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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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화 죄의 무게 (2)
시후는 식어 버린 찻잔을 매만졌다.
찻잔 속 내용물은 진즉에 뱃속으로 들어간 지 오래다.
할 말이 있다며 불렀던 정진은 아무런 미동조차 없었다.
결국, 먼저 입을 연 쪽은 시후였다.
“정진 스님, 왜 부르셨는지······.”
그제야 정진은 차갑게 식어 버린 찻잔을 들어 올려 홀짝였다.
불러 놓고 이유 없이 기다리게 하진 않았기에 시후는 인내하며 기다렸다.
“할 말은 차 시주가 있을 것 같소만?”
인내의 열매는 달콤했다.
정진의 말에 시후는 눈을 반짝였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가로저으며 곤란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드리고 싶은 말은 많지만, 말이라는 녀석이 원체 오해를 사기에 좋은 녀석인지라······.”
“이곳에서 했던 대화는 내 기억에서 사라질 것이외다.”
그의 배려에 시후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시후는 그를 설득하기 위해 준비했던 말들을 머릿속에서 떠올렸다가 지우길 반복했다.
그 과정이 복잡했기에 제법 시간이 걸렸지만, 정진은 재촉하지 않고 기다려 주었다.
적지 않은 시간이 흐른 다음 눈을 떴을 때, 시후는 가면을 썼다.
“이 검은 막야라고 부릅니다.”
시후는 허리춤에 매달린 막야검을 들어 올렸다.
전설적인 검이었지만, 정진의 눈빛은 아무런 미동조차 없었다.
시후는 검집에서 검을 반쯤 뽑은 채 올려놓았다.
“아시다시피, 그의 부군인 간장이 만든 검이죠. 결과론적으로 본다면 간장은 자기 자신은 물론이거니와, 아들까지 죽인 셈이 아닙니까?”
“죽인 건 간장이 아니지요.”
“맞습니다. 간장을 죽인 건 합려이고, 그의 아들은 막야로 자신의 목을 베었을 뿐이죠.”
시후는 탁자에 올려진 막야검을 툭툭 건드렸다.
반쯤 뽑힌 검이 유달리 번득이는 듯했다.
“간장이 죄가 없다면, 죄는 이 막야검에 있을까요?”
“도구에는 의지가 없소.”
“맞습니다. 도구는 죄가 없죠.”
시후는 그 말을 끝으로 할 말이 끝났다는 듯 입을 닫았다.
정진은 시후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지 눈치챈 듯, 눈썹은 잔뜩 찡그렸다.
“사람은 도구가 아니오.”
“맞습니다. 하지만, 그는 도구로 쓰일 수 있었습니다.”
정진은 얼굴을 더욱 찡그렸지만, 더 이야기해 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그자에게 들었다며 전했던 말을 기억하십니까?”
“삶과 죽음의 경계선을 허물어, 모두가 불사의 삶을 누린다는 허황한 말 말이오?”
“배교가 바라는 생강시는 삶과 죽음의 경계가 허물어진 존재이지요. 그는 모두가 죽지 않는 세상을 꿈꾸었고, 배교는 자신들의 주술을 보이며 그를 현혹했을 겁니다. 통제되지 않았던 고를 주술로 다루는 모습을 보며, 그는 자신의 꿈이 이뤄질 것으로 믿었을 겁니다. 배교는 그를 도구처럼 사용했을 겁니다.”
“그럴지도 모르오. 그러나 백번 양보해서 그가 배교에 이용당했다고 한들, 수많은 인명을 해쳤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소.”
“그렇기에 우리도 그를 이용해야 합니다.”
정진의 표정이 무섭도록 딱딱하게 굳어졌다.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시후는 얼른 손사래를 쳤다.
“그를 이용하자는 말을 오해하셨나 본데, 그는 이용 가치가 많은 사람입니다. 그가 수많은 목숨을 빼앗은 것은 사실이나, 그를 이용한다면 그보다 더 많은 사람을 살릴 수도 있습니다.”
“미래를 보자는 말이오?”
정진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죄는 사라지지 않지요. 하지만, 자신의 과오를 인정한다면,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갈 기회를 주는 게 부처님의 가르침이지 않겠습니까?”
시후가 부처를 들먹이자 정진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그가 거짓된 마음으로 행한다면 어찌하겠소?”
“그래도 상관없습니다.”
“설명해 보시오.”
“그 마음이 참되다면 스스로 공덕을 쌓아 구원받을 것이고, 거짓되다면 그에게 업으로 돌아올 것입니다. 그리고 거짓되다고 한들, 그의 손에 도움받는 중생은 있지 않겠습니까?”
정진은 뭔가 깨달은 듯, 눈을 감은 채 손에 쥔 염주를 굴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시후는 자신을 억지로 절에 끌고 다녔던 할머니를 떠올리며 속으로 감사 인사를 드렸다.
마지막 말은 의미도 모른 채 지껄이는 것에 불과했다.
다만, 정진이 알아서 좋을 대로 해석한 것뿐이었다.
잠시 후, 정진이 자리에서 일어나 시후를 향해 합장했다.
축객령이었다.
시후는 조용히 일어나 방장실을 나섰다.
방장실에서 멀찍이 떨어져 바라보니, 사방으로 어린 동자승이 바삐 움직였다.
혼자 결정을 내리기 어려우니, 사형제들을 불러 논할 모양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시후는 방장실에서 멀찍이 떨어진 다음에야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두 번은 못 해 먹겠네.”
하지만, 더 해야 했다.
소림이 손을 들어 준다고 한들, 죄다 반대하면 방법이 없다.
“당가는 의외로 손을 안 들어 줄 가능성이 커.”
신의가 진류를 옹호하고 나선 것도 그들에겐 치명상이었다.
대놓고 반대하지는 않겠지만, 굳이 나서서 손을 들어 주진 않을 것이다.
그 말은 신의와 직간접적으로 연관이 있는 문파는 어정쩡한 태도를 보일 곳이 많다는 말과 일맥상통했다.
아미파는 중립을 지킬 것이다.
무당과 곤륜도 마찬가지.
하지만, 반대할 문파들이 눈에 선했다.
대표적으로 화산과 청성.
두 곳은 무조건 반대할 것이다.
그렇기에 나서줄 다른 문파가 필요했다.
“일단 하오문과 개방.”
하오문은 확실한 패다.
하지만, 하지만 개방은 불확실했다.
아직은 자신과 어정쩡하게 얽혀 있었으니깐.
남궁천이 있었다면 남궁세가의 지지를 받을 수 있었을지는 모르나, 되레 서운해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의도한 건 아니지만, 여러모로 남궁천은 없는 게 나았다.
“점창은?”
유운검법을 완성하는 데 제법 큰 도움이 되었기에, 목일자와의 관계도 제법 가까웠다.
하지만 이 정도 일에 나서 줄 정도로 가깝냐고 묻는다면, 그건 또 아니었다.
제갈려 보고 나서 달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다른 곳과 달리 세가의 의견을 대표할 만한 지위가 아니니깐.
“그렇다는 건······.”
비빌 언덕 중 가장 높은 곳이자 가장 험한 곳이 하나 남아 있었다.
시후는 한숨을 쉰 채 터덜터덜 발을 움직였다.
* * *
“생각보다 늦었네? 들어와.”
시후는 난데없는 천비령의 등장에 떨떠름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안을 슬쩍 쳐다봤지만, 검후는 보이지 않았다.
“스승님께 뭔가 부탁하러 왔지? 저기서 무릎 꿇고 기다리렴. 아니면 돌아가고.”
이미 검후는 자신이 올 거란 걸 알았나 보다.
아니, 그렇다고 한들 무릎 꿇고 기다리라니.
“여기서 이쪽 보고 있으면 될까?”
“응.”
시후는 방 중앙에서 입구를 바라보며 무릎을 꿇었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남궁세가에 이어 신의까지 얻을 수 있다면 이 정도 수치는 감내할 만하다고 생각했다.
다만, 옆에서 비령이 침대에 걸터앉아 다리를 꼰 채로 지켜보는 게 신경이 매우 거슬렸다.
그와 동시에 의심이 들었다.
‘과연 검후가 이런 쓸데없는 명령을 내렸을까?’
시후는 의심 어린 눈초리로 비령을 바라봤다.
“정말 검후께서 이렇게 기다리라고 하셨어?”
“의심하는 거야?”
“그럴 리가.”
비령이 눈을 부라리며 되묻자 시후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고개를 돌린 채 소리 없이 욕을 한바탕 퍼붓고 있으니, 얼마 지나지 않아 저 멀리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비령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어나. 돌아오셨나 보네.”
그 말에 의심은 곧 확신으로 바뀌었다.
시후는 땅에 머리를 박았다.
그러자, 땅에 엎드려 머리를 조아린 형국이 되었다.
비령이 급히 시후의 팔을 잡아당겼지만, 시후는 내공을 한껏 끌어올리며 저항했다.
투덕거림은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문이 열리기 무섭게 비령은 딴청을 피웠다.
“일어나거라. 내게 부탁할 게 있다고 해도, 그런 저자세를 보일 필요는 없다.”
검후의 말에 시후는 한숨을 쉬었다.
아니나 다를까, 비령은 일전에 북경까지 동행했을 때 쌓였던 앙금을 여태껏 품은 모양이었다.
“검후 님의 제자가 이렇게 기다리라 말했는데, 제가 잘못 들었나 봅니다.”
“내가 언제!”
“목소리를 낮추거라.”
비령이 버럭 소리를 지르자 검후는 기막을 펼쳤다.
그 와중에도 시후는 여전히 엎드려 있었다.
검후가 한숨을 내쉬며 다가와 시후를 일으켜 주었다.
“윽!”
시후는 부축받아 일어나면서 다리가 저린 듯 짧게 신음을 흘렸다.
그 모습을 본 비령이 입을 뻥긋뻥긋하며 손가락질했다.
“저, 저······.”
“비령.”
검후의 날 선 목소리에 비령은 억울한 듯 울상을 지었다.
시후는 의자에 앉아 다리를 주물렀다.
“오래 기다렸느냐?”
“아닙니다. 그리 오래 기다리진 않았습니다.”
“바로 오지 않기에 저녁에나 오려나 싶었다.”
“정진 방장의 부름이 있기도 했거니와 소림이 의견을 모으는데 제법 오래 걸릴 테니, 그쪽에 먼저 다녀왔습니다. 검후께 먼저 찾아오지 않은 건, 소림과 달리 의견을 모으실 필요가 없는 분이라 그렇지요.”
시후는 계속해서 다리를 주무르며 말했기에 검후는 비령을 노려볼 수밖에 없었다.
그제야 비령은 억울하다는 듯 해명했다.
“무릎 꿇고 기다리라고 했지만, 머리를 박으라고 하진 않았어요!”
“하긴 했구나.”
비령은 보았다.
검후는 고개를 돌렸으나, 비령이 있는 방향에선 시후의 얼굴이 똑똑히 보였다.
분명 웃고 있었다.
비령은 가슴을 퍽퍽 두들기며 억울함을 호소했지만, 검후는 방에서 나가라 손짓하며 변명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결국, 비령은 울음을 터트릴 듯한 표정을 지으며 방을 나섰다.
검후는 닫힌 문을 바라보더니 싸늘한 시선으로 시후를 바라봤다.
“비령이 먼저 잘못한 점은 인정하지만, 앞으로 이런······.”
“이런 식으로 검후를 속이고 비령을 놀리는 일은 없을 겁니다.”
시후는 재빨리 검후가 하고자 하는 말을 끊고 선수를 쳤다.
덕분에 검후의 싸늘한 시선은 다소 온화하게 바뀌었다.
검후가 의자에 등을 기대며 말해 보라는 듯 턱을 까딱거렸다.
“모두가 완벽하면 좋겠지만, 실수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사람은 실수에서 배우는 법이고······.”
“사람 보는 눈이 좋고, 눈치가 빠르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던가?”
검후는 에둘러 말하는 걸 싫어했다.
그녀가 추구하는 건 간단명료.
시후는 머릿속에 준비해 둔 말에서 불필요한 단어를 솎아내고, 구기고 구겨서 몸집을 줄였다.
“다소 직설적으로 말해도 괜찮을지······.”
“말해.”
검후의 허락이 떨어지자 시후는 길게 숨을 들이마셨다.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마주하며 입을 열었다.
“검후께서도 최근 배교에서 실수를 저질렀죠.”
검후의 얼굴이 굳었다.
그 일은 아무도 거론하지 않았다.
실수를 저질렀으나, 어찌 되었건 좋게 해결했으니 묻어 두자는 무언의 약속이었다.
시후는 재빨리 말을 이었다.
“그때 저지른 실수는 개인의 힘으로 극복할 수 있는 게 아니었죠. 돌이켜 본다면, 혼자만의 힘으로 해결할 수 있었겠습니까?”
검후가 화를 낸다면 여기서 끝이었고, 인정한다면 오부 능선을 넘은 것과 다름없었다.
시후는 매서운 눈빛을 피하지 않았다.
눈싸움을 이어가던 검후는 눈을 꾹 감더니 이내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검후께서 진을 부수고 나오는 선택을 했듯, 그도 아무도 죽지 않는 삶을 위해 배교를 선택했죠. 저는 넓은 의미로 본다면 그의 선택도 실수라고 봅니다. 그렇기에 그에게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도록······.”
정진에게 했던 말을 비슷하게 읊었다.
시후의 말이 끝났음에도 검후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실수라는 단어를 곱씹더니 고개를 뒤로 젖혔다.
“검후라 불린지 이십여 년간, 내게 실수했다고 말하는 건 네놈이 처음이다.”
‘실패인가?’
하지만, 검후의 표정을 보아하니 실패 같진 않았다.
검후가 희미한 미소를 짓고 있었으니깐.
“좋다. 소림이 나선다면 나도 힘을 실어 주지.”
시후는 활짝 웃음을 지으려 했지만, 다음으로 이어지는 말에 얼굴을 굳힐 수밖에 없었다.
“대신 조건이 있다. 조건은······.”
- 87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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