴 수도 있다는 듯, 곧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스승이 누구더냐? 너만 한 인물을 키웠다면 제법 명성이 있을 터.』
고개를 저었다.
백리은이 인상을 찡그리다가 돌연 눈을 크게 떴다.
『혹, 스승이 없더냐?』
있을 턱이 있나.
시후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고, 그 뒤로 백리은의 질문은 끊겼다.
그의 전음이 다시 들려온 건, 반 시진이라는 긴 시간이 흐른 뒤였다.
『날 스승으로 섬긴다면 네 무공을 손봐 주마.』
- 158화에 계속 -
<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