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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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화 황릉으로 가는 길 (3)
대안탑이 개방되어 있다고 한들, 다관(茶館)도 아니었기에 사사로운 이야기를 나누기엔 부적합했다.
시후는 주지 스님이 여유롭게 둘러볼 시간을 주기 위해, 밑에서 기다리겠노라 말하곤 아래로 내려왔다.
스님이 금방 내려오진 않았다.
시후가 기다리겠다고 말했지만, 스님으로선 대안탑을 대충 둘러보고 내려올 수 없었을 테니깐.
기다림이 길어지자 제갈려는 하품을 해 댔다.
“그런데 안 먹히면 어쩔 거야?”
“그래도 진법으로 가두는 짓은 안 할 거야.”
진법에 가두는 건 정말 최악의 한 수가 될 가능성이 컸다.
진법에 능한 제갈려가 있는데 진법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주지 않았다고 한다면, 그것 자체로 의심받을 상황이었다.
차라리 우연을 가장해서 데려가는 편이 나을지도 몰랐다.
그렇기에 제갈려의 의견은 고려조차 하지 않았다.
“정말 오래 걸리네.”
제갈려가 투덜거린 것처럼 기다림은 길었다.
스님은 그로부터 무려 반 시진 후에 나왔으니깐.
“소승이 많이 늦었습니다.”
“이해합니다. 현장 법사의 행적을 되짚다 보면 그 과거를 따라 절로 천축으로 향하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되지요. 그 길은 길고도 기니까, 오래 걸림이 당연합니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마음이 한결 가벼이 느껴집니다.”
스님은 합장하며 시후를 지긋이 바라봤다.
자신에게 할 말이 있어서 기다린 게 아니냐는 시선이었다.
“평정사를 떠나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처음엔 탁발하며 동으로 향했었습니다. 그리고 구화산(九華山)과 보타산(普陀山)을 들린 뒤, 최근에는 아미산도 다녀왔지요. 아미산에 올라 아래를 내려보니, 아미천하수(峨眉天下秀)라는 말의 의미를 여실히 느꼈습니다.”
“사대 명산의 종주를 하시나 봅니다.”
“예, 이제 오대산을 둘러본 다음 소림으로 가려 합니다. 명망 높은 스님들이 많으니, 대화를 통해 하나라도 건질 게 있지 않겠습니까?”
‘아니. 없을걸.’
말과는 반대로, 그는 건지는 사람이 아닌, 마구 뿌려 주는 사람이 될 것이다.
그는 소림승들에게 성장의 발판을 넘어, 그 이상의 존재가 될 것이다.
시후는 그의 말에 동조해 주곤, 그간의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이렇게 우리의 만남을 석가께서 인도해 주셨는데, 이대로 스님과 헤어지긴 아쉽군요. 혹,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저희가 머무르고 있는 장원에서 하루 묵으시는 게 어떠신지요?”
“폐를 끼치는 게 아닐지 싶습니다.”
“하하, 공짜는 아닙니다. 저도 좋은 말씀 들으면서 스님의 깨달음 주머니에서 이것저것을 훔칠 테니 단단히 각오하십시오.”
“제 주머니에 들어 있는 게 부족하여 원하는 걸 가져가실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리하지요.”
시후는 원하는 바를 끌어냈기에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살포시 웃으며 제갈려를 바라봤다.
그 웃음은 얼마 이어지지 않았다.
제갈려가 불평 가득한 얼굴로 입술을 달싹였다.
‘이러지 마 제발.’
제갈려가 눈빛으로 간곡히 애원했지만, 이미 늦었다.
“둘러볼 게 많으셨나 봐요?”
“하하, 얘가 왜 이런다.”
시후는 입꼬리를 억지로 올리며 제갈려의 팔을 붙잡았다.
스님은 제갈려의 불평 어린 말에 불쾌한 표정 없이 빙긋 웃었다.
되레 시후에게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안에 있는 물건들을 보며 현장 법사께서 겪었던 일들을 상상해 봤습니다. 고행에 가까운 길을 걸으셨던 그분의 행적을 머릿속으로 뒤쫓다 보니, 시간 가는 줄을 몰랐지요. 본의 아니게 오래 기다리시게 했나 봅니다.”
“시후의 말로는 스님이 뛰어난 고승이라고 했는데, 스님께선 자등명법등명(自燈明法燈明)이라는 말의 의미를 모르시나 봐요?”
선을 넘었다.
급히 제갈려의 입을 틀어막았다.
시후는 발버둥 치는 제갈려를 붙잡은 채 머리를 연신 조아렸다.
“얘가 아침을 못 먹어서······ 스님?”
은은한 금빛 광채가 스님의 몸을 휩싸고 있었다.
순간 시후는 ‘스님이 일원신공을 익혔나’ 싶었다.
하지만, 그럴 일은 없었다.
적어도 지금은 시후 자신을 제외하면 익힐 수 있는 사람이 없었으니까.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제갈려를 쳐다봤지만, 그녀는 시후의 손에 입이 틀어막힌 채 눈알만 좌우로 굴리고 있었다.
점입가경이라는 말이 이럴 때 사용되는 것일까.
스님의 몸이 살짝 떠올랐다.
“하하······.”
무인도 깨닫지만, 스님이나 도인들도 깨달음을 얻는다.
스님이 공중에 떠 있던 시간은 지극히 짧았다.
하지만, 시후와 제갈려에게는 영겁과도 같은 시간이었다.
땅에 내려선 스님이 눈을 뜨자, 눈이 멀 것만 같은 황금빛 광채가 순간적으로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등불에 기댈 게 아니라, 스스로가 등불이 되어야지요.”
제갈려는 금광이 남아 있는 듯한 스님의 눈을 바라보며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시후는 제갈려의 입을 틀어막은 손을 떼서 머리를 마구 헝클어 주었다.
‘잘했다. 정말 잘했어!’
* * *
스님은 먼저 앞서며 장원으로 가자고 재촉했다.
조금이라도 제갈려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하는 듯했다.
깨달음을 얻은 그 말은 제갈려가 우연히 던진 말에 불과했다.
결국, 제갈려는 그 부담감을 이기지 못하고 장원으로 가는 도중 실토했다.
그러나 그 사실을 모를 스님이 아니었다.
스님은 세 살배기 아이에게도 배울 게 있다는 말을 꺼내었다.
결과적으로 스님은 장원에 오게 되었다.
스님은 입구에 들어와 주위를 둘러보며 칭찬을 건네었다.
“장원이 아담하니 좋군요. 서안 성내에 이런 장원을 가졌다면, 필시 어디 명망 높은······.”
“서안에 며칠 머무를 것 같아서 빌린 곳에 불과합니다.”
시후는 그가 오해하기에 앞서 재빨리 말을 잘랐다.
스님은 빙긋 웃었고, 시후는 앞장서 방으로 데려갔다.
장원만이 아니라 사람까지 빌렸기에, 기다리고 있던 시비에게 차를 내와달라며 부탁했다.
찻물을 끓이기만 하면 되는 일이어서, 시비는 금세 차를 가지고 왔다.
“비령은요?”
“대장간에서 돌아온 뒤 방에 있습니다.”
“손님이 왔는데 얼굴도 안 내비치고······. 불러와 주세요.”
시비가 방을 나서자 스님은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새로운 인연을 만나는 건 즐거우나, 굳이 쉬고 있는 사람을 불러낼 필요까지야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쉬는 게 아니라 하릴없이 시간을 죽이고 있을 테니, 부르면 좋아할 겁니다. 게다가 스님께선 깨달음이라는 아주 엄청난 녀석을 훔치셨으니, 우리도 떼거리로 덤벼서 주머니를 털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허허, 불제자의 몸으로 불투도(不偸盜)를 어겼으니 다 내어 드려야지요. 마음껏 가져가십시오.”
발소리가 들려 문을 바라봤지만, 발걸음 소리에서 비령이 아니란 걸 알아챌 수 있었다.
열린 문 너머에는 난감한 표정을 짓는 시비가 고개를 젓고 있었다.
곧장 제갈려에게 눈짓을 보냈지만, 시선을 회피하며 모른 척을 했다.
“잠시 다녀오겠습니다.”
“인연이라는 건 모두 순리에 맞게 흘러가야 하는 법이거늘······.”
뒤에서 스님의 중얼거림이 들려왔지만, 시후는 대꾸하지 않았다.
어차피 스님을 모신 이유는 비령 때문이었는데, 그 주인공이 안 나타나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시후는 걸음을 바삐 놀려 비령의 방 앞에 다다랐다.
“뭐 해?”
“쉴 거야 피곤해.”
“아직 잘 시간은커녕 저녁 먹을 시간도 아닌데 뭐가 피곤해? 빨리 나와.”
“네가 부른 손님이잖아. 내가 왜 나가?”
“야. 네가 없으면 몰라도, 있는데 얼굴을 안 비추는 건 예의가 없는 거지. 이러면 다들 욕해.”
“욕하라고 해.”
“네 욕이 아니라, 어떻게 널 가르친 거냐고 검후를 욕하겠지.”
안에서 우당탕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곧 문이 열리며 비령이 모습을 드러냈다.
눈에 쌍심지를 켜고 있는 게 제법 화가 나 보였다.
“너, 툭하면 스승님 들먹이는데······ 적당히 해.”
“알았어. 알겠으니깐 일단 나와.”
비령은 주먹을 꽉 움켜쥐며 몸을 떨었다.
한 대 때려 주고 싶다는 표정이었지만, 숨을 고른 뒤 되려 앞장서 걸었다.
예의와 검후를 거론했으니 막상 가서 인사만 하고 빠져나오진 않을 것이 분명했다.
최소한의 대화를 할 것이다.
‘그때가 기회다.’
비령은 자신의 기분이 별로 좋지 않음을 반영하듯 발소리가 둔탁했다.
“바닥 다 부술 것처럼 걷는 거 보니까, 기분이 상했어도 얼굴만은 비춰 주겠다는 것 같네. 그런 거라면 관둬.”
비령은 잠시 멈춰 서더니 숨을 길게 내뱉곤 본래의 걸음걸이를 되찾았다.
화를 삭인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실수를 반성하는 것인지 몰라도, 시후는 어찌 되었건 좋았다.
비령은 문 앞에 다다르자 인기척을 내며 안으로 들어갔다.
“다소 피곤하여 결례를 범했습니다. 천비령이라고 합니다.”
“결례랄 게 어디 있겠습니까? 초오(超悟)라고 합니다.”
시후는 두 사람이 인사를 나누는 사이 제갈려의 뒤를 지나 그너의 옆에 앉았다.
물론, 그냥 지나치진 않고, 두 사람의 눈을 피해 제갈려의 등을 쿡쿡 찔렀다.
시후가 앉음과 동시에 제갈려는 헛기침을 내뱉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는 너무 경황이 없어서 묻지 못했는데, 초오 대사께선 공중에 몸이 뜨신 걸 인지하셨나요?”
“육신을 잠시 벗어난 사이에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육신을 벗어나요? 잠시나마 탈각(脫却)을 경험하셨다는 건가요?”
제갈려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예의 상 묻는 것이 아니라, 정말 놀란 듯했다.
그에 초오 대사는 인자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정쩡하게 서 있던 비령도 관심이 동하는지 자리에 슬그머니 앉았다.
다들 귀를 기울이는 걸 눈치챈 초오 대사는 적잖이 식은 찻잔을 들이켜며 입을 열었다.
“탈각을 경험했으나, 저 위에 올라가니 ‘아직 깨달음이 부족하고 공덕을 베풀지 못하였으니 내려가거라’라면서 쫓겨났습니다.”
“부처님을 만난 건가요?”
“우리가 모두 부처지요.”
“그야 그렇죠······.”
초오 대가사 갑작스레 대화 수준을 확 올리자, 제갈려는 적잖이 당황한 듯 말끝을 흐렸다.
하지만, 대화를 이어나가기 위한 노력은 계속되었다.
“깨달음이 부족하다고 하셨는데, 탈각까지 하고도 깨달음이 부족하다는 말씀은······ 돈오돈수(頓悟頓修)라는 가르침을 떠올려 본다면, 대사께서 얻으신 깨달음이 곧 진정한 깨달음은 아니라는 말인가요?”
“돈오돈수를 아시니 돈오점수(頓悟漸修)도 아시겠지요. 지금 소승의 깨달음은 뿌연 안개 속의 촛불과도 같습니다. 진정한 탈각을 위해서는 그 안개를 걷어 내어, 올바른 길로 갈 수 있도록 빛을 비추어 주어야 할 테지요. 그러기 위해선······.”
초오 대사의 설명을 듣고 있자니 시후는 정신이 혼미해졌다.
모르는 말은 아니었다.
하나하나 단어를 떼어 놓는다면 모를 수 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저따위로 복잡하게 엮어서 말하면 이해할 방법이 없었다.
그러나 시후는 대단히 격식 있는 대화를 듣는다는 표정을 지으며 경청했다.
의외로 제갈려가 불교에 제법 정통한 게 큰 도움이 되었다.
시후가 어설프게 말을 걸었다면 큰 낭패를 볼 뻔했다.
시후가 옆으로 슬쩍 고개를 돌리자, 비령이 엄청난 집중력을 보이고 있었다.
평소라면 뭘 보냐는 듯 째려봤을 텐데, 시선이 느껴지지 않는지 초오 대사의 입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뭔가 묻고 싶은 듯 앙증맞은 입술이 움찔움찔하고 있었다.
“천 시주께서 혹 묻고 싶은 게 있다면 말씀하시지요.”
“한 구절에 관해서 여쭙고 싶은데, 괜찮겠습니까?”
비령의 표정은 매우 간절해 보였다.
초오 대사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듯, 인자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비령이 얼굴을 잔뜩 굳힌 채 천천히 입을 열었다.
“현중백유(玄中白有) 하여 현소백창(玄消白彰) 하니, 현현백백(玄玄白白) 하리라. 이 말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초오 대사는 잠시 생각하더니 곧 얼굴 가득 웃음을 지었다.
비령은 너무 집중하느라 상체가 앞으로 쏠리다 못해 아주 얼굴을 들이밀고 있었다.
조금만 더 앞으로 나오면 엉덩이가 의자에서 떨어질 지경이었다.
초오는 팔을 뻗어 비령의 어깨를 뒤로 밀어주었다.
덕분에 비령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처음에 피곤하였다며 변명했던 게 떠올랐을 것이다.
비령이 고개를 푹 숙이자, 초오 대사가 괜찮다는 듯 어깨를 살짝 토닥여 주었다.
그리고 그녀가 던졌던 질문의 답을 해 주었다.
“한 가지에서 나왔거늘, 어찌 둘로 나누십니까?”
초오 대사의 말에 시후는 비령을 관찰했다.
비령은 천천히 눈을 감았을 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시후의 판단은 틀렸다.
태풍조차도 시작은 살랑거리는 한 줄기 바람에 불과한 법이었다.
이미 비령의 몸은 태풍의 핵이 되어 있었다.
- 93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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