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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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화 측천무후의 황릉 (2)
스무 번.
운기조식으로 내공을 회복하고 문을 밀었던 횟수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문을 활짝 연 건 아니었다.
간신히 몸을 비집고 지나갈 공간을 확보하는 것에 그쳤을 뿐.
시후는 내공을 다 회복한 뒤, 벌어진 문틈 사이로 몸을 욱여넣었다.
코끝이 조금 쓸리는 불상사가 있었지만, 억지로 비집고 지나오는 데 성공했다.
“나갈 때 고생 좀 하겠네.”
시후는 발개진 코끝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곧 주변을 둘러보자 사방은 벽으로 막혀 있었다.
사실 벽이라기보다는 여기까지만 파냈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건릉은 산 하나를 파낸 뒤, 그 안에 무덤을 만든 이산위릉(以山僞陵)이었으니깐.
그 벽은 빼곡히 조각들로 채워져 있었다.
당장에라도 벽을 부수고만 나올 것 같은 용과 날아오를 듯 날개를 편 봉황들은 이곳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을 장인들의 손길이 느껴졌다.
구석에는 목을 축일 수 있도록 맑은 광천(鑛泉)이 올라오도록 만들어져 있었다.
다만, 길은 보이지 않았다.
제갈려를 바라봤다.
자신이 운기조식을 하는 동안 먼저 넘어와서 살폈으니, 알아차린 게 있을지도 몰랐다.
“찾은 거 없어?”
“뭔가 통로가 있을 텐데 아직은 모르겠어.”
“의심 가는 건?”
“휴······. 전부 다 의심스럽지.”
제갈려는 한심하다는 눈빛을 보내며 고개를 돌렸다.
그 반응이 시후에게 불을 붙였다.
시후는 제갈려의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며 주변을 차근차근 살폈다.
가장 입구에 조각된 용을 살폈다.
“절대 함부로 만지지 마!”
제갈려의 서슬 퍼런 목소리에 야명주로 만든 여의주로 향하던 손을 거뒀다.
다음으로 새빨간 눈이 시선을 잡았다.
“눈도 그냥 보석일 뿐이고······.”
쏙 잡아당긴다면 끄집어낼 수 있겠지만, 지금 중요한 건 저런 하찮은 보석 따위가 아니다.
옆으로 한걸음 옮기자 봉황이 반겨 주었다.
흔히 사령(四靈)이라 부르는 용과 봉황, 기린, 거북을 모두 지나니 사람이 등장했다.
당장에라도 검을 휘두를듯한 용맹한 장군와 매혹적인 춤사위를 펼칠 것만 같은 무희부터 시작해서, 땅에 곡괭이를 내려치는 농부와 먹을 갈고 있는 서생의 모습까지.
워낙 넓은 공간인 만큼, 벽면을 빼곡히 채운 조각들은 수백에 달했다.
이 조각들이 의미 없진 않을 것이다.
이 중 하나는 분명 다음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 줄 게 분명했다.
문제는 그게 뭔지 알 수 없다는 점이었다.
“아. 진짜 어렵게도 만들어 놨네.”
결국, 시후는 항복을 선언했다.
머리를 벅벅 긁적이다 보니 머릿속에 흥건한 땀이 느껴졌다.
세수라도 하기 위해 광천으로 다가갔다.
고여 있는 물이 아니라는 듯, 광천 표면엔 얕은 파문이 일었다.
손을 물에 담그니 짜릿할 정도로 차가운 한기가 느껴졌다.
시후는 얼굴부터 씻어 낸 뒤 머리칼을 쓸어올렸다.
소매로 대충 닦아 내고 돌아보니, 제갈려는 초지일관 변함없는 모습으로 주변을 관찰하는 중이었다.
슬쩍 뒤로 다가가 보았다.
같은 곳을 바라봤지만, 아는 만큼 보이는 법이니 눈에 보이는 광경은 다를 것이다.
“뭐가 보여?”
“조각.”
제갈려는 귀찮다는 듯 건성으로 대답했다.
그 성의 없는 대답에 물러날 법도 했지만, 시후는 스스로 찾는 걸 포기했기에 그녀의 뒤를 졸졸 쫓았다.
“이야, 대장장이도 있네. 손에 들린 망치는 진짜 아냐? 어? 이제 보니깐 여기 걸려 있는 검이랑 저기 장군이 들고 있는 검이랑 비슷하게 생겼는데? 둘이 무슨 관계라던가······.”
혼자 볼 때는 생각으로 그쳤지만, 제갈려가 곁에 있으니 궁금했던 것들을 이것저것 물었다.
“검이 비슷하다는 건 좋은 발견이지만, 나머지는 다 쓸데없는 생각이야. 그러니깐 좀 닥쳐.”
예상대로 좋은 말은 못 들었다.
그래도 시후는 그녀를 묵묵히 뒤따랐다.
그러자 되려 제갈려가 미안했는지 시후를 힐끗 쳐다보았다.
“이렇게 놓여 있는 물건은 저승에 가더라도 쓸 일이 있으면 꺼내 쓰라고 놔둔 물건이야. 물론, 무후가 쓰던 물건이나 값어치 있는 물건은 죄다 안에 있겠지만, 돌로 된 조각보다 실생활에서 쓰던 물건들을 두는 게 보기에도 좋았겠지.”
“이 물건들이 뭔가 장치일 가능성은 없어?”
“현재로선 가장 높아. 그래서 함부로 건드려 볼 수 없는 거고.”
수백 개의 조각상은 각기 물건 하나씩을 가지고 있었다.
제갈려의 설명에 시후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팽이 치며 연 날리는 아이들을 지나자 치성을 드리는 아낙네도 있었다.
저 높이 달아둔 야명주는 여의주랑 얼추 비슷했다.
“이상······ 한데?”
시후는 달 대신 걸려 있는 여의주를 바라보다가 다시금 안을 쭉 둘러봤다.
역시 이상했다.
시후는 입구로 향하는 동안 물건들을 하나하나 되짚어보며 이동했다.
“야명주, 검, 보석, 깃털, 뿔, 발톱, 노리개······.”
수백 가지 물건을 헤아려 본다는 건 지극히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해야 했다.
머릿속에 자리 잡은 이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해야 했다.
“이리 와 봐.”
시후는 곧 제갈려를 불렀다.
평소와 달리 목소리를 낮게 깔았기에 덩달아 제갈려의 표정도 굳어져 있었다.
시후는 제갈려의 팔을 붙잡아 중앙에 세웠다.
“여기 서서 조각 말고 물건들을 살펴봐.”
제갈려가 주변을 한차례 쭉 둘러보자 시후는 입구를 가리켰다.
“문을 기준으로 사령이 좌우대칭으로 조각되어 있고, 조각에 놓인 물건 또한 동일하지?”
시후의 말에 제갈려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서 장군과 대장장이를 가리켰다.
“저기 검.”
이어서 당장이라도 나무를 베어 넘길 것 같은 나무꾼과 비쩍 마른 통나무에 꽂혀 있는 도끼를 가리켰다.
“도끼.”
시후는 다음 물건을 향해 손가락을 옮기려 했지만, 제갈려의 표정을 바라보곤 곧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제갈려는 눈치가 빠른 편이었다.
특히, 이런 일에 관련해서는 그 누구보다 빠를 것이다.
시후가 먼저 알아냈지만, 그렇다고 제갈려보다 관찰력이 좋아서는 아니었다.
보는 시선이 달랐던 탓이다.
제갈려는 전체를 봤고, 시후는 물건 하나하나에 집중했던 것에 차이가 있었다.
“짝이 있어.”
“그래.”
“적으면 둘, 많게는 여덟 개까지 있지만, 죄다 짝이 있어.”
“없는 것도 있지.”
둘의 시선이 한곳을 향했다.
치성을 드리는 아낙네의 앞에 놓인 접시.
그 접시는 수백 가지 물건 중 유일한 하나였다.
제갈려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한 바퀴 쭉 돌아봤지만, 이미 시후는 확인한 뒤였기에 느긋이 접시 앞에서 기다렸다.
곧 상기된 표정으로 다가왔다.
“관찰력 좋은데?”
“이 정도야 가뿐하지.”
더 칭찬해주길 바라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코가 하늘 높이 치솟으려 했지만, 제갈려의 관심은 곧바로 접시로 향했다.
‘요 매정한 것.’
시후는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같이 접시를 관찰했다.
접시는 지극히 평범했으나, 더는 평범치 않았다.
제갈려의 관찰은 오래도록 이어졌다.
수백 년 전에 무엇을 담았는지까지 알아낼 기세였지만, 소득은 없었는지 이내 고개를 저으며 시선을 돌렸다.
제갈려의 시선이 이번에는 접시 앞에서 치성을 드리고 있는 아낙네의 조각으로 향했다.
한참을 바라보던 제갈려는 뭔가 알아낸 듯 고개를 끄덕였다.
“기관은 아냐.”
단언했다.
시후는 그 뒤에 말을 기다렸다.
“내가 모르는 기관이 세상에 존재할 리 없고, 이 공간에는 진법이 전혀 가미되어 있지 않으니, 남은 건 술법밖에 없겠지. 배교를 쫓을 때와는 다르게 조건이 걸려 있는 듯한데······.”
제갈려는 술법이라 단정 짓곤 조금 더 조심스럽게 살피었다.
“뭔가 더 신경 쓰이는 건 없어?”
“신경 쓰이는 거라면?”
“이 접시는 술법의 매개체 역할을 하겠지. 다만, 그 역할을 하기 위해선 무엇인가가 더 필요할 거야.”
“아, 그럼 간단하네.”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곧바로 접시를 가리켰다.
“물이 없잖아?”
“······ 그렇게 간단할 리가 없잖아.”
“정답은 문제 옆에 있는 법.”
“근거가 너무 빈약해.”
“내 촉이 물이라 말한다니깐?”
“확실한 증거 없이는 곤란해.”
시후의 감은 분명 물을 채워야 한다고 소리쳤다.
하지만, 제갈려의 말대로 근거는 매우 빈약했다.
치성을 드리니깐 물을 붓자.
이건 너무나도 단순한 생각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딱히 이것 말곤 다른 생각이 들지 않았다.
시후는 답답한 마음에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봤다.
하늘이 보일 리 없었다.
사방이 돌로 틀어막혀 있었고, 바닥과 천장 또한 마찬가지였다.
천장에는 달을 대신하듯, 큼지막한 야명주가 눈 부신 빛을 뿜고 있었다.
“어?”
시후는 고개를 내려 다시 접시를 바라봤다.
다시 위로.
그 행동을 몇 번 반복하던 시후는 곧 인상을 찌푸렸다.
시후는 기억 속을 더듬거렸다.
그리 오래 지나지 않은 기억이다.
금방 기억나리라 생각했으나, 대충 넘겼던 터라 휘발성이 강했는지 금세 기억에서 사라졌다.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던 시후는 서둘러 제갈려를 찾았다.
제갈려는 여러 조각과 고개를 나란히 하고 있었다.
“뭐 해?”
시후가 다가가서 묻자 접시를 가리켰다.
“혹시 저 접시를 보고 있는 조각이 있나 해서. 그보다 왜? 뭐라도 알아냈어?”
“그건 아닌데 알아낼 거 같아서. 혹시, 무자비에 적혀 있던 거 기억나?”
시후의 질문에 잠시 대화가 끊겼다.
그리 장문은 아니었지만, 단박에 떠오를 만큼 짧지도 않았다.
“평온무사를 꿈꿨으나, 시대가 나를 가만두지 않았기에······.”
“적어 봐.”
시후는 즉시 품에서 종이와 간이 먹통, 그리고 얇은 세필을 꺼내었다.
그 모습에 제갈려는 혀를 내둘렀다.
“이런 건 도대체 왜 들고 다니는 거야?”
“쓸데없는 소리 말고.”
시후의 재촉에 제갈려는 곧 자리에 앉아 붓에 먹을 묻혀, 한 글자씩 적어 나가기 시작했다.
중간중간 고개를 갸웃거리긴 했지만, 다 적는데 반 다경도 걸리지 않았다.
시후는 종이를 받아들곤 고개를 끄덕였다.
시후의 얼굴에는 함박웃음이 맺혀 있었다.
“물을 부어야 해.”
“근거 빈약한 감을 믿자면 집어치워.”
“근거는 확실해.”
시후는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으며 손에 들린 종이를 팔랑거렸다.
덕분에 제갈려의 표정은 더욱 아리송하게 변했다.
방금 적어 준 사람이 제갈려 자신이니, 내용을 모를 리는 없었다.
시후는 웃으며 입을 열었다.
“내가 악양루에 갔을 때 초설을 봤는데······.”
“신첨어? 그런데 그 이야기를 왜 지금 꺼내?”
“중간과정 다 생략하고 말하자면 초설은 달을 원했고, 나는 노대로 끌고 나간 뒤에 술을 한잔 건넸지. 그 술잔에는 하늘에 뜬 영롱한 달이 담겨 있었고······.”
“내가 그 이야기를 왜 듣고 있어야 하는데!”
제갈려는 얼굴이 시뻘게져 소리쳤다.
바늘로 콕 찌르면 푹 하고 피가 솟구칠 정도였다.
뭔가 오해하는 듯했기에 설명을 위해 입을 열려고 했지만, 제갈려가 한 발 더 빨랐다.
“뒷이야기는 할 생각도 하지 마!”
어차피 할 이야기도 아니었지만, 화를 버럭버럭 내는 통에 말을 꺼내기가 어려웠다.
시후는 제갈려에게 세필과 먹통을 돌려달라 손짓했다.
‘건네준다’기보다는 ‘던진다’는 표현이 어울렸다.
시후는 제갈려에게서 간신히 먹통을 받아들곤, 세필에 먹을 묻혀 종이에 원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제갈려에게 종이를 건넸다.
제갈려는 거칠게 종이를 받아들곤 원을 친 부분을 확인했다.
그녀의 동공이 떨렸다.
그 떨림은 곧 온몸으로 번졌다.
제갈려는 황급히 시후를 쳐다보았다.
시후는 고개를 끄덕이며 광천과 접시, 그리고 높이 달아둔 야명주를 가리켰다.
“그럴듯하지?”
제갈려는 아무런 반박을 하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손에 쥐어진 종이에는 원이 그려진 네 개의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평(平), 월(月), 수(水), 침(寖).
그릇이 평평하니, 물을 부으면 달이 가라앉을 것이라는 뜻이었다.
“자, 접시에 달을 담아 볼까?”
- 95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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