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112화 맺음 (4)
시작은 당가의 손끝이었다.
당금벽의 손끝에서 날아간 호접표(胡蝶鏢)는 유려하게 허공을 노닐었다.
하지만, 그 가벼운 날갯짓이 가져온 결과는 한없이 무거웠다.
연신 졸린 눈을 비벼 가며 불침번을 서고 있던 놈들의 목에서 피 분수를 뿜게 했다.
놈들은 황급히 목을 틀어막으며 지혈하려 했으나, 의미 없는 몸부림에 불과했다.
그 와중에 한 녀석은 호각을 입에 물었지만, 기도를 베였기에 숨은 온전히 입까지 전해지지 못했다.
하지만, 놈은 궁여지책으로 칼을 뽑아 바닥에 던졌다.
캉, 카랑.
칼은 자갈에 부딪히며 날카로운 소리를 내었다.
사방에 숨어 있던 정의맹 인원들이 급히 달려들었다.
“뭐야? 어떤 덜떨어진 놈이 칼을 떨어트려서 잠을 깨우는······.”
간이 천막 밖으로 나오던 수적의 눈이 커졌다.
“스, 습격이다! 커헉!”
당금벽의 호접표가 다시 날아올라 놈의 숨통을 끊었다.
하지만, 늦었다.
수적들이 간이 천막 밖으로 줄지어 달려 나왔다.
대다수가 잠이 덜 깬 표정이었지만, 상황을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덜떨어진 놈들은 없었다.
그렇게 눈치 없다면 진즉에 죽어 나갔을 테니깐.
“이쪽으로.”
준혁은 그 광경을 지켜보더니 시후와 남궁천을 이끌곤 자리를 옮겼다.
그들의 걸음이 향하는 곳은 사방에 설치된 간이 천막 중, 유일하게 사람이 나오지 않은 한 곳.
남궁천이 눈짓으로 검기라도 날려 볼까 묻는 듯했지만, 시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벌써 내공을 낭비할 필요는 없다.
“말씀드린 것만 기억해 주세요.”
“알겠네. 자네 둘도 조심하게.”
짧은 대화를 주고받는 사이, 빙검이 천막을 가르며 밖으로 나왔다.
그의 표정은 침착했다.
하지만, 시후의 얼굴을 확인하곤 얇은 눈썹이 크게 꿈틀거렸다.
“오랜만이야? 도피 생활은 할 만했나?”
“고작 셋?”
“둘로도 충분하지.”
시후의 말에 준혁이 개입하지 않겠다는 듯 뒤로 훌쩍 물러났다.
덕분에 빙검의 눈썹이 살짝 휘어졌다.
마치 화를 억누르는 듯했다.
“내가 진두처럼 쓸데없는 도발에 넘어가리라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워워, 도발 아니니깐 걱정하지 마. 흥분은 몸에 안 좋잖아?”
시후는 히죽 웃으며 계속 신경을 긁었다.
빙검은 도발에 넘어오기보다는 잠시 주변을 살폈다.
수적들은 하나둘 쓰러지고 있었다.
그의 눈이 찌푸려졌다.
대충 보아도 전력 차이는 극명했다.
지금 상황에서 도망치는 건 불가능하다는 걸 깨달은 듯 초연한 표정으로 검을 늘어트렸다.
“시간을 버는 역할이군.”
남궁천은 두 걸음 앞으로 내디디며 검을 들어 올렸다.
시후 또한 그의 왼편에서 빙검을 막아섰다.
이제 빙검이 본대를 치기 위해선, 돌아가는 게 아니라면 두 사람을 뚫고 지나가야 했다.
빙검은 새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웃으며 팔을 끌어당겨 아래서 위로 쳐올렸다.
한 번의 휘두름에 두 개의 검기.
검기는 마치 땅에 내려온 초승달처럼 시후에게 날아들었다.
“파월아!”
시후의 창은 땅에 내려온 달을 무참히 씹어 삼켰다.
그에 빙검의 입꼬리가 살짝 씰룩거렸다.
“진두를 상대로 손을 섞었다는 소문이 진짜였나 보군. 좋다.”
인사를 마쳤으니 본격적인 시작이다.
빙검의 몸에서 한기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실제로 와닿는 한기다.
그의 주변으로 바닥에 서리가 내리기 시작했다.
시후는 한 걸음을 내디뎠고, 파삭거리며 흙 부서지는 소리가 들린 순간.
빙검이 몸을 날렸다.
단순한 찌르기.
검은 삼 장에 달하는 거리를 눈 깜짝할 사이에 좁혔다.
목표는 시후의 심장.
“어딜!”
공격엔 허점이 드러나기 마련.
남궁천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훤히 드러난 빙검의 옆구리를 역으로 노렸다.
빙검은 검을 몸에 바짝 붙인 채 몸을 빙글 돌렸다.
애초에 남궁천을 공격하려고 했던 것처럼 검로가 바뀌었다.
허공에서 맞닿은 두 자루의 검!
쾅!
“흡!”
짧은 충돌과 함께 둘은 동시에 뒤로 물러났다.
남궁천이 세 걸음, 빙검은 한 걸음.
명확한 힘의 차이.
하지만, 표정이 구겨진 건 오히려 빙검이었다.
“······ 정파에서 괴물을 만들어 냈구나.”
예상대로 막야검을 든 남궁천은 빙검을 상대로도 크게 밀리지 않았다.
빙검의 능력이 이 정도라면, 시후와 협공한다면 필승이었다.
하지만, 아직 그에겐 두 가지 패가 남아 있었다.
“그래 봤자, 우물 안 개구리지.”
빙검의 눈에 은은한 붉은 기운이 맴돌았다.
첫 번째 패, 폭렬기공을 사용하고 있었다.
파양도가 사용했을 때처럼, 분위기가 사납게 변했다.
빙검의 어깨가 살짝 뒤로 젖혀졌다.
시후가 급히 반응했다.
“월선일도!”
공격은 공격으로 차단한다.
훌륭한 판단이었다.
덕분에 남궁천을 향하던 검 끝이 자운유성창을 사선으로 튕겨 냈다.
크게 뒤로 젖혀지는 시후의 팔.
삽시간에 가슴이 무방비로 노출되었다.
하지만, 시후는 태연하게 웃었다.
‘이쪽은 둘이다.’
남궁천은 시후가 만들어 준 틈을 놓치지 않았다.
“창천일로!”
굳이 외칠 필요 없는 초식 명을 내뱉은 이유는 하나였다.
약속된 행동.
남궁천이 빙검을 향해 검을 찔러 넣자, 시후는 급히 허공으로 몸을 띄웠다.
“교천영신!”
둘은 동시에 양쪽에서 빙검을 압박하는 모양새가 되었다.
그에 빙검이 급히 오른발로 땅을 강하게 찍었다.
먼저 발목을 찔러 오는 남궁천의 검으로 팔을 뻗었다.
빙검은 쳐내는 대신, 남궁천을 향해 바짝 붙는 걸 택했다.
오른손 손목을 가볍게 돌려 남궁천의 검을 휘감은 순간.
시후의 공격이 펼쳐졌다.
“구룡!”
예전에 펼쳤던 구룡이 지렁이나 뱀 수준이었다면, 이제는 최소 이무기에 이르렀다.
하나하나 허투루 무시할 수 없는 공격에 빙검이 왼손에 내공을 잔뜩 두른 채 막아 냈다.
빙검의 왼손이 번잡해졌다.
덩달아 남궁천을 상대하고 오른손 또한 꼬이기 시작하는지, 연신 뒷걸음질 치며 물러났다.
하지만, 빙검은 고수다.
“얕은수!”
곧 익숙해졌는지 어느 순간부터 밀려나지 않았다.
되려 두 사람을 상대하면서 수적들을 힐끔거리며 전황을 살피기 시작했다.
악착같이 버티는 데 치중했기에 완전히 무너지진 않았지만, 수적들은 일방적으로 밀리고 있었다.
빙검의 표정이 굳었다.
폭렬기공을 한계까지 끌어올린 듯 기세가 한층 더 매서워졌다.
“팔다리를 잘라낸 뒤 안정적으로 목을 취하겠다? 네놈들 생각대로 놀아날 순 없지.”
“월광귀곡! 폐월암천!”
시후는 빙검이 자리를 벗어날 수 없도록 가진바 내공을 쏟아부으며 공격을 감행했다.
쉴 틈 없이 공격을 몰아붙이는 탓에 빙검이 자리를 뜨진 못했지만, 그만큼 시후의 내공은 빠르게 소진되었다.
남궁천 또한 합세했지만, 두 사람의 공격에 익숙해진 빙검의 대응은 실로 훌륭했다.
시후의 자운유성창을 끌어들여 남궁천의 검로를 방해하고, 그 반대로 남궁천을 방패 삼아 시후가 창을 거두게 했다.
이 상태로 조금만 더 지나면 시후의 내공이 바닥을 보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때쯤이면 수적들은 죄다 차가운 땅에 몸을 뉘고 있을 것이다.
초조한 건 시후 쪽이 아니었다.
하지만 불현듯, 불안감이 뇌리를 스쳤다.
그에 시후는 더욱 격정적으로 몰아치려 했으나, 빙검의 눈에 흰자위가 없어진 걸 확인하곤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이전과 전혀 다른 흉포한 기세.
‘개문이다.’
“이 거머리 같은 놈들! 모두 다 죽여 주마!”
시후는 남궁천의 곁에 바짝 붙었다.
혹시라도 그대로 지나치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빙검은 시후와 남궁천을 치우고 가는 길을 선택했다.
그나마 다행이다.
지금 빙검이 본대 쪽으로 다가간다면 피해가 터무니없이 커질 테니까.
하지만, 시후는 그의 일격을 받아 내자마자 생각이 바뀌었다.
‘망할.’
손목이 으스러지는 줄 알았다.
창이 아니라 검이었다면 놓쳤을지도 몰랐다.
남궁천 또한 다음 공격을 받아 내더니 표정이 일그러졌다.
“이게 얼마 간다고 했지!?”
“반 각!”
“제길!”
남궁천의 입에서 처음으로 상스러운 말이 튀어나왔다.
지금 상황에서 반 각이면 다섯 번은 더 죽을 시간이었다.
그래도 막아야 했다.
남궁천은 이를 꽉 깨물며 시후의 앞에 섰다.
“뒤에서 받쳐 주게!”
물론 그럴 생각이다.
그러기 위해서 막야검을 쥐여줬으니깐.
남궁천의 몸에서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듯 내공이 솟아올랐다.
“창천협로!”
“월광귀곡!”
막야가 은빛 섬광으로 허공을 뒤덮었고, 자운유성창이 귀곡성을 내지르며 그 주변을 맴돌았다.
그 누가 둘의 협공을 벗어나랴.
쾅!! 쾅!!
하지만, 빙검은 압도적인 힘으로 뚫어냈다.
시간차 공격도, 기교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냥 짓눌러 버리면 그만이었다.
길어야 반 각.
하지만, 그 반 각을 버틸 재간이 없었다.
시후가 계속 ‘참월’과 ‘파월아’를 번갈아 날리며 시간을 끌었지만, 빙검은 가볍게 검을 휘저으며 소멸시켰다.
“뒤로!”
남궁천이 시후의 앞을 가로막으며 다급히 소리쳤다.
그의 등에서 목숨을 걸고서라도 시간을 벌어 주겠다는 마음이 전해졌다.
감동하고 있을 시간이 없다.
남궁천을 죽게 내버려 둘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시후는 그의 곁에 섰다.
“가서 우송 진인이라도······.”
남궁천이 도움을 청하라고 말하려 했지만, 말을 끝까진 내뱉지 못했다.
벼락처럼 내리꽂히는 빙검의 공격을 막아야 했으니깐.
쩌엉!
“크흑!”
벼락과 같았다.
인간의 몸으로 벼락을 막아 냈으니 충격이 얼마나 대단하랴.
정면으로 일격을 막아 낸 탓에 남궁천의 무릎이 반쯤 굽혀졌다.
떨리는 두 팔을 보니 경직으로 몸이 굳은 게 분명했다.
‘다음 공격은 막을 수 없다.’
시후는 즉시 남궁천의 뒷덜미를 잡아 뒤로 던졌다.
남궁천은 별다른 저항도 없이 뒤로 날아갔다.
“차 아우!”
그 와중에 입은 멀쩡한지 시후를 불렀다.
시후는 그의 비명과도 같은 부름을 뒤로한 채 창을 찔러 넣었다.
“일섬!”
금빛 섬광이 포효했다.
하지만, 숨이 끊어지기 직전의 일갈(一喝)이었는 듯, 창은 맥없이 튕겨 나갔다.
시후는 공격이 실패할 걸 예상했는지 곧바로 옆으로 굴러서 날아오는 검기를 피했다.
하지만, 일어나기도 전에 빙검은 시후의 앞에 서 있었다.
양손으로 검을 쥔 채.
“죽어라.”
“안 돼!”
남궁천의 다급한 외침을 뒤로 한 채, 빙검은 시후의 가슴으로 검을 찔러 넣었다.
아니, 찔렀다.
팅!
맑고 경쾌한 소리.
빙검이 이해할 수 없는 현상에 멈칫했다.
황급히 달려오던 남궁천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 와중에 시후는 재차 창을 들어 올렸다.
“일섬!”
젖먹던 힘까지 쏟아부은 공격.
하지만, 이전보다 약한 검이었고, 빙검 또한 놀란 와중에도 반응을 했다.
창을 쳐 낸 빙검은 혼란스러운 표정이었지만, 이내 베어진 시후의 옷자락을 보곤 눈을 부라렸다.
“놈! 천잠보의라도 입고 있었나 보구나! 그래 봤자 죽는 건 변함없다!”
검병을 고쳐잡으며 검로를 수정했다.
방향이 바뀌었다.
목적지는 시후의 목.
빙검은 검은 허공에 일(一)을 그렸다.
다만, 그 종착역인 시후의 목에는 닿지 못했다.
“내가 흥분은 몸에 안 좋다고 했지?”
시후는 빙검을 향해 이죽거렸다.
하지만, 그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마치 붕어처럼 연신 입술을 뻥긋거릴 뿐이었다.
빙검은 천천히 고개 숙여 가슴을 내려다봤다.
도.
그의 가슴에는 넓적한 도 하나가 뾰족 솟아 있었다.
빙검이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저 녀석 말대로, 흥분은 몸에 좋지 않지. 안 그래?”
준혁의 물음에도 빙검은 아무런 대꾸도 못 한 채 입에서 피를 뿜어내며 쓰러졌다.
수적들의 희망이 사그라들었다.
빙검이 땅에 꼬꾸라지는 모습을 본 수적 중 한 명이 무기를 버리며 땅에 납작 엎드렸다.
뭐든 처음이 어려운 법이다.
수적들은 줄지어 바닥에 엎드렸다.
[비천보어검이 죽음에 이르는 공격을 막아 내었습니다.]
[돌발 임무 ‘저항을 잠재워라’를 완료하였습니다.]
시후는 꺼 놓았던 알람 창을 확인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뒤통수에서 느껴지는 따가운 시선에 돌아보곤 어색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곳에는 남궁천이 여러 가지 감정이 뒤섞인 표정을 지은 채, 설명을 요구하는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 113화에 계속 -
<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