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110화 맺음 (2)
소림에서 광주까지의 거리는 삼천리가 훌쩍 넘었다.
적잖은 거리를 잠을 쪼개가며 말을 몰았지만, 주어진 휴식은 그리 길지 않았다.
“졸려 죽겠는데 왜 이 시간에 모이는 거람.”
제갈려의 투덜거림도 이해는 했다.
잠에 취해도 이상하지 않은 시간이니 말이다.
시후는 투덜거리는 제갈려를 달래며 회의실로 들어갔다.
안에 있는 사람들의 얼굴에도 미약한 짜증이 가득했다.
시후는 먼저 와 있던 남궁천과 눈인사를 주고받은 뒤, 적당히 자리에 앉았다.
뒤이어 종남과 청성에서도 들어오자 빈자리가 다 채워졌다.
추나행이 주위를 둘러보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리에 다들 온 거 같으니 바로 시작하겠소이다.”
말과 동시에 옆을 바라보았다.
추나행의 옆에 앉아 있던 인물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그는 모두의 시선을 받으며 포권을 취했다.
“진가의 진소문이라고 합니다.”
다들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진가는 광동성의 터줏대감이었다.
사천당가와 마찬가지로 광동진가라 불리니, 그 위상이 얼마나 높은지 이뤄 짐작 가능했다.
하지만, 진가는 배교 일과 더불어 이번 일에도 사람을 보낼 수 없다고 밝혔었다.
“말을 드리기에 앞서 이번에도 손을 거들어드리지 못해서 송구합니다.”
“그 누가 진가와 해남파가 이 자리에 오지 않았다고 탓할 수 있겠습니까. 진가에서 민초를 위해 희생하고 있음을 모르는 사람은 세상천지에 없지요.”
진소문의 사과에 목일자가 부드럽게 답했다.
해남파와 진가는 지금 왜구를 몰아내느라 최소한의 인원을 제외하곤 세가에 인원이 없었다.
“이해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일단, 다들 피곤하신 듯하니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진소문은 손끝으로 탁자에 올려진 지도를 가리켰다.
일전에 추나행이 꺼내놓았던 지도와 얼추 비슷하긴 했지만, 섬세함의 차원이 달랐다.
특히, 바다가 그러하였다.
“추나행 장로님께 계획을 들었는데, 이 계획은 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됩니다. 여기 지도를 보시면 얇게 그려 놓은 선이 보이십니까?”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바다에는 수많은 선이 그려져 있었다.
쭉 이어지다가 빙글빙글 돌기도 하고, 낙서처럼 죽죽 그어 놓은 곳도 있었다.
“이건 입춘부터 우수까지의 해류의 흐름입니다. 보시면 알겠지만, 무조도 근처를 둘러싼다는 허무맹랑한 계획은 실현이 불가능합니다.”
봐도 모른다.
다들 말은 안 했지만, 눈빛으로 설명을 요구했다.
진소문은 주변을 둘러보곤,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는지 허리를 꾸벅 숙이며 지도를 짚었다.
“일단 이 선들은 해류의 흐름을 나타냅니다. 보는 방법은 오밀조밀하게 그려진 곳일수록 해류가 강하다는 뜻이지요. 여기 향항 근처를 보시면 해안을 따라서 완만한 이동을 보이지만, 정의맹에서 가야 할 무조도 근처는······.”
진소문은 뒷말을 삼켰다.
말이 필요 없었으니깐.
무조도 근처는 선들이 어마어마할 정도로 촘촘했다.
게다가 향하는 방향 또한 복잡하기 그지없었다.
마치 어린아이의 낙서와 다름없었다.
다들 떨떠름한 얼굴로 지도와 진소문을 번갈아 바라봤다.
“복잡하지요? 실제로 바닷물깨나 먹었다는 어부들도 무조도로 들어가는 건 쉽지 않다고들 하죠. 이는 무조도 근처에 자리한 수많은 암초(暗礁) 때문인데, 이로 인해 배를 몰고 들어가기도 어려울뿐더러, 해류의 속도도 급변합니다. 더욱이 가장 큰 문제는······.”
“아하!”
갑작스러운 제갈려의 감탄에 진소문의 말이 끊겼다.
시후가 옆을 바라보니, 졸음에 반쯤 감겨 있던 제갈려의 눈이 초롱초롱하게 바뀌어 있었다.
제갈려가 반응을 보일 때는 단 두 가지밖에 없었다.
하나는 천생 도굴꾼의 기질을 타고났기에 끌릴 수밖에 없는 무덤이고, 다른 또 하나는 제갈려의 세가와 관련이 깊었다.
제갈려는 자리에서 일어나 지도로 다가갔다.
무조도 근처 이곳저곳을 찍으며 암초의 위치가 맞는지 물어보자, 진소문이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합니다.”
이후로 진소문이 몇 가지 질문을 던졌다.
하지만, 제갈려는 대부분 질문에 고개를 내저었다.
“이 지도로 대략적인 흐름을 알 수는 있지만, 눈으로 보지 않고선 확답드리긴 어렵네요.”
* * *
광동의 요리는 과연 천하 사대 요리로 손꼽힐 만했다.
왜 사람은 입이 하나일까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안타깝군.”
남궁천이 누구라고 콕 짚어 말하진 않았지만, 누굴 가엽게 여기는 사람이 누군진 알아차리기 쉬웠다.
이 자리에 없는 사람 중, 남궁천과 친분이 있는 사람은 제갈려가 유일했으니 말이다.
내뱉은 말은 지켜야 한다.
어젯밤 제갈려가 보지 않고서 확답을 할 수 없노라 말했으니, 눈으로 직접 보면 될 일이었다.
시후는 이른 새벽에 울상을 지으며 나갔을 제갈려를 떠올리니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남궁미는 그 웃음을 보더니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보다 언제쯤 돌아올까요?”
“아직 도착도 안 했을 테지.”
“그렇게 멀어요?”
남궁미가 깜짝 놀라 물었지만, 남궁천은 조금 전 시후가 지은듯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덕분에 남궁미는 더욱 궁금증이 동하는 듯 귀를 쫑긋 세웠다.
하지만, 대답은 남궁천의 입에서 흘러나오지 않았다.
“멀진 않소.”
고개를 돌리자 이 장원의 주인이라고 할 수 있는 서문주옥이 서 있었다.
남궁천이 일어나 포권을 취하려 했으나 그가 손을 내저으며 앉으라 손짓했다.
“앉아도 되겠소?”
덕분에, 다들 당황했다.
특별한 일이 없는 이상 식사는 얼추 같은 사람끼리 하는 법이다.
서문세가의 가주라면 운허나 추나행 등과 식사함이 옳았다.
다들 남궁천의 얼굴을 바라봤다.
“에······. 앉으시지요.”
딱 잘라 곤란하다고 말하기 어려웠는지, 남궁천은 의자 하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하긴, 그의 집에서 앉지 말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 아닌가.
“고맙소. 아무래도 저쪽에 끼여서 밥을 먹자니 체할 거 같아서 말이오. 아, 억지로 앉으라 했다면 일어나리다. 나 때문에 체하면 그것 또한 미안한 일이니.”
“아무래도 연배가 비슷한 사람끼리 먹는 게 편할 테니 이해합니다. 남궁천입니다.”
“이 구석진 곳에 있지만, 남궁천 소협의 위명은 광동성까지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지요. 이쪽 분이 그 유명한 남궁세가의 금지옥엽 남궁미 소저시지요? 제가 혼인만 안 했다면 당장이라도 남궁세가에 매파를 넣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입에 발린 소리일 테지만, 남궁미의 콧대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곧 서문주옥은 시후를 바라보며 눈을 반짝였다.
“최근 신진고수 중 가장 이름을 떨치고 계신 차시후 소협 또한 광동성에서도 화재지요. 여러 곳에서 소협께 높은 관심을 보내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별말씀을.”
“최근까지 소검후와 같이 있으셨다고 들었는데, 실례가 안 된다면 한 가지 여쭤봐도 괜찮겠습니까?”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 아니라면야······.”
시후는 말끝을 흐리며 대답했다.
대답을 들은 서문주옥은 주변을 슬쩍 살피더니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행간에 떠도는 소문에 의하면 소검후와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이야기가 있소만.”
“절대 아니에요!”
대답은 엉뚱하게도 남궁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덕분에 서문주옥은 다소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시후와 남궁미를 번갈아 바라봤다.
그러곤 입을 쩍 벌리더니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혹시라도 소협께 짝이 없다면 중매라도 서려 했지만, 제가 오해하고 있었나 봅니다. 심기를 불편하게 해서 죄송합니다.”
‘오해는 무슨. 지금 하는 게 오해라고!’
시후는 당장에 소리치고 싶은 마음이 들끓었다.
하지만, 남궁천의 어색한 웃음과 남궁미의 실없는 웃음을 보곤 생각을 접었다.
오해를 풀자고 두 사람과의 관계가 요원해지는 건 바람직하지 않았으니깐.
게다가 서문주옥에게 무안을 주는 것도 옳지 않았다.
“뭐든 오해할 수 있죠. 그보다 주방장님 솜씨가 아주 좋네요.”
“하하, 제 숙수는 광동성 요리 대회에서 무려 3회나 우승한 대단한 분입니다.”
광동성 요리 대회 3회 우승이 얼마나 대단한 수준인지 모르겠지만, 확실히 손에 꼽을 만한 수준이란 건 확실했다.
정주의 일미각과 그 요사스러웠던 미미객잔과 비교해도 맛이 떨어지지 않았다.
“석 숙수도 이에 못지않았죠?”
시후는 남궁미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남궁미의 표정이 밝아졌다.
남궁선유 때문에 식사 시간에 불편했다는 것만 제외하면, 남궁세가도 대단했다.
“그보다 무조도가 멀지 않다고 했는데, 왜 아직 도착도 안 했을 거라고 말한 거예요?”
남궁미가 아까 끊어진 이야기를 꺼내 들었다.
남궁천은 서문주옥을 바라봤다.
대신 설명하겠냐는 시선이었다.
그에 서문주옥이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무조도까지는 쾌속선을 타고 간다면 두 시진이면 도착할 수 있을 테지요.”
“그런데······.”
“하지만, 갑작스레 섬 주변에 쾌속선이 도착한다면 녀석들이 경계를 취하거나, 까딱하다가 도망칠 수도 있을 테니, 바람직하지 않기에 부득이하게 위장해야 했기에······.”
서문주옥이 쓴웃음을 지었다.
위장이란 건 말 그대로 정체나 모습이 드러나지 않도록 꾸밈을 의미했다.
그렇다면 드넓은 바다에선 어떻게 위장해야 할까.
물을 필요도 없었다.
정답은 하나였다.
남궁미가 경악스러운 표정을 짓자 서문주옥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갈려는 지금 조그만 어선으로 무조도에 접근 중이었다.
아마도 돌아오는 건 저녁때나 가능할 것이다.
섬이 육안으로 보이기 전까지는 내공을 이용해서 신나게 노를 저을지 몰라도, 그 이후부터는 어부로서 혼신의 연기를 다 해야 할 테니 말이다.
“그래도 독고 대협이 함께 가 주셔서 다행이지 않습니까? 저쪽에서 다가오면 먼저 알아챌 수 있으니 말입니다.”
남궁천의 말을 제갈려가 들었다면 불같이 화를 냈을 것이다.
아무리 따스한 남쪽이라고 한들, 바닷바람을 매섭기 그지없다.
아직 무공 수준이 낮은 제갈려로선 오늘 하루가 매우 길 것이다.
“그보다 입구에서 이쪽을 계속 바라보고 있는 아이가 있는데, 혹시 가주님께서 아시는 아이입니까?”
남궁천의 말에 다들 고개를 돌렸다.
입구에는 일고여덟 살 남짓의 남자아이가 고개를 빼꼼 들이밀곤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서문주옥이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나곤 입구로 다가갔다.
곧 아이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곤 손을 잡은 채로 다가왔다.
“제 아들 지약이라 합니다. 지약아, 인사드려야지.”
서문주옥이 슬쩍 앞으로 밀었지만, 아이는 낯을 가리는지 계속 뒤로 숨어들었다.
그의 얼굴에 난감한 기색이 떠올랐다.
“갑자기 많은 손님이 왔는데 낯을 가리는 건 당연하지요. 저도 어릴 적 조부님 환갑잔치 때 많은 사람에 놀랐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 와중에 이렇게 아버지를 찾아왔다는 건 그만큼 믿고 따른다는 말이니 책잡지 마시길.”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남궁천의 말에 서문주옥의 안색이 한결 밝아졌다.
그는 지약을 달랜 뒤 돌려보내곤, 다소 식어 버린 아침을 들기 위해 자리에 앉았다.
시후는 대화에 끼지 않았기에 일찌감치 배를 채운 뒤였다.
그렇다고 자리에서 일어날 수 없으니 젓가락을 아주 천천히 움직였다.
게다가 갑작스럽게 다가온 서문주옥을 관찰할 좋은 기회였다.
시후는 음식을 살피는 척 그의 손가락을 힐끔거렸다.
무림 세가의 남자치곤 손가락이 제법 가늘었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반지를 여러 개 끼시네요.”
“하하, 제가 반지를 좀 좋아합니다. 한때 가세가 워낙 기울어지다 보니, 혹시라도 집이 망하면 팔아 치울 수 있는 패물이 끌리더군요.”
시후의 뜬금없는 질문에 서문주옥이 웃으며 답했다.
그 대답에 남궁천이 당황한 듯 헛기침을 했다.
하지만, 시후는 묘한 웃음을 지으며 그의 오른손을 바라봤다.
“그런데 서문세가의 명성과 비교하면 유독 볼품없는 반지가 하나 있네요.”
그 말에 순간적이나마 서문주옥의 표정이 굳어졌다.
남궁천이 얼른 사과하라는 눈빛을 보냈지만, 시후는 모른 척 무시했다.
서문주옥은 아련한 눈빛으로 손가락에 끼인 반지를 쓰다듬었다.
“사실, 이 반지는 어려웠던 시절에 구한 반지라 그때를 기억하자는 의미가 있네.”
“아하, 뜻깊은 의미가 있는 반지네요. 아픈 기억을 들춰서 죄송합니다.”
시후는 곧바로 사과했다.
하지만, 미안하다는 말과 달리 눈은 웃고 있었다.
- 111화에 계속 -
<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