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95화 (77/201)

<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95화 측천무후의 황릉 (3)

가져온 호리병에 물을 비웠다.

그 안에 있는 물을 부어도 괜찮지 않을까 싶었지만, 광천이 떡하니 마련되어 있는데 굳이 그런 모험을 할 필요는 없어 보였다.

물을 바닥에 버리고 빈 호리병을 광천에 담그자, 골골거리는 소리와 함께 물이 채워지기 시작했다.

“려 선생님, 도굴은 어떤 식으로 진행될 예정인가요?”

“도굴이라니, 누가 들으면 진짜 그런 상스러운 짓을 하는 줄 오해하겠어.”

“도굴이 아니면 뭐야?”

“지금 우리가 하는 건 땅에 묻혀 있는 옛 물건들을 밖으로 꺼내 주는 인도자의 역할이지.”

“말이라도 못하면······.”

대화를 나누는 사이 호리병에 물이 가득 찼다.

두 사람은 서둘러 접시 앞으로 향했다.

빈 접시는 마른 목을 채워달라 갈구하듯 반짝였다.

시후는 왼쪽 무릎을 땅에 꿇으며 물이 튀지 않게 호리병을 가까지 가져다 댔다.

광천수가 접시를 채웠다.

접시도 높지 않았기에 달을 물에 재우기 위해선 극소량만 부어도 충분했다.

조심스럽게 일어나며 주변을 둘러봤다.

아무런 변화는 없었다.

다소 밝아진 것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두 사람은 황급히 고개를 치켜들었다.

빛이 내리고 있었다.

문자 그대로, 빛이 내려오고 있었다.

야명주에서 뿜어져 나온 빛은 그대로 접시를 향했다.

아무런 위협도 없었지만, 두 사람은 슬금슬금 뒷걸음질 쳤다.

그 사이, 빛이 접시에 닿으며 영롱한 소리를 내었다.

띵.

빛과 물이 닿았는데 소리가 나는 것에는 의문을 느낄 틈도 없었다.

야명주와 접시를 이은 빛은 점점 그 크기를 키워나갔다.

거기까진 괜찮았다.

빛이 좌우로 벌어지기 전까지는.

“저게 뭐지?”

고오오오.

제갈려의 물음에 응답하듯, 괴이한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제갈려는 시후의 등 뒤로 급히 숨었다.

원흉은 저것이었다.

좌우로 갈라진 빛 사이엔 시꺼먼 어둠이 자리 잡고 있었다.

시후는 고개를 끄덕이며 뒤를 돌아봤다.

“가자.”

“어? 어딜?”

“딱 봐도 들어오라고 손짓하잖아.”

제갈려의 동공이 흔들렸다.

망망대해에서 거친 풍랑을 만난 조각배처럼.

제갈려가 꼭 저기로 가야 하냐고 묻는 눈빛을 보내자 시후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시후가 고개를 끄덕였음에도 제갈려는 발을 떼지 않았다.

시후가 그녀의 팔목을 붙잡고 끌었다.

“아, 잠깐만! 저 안에 뭐가 있을 줄 알고?”

“측천무후와 함께 묻었던 엄청난 보물.”

그 말의 효과는 굉장했다.

붙잡은 손을 통해 전해지던 망설임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오히려 제갈려가 앞장서기 시작했다.

“너는 정말······.”

잠시 살피는 시간을 갖긴 했지만, 본다고 알 수 있는 것도 아니기에 그리 오랜 시간을 쏟진 않았다.

제갈려는 자신감 있게 앞으로 나섰던 것과 달리, 먼저 발을 내딛긴 꺼려졌는지 곁눈질로 시후를 힐끗 바라봤다.

시후는 그녀를 향해 피식 웃어주곤, 앞으로 발을 내딛으며 ‘문’을 넘었다.

무엇인가 몸을 휘감음과 동시에 몸이 뜨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그 느낌은 찰나에 가까웠다.

부유감을 느낄 새도 없이 시후의 양발이 바닥에 닿았다.

게다가 몸을 휘감고 있던 끈적한 기운은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뒤를 돌아보니 ‘문’은 여전히 열려 있었다.

시후는 혹여나 부딪히지 않게 옆으로 피했고, 자리를 벗어나기 무섭게 제갈려가 넘어왔다.

“으······. 몸에 아직 뭔가가 묻어 있는 것 같아.”

제갈려는 팔을 벅벅 긁으며 주위를 둘러봤다.

일자로 쭉 뻗은 통로였다.

다만, 아래로 내려가야 하는 듯 바닥에 얕은 경사가 있었다.

이번에도 제갈려가 자신 있게 앞장섰다.

다만, 나아가는 속도는 그다지 빠르지 않았다.

첫걸음을 뗀 아기의 속도와 비슷했다.

그리고 그마저도 얼마 이어지지 못했다.

“갈림길이라고?”

제갈려는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앞으로 쭉 뻗은 길과 좌·우측으로 뻗은 길이 있었다.

앞은 평지였으나, 좌측과 우측은 각각 오르막과 내리막이었다.

딸깍.

시후는 뭔가 소리가 들리자마자 제갈려를 뒤로 밀었다.

저 앞 천장에서 무언가가 떨어졌다.

떨어진 무언가에는 글자가 쓰여 있었다.

“나는 누구인가?”

펄럭이는 새하얀 천에 적힌 필체에는 꺾을 수 없는 자신감이 돋보였다.

제갈려는 뭔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무후의 필체야.”

“다른 건 없어?”

“사실 저것도 몰랐어.”

자신감이 뚝 떨어진 목소리다.

조금 전 자신이 모르는 기관이 세상에 존재할 리 없다고 말했기에 더욱 그러한 듯했다.

“술법이겠지. 벽이 뒤집힌 것도 아니고 어디 틈이 열렸던 것도 아닌데, 어디서 튀어 나왔겠어?”

“그런가?”

“네 말마따나 네가 몰랐으면 그건 기관이 아니지.”

제갈려의 얼굴이 한껏 붉어졌다.

자신 있게 내뱉었던 말이 이렇게 돌아왔으니 부끄러운 탓이었다.

“놀리는 게 아니라 진짜야.”

시후가 사뭇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말하자, 제갈려는 귀까지 빨개져선 고개를 푹 숙였다.

뭐라 말을 웅얼거렸지만, 입 밖으로 나오진 않았기에 알아들을 수 없었다.

“약간 거리를 벌려서 따라와.”

시후가 앞장서서 걸음을 옮겼다.

창을 들어 올려 주의를 기울였으나, 천 아래까지 다다르는데 그 어떤 위협도 없었다.

고개를 들어 올려 다시금 천을 바라봤다.

“이곳이 누구의 묘인지 모르는 사람은 없을 텐데 왜 이런 글귀를 남겼을까?”

제갈려의 말은 혼잣말에 가까웠기에 시후는 대답하지 않은 채 그녀의 말을 경청했다.

“오르막, 평지, 내리막길에 의미를 부여했을 테지? 가장 높은 곳에 올랐으니 오르막일 수도 있겠지만, 압박에 못 이겨 황위를 양보했기에 내려왔다고도 할 수 있을지도 몰라.”

“평지는? 무자비 가장 앞에서 보면 평온무사를 꿈꿨다고 했잖아.”

시후는 아까 제갈려가 적어 줬던 종이를 펄럭이며 물었다.

덕분에 제갈려의 미간에는 주름이 깊어졌다.

“가장 바랐던 삶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렇겠지만, 질문의 요지는 그게 아니잖아?”

“흠······.”

“뭐, 어느 것 하나 확실한 건 없으니 확신하긴 이르긴 하네.”

제갈려는 눈치를 살피더니 슬쩍 발을 뺐다.

이미 한 번 실수를 범했던 탓인 것 같았다.

이후의 이야기는 지지부진하게 흘러갔다.

제갈려는 장난삼아 충권(蟲拳)을 제안하기도 했지만, 곧 진지한 태도로 임했다.

“무후는 왼손잡이였을까? 오른손잡이였을까?”

“적은 글로 짐작해 보면 왼손잡이였을 거야. 하지만, 글만 왼손으로 썼을 가능성도 있지.”

“그 말은 왼손을 더 잘 썼다는 말일 수도 있으니 왼쪽으로 가 볼까?”

“그와 반대로 숨기고자 하는 건 오른쪽으로 썼을 수도 있지. 반대편 손으로 쓰면 필체가 달라지는 법이니깐.”

시후의 뜬금없는 물음에서 시작된 이야기가 그럴듯하게 변하기도 했다.

어느 것 하나 확신할 수 없었지만, 시간은 두 사람의 편이 아니었다.

아무리 깨달음의 정리가 오래 걸린다고 하지만, 열여섯의 나이에 절정에 올랐을 정도로 재능이 출중했던 비령이다.

열흘 정도 걸릴 것으로 생각했지만, 그보다 빠를 가능성도 염두에 두어야 했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제갈려는 머리를 싸매며 주저앉았다.

“하······.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다니깐. 전해지는 무후의 성격이라면 이런 문제를 냈을 리가 없는데······.”

“무후의 성격이 어땠는데?”

“자신이 내세운 바는 끝까지 실행하고, 반하는 자가 있다면 그대로 처리해 버릴 정도로 냉혹한 여제였지.”

제갈려의 말에 시후는 순간 머릿속에 무엇인가 스쳐 지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생각을 정리하기보다는 말로 먼저 내뱉었다.

“그 말은······ 앞만 보고 달린다는 말과 비슷하지 않아?”

“앞만 보고······.”

“그러니까, 다른 길이 있다고 하더라도 앞으로 가라는 게 아닐까?”

시후의 말에 제갈려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 있어.”

짧은 긍정과 함께 다시 생각에 잠겼다.

고뇌는 길지 않았다.

재차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듯해.”

곧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제갈려의 눈에는 ‘네가 앞장서라’라는 무언의 강요가 담겨 있었다.

시후는 자신이 주장했기도 했으니, 이번에도 군말 없이 앞장서서 걸음을 옮겼다.

제갈려는 시후의 뒤에 바짝 붙었다.

갈림길을 지나 스무 걸음쯤 걸었을까.

딸깍.

천이 떨어졌을 때 들어 본 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시후가 급히 뒤를 돌아보자, 천장에 걸려 있던 새하얀 천이 사라진 상태였다.

단지 그뿐이면 좋으련만, 지나온 길이 무너지고 있었다.

아무런 소리도 없이.

“뛰어!”

시후가 옆을 바라보며 외쳤지만, 제갈려는 이미 저 앞에서 달리고 있었다.

‘우라질 것.’

* * *

“야, 배신자.”

시후는 얼굴에 흥건한 땀을 닦으며 제갈려를 툭툭 걷어찼다.

어지간하면 대꾸했을지 몰라도, 지금 제갈려는 문자 그대로 숨을 쉬는 것도 버거워하고 있었다.

반나절 만에 180리를 달린 것으로도 제갈려의 체력은 모조리 고갈된 것과 다름없었다.

그 상태에서 전력 질주를 했으니, 탈진하지 않은 게 용했다.

하지만, 용한 건 용한 거고, 시후를 두고 먼저 도망쳤다는 건 변하지 않았다.

시후는 그 뒤로 조금 더 잔소리하곤, 지나온 길을 되돌아봤다.

끝이 보이지 않는 무저갱(無低坑)이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일어나. 또 언제 바닥이 꺼질지도 모르잖아.”

“차라리 떨어질래.”

“입 놀리는 걸 보니 충분히 쉬었군.”

시후의 말에 제갈려는 상체를 일으켰다.

조금 전까지 그녀의 등이 닿아 있던 자리엔 땀으로 흥건했다.

시후는 그 모습을 보곤 물이 담긴 호리병을 건네주었다.

제갈려는 황급히 받았지만, 입을 대기 전 찝찝한 표정으로 호리병을 바라봤다.

“이거 그 광천수 담은 물 아냐? 먹어도 괜찮을까?”

“목이 덜 말랐네.”

시후가 당장에라도 빼앗을 듯 손을 뻗자, 제갈려는 벌컥벌컥 물을 들이켰다.

제갈려는 흘린 땀의 배는 될 법한 양을 쉴 새 없이 마시곤, 급격히 가벼워진 호리병을 돌려주었다.

그녀는 잠시 숨을 고른 뒤, 시후와 마찬가지로 끝없는 무저갱을 바라봤다.

시후가 슬쩍 곁으로 다가가 물었다.

“땅이 왜 꺼진 걸까?”

“······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말이 안 되는 이야기지만, 뒤돌아봤기 때문인 것 같아.”

“뒤돌아봤기 때문이라고? 왜?”

“무후는 뒤돌아보는 성격이 아니었을 테니깐.”

제법 그럴듯한 이야기였다.

시후는 고개를 끄덕거린 뒤 몸을 돌려 앞을 바라봤다.

긴 공간이 자리잡고 있었다.

조금 전에 지나온 통로와 비교한다면 곱절은 넓었다.

다만, 쓸데없이 넓게 만든 것만은 아니었다.

“많기도 해라.”

제갈려가 어느새 곁으로 다가왔다.

둘의 시선이 향한 통로 좌·우측에는 수많은 야차가 자리하고 있었다.

시후는 먼저 앞장서라는 눈짓을 보냈지만, 제갈려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시후를 곁으로 끌었다.

아무도 앞서가지 않자, 두 사람은 나란히 걸을 수밖에 없었다.

기다란 통로에는 두 사람의 발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죄다 자세가 달라.”

제갈려의 시선은 야차들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걸음을 멈춘 뒤 자세히 관찰했다.

그 말대로였다.

아주 미묘한 차이지만, 같은 자세는 없었다.

게다가 취하고 있는 자세는 물 흐르듯 이어졌다.

마치 하나의 초식처럼.

제갈려도 그 사실을 알아챘는지 조금 더 유심히 살폈다.

뭔가 대단한 무공일지도 모르고, 어떤 의미가 있을지도 모르니 말이다.

“여기까지가 한 초식인가 보네.”

자연스레 이어지던 동작이 끊어졌다.

그 뒤엔 또 다른 초식이 이어졌고, 다시 이어졌다.

그렇게 총 열두 개의 초식을 확인했다.

“뭘까?”

“기억했다가 나가서 익혀 봐. 도움이 될지 누가 알아?”

“······ 너나 익혀. 내가 부법(斧法)을 익혀서 어디다 쓰겠어?”

제갈려는 황당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톡 쏘아 댔다.

하기야, 검조차도 제대로 사용하지 않는 제갈려에게 부법은 거론할 가치도 없는 이야기였다.

“그보다, 문을 정말 좋아하나 보네.”

석문(石門)이었다.

문에 조각된 야차는 지나온 길에 있던 두 녀석과 닮아 있었다.

“무슨 의미일까?”

“알아봐야지.”

시후는 팔을 걷어붙이며 앞으로 나섰다.

가장 최초에 맞닥뜨렸던 철문에 비한다면 우습지만, 석문 또한 제법 육중해 보이는 외견을 자랑했다.

시후는 발끝에 힘을 주며 힘껏 밀었다.

어마어마한 무게의 철문을 밀어 본 전력이 있어서일까.

석문은 생각보다 쉽게 밀려났다.

시후는 문 안을 살폈다.

안은 그다지 넓지 않았다.

아니, 황릉의 거대한 규모에 비해서 넓지 않았다는 말이지, 스무 명은 동시에 무공 수련을 할 수 있을 저도로 넓었다.

그 공간 가운데는 두 개의 석상이 서 있었다.

손에 들린 거부(巨斧)가 기분 나쁘게 번뜩였다.

“내가 겪어본 바로는 꼭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일들은 일어난다는 말이지.”

“무슨 말이야?”

“일어나지 말아야 할이 일어나서, 쟤들이 일어날 것 같단 말이야.”

“무슨 말장난을······.”

제갈려는 말을 하다말고 눈을 크게 떴다.

석상이 움직였다.

- 96화에 계속 -

<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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