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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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화 팔진도해법 (3)
당모준.
사천당가의 가주이자 신의의 조카.
시후의 머릿속에 당모준에 관한 정보는 한 줄이 전부였다.
“선유는 좀 어떤가?”
“건강하십니다.”
“직접 찾아가서 위로의 말을 전하지 못한 게 못내 마음에 걸렸는데 다행이구나.”
“가주님을 비롯해 많은 분이 걱정해 주신 덕분입니다.”
당모준은 남궁천과 짧은 대화를 나눈 뒤, 시후를 건너뛰고 제갈려를 바라봤다.
“노야의 속을 그만 태우고 어서 집으로 돌아감이 좋을 것 같구나.”
“이번에 돌아가면 꼼짝없이 진법만 붙잡고 있을 텐데, 꽉꽉 채워서 놀아야죠.”
“하필이면 이런 망종이 제갈세가의 진법을 잇게 된다니······. 무후께서 무덤을 박차고 나올 노릇이구나.”
“저라도 있어서 다행이라면서 머릴 쓰다듬어 주시겠죠?”
제갈려는 한마디도 지지 않고 받아쳤다.
발언이 다소 과하지 않나 싶었지만, 당모준은 피식 웃으며 제갈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요 녀석, 변함없구나.”
“헤헤.”
보아하니, 두 사람은 개인적으로 아는 눈치다.
시후의 눈에 담긴 의문을 읽었는지 당모준은 살짝 웃으며 바닥을 가리켰다.
“이 땅에서 무후가 꿈을 펼치지 않았는가? 제갈세가에서 사천으로 자주 오는 편이지. 그보다 인사가 늦었군. 당모준일세.”
“차시후라고 합니다.”
“알지. 숙부께서도 워낙 언급하기도 했지만, 근래 가장 유명한 인사 아닌가?”
시후를 바라보는 당모준의 눈빛에도 호의가 가득했다.
“좀 더 대화를 나누고 싶지만, 아쉽게도 가야 할 곳이 있어서 이만 가 보겠네. 하루를 묵더라도 편히들 쉬고 가게.”
당모준은 바쁜 와중에 들린 것인지 대답을 듣기도 전에 걸음을 옮겼다.
“아마 회의 중에 오셨을 것이오.”
“당가에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남궁천의 물음에 당패철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최근 운남에서 채집꾼들이 실종되는 일이 잦아서, 조사단을 꾸리려 하고 있소.”
당가에서 만드는 독의 재료는 당가 인원들만의 노력으로 만들어지지 않았다.
핵심이 되는 주재료들은 직접 구하긴 하지만, 적당한 부재료들은 구매하는 편이었다.
물론, 그마저도 정보 유출을 우려하여 필요 없는 물품들을 사들이기도 했다.
문제는 이 부재료를 구할 수 있는 인력이 그리 많지 않다는 점이었다.
독을 다루는 일은 위험했다.
그 재료를 구하는 것 또한 만만치 않은 위험이 동반된다.
하지만, 당가처럼 철저한 곳에서 어중이떠중이에게 납품받을 리는 없었다.
“사고가 아닌가 보죠?”
남궁천의 질문에 당패철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실종된 인원만 다섯이네. 덕분에 다른 채집꾼들도 겁을 먹어서 산을 타지 않는 실정이지.”
“여간 곤란한 일이 아니겠습니다.”
“곤란한 수준이 아닐세. 하필이면······.”
당패철은 말을 꺼내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말하긴 곤란한 듯한 내용이었기에 다들 못 들은 척 넘어갔다.
세 사람은 그의 안내에 따라 휴심각에 짐을 풀곤 곧바로 당가를 빠져나왔다.
대설산을 맨몸으로 오를 순 없으니 말이다.
* * *
대설산은 하나의 봉우리가 아니라, 성도 북서쪽 250리부터 펼쳐진 드높은 산들을 지칭했다.
사월의 중순을 지나고 있었지만, 봉우리 곳곳은 구름이 내려앉은 듯 새하얗게 물들어 있었다.
“와······.”
제갈려가 탄성을 터트렸다.
하지만, 감탄이 아니라 탄식의 탄성이었다.
높고 가파르다.
가히 화산과 비견될 만한 수준.
시후도 끔찍한 경험이 떠올랐다.
“그때 쌍괴가 낙안봉 중턱에 날 버려 뒀었지······.”
“낙안봉?”
“아, 예전에 쌍괴가 절 낙안봉에 내버려 두고 갔거든요. 이걸 따지고 드는 걸 잊고 있었네요. 그때 어찌나 고생하면서 내려갔는지······.”
시후의 말에 남궁천은 뭔가 깨달은 듯 손뼉을 쳤다.
“그럼, 우리가 화음현에서 만났을 때가 쌍괴 어르신들과 헤어진 다음이었나?”
“그렇죠.”
“하하, 이거 쌍괴 어르신들에게 감사 인사라도 드려야겠군. 차 아우를 진즉에 화음현까지 내려다 줬다면 만나지 못할 뻔했으니 말이야.”
“······ 이야기가 그렇게 되네요?”
한없이 긍정적인 남궁천 덕분에 시후 또한 피식 웃을 수 있었다.
하지만, 제갈려는 웃을 수 없었다.
두 사람과 달리 앞에 펼쳐진 드높은 산들을 오르다간, 하루는커녕 반나절도 가지 못해서 쓰러질 테니까.
* * *
“······ 얼마나 더 가야 해?”
“저 봉우리만 넘으면 될 거 같은데?”
“그 말 조금 전에도 했잖아······.”
“편하게 오르면서 투덜거리긴.”
“야, 지나가는 사람들한테 물어봐! 누가 이게 편하겠어?”
제갈려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시후는 익숙하다는 듯 약지로 귀를 후볐다.
“여기에 지나가는 사람이 어딨어? 그리고 쌩쌩한 걸 보니 편한 거 맞네.”
시후의 심드렁한 대답에 제갈려는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한 대 때려 주고 싶다는 표정이었으나, 시후와 남궁천에 비하면 편하게 오르는 게 맞았다.
두 사람이 번갈아 가면서 제갈려를 앞에서 이끌어 주고 있었으니깐.
다만, 제갈려는 허리와 상체에 줄을 묶었기에 흡사 개처럼 끌려가는 듯했다.
“내 존엄한 인권이······.”
제갈려는 인권이 짓밟히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진짜 개처럼 기어오르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시후는 서괴가 가르쳐 준 곳으로 향하곤 있었지만, 사방을 둘러봐도 산이고 그곳이 이곳 같고 저곳이 그곳 같았다.
“그보다 하루 치 거리라고 했는데, 돌아가면 수염을 잡아 뜯어야겠네요.”
“하하. 추 어르신에게 하루 치라면, 우리에겐 이틀 아니겠는가?”
“누구에겐 사흘이겠지만요.”
시후가 뒤에서 끌려오다시피 하는 제갈려를 노려봤다.
서괴에겐 하루 거리였을지 몰라도, 세 사람은 꼬박 나흘째 산길을 걷고 있었다.
물론, 가장 큰 이유는 제갈려의 저질 체력 때문이지만.
그것도 이제 끝이다.
아마도 이 봉우리 정상에 올라가면 나타나리라 확신했다.
아니, 그러길 바랐다.
“와!”
시후가 팔을 번쩍 들어 올리며 소리 지르자, 제갈려가 줄을 잡아당기며 스스로 정상에 올랐다.
제갈려의 붉어진 뺨이 노을을 받아 더욱 붉어졌다.
눈에는 그렁그렁 눈물이 맺혔다.
시후는 씩 웃으며 제갈려의 어깨를 두들겼다.
손바닥 너머로 제갈려의 떨림이 느껴졌다.
계속 어깨를 토닥이며 산 아래를 내려다봤다.
저 아래 팔진도해법이 있을 것이다.
시후는 제갈려의 눈을 마주치며 입을 뗐다.
“선조의 유산을······.”
“이걸 또 언제 내려가!”
* * *
내려서자마자 제갈려는 뻗었기에, 팔진도에 들어서는 건 다음 날 아침에야 시도할 수 있었다.
제갈려는 주변을 한 바퀴 빙 둘러보더니 바닥에 주저앉아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바닥에 점을 찍고 선을 그으며 알아보기 힘든 글자를 이곳저곳에 새겨 넣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가로저으며 지웠다.
제갈려는 같은 행동을 수십 차례 반복했다.
햇살이 정수리를 비출 때쯤, 제갈려는 제자리에서 펄쩍 뛰며 소리를 질렀다.
이후, 바닥에 그려놓은 알아보기 힘든 진은 지우지 않았다.
시후는 그런 제갈려의 곁으로 다가가 슬그머니 물었다.
“알아냈어?”
“자세한 건 심층에 들어가서 알아봐야겠지만, 아마 틀리지 않을 거야. 기본적으로 팔진도의 한 축은 각기 오행을 품고 있는데, 방위에 따라서 배열이 조금씩 달라진단 말이야? 여기 휴(休)를 보면······.”
“내가 알아들을 것 같으면 계속 설명해. 그것도 아니면 날 이해시키던가.”
시후의 말에 제갈려는 깔끔히 손을 털고 자리에 일어섰다.
그리곤 곧장 팔진도 안으로 들어가려는 듯 걸음을 옮겼다.
시후는 바로 팔을 붙잡았다.
“어디 가?”
“응? 정확한 건 들어가 봐야 아니깐 들어가야지.”
“혼자? 같이 가.”
“잘 모르는 진법 안에서 짐 덩어리를 달고 돌아다니는 게 얼마나 어려운 줄 알아?”
“그 말 그대로 돌려줄게. 나흘간 널 끌고 다니느라 얼마나 고생했는데?”
“장난하는 거 아냐.”
제갈려가 낯빛을 굳히며 말했지만, 시후 또한 제갈려 혼자 안으로 들여보낼 생각은 없었다.
팔진도해법을 얻는 건 자신이어야 하니깐.
팽팽한 기 싸움이 펼쳐졌다.
덕분에 중간에 끼인 남궁천의 입장만 난처해졌다.
“차 아우, 진법이라는 게 그리 호락호락한 것도 아니지 않은가? 정 안이 보고 싶다면 일단 려가 먼저 들어가서 확인한 후에······.”
“혼자는 못 보내요.”
남궁천에게 이렇게 딱 잘라 말한 적이 있었던가.
단언컨대 없었다.
그렇기에 남궁천도 더는 시후를 막아서지 못했다.
한참 동안 이어진 눈싸움의 결과는 제갈려의 패배로 끝을 맺었다.
제갈려는 깊은 한숨을 내쉬더니 나뭇가지를 주워 바닥에 선을 하나 그었다.
“딱 이 선을 넘으면, 무조건 내가 발 디딘 곳만 밟으면서 뒤따라와.”
“알았어.”
“단 한걸음이라도 이상한 곳 밟으면 나도 어떻게 될지 몰라.”
“네가 밟은 곳이 아니면 쳐다도 안 볼게.”
이후로 몇 번의 확답을 더 받은 뒤에야 제갈려는 선 앞에 섰다.
하지만, 불안한 듯 연신 뒤를 힐끔거렸다.
한참을 주저하더니 하늘을 올려다보곤 입술을 깨물었다.
“휴문과 생문으로 들어가는 게 가장 좋지만, 오시니깐 상문(傷門)으로 들어갈 거야.”
무슨 소린지 모르니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무덤덤한 시후와 달리, 제갈려는 한껏 긴장한 표정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제갈려의 왼발이 선을 넘었다.
시후도 그 뒤를 따라 발을 내딛자 뭔가 출렁이는듯한 느낌이 전해졌다.
마치 밀도 옅은 물속을 걷는 기분이었다.
[팔진도(八陳圖)에 들어왔습니다.]
[진의 휩쓸리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시후도 제법 많은 진에 들어갔었다.
신의가 있던 경격혈향진부터 시작해서 천옥무로, 산인무견, 천외별지 등등.
하지만, 그 어느 진도 이러한 경고를 띄워 준 적은 없었다.
팔진도가 얼마나 대단한 진법인지 은연중에 알 수 있었다.
“역시, 시간이······ 화가 생하고······.”
들어오기 전에야 투덜거렸지만, 진안에 들어오자마자 제갈려는 무서울 정도로 집중했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진이 출렁거리는 게 느껴졌다.
시후는 침을 꼴깍꼴깍 삼키며 뒤따랐다.
제갈려 덕분에 진의 영향을 받지 않았음에도 압박감이 느껴질 정도니, 행여나 실수로 발을 헛디뎠다간 뼈도 못 추릴 게 분명했다.
“두(杜)를 뚫어야 하니깐. 여기랑 여기를······.”
제갈려는 잠시 멈춰선 뒤, 바닥에 놓인 돌멩이 하나를 툭 건드렸다.
밀도가 한층 더 짙어졌다.
뭔가 잘못된 게 아닌가 싶어 바라봤지만, 제갈려는 거침없이 앞으로 걸었다.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밀도는 점차 짙어졌다.
시후가 부담을 느끼는데 제갈려야 오죽하랴.
한 걸음씩을 내디딜 때마다, 제갈려의 뺨에선 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나아가는 속도는 더뎌졌다.
시후는 제갈려의 상태를 살펴보곤 잠시 쉬는 게 어떻냐고 말을 꺼내려는 찰나.
제갈려가 바닥에 놓인 돌멩이를 또다시 건드렸다.
순간, 몸을 짓누르는듯한 압박감이 사라졌다.
제갈려는 소매로 땀을 닦으며 뒤돌아봤다.
“이제 경(景)을 통해서 안으로 들어갈 거야. 왼발에 들숨, 오른발에 날숨. 알겠지?”
시후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제갈려의 뒤를 따르며 지시를 충실히 이행했다.
신기했다.
왼발을 내디디면 주위가 어두워졌다가, 오른발을 내디디면 다시 밝아졌다.
무슨 원린지 도통 이해하지 못했지만, 어차피 결과만 얻으면 그만이다.
열 걸음, 스무 걸음.
어둡다가 밝아지길 반복하는 게 익숙해져서 숫자를 세는 것조차 잊었을 때.
주위 풍경이 확 바뀌었다.
- 136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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