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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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화 북방 토벌 (3)
제아무리 일신의 능력이 출중하다고 한들, 수천을 베어 넘길 순 없다.
하물며 순간적으로 대처에 실수가 있긴 했어도, 한때 중원을 지배했던 초원의 후예들이다.
수십에 달하는 인원이 목숨을 도외시하며 집요하게 달라붙었다.
놈들은 목숨을 잃었지만, 그 대가로 다른 녀석들은 거리를 얻었다.
최초로 시후가 달라붙을 수 있었던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는 멀리서 속력을 붙인 덕분이었다.
두 번째는 당연하게도, 상대방의 방심이었다.
하지만, 이제 단 한치의 접근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이 거리를 유지했다.
전속력으로 달리며 화살을 쏘아대는 그들과 달리, 시후는 자신은 물론이거니와 말에게 위협이 되는 화살도 죄다 쳐 내야 했다.
달라붙으려면 속력을 내야 하지만, 도무지 속력을 낼 수 없는 상황이었다.
결국, 시후는 중앙에 고립되었다.
전방위적으로 화살이 날아들자 이전과 달리, 지켜보는 이들의 간담을 서늘케 하는 장면이 몇 번이고 포착됐다.
귓불을 스치고 지나는 화살이라던지, 연이어 쏟아지는 화살 세례에 연신 휘청거리는 모습은 지켜보는 이들에게 불안감을 안겨 주었다.
다만, 모두 연출된 상황에 불과했다.
그들을 기다리기 위한.
“빨리도 온다.”
시후는 이들이 내려왔던 구릉을 흘겨보며 중얼거렸다.
구릉 위로 하나둘씩 사람 머리가 불쑥불쑥 올라오기 시작했다.
놈들의 뒤를 잡기 위해, 지난밤 몰래 본대에서 떨어져 나간 기병들이었다.
그들은 이전의 북원 무리가 달려왔던 길을 그대로 내달렸다.
본대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쿵, 쿵, 쿵, 쿵!
긴장을 고조시키는 북소리와 함께 여기저기 기수들이 분주히 좌우로 움직였다.
기수는 곧 부대의 움직임을 뜻했다.
기병이 뒤를 점하자, 본대는 날개를 펼쳤다.
“개(開)!”
놈들의 최대 장점은 빠른 기동전이다.
포위당하면 일방적으로 쓸려나갈 수밖에 없다.
퇴각만이 살길이다.
하지만, 놈들은 큰 짐 덩어리를 안고 있었다.
시후를 고립시킨 행동은 되려 그들에게 족쇄로 다가왔다.
“수하르 고원으로 간다!”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후는 수하르 고원이 어디에 있는지 몰랐지만, 방향은 알 것 같았다.
좌측에 있던 놈들이 이를 악물고 말머리를 돌렸으니깐.
“자, 시작해 볼까?”
맨 앞줄을 달리는 놈들은 손끝이 떨어져 나가라 시위를 당겼다.
시후도 그에 질세라 어깨를 뒤로 최대한 젖혔다.
“쏴라!”
“월광일주!”
양쪽에서 날아든 은빛과 금빛 궤적은 허공에서 부닥쳤다.
애초부터 힘의 균형은 성립하지 않았다.
“컥!”
금빛 궤적은 단말마의 비명을 만들었다.
기수를 잃은 말들은 순간적으로 땅을 굴렀다.
자욱한 흙먼지를 만들어 내며 허공에 발을 휘저었지만, 그 움직임은 지극히 짧았다.
뒤에서 달려오는 말발굽은 쓰러진 말들을 형체도 남기지 않고 무참히 짓밟았으니깐.
“파월아! 폐월암천!”
시후는 달아나는 놈들을 향해 미친 듯이 내공을 쏟아부었다.
하지만, 놈들에게 닥친 문제가 시후만으로 끝나는 건 아니었다.
더 큰 재앙은 아직 찾아오지도 않았다.
“크아아아악!”
놈들의 옆구리는 단숨에 뜯겨 나갔다.
놈들은 앞뒤로 나누어졌다.
허리가 끊어졌지만, 놈들은 어설프게 구하려 들려고 하지 않고 되려 속도를 높였다.
아쉽게도 날개가 덮이기 직전, 절반에 달하는 병력은 놓칠 수밖에 없었다.
* * *
이번에 습격을 감행한 놈들의 숫자는 고작 육천.
하지만, 단 한 명도 항복하지 않았을 정도로 모두가 각 부족의 정예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보통 대승이 아니다.
예상보다 더욱 값진 승리였다.
“······ 사망자 예순다섯에 중상자 칠백오십삼 명, 경상자 천팔백이며, 노획한······ 보고는 이것으로 마칩니다.”
피해 보고와 극히 미미한 노획 보고가 끝나자, 내부엔 묘한 기류가 흘렀다.
중요한 이야기는 끝났다.
아니, 가장 중요한 이야기가 남은 걸지도 몰랐다.
아직 시후에 처벌에 관해선 언급하지 않았으니까.
다들 총병관과 시후를 번갈아 봤다.
이번 전투에서 분명 시후는 돌발적인 행동을 했다.
단독 행동과 대열 이탈.
군법에 따르면 이는 당장 목을 쳐도 할 말이 없었다.
문제는 시후에게 단독 행동권이 있다는 점이다.
“아무리 황상께서 단독 행동을 허하셨다고 한들, 차 천호는 이번에 작전을 훼방 놓으려는 듯한 행동을 보였습니다. 이번 전투가 얼마나 중요한지는 다들 알고 있지 않습니까? 이는 단순한 전투를 망치는 것이 아니라, 크게 생각하면 불충이나 마찬가집니다!”
누군가 목소리를 높이는가 했더니, 또 그놈이었다.
총병관으로부터 좌측 세 번째에 앉은 녀석.
놈이 운을 뗐기 때문일까.
연이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건 그렇지. 엄밀히 말하면 선행 작전을 우선시하지 않고, 제 독단적인 판단으로 작전에 개입한 것 아닌가?”
“무공을 자랑하고 싶지 않았겠나? 겸사겸사 전공도 올리고 말이야.”
“전쟁을 홀로 하는 줄 아나 보군. 안하무인이 따로 없어.”
오늘 엄청난 수준의 무위를 보인 탓일까.
면전에 대놓고 욕하는 자는 없었지만, 수군거리는 목소리는 직접 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그들의 목소리는 총병관이 손을 들어 올리기 전까지 이어졌다.
“불충까지는 너무 갔군. 그건 황상의 안목을 의심하는 것이 아닌가?”
“절대 그런 뜻은 없었습니다!”
총병관의 말에 다들 안색이 새하얗게 질렸다.
하지만, 총병관은 곧바로 태도를 달리했다.
“그러나 아무리 차 천호가 독자적으로 움직일 권한을 부여받았다고 한들, 오늘 있었던 일은 확실히 과한 면이 없지 않아 있었지. 다들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가?”
“예? 아, 맞습니다! 확실히 과했다고 생각합니다.”
다들 총병관의 물음에 서둘러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에 힘을 실어 줬다.
시후는 총병관이 왜 이렇게 나오는지 의문이 들었다.
“다들 의견이 이런데, 앞으로 독자적인 행동을 취하기 전에 이야기를 나눔이 어떤가?”
하고자 하는 말은 간단했다.
‘허락받고 움직여라.’
황제가 독자적인 행동권을 부여했기에 직접 명령을 내릴 수 없으니, 이번 일을 빌미로 최소한의 고삐를 묶어 두려는 것이다.
시후는 대답하지 않고, 지긋이 총병관의 눈을 바라봤다.
“이번 일은 습격 아니었습니까? 저는 단순히 습격에 대비하기 위해 움직였을 뿐인데, 다들 말하는 걸 들어 보니, 뭔가 다른 이야기를 하시는 것 같군요.”
“그게 무슨······.”
“분명 ‘이번에 작전을 훼방 놓으려는 듯한 행동’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저는 이번 일이 작전이라는 걸 알지 못했습니다. 제가 없는 회의가 있었나 봅니다?”
이들이 시후를 탐탁지 않게 여기면서도 꼬박꼬박 회의에 불러야 했던 또 다른 이유.
시후가 고작 천호장의 위치를 받았지만, 그를 대신해서 받은 건 두 가지였다.
독자적인 행동권과 회의 참석 보장.
애당초 시후에게 이번 계획을 알려 준 적은 없었다.
공식적으론 말이다.
“아니, 분명 그 아이에게······.”
“제가 없는 회의가 있었나 봅니다?”
시후의 말에 다들 입을 꾹 다물었다.
회의 참석은 황제가 보장했다.
지금 회의가 있었노라 말하면 이 자리에 있는 자들은 모두 황명을 거역한 것이 된다.
시후를 물고 늘어지던 그자는 입술을 파르르 떨며 허공에 손을 휘저었다.
“그······ 그 작전이란 건······ 방어 작전일세! 우리 전군도독부에서 행하는 방어 작전이 있는데, 그걸 착각했지 뭔가! 익숙한 얼굴들로 이뤄져 있다 보니 그만 착각했지 뭔가? 안 그렇습니까?”
“암! 그렇고말고!”
“허허, 그러고 보니 우리 전군도독부의 인물들만 모여 있다 보니, 착각하기 딱 쉬운 환경이지.”
개수작이었다.
하지만, 시후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제가 전군도독부의 방어 작전이 어떻게 이뤄지는지 잘 몰라서 오해했나 봅니다.”
“어허, 이해했다니 다행일세. 그럼······.”
“그럼, 이번에 제가 세운 전공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지요?”
“전공······?”
“기습해 오는 놈들의 이목을 끌어 아군의 피해를 최소화하고, 도망치는 놈들의 발목을 붙잡았지 않습니까? 그 과정에서 베어 넘긴 숫자만 무려 일흔일곱이죠.”
남궁천과 제갈려는 웃음이 터질 것만 같은지 입을 틀어막았다.
그와 반대로 나머지 사람은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죄를 물으려는 자리에서 공을 칭찬하게 생겼으니깐.
* * *
“찬 바람이 쌩쌩 부네.”
시후가 기분 좋은 듯 말을 내뱉자, 제갈려는 고개를 내저었다.
“총병관이 황제의 조카인 건 까먹은 거야?”
“먼 친척보단 가까운 이웃이 더 낫다는 말이 있지.”
“그런 말이 어딨어? 그리고 황제가 네 이웃이야? 그냥 네가 한 번만 숙여 주면 총병관도 널 존중해 줄 텐데 말이야.”
“뭐든 처음이 어려운 법 아니겠어? 저쪽도 타협하는 법을 배워야지.”
시후의 말에 제갈려가 뭐라 이야기하려 했지만, 남궁천은 그녀의 어깨를 붙잡으며 말렸다.
목소리가 점점 커졌기에 까딱하다간 안에서도 들릴 수도 있었다.
제갈려는 두 사람을 그녀의 막사로 데려왔다.
“어쩔 거야?”
“뭘?”
“메마른 늪을 지나면 부대가 다섯 갈래로 찢어지잖아. 이대로 가다간 네가 가겠다는 방향은 아주 오합지졸로 구성할 거 같은데?”
“생각이 있다면, 질 정도로 구성은 안 하겠지.”
“그야 그렇겠지만······.”
아무리 화가 나도 이번 북벌에 나선 병력은 전부 다 총병관의 수족이라고도 할 수 있는 전군도독부 소속이다.
아무리 시후가 눈엣가시라고 한들, 살이 아니라 수족을 잘라내면서까지 처리할 수준은 아니었다.
“줄타기 잘하고 있으니깐 걱정하지마.”
제갈려는 더 말을 섞기 싫다는 듯, 탕관에 물을 채워 화덕에 올렸다.
그녀의 빈자리를 자연스럽게 남궁천이 채웠다.
“그래서 정했나?”
“출발하기 전부터 말씀드렸잖아요.”
“음, 생각은 변함없는 건가?”
“네.”
시후의 확고한 대답에 남궁천은 생각에 잠긴 듯, 탁자에 팔꿈치를 올린 뒤 턱을 괴었다.
화덕에 올려 둔 탕관에서 뜨거운 김이 올라올 때쯤, 남궁천은 생각을 정리했는지 재차 시후를 바라봤다.
“병사들 때문인가?”
“네?”
“오늘 병사들이 화살에 쓰러지는 모습을 보고 달려가지 않았나? 가장 위험한 쿠빌라이의 땅으로 가겠다는 이유가 혹시, 한 사람이라도 더 구하겠다는 생각 때문이냐는 걸세.”
남궁천의 질문에 시후는 대답하지 않았다.
쿠빌라이의 땅으로 향하는 이유는 흑련회 때문이지만, 오늘 뛰쳐나간 계기는 남궁천의 말대로 이목을 끌어 피해를 줄이겠다는 생각이 맞았으니깐.
“알겠네.”
뭘 알겠다는 건지 모르겠지만, 남궁천은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제갈려에게서 찻잔을 건네받았다.
세 사람은 말없이 차를 홀짝였다.
제법 긴 정적이 흘렀지만, 최근 워낙 오랫동안 붙어 다닌 덕인지 어색하진 않았다.
삐이이이익!!
귀에 익숙한 소리.
세 사람은 황급히 막사 밖을 나섰다.
하늘에는 새 한 마리가 떠 있었다.
또다시 놈들이 새를 띄웠나 싶었지만, 크기가 한참 작았다.
시후는 눈을 반짝이며 하늘을 향해 손을 휘저었다.
순간, 새는 날개를 잃은 듯 추락하기 시작했다.
지켜보던 병사들은 황급히 제갈려의 막사에서 멀어졌다.
하지만, 시후는 태연하게 팔을 옆으로 뻗었다.
파라락!
떨어지던 새는 고작 오 장을 남겨두고 날개를 펴더니 시후의 팔에 가볍게 안착했다.
시후는 인상을 찌푸렸다.
“야, 야, 발톱.”
해동청의 발톱은 얇은 철판도 뚫을 정도로 날카롭다.
물론 시후를 헤칠 생각으로 붙잡은 게 아니기에 살을 파고들 정도는 아니었다.
시후는 다른 팔로 힘겹게 품을 뒤져 육포를 건네줬다.
어른 손바닥만 한 육포를 다섯 개를 먹여 주고 나서야, 놈은 꽉 움켜쥔 발톱을 풀어 주었다.
시후는 놈의 기분이 풀린 걸 확인하곤 발목에 묶인 서찰을 조심스럽게 풀었다.
“하오문에서 보낸 거야?”
“그렇지.”
“뭐라고 적혀 있어?”
제갈려의 질문에 시후는 웃으며 서찰을 보여주었다.
적힌 내용을 확인한 제갈려의 얼굴이 잔뜩 구겨졌다.
“이게 뭐야? 가(可)? 뭐가 옳다는 거야?”
“그런 게 있어.”
다른 사람에게는 의미 불명의 한 글자일지 몰라도, 시후에게는 확신을 안겨 주는 한 글자였다.
“가자, 쿠빌라이의 땅으로.”
- 127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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